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현형의「최초의 사람」감상 / 장석남
최초의 사람
권현형
챙이 커다란 청모자를 쓴 아이가
제 동화책 속에서 걸어나와
검정 에나멜 구두로 땅을 두드린다
최초의 사람인 듯 최후의 걸음인 듯
갸우뚱갸우뚱 질문을 던지며 걸어다닌다
집을 나와서는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 봄의 부랑자들,
길바닥에 떨어져 누운 꽃점을 두고
차마 지나치지 못하여 한참을 서 있다가
바르비종 마을의 여인처럼 가만 무릎을 꿇는다
이삭 줍듯 경건하게 주워 올려 본래의 둥지
나무 가까이에 도로 놓아준다 방생하듯
봄날의 바다에 꽃의 흰 꼬리를 풀어 놓아준다
꽃 줍는 아가야, 환한 백낮에 길 잃은
한 점 한 점을 무슨 수로 네가 다 거둘 것이냐
몸져누운 세상의 아픈 뼈들을 무슨 수로
일으켜 세울 것이냐 한번 떨어져 나온 자리로는
다시 돌아갈 길 없다
네가 옮긴 첫 발자국이 그토록 무겁고 서러운
질문이었음을 기억하거라
—시집『밥이나 먹자, 꽃아』(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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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어여쁜 아이가, 세상의 때라곤 한 점 티끌도 묻지 않은 아이가 꽃을 줍고 있습니다. 이건 뭘까? 이 예쁜 것이 왜 땅에 떨어졌을까 질문하면서 꽃을 줍고 그것을 꽃나무 그늘에 다시 놓아줍니다. 그러나 꽃은 너무 많습니다. 아픔도 그 꽃잎만큼 많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아이에게 화자는 당부합니다. 한번 떨어져 나온 자리로는 다시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 네가 이 세상에 온 첫 걸음이 '서러운 질문'이었음을 기억하라고.
수백의 어린 생명들이 저 아름답기로 이름난 남녘의 봄바다에서 아무 죄도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가면서 무슨 질문을 했을까요. '꽃을 줍던' 그 아이들의 질문에 대한 응답은 그저 미어지는 가슴일 뿐입니다.
장석남(시인)
첫댓글 장석남 시인이 고르는 시들은 참으로 눈물겨운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2006년에 발간한 시집이군요.
신작시인줄 알았습니다.
'한번 떨어져 나온 자리로는 / 다시 돌아갈 길 없다'
가슴이 미어지는 구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