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의 역사를 가진 진안 본당의 모체
전북 진안군과 장수군을 잇는 해발 1059m의 성수산 북쪽 자락 끝에 있는 어은동(魚隱洞) 마을은 이미 1888년에 공소가 설립된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박해를 피해 충청도, 경기도, 경상도 지방과 같은 곳에서 고산 지방으로 피신하여 살다가 병인박해 이후 다시 이 지역으로 이사 와서 정착하였다. 진안·장수 지역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이다.
진안 지역에 교우들이 거주한 것은 병인박해 이후였다. 이들은 박해를 피해 충청도, 경기도, 경상도 지방과 같은 곳에서 고산 지방으로 피신하여 살다가 병인박해 이후 다시 이 지역으로 이사한 것이다. 진안 지역의 교우들은 대개 고산 지방에서 이사한 사람들이 많았다. 전주 본당(현 전동 본당) 관할이었던 어은동 공소는 1900년 9월 22일 전주 본당에서 분가해 전주 동남쪽 지방인 진안, 장수, 남원 일대까지 관장하는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전라도에서 두 번째로 사제가 된 김양홍(金洋洪, 1874~1945, 스테파노) 신부가 초대 주임 신부였다. 당시 인계 받은 본당 관할 공소는 11곳이었으나 교우들의 편리를 위해 18개 공소로 나누었다. 교우 수는 모두 합쳐 999명이었으며 어은동에만 교우가 189명이나 되었다. 이듬해 9월 옛 공소를 수리하고 확장해 목조 7칸 성당을 마련했다. 그러나 교세가 점점 불어나자 1904년 마을 아래쪽에 새 성당 15칸 크기의 한옥을 신축했다.
1905년에는 성당에 14처를 세우고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당시 조선교구장) 지시로 여교우들이 앉는 여교우청에 통로를 따로 만들었다. 그 이듬해 다시 성당을 넓히고자 성당 입구 쪽 남녀 교우청에 각각 한 칸씩을 신축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09년 3월, 마침내 너와 지붕 목조 49평의 새 성전을 준공했다. 등록 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된 건물이 바로 이 공소 건물이다.
성당이 완공되던 1909년에 김양홍 신부는 성당 사랑채에 영신학교를 세워 국어, 한문, 수신, 산수 등을 가르쳤으며 1911년에는 성당 앞마당에 학교를 신축하기도 했다. 학교가 신축되던 1911년 어은동 본당 관할 교우 수는 2,117명이었고, 어은동 공소 교우만 520명이나 되는 등 어은동은 진안, 장수 지역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21년 어은동 본당은 본당 자리를 진안군 마령면 연장리 한들에 있는 한들 공소로 넘겨주고 다시 공소로 편입되었다. 이후 어은동 공소는 1947년 11월 송남호(宋南浩, 1904~1977, 요셉) 신부를 맞이하면서 다시 본당으로 승격했으나 한국 전쟁이 나면서 1951년에 다시 폐쇄되어 한들 본당 공소가 됐다. 그러다가 본당이 1952년 진안읍으로 옮겨 가면서 어은동 공소는 진안 본당에 편입돼 오늘에 이른다. 중말과 어은동 공소 중간쯤 모싯골(당고개 재) 산 능선에는 천호 성지로 유해가 이장된 이명서(일명 재덕, 1821~1866, 베드로) 성인의 묘터가 있다.
▒ 김양홍(金洋洪) 신부
김양홍(1874~1945, 스테파노) 신부는 전주교구 초대 교구장(지목구장)이다. 1900년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품을 받았다. 서품 후 전라도 담당 신부로 임명되어 전북 진안의 어은동을 근거로 전북 장수, 남원, 무주, 용담 등지의 18개 공소를 맡아 사목과 전교에 힘썼다.
1931년 전라도 지역이 감목 대리구로 설정되자 감목 대리로 임명되었고, 이어 1937년 전남 지역이 광주 지목구로, 전북 지역이 전주 지목구로 설정되자 전주 지목구장에 임명됨으로써 한국 최초의 방인 교구장이 되었다.
1941년 일제의 탄압과 노령으로 인해 11월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석동 본당에서 잠시 사목하다가 이듬해 광주교구로 이적되어 나주 본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던 중 1945년 5월 3일 72세로 사망하였다.
■ 순교자
◆ 성 이명서 베드로 (1821∼1866)
‘재덕’으로도 불렸던 이명서는 충청도 출신으로, 박해를 피해 여러 곳을 유랑하다가 병인 박해가 일어나기 몇 해 전부터 전주 성지동에 정착하였다. 1866년 12월 5일 포졸들이 성지동을 습격하자 이명서는 조화서의 피신 권유를 뿌리치고 병든 몸으로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관장은 병자인 이명서를 배교시키기 쉬울 것으로 생각하여 가장 먼저 신문하고 혹형과 고문으로 강요하였지만, 그는 배교를 거부하고 함께 체포된 교우들과 열심히 기도하며 순교를 준비하였다.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숲정이에서 4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이명서 베드로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이명서 베드로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회의 모든 공소회장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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