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종 김희성이 고신 극기 생활을 하던 일월산 교우촌
초기 박해 시대 교우촌이다. 하느님의 종 김희성(金稀成, 일명 경서, 1765~1816, 프란치스코)이 고신 극기 생활을 하던 일월산 교우촌이다. 그는 신유박해 때 부친 김광옥(金廣玉, ?~1801, 안드레아)이 순교한 후에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는 거룩한 신앙심으로 금욕 생활을 하다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하였다. 곧은정은 영양군과 봉화군 경계 지역이라 양쪽에 걸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월산 자락에 남아 있는 또 한 곳의 교우촌은 봉화군 소천면 남회룡리와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와 맞닿은 곳에 있는 곧은정이다. 이곳 곧은정에도 신유년 박해를 피해 천주교도들이 숨어들어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다. 김희성을 비롯해 김복수, 김광복 등 20여 명의 신자들이었다.
건사골에서 깊은 계곡을 따라 다시 동북쪽으로 1.5㎞가량 내려가면 현재 남회룡 제4다리 좌우에 곧은정 신자촌이 있다. 이곳은 봉화군 소천면 남회룡리와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의 경계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남회룡 제5교 직전 30m 전방에서 좌회전하여 약 200m 올라가면 우측 산 밑의 공터 약 2,000여 평은 봉화쪽 곧은정으로 안동교구에서 성지를 조성하기 위하여 구입하여 놓았다고 한다.
더 내려가서 남회룡 제4교 직전 우측 군 경계 지역 계곡의 길 바로 옆에 있는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 지역의 우거진 낙엽송 밭은 영양쪽 곧은정으로 여기저기 돌무더기들이 쌓여 있으며 야생 약초들과 칡덩쿨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이곳이 곧은정 교우촌이 아닌가 싶다.
교우촌의 정확한 장소와 그들의 신앙생활에 대해선 구체적인 자료가 전해오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과 《일성록》의 기록에서 전하는 박해사로 교우촌 규모와 신자수를 가늠할 뿐이다. 일월산 중의 영양군 일월면과 봉화군 소천면 지역에는 ‘곧은정’ 외에 ‘바른골’(영양군 일월면 용화리), 작골(일월면 문암리) 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3곳이 있으므로 1801년 신유박해 때 박해를 피해 와서 살았던 신자촌이 어느 곳인지 확실치 않으나, ‘곧은정’이란 이름이 그대로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곳은 봉화군 소천면 남회룡리의 마당모기뿐이다.
마당모기에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청도 여사울 사람 김희성 가정 등이 살았다. 그는 신유박해 때 부친 김광옥이 순교한 후에 경상도 영양 고을 곧은정으로 가서 숨어 살았다. 나무뿌리와 도토리로 연명을 하며 늘 금욕 생활을 하였다. 1815년 3월 배신자 전지수와 안동 포졸들이 체포하러 오자 그들을 관대히 대접하고 안동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대구로 이송되어 형벌을 받았으나 형벌 중에도 그가 보여 준 용감한 항구심은 관헌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1816년 11월 1일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나이 52세였다. 그 후 이곳 곧은정 신자촌은 사라지게 되었다.
■ 순교자
◆ 복자 김희성 프란치스코 (1765∼1816년)
교우들 사이에는 ‘경서’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코는, 1765년 예산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의 부유한 중인 집안 출신으로, 1801년 예산에서 순교한 김광옥(안드레아)은 바로 그의 부친이다. 1801년 아버지가 순교하자, 모든 재물을 버리고 경상도 일월산에 있는 영양의 곧은장으로 들어가 가족과 함께 고신극기를 실천하였다.
1815년 3월, 을해박해 때 곧은장에서 체포되어 안동 관아로 끌려간 그는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그를 김종한(안드레아)과 함께 대구로 이송하였다. 동료들과 함께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대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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