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에 교우들이 신앙을 증거 하던 동헌과 객사
강릉 동헌은 영동 지방의 교우들이 신앙을 증거하던 곳이며 칠사당 동헌 마당에서는 병인박해 때 심문도 없이 목이 잘리는 참수형으로 많은 교우들이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천주교인들을 묶어 갖은 고문을 가했던 것으로 전하는 고목이 아직도 남아 있다.
강릉은 강원도의 요충지로 정3품의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가 주재하였다. 이 지방은 복음을 늦게 전해 받아 오랜 박해는 겪지 않았으나, 교우들을 잡아들여 심문하고 처형하던 동헌은 박해로 피 흘린 교우들이 신앙을 증거하던 곳이다. 교회 공식 문헌에 나타나고 있는 강릉 지역의 순교자로는 《치명일기》에 기록돼 있는 심 스테파노(1820~1868) 한 명뿐이다.
《치명일기》(832번)에 나타나는 심 스테파노에 관한 내용을 보면 “본디 강릉 굴아위에 살더니, 무진 5월에 경포(포도청 포졸)에게 잡혀 지금 풍수원에 사는 최 바오로와 함께 갇히었다가 치명하니 나이는 29세 된 줄은 알되(치명사적에는 49세로 기록) 치명한 곳은 자세히 모르노라.”고 기록되어 있다.
《병인치명사적》(23권 118~119쪽)에 의하면, 심 스테파노는 이 안토니오와 함께 강릉에서 1867년 4월 경포에게 잡혀 서울 포도청에서 치명하였다. 또 같은 책(23권 160~161쪽)에서는, 1868년 5월 5일 강릉 굴아위 지방에서 이 안토니오와 같이 잡혀 포청으로 끌려가 치명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같이 잡혀가다 나온 최 바오로(풍수원 거주)가 증언한 것이다. 이런 증언 기록으로 볼 때 심 스테파노는 치명 연도(정확히는 체포 연도)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강릉에서 치명한 것이 아니라 서울 포도청에서 치명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7호인 칠사당은 대도호부사가 주재하던 조선 시대 관공서로 호적, 농사, 병무, 교육, 세금, 재판, 풍속에 관한 일곱 가지 정사를 베풀던 곳이다. 이 건물의 최초 건립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인조 10년(1632년)에 중건하고, 영조 2년(1726년)에 중수했으며, 고종 3년(1866년)에는 진위병(鎭衛兵)의 영으로 쓰이다가 이듬 해 화재로 타 버린 것을 강릉 부사 조명하가 중건했다고 한다.
객사란 고려와 조선 시대에 각 고을에 두었던 관청 건물의 하나이며, 객사문은 객사의 정문에 해당한다. 조선 시대에는 객사의 건물 중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자리한 정전(正殿)에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 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를 행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 관리나 사신들이 오면 여기서 묵게 하였다.
이 객사는 고려 태조 19년(936년)에 총 83칸의 건물을 짓고 임영관이라 하였는데, 문루에 걸려 있는 ‘임영관’(臨瀛館) 이란 현판은 1366년 공민왕이 낙산사로 행차하는 도중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일제 시대에는 학교 건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2006년부터 시작한 국보 제51호 객사문을 비롯해 전대청(殿大廳), 중대청(中大廳), 동대청(東大廳), 낭청방(郎廳旁), 서헌(西軒) 등 복원사업과 관아지(내아 동헌 등) 복원 등 사적지 공원 조성 사업이 완료되었다.
임영관지는 인접한 곳에 위치한 객사문 및 부사(府使)가 업무를 보던 칠사당(七事堂)과 함께 옛 강릉의 고려시대 이후 관아 성격의 건물지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 오늘도 죽지 않아 (강릉 동헌에서) <김영수> ▒
안으로 들어가야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것입니까
죽음 속에서 내다보며
하늘을 숨 쉬었던 이들
나는 오늘도 죽지 않아
삶에 닿지 못하고
쓸쓸히 옛 동헌 앞마당 서성입니다
소매 끝으로 들어오는
싸한 슬픔의 꿈에서
황급히 날아 뜨는 나의 기도
'거룩한 죽음 허락하소서' 는
정녕 구름 뚫을 수 있을까요
내 지금이라도
가난한 이들 마당에 들어가
목마름으로 설렐 수 있다면
멀리 푸른 숲 속에서 휘어지고 있는
흰 폭포도 환히 보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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