연평도는 당신을 버리지 않는다
사람들 떠난 그 섬에 여인이 산다. 연평도 주민 이기옥씨
"부지런하면 굶지 않고 나이 들어도 내치지 않고
시말서 써라 하지 않고… 여기 바다가 좋아 난 안 떠난다"
고향 잃은 부모의 눈물이 때로 야속하고 때론 다정한 바다가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는 아들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
"아,왜 안 나가고 그래?"
집 앞으로 기자를 마중 나온 이기옥(49)씨를 보고
이 동네 의용소방대원이 농담 반, 진담 반 말을 건넸다.
"자식새끼 버리고 나가는 에미 있나. 부모가 여기 있는데 어딜 나가?
쳐들어오라 그래. 박살 내고 싶은 심정이니까." 이기옥씨가 당차게 받아쳤다.
면적 7㎢의 이 작은 섬에 포탄이 우박처럼 떨어지던 날, 주민 1400명 대부분은 이 마을을 떠났다. 남은 이는 주로 노인이나 꽃게창고를 지키는 남자들이었다.
이기옥은 남은 여성 대여섯 중 가장 나이가 젊다.
섬에 포탄이 떨어진 지 엿새째인 지난달 29일. 인천연안여객터미널에서 쾌속선을 타고 두 시간을 달려 그녀가 사는 인천 옹진군 연평면에 간 것은 궁금증 때문이었다.
그의 부모인 이유성(82)·강선옥(81)씨 부부는 포격 이틀째,
조선일보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연평도가 밀리면 대한민국 전체가 위험해지는 만큼 이 지역에 남는 것이 내 자녀를 지키고 이 나라를 지키는 길입니다."
같은 기사에서 그 딸인 이기옥은
"부모 모시며 이곳을 지키는 게 도리라고 생각해 남았다"고 했다.
포탄이 떨어지는 그 상황에서 정말 대한민국 때문에, 부모 때문에 '사지(死地)'에 남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이 가족은 원래부터 이렇게 용감하거나, 애국적이었을까.
대체 이들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건 무엇일까.
작은 섬에서 평생을 살아온 '섬 여자'에게, 대체 나라란 무엇일까.
▲ 23일 북한 도발로 거의 빈 섬이 된 연평도를 지키는 이기옥씨. 그녀는 섬에서 태어났지만 수영을 할 줄 모른다. 숟가락 들 무렵부터 바다에서 굴 따고, 바지락 주우며‘맨손어업’을 하느라 수영 배울 틈이 없었다. 그래도 그녀에겐 연평도가 세상의 전부다.“ 또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하라고 해. 북한이고 뭐고 다 깨부숴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채승우 기자 |
▲ 이기옥(오른쪽)씨의 아버지 이유성, 어머니 강선옥씨. |
그래, 닥친 거라면 견디자
―이번 북한 도발은 이유가 무엇 같은가.
"김정은이 힘 있다 과시하려고 쏜 거다."
―우체국·면사무소·농협처럼 주요 포스트만 정확히 쐈다면서.
"그러게 말이다. 알고 쏜 거다. 정확히 조준해서. 해경초소·파출소·7중대처럼 주요한 데만 정확히 골라 쐈는데 조금씩 그 옆으로 떨어진 거다."
―그날 어떤 느낌이었나.
"아침에 한·미합동훈련을 하면서 그저 유리창 흔들리는 정도의 느낌이 있었다.
그래도 여느 때처럼 굴을 따다 엄마 집에 왔더니 마늘을 다듬고 계시더라.
화장실 가려고 하는데, '꽝'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흔들리더라. 처음엔 우리 군이 오발한 줄 알았다. 산에서 불길이 보여, 급히 마을 대피소로 피했다."
―여기서 태어났으니, 대피소로 피하는 건 익숙하겠다.
"90년대 초까지는 민방위 훈련에서 대피 훈련을 했었지만, 이후엔 해본 적 없다.
대피소가 어디 있다는 것만 알 정도였지."
―1·2차 연평해전(1999년·2002년) 때는 어땠나.
"그때는 바다에서 싸움했었고, 여기(민가)까지 날아온다는 두려움은 없었다.
김매고, 나물도 뜯고 일상생활 그대로 다 했다.
감히 너희가 민가를 어떻게 하겠나 하는 생각이 있었다."
―대피소에선 어땠나.
"대피소에 모여 북한이 마음먹고 포격한 것 같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곧 2차 포격이 있을 것 같다는 안내가 나오더라.
진짜로 꽝꽝 하면서 해가 안 보일 정도로 연기가 나더라. 정말로 해가 안 보였다.
대피소까지 흔들릴 때는 '꼼짝없이 죽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어두운데 포격이 있으랴 싶더라. 좀 살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거기서 밤을 새웠다."
다른 주민들은.
"배를 가진 선주들은 어두워지면서 배 끌고 가족들이랑 함께 나갔고, 다음 날도 또 나갔다. 나가기 어렵거나 나갈 생각 없는 사람만 남았지. 그게 스무명 남짓이더라."
―왜 함께 나가지 않았나.
"부모가 여기 계시지 않나. 게다가 새끼 있는데, 어딜 나가나. 내치고 나가나?"(이씨 아들(22)은 상근예비역으로 연평면에서 복무 중이고, 다음 달 전역한다)
―대피소에서 아들과는 연락했나.
"갖고 있던 휴대전화로 해봤더니 불통이더라. 처음엔 눈물 나고 답답해 죽을 것 같더라. 울고 나니 새벽녘부턴 좀 여유가 생기더라. 이런 생각이 들더라.
'그래, 죽을 운명이라면 여기서 죽자', '우리 아들만 거기 있나. 남의 아들도 다 거기 있다. 제대 말년 겪을 것이라면 빡세게 겪어라. 겪어야지 어떻게 하겠나'."
―이게 전쟁으로 발전할 것이라 생각했나.
"늘 아버지랑 그런 얘기를 했다. 이번에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면 3차 세계대전이 되는 거니까, 이북이 함부로 하지는 못할 것이다.
김정은이 이어받았으니 쇼를 하는구나 생각했다."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면,
우리가 더 준비를 해야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
"그건 그렇지 않다. 봐라, 이런 데서 피해가 일어나지 않나. 포탄 박혀 있던 자리가 그대로 있고, 포탄 맞아 불난 집, 충격에 유리창이 다 박살 난 보건소…."
시체를 밟고 건너왔다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김종삼 시 '민간인')
들키면 죽는 상황, 우는 아이는 그렇게 바다에 버려졌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시인 김종삼은 '죽여야 살았던' 1947년 황해도 해주 용당포의 월남(越南) 풍경을 이런 짧은 시로 기록했다. 그러나 어디 시인뿐이었을까.
60년 전, 이 땅의 수많은 청년과 노인, 아이와 여자들은 그렇게 찾아 남으로 내려왔다.
이기옥의 부모도 그랬다.
―대체 이렇게 살벌한 풍경에 남아있겠다는 고집은 어디서 오는 건가.
"남동생이 이곳 부대에서 전기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군무원이다.
엄마나 나나 군에 있는 아들 때문에 못 나간다. 부모님은 월남하면서 가족들과 헤어진 것이 평생 한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또 그렇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부모님은 언제 내려오셨나.
"두 분 다 황해도 옹진 근처에 살다가 1·4 후퇴 무렵 내려왔다.
외아들이었던 아버지는 사촌 동생과 먼저 내려오면서 부모님과 누이들하고 여기 연평도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더라. 그래서 여길 평생 못 떠났다.
어머니 역시 '연평 계시면 모시러 간다'던 시동생 말 때문에 여기 정착했다.
그런데 몇 개월, 몇 년이 지나고도 소식이 없어 두 분이 여기서 결혼을 했다. 두 분 다 거기서 결혼을 했던 처지라, 이산가족상봉에 세 번이나 신청했다가 떨어졌다.
이제는 포기하고 살지만, 그래도 여길 떠날 생각이 없다."
―그러면 가족끼리 유난히 사이가 좋은 것이 이북분들이라 그런 건가.
"가족들에게도 그렇지만, 객이 와도 배고프면 안 된다고 다 먹여서 보낸다. 부모님이 일찍부터 그야말로 나눔의 기쁨을 미리 알았던 분들인 것 같다."
―이북 출신이 굉장히 짜다고 하던데.
"그렇지 않다. 예전에 벼농사 지을 때도 탈곡하면 쌀 한 말씩을 여러 군데 돌렸다.
독거노인도 7명 정도 섬겼다. 어릴 적부터 그게 사람 사는 맛이고 멋이라고 생각했다."
―속초 아바이 마을에서는 오징어 순대를 해먹던데, 여기선 실향민들이 뭘 해먹나.
"어른 주먹만한 평양왕만두를 잡수더라.
김치·두부·콩나물·돼지고기 넣어서 크게 만들어 한 사람이 세 개 이상 먹지 못한다."
"가이(개·犬)들 뭐 좀 먹였네?" 아버지 이씨가 외출했다 돌아왔다.
"적십자 밥차에 가서 '거이국'(게국)을 좀 먹고 오는 길이래. 그래도 연평 주민 먹으라고 해놨는데, 우리가 가서 좀 먹어줘야 그 사람들도 힘이 날 것 아닌가."
TV에서 나오는 찜질방 주민들 화면을 보면서 어머니 강선옥씨가 말을 받았다.
"찜질방이면 양반이지. 우리는 시체 밟고, 며칠씩 굶으면서 살아왔어."
강씨는 옹진에서 연평으로 바닷길을 건너올 때의 얘기를 해줬다.
빠져 죽은 시체가 둥둥 떠있고 해안가로 밀려온 게 부지기수여서 아예 시체를 밟고 배에 올라탄 얘기, 아침녘 풍선(風船)에 타고 떠난 길에서 초병에게 들킬까 봐 '닭섬'에 숨었던 이야기, 누군가는 정신없이 배에 올라타고 보니 포대기만 남고 아이가 없어졌더라는 얘기…. 그러더니 강씨가 말했다. "우리가 하도 징그러운 일을 겪어서 우리 세상(세대)으로 끝인 줄 알았는데, 이 꼴을 또 당할 줄 누가 알았겠어."
▲ 포탄 맞아 불이 난 한 연평 주민의 집. |
▲ 주인은 피란 가고, 시래기만 남았다. |
바다가 키운 여자
섬 여자 이기옥은 수영을 못한다. 3남2녀 중 넷째. 밥숟갈을 혼자 들 무렵부터 바다에서 바지락을 주웠고, 열아홉부터는 그걸로 돈도 벌었다.
수영은 사치한 놀이였다. 아버지가 농사지을 땐 쌀·보리·수수·감자·고구마 키웠고, 소 키울 땐 소를 돌봤다. "일꾼이었지, 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를 말했다.
―어린 시절 얘기를 해달라.
"아버지가 젊어서는 배를 탔는데, 왜 그렇게 아버지 타는 배는 고기가 안 잡히는지.
그게 안 좋아 남의 논 3000평 얻어서 각종 작물 키웠고, 다음에는 소도 키워 팔았다.
수의사가 도축해도 된다고 허가해주면, 소 잡는 이가 잡고, 그리고 나면 내가 팔았다."
―섬에서 쇠고기 팔았으면 돈 벌었겠다.
"여긴 보관시설이 없으니까 그날 잡으면 바로 다 팔아야 한다.
육지보다 근당 5000원은 더 적게 받았다."
―결혼하고는 형편이 좋아졌나.
"남편도 처음엔 꽃게 배를 탔는데 그것도 어려웠다.
몇년 후, 벽돌을 찍어 지고 날랐다. 그런데 여기도 여러 가지 일이 많았다. 섬이 발전하면서 화물선에 벽돌 같은 것을 싣고 오니 우리가 힘들어졌다.
20년전 쯤에는 이 섬에도 기름 보일러 놓는 게 유행이었다.
남편이 기름보일러 자격증을 따서 그 일을 한다. IMF가 터지고 나서는 도시에서 힘든 사람들이 이리로 많이 몰렸다. 여기는 못살긴 해도, IMF 영향은 아예 없었으니까.
꽃게가 풍성하다고 소문난 것도 있고. 주민들도 한 5분의 2는 바뀐 것 같다."
―꽃게 잡으면 돈 좀 버는 것 아니었나.
"꽃게는 희한하다. 한 3년쯤은 풍년이 든다.
그 덕에 육지에 아파트 두 채씩 산 사람도 있다.
그러다 한 5년은 또 빌어먹게 생긴다. 그후엔 다시 풍성풍성 쏟아지고. 기복이 심하다. 정부에서 치어 뿌려서 수를 늘려 사시사철 나게 되면서 연평도 꽃게가 알려진 거다."
―결혼해서도 처녀때만큼 일을 했나.
"결혼 후 3~4년은 정말 힘들었다. 애 업고 다니며 굴 쪼고, 낙지 잡았다.
섬에 포장마차가 한둘 생기면서 거기다가 팔았더니 돈이 좀 되더라. 바지락도 젓으로 담가 놓으면 육지에서 사러 온다. 친정 밭농사 지어주고 작물도 가져다 먹고."
―낙지 잡아 벌이가 되나.
내가 어릴 때부터 낙지 잡는 재주가 있었다.
물 빠지고 서너 시간 잡으면 60마리 정도 된다. 하루 낮에 10만원이면 여자 벌이로 괜찮지 않은가. 봄, 가을엔 낙지, 여름엔 바지락, 겨울엔 굴 잡으면 벌이가 꽤 된다."
―겨울 바다에서 일하면 동상 걸리지 않나.
"퉁퉁 붓고, 가렵고…. 여기는 동상 걸리는 사람이 많아 보건소에서 치료제를 공짜로 많이 나눠줬다. 동상이야 날 풀리면 다 없어지는데 뭐…."
―육지로 나간 적은 없나. 어땠나.
"결혼 후 배 타는 게 돈이 안 돼서 육지로 나갔다.
남편이 인천제철에 다니다 2년도 못 다니고 구조조정당했다.
그 길로 돌아와 벽돌 공장 차린 거다. 돌아오니 좋더라.
부모, 이웃들, 친구들이 그립더라."
―인천이라면 시장도 크고, 극장도 있고, 버스도 많고. 좋지 않던가.
"그렇긴 한데, 내가 문화생활하고는 잘 안 맞나 보더라."
―들어와서도 여전히 팍팍하지 않았나. 그래도 좋던가, 여기가.
"그래도 좋았다."
―뭐가 그렇게 좋은가.
"내 심정에 물어봐도 나도 잘 모르겠더라. 일도 너무 많이 하고,
참 힘도 많이 들었는데, 정을 주고 살아서 그런지 애착이 가더라."
―여기 주민들은 대개 어떻게 살아왔나.
북한에서는 여기 주민을 '인간방패'라고 하지 않았나.
"바다에서 먹고사는 사람들이 인간방패라고?
고향 잃고 내려와 통일되기만 기다리다 여기 눌러앉은 사람이 태반이다. 배 타고 나가 고기 잡고, 꽃게 잡는 어부들, 나처럼 '맨손어업'으로 굴 따고, 바지락 캐는 사람들, 그리고 장사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데처럼 다방, 노래방도 있는 그냥 바닷가 마을이다."
―어느 기사 보니 '총을 잘 쏜다'고 얘기했던데, '여성예비군' 멤버인가
(여성예비군은 지난 89년 백령도와 대청도에 처음 창설됐으며, 연평도에서는 2007년 창설됐다).
"그때는 아들 대학 진학 때문에 뭍에 나갔다 와서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면 총은 어디서 배웠나.
"부녀회(37명 내외)가 호국보훈의 달 6월에 한 번씩 인근 부대에서 총 쏘는 걸 배웠다. 서른 초반부터 매해 했는데, 처음엔 총만 닦다가 몇년 후부턴 쏘는 법도 배웠다.
군인들이 시범으로 쏘고 해보라고 하면 따라 하면 된다."
―쏠 만하던가.
"처음 하는 사람은 남의 표적으로 쏘고 하는데, 나는 쏠 만하더라.
해보니까 체질인 것 같더라. 20발씩 주는데 19발을 모두 표적 안에 명중시켰다."
―그런데 그 여성예비군들은 다 어디 갔나.
"인천으로 피란 갔다. 그분들도 워낙 놀라서…."
―많은 사람이 바다를 주제로 시를 썼지만,
막상 바닷가 사람들은 바다를 무서워하더라.
"우리 외삼촌도 바다에서 고기 잡다가 돌아가셨다."
―무섭지 않은가.
"그다지 무섭지 않으니까 계속 살겠지."
―툭하면 사람들이 바다에서 죽는데, 무섭지 않은가.
"사고로 아니면 부주의로, 또 풍랑에 의해 운 없이 돌아가시기도 하는데, 어쩌겠나."
―굉장히 강하다.
"강해야 산다. 허술해서야 이 척박한 데서 살 수 있겠나.
바람도 세고 문화혜택도 못 받고, 젊은이들이 살 수 있는 그 뭔가, 시스템 같은 것도 여긴 없다. 그러나 바다는 풍성하다.
척박하긴 하지만 본인이 부지런하면 절대 굶어 죽지 않는다.
바다는 나이 들었다고 오지 말라고도 하지 않고, 할당량 못 채웠으니 시말서 쓰라고도 하지 않는다. 자유분방한 직장이지."
▲ 민간인의 추가 피해를 우려, 섬을 떠날 것을 권유하고 있는 해병대 공지문. |
나 내쫓지 말라
―연평도에는 중국 배도 자주 들어온다고 하던데.
"최근엔 우리 낚싯배가 파도에 밀려 조금만 NLL(북방한계선)을 넘어가도 해경이 경고한다고 하더라. 그런데 해안 초소에만 나가도 게 잡으러 온 중국 배가 훤히 보인다. 어떤 때는 그들 배에서 밝힌 불이 동네보다도 더 훤하다. 이북이 커미션을 받는 건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그쪽이랑 얘기하고 하는 거 아니겠나. 그런데 우리 정부가 6자회담 같은 데서 중국이 불법 조업하는 문제를 주제로 협상했다는 얘길 들어본 적이 없다. 주민들이 분개할 수밖에 없다. 어획고가 줄어드니 어민들은 정말 불만이 많다. 내가 꽃게잡이로 먹고살지는 않지만, 내 맘이 이심전심이다."
―대한민국 최전방에서 중국, 북한 맞닥뜨리는데 여기서 사는 마음은 어떤 건가.
"불안하긴 하다. 항상 말이다.
그런데 공기도 좋고 내가 두세 시간 만에 10만원 벌 수 있는 곳이지 않나."
―돈 벌어 뭐할 건가. 꾸미는 것도 안 하시는구먼.
"아들 하나뿐이긴 하지만,
애가 '엄마 그만 해줘' 할 때까지는 공부, 모든 걸 지원해주고 싶다."
―정부에 바라는 건 뭔가.
"아무리 낙후된 도서지역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일 꽝 터지고 나서 뭐 해준다고 하는 것은 좀 그렇지 않은가.
국방 신경 써서 마음 놓고 일상생활할 수 있게만 해달라."
―그래도 연평도에선 사람 못 살겠다고들 하기도 한다.
"무인도가 되면 북한 속셈에 넘어가는 거다.
조선 500년을 봐라. 얼마나 침략을 많이 당했나.
글로벌 시대라는데, 이런 세상에 이렇게 포 쏘는 놈들이 어디 있나.
섬 비우면 그 속셈에 넘어가는 거다. 나라가 꼴이 아니다."
―나라는 군인이 지키는데, 왜 이렇게 나라에 신경 쓰나.
"군인은 민간인이 없으면 약해질 수밖에 없다. 북한이 그런 작전을 쓰는 거다.
그런 상황 되면 북한이 장악하는 건 시간문제다.
민가가 있어야 저 녀석들이 함부로 못한다니까."
―나가라고 하면 어쩔 건가(이날 연평도에는 주민을 소개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내쫓으려면 들어서 내쫓으라 그래라.
그러지 않으면 계속 있을 거다. 민주주의 국가 아닌가."
가족 모두 나가고 홀로 남은 실향민 출신 신유택(70)씨는 자원봉사자들의 식사를 받아서도 꼭 이 집에 와서 먹었다. 꽃게 지키느라 혼자 남은 김정희(45)씨는 밭의 배추가 얼겠다며 자기 부인 대신 김장을 좀 해달라고 했다. 이기옥은 노인들 끼니 챙기고, 남의 집 김장해주고, 기자들 말상대해주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여유로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집앞 소형 소각장에서 쓰레기를 태우지 않는다. 연기가 나면 사람들이 놀랄까 봐 그렇다. 밖에서 확성기 소리만 들리면 창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매우 강인했지만, 태생적인 건 아니었다.
고향 잃은 부모의 눈물이, 때론 야속하고 어느 땐 다정한 바다가,
그리고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는 아들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
누구는 너무 쉽게 하고, 다른 누군가에겐 어색한 말,
'애국'이란 단어가 결코 추상명사가 아님을 그녀는 증명하고 있었다.
그 깡마른 몸으로. 연평도=박은주 기자
눈물의 연평도 - 이미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