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제도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입장
교회 역사 안에 바오로 사도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사람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의 특별했던 신앙여정과 우여곡절의 연속인 인생각본을 소설로 쓰자면
10권의 대하 장편소설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혈기왕성하던 청년시절 그의 이름은 바오로가 아니라 사울이었습니다.
왕가나 잘 나가던 가문에서나 쓰던 이름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사울은 예수님의 사도가 아니라 예수님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최 일선에 서있던 박해자였습니다.
그는 율법 전문 교육과정을 제대로 이수한 율법학자인 동시에
정통 바리사이 중의 바리사이, 진골이나 성골 신분의 금 수저 인생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의 꿈이 있었습니다.
타고난 좋은 가문과 혈통, 총명함과 지혜를 최대한 발휘해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크게 한번 뜨는 것이었습니다.
정통 유다 신앙을 잘 고수하고 발전시키는 대학자요 유다 민족의 지도자로 살고 싶었습니다.
당대 유다 지도층 인사들과 주류 사회 사람들도 특출한 청년 사울을 눈여겨보고 있었으며
동시에 큰 기대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사울은 요즘 점점 세를 늘려가며 유다 정통신앙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그리스도 신자들이
다수 모여 있다는 정보를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습니다.
당장, 모조리 체포하려고 다마스쿠스로 달려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때로 하느님은 참 묘하십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인 인물들도 많았는데,
하필 목숨 걸고 그리스도교 척결에 앞장서있던 사울에게 다가가십니다.
주님께서는 혈기왕성 분기탱천해서 그리스도인들을 몽땅 체포하기 위해
초스피드로 말을 타고 달려가던 청년 사울을 보란 듯이 넘어트리십니다.
넘어져도 제대로 넘어졌습니다.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시력을 상실했습니다.
강철 같은 자신의 체력을 바탕으로 천방지축 날뛰던 젊은이였던 사울이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두렵지 않았던 잘나가던 젊은이였는데
순식간에 깊은 나락으로 곤두박질한 것입니다.
한때 날아다니던 그는 이제 누군가의 부축 없이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존재,
한없이 나약한 존재,
마치 서너 살 바기 어린이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고만장하던 그,
거침없이 잘 나가던 그를 뜨거운 시련의 용광로 속으로 집어던지신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사울은 사흘간의 바닥체험 기간 동안 완전한 새사람,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런 장엄한 신앙고백에 도달합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외에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완전 바닥으로 내려간 사울,
그간 지녔던 하늘을 찌르는 교만의 탑을 완전히 허물어트린 그,
어린이처럼 한없이 순수하고 작아진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바오로라는 새 이름을 주십니다.
위대한 자라는 의미의 사울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새사람이 된 바오로는
그제야 초대교회 가장 훌륭한 지도자이자 예수그리스도의 사도로 거듭나게 됩니다.
한 대선 후보의 사형제도와 관련된 구시대적 사고방식과 몰지각함 앞에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아시는 바처럼 우리나라는 1997년 12월 김영삼 전 대통령 임기 말에 대대적으로 집행된
23명에 대한 사형 집행이후 20년간에 걸쳐 사형집행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경우 정식 사형폐지국가는 아니나,
더 이상 집행이 이루어지지는 않는 준 사형폐지 국가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 후보는 너무나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사형선고 6개월 내 집행을 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사형을 안 하니 흉악범이 너무 날뛴다. 사형제도 집행해야 한다.”
그분의 말에 저는 속으로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어떻게 민주화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한 국가의 리더를 꿈꾸는 사람이
저런 몰상식하고 비인간적인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마음 참담해지고 슬퍼졌습니다.
지금 국제사회는 유심히 우리나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UN 인권이사회의 이사국이자 UN 사무총장을 배출한 대한민국이
국회 입법을 통해 사형 제도를 완전히 폐지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현재 사형집행국의 수는 매년 줄어들고 있습니다.
유럽 연합은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사형 폐지국가입니다.
그들은 사형폐지 여부에 따라 문명국과 비문명국으로 구분합니다.
이미 전 세계 160여 개국이 법률적 또는 실질적으로 사형 제도를 폐지하였고
사형을 집행하고 있는 국가는 20여 개국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지난 19대 국회 때 현직 주교님 전원을 비롯해 85,637명의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한 마음으로 사형폐지특별법을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법안은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서 통과되지 않았습니다.
참혹한 범죄가 발생하면 사형제도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커지곤 합니다.
하지만 유엔과 세계 석학들의 신중한 연구 결과는 사형제도 실시와 흉악 범죄 발생 억제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없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사형 등 강성 형벌 정책은 정통성이 없는 독재정권의 통치도구로
악용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토록 존경하는 안중근 토마스 의사(義士) 역시 사형제도의 피해자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군부 독재자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거의 교수대 위까지 올라가셨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셨습니다.
1974년 4월 박정희 정권은 종신집권을 위한 유신헌법 긴급조치를 발동하면서
소위 ‘인혁당 재건위’ 소속 8명의 시민에 대한 사형 선고를 내립니다.
그리고 불과 20 시간 후에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사상 초유의 사법 살인이자 정치 살인인 당시 사건은 32년이 지난 2007년 1월
무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참혹한 범죄가 발생했다고 똑같이 참혹한 형벌로 응징하는 폭력의 악순환을
이제는 끊어내야 합니다.
범죄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분석하고 구조적인 모순을 찾아내어
애초에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사형 제도의 완전히 폐지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국가와 사회가 앞으로 더 크고 무거운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사형제도는 이제 더 이상 지구상에서 존재해서는 안 되는 형벌이며,
사형제도 폐지의 전 세계적인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그 어떠한 순간에도 국민의 생명을 함부로 여기지 않는 대한민국을 꿈꿉니다.
이제는 대한민국 국회와 정부가 사형제도 폐지라는 전 세계적 부름에 답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