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박해의 발상지 곡성 덕실 마을
곡성 당고개는 대규모 박해의 계기가 된 정해박해의 발상지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게 된 진원지 곡성 당고개에서 옹기가마 증축 축하연 중 한백겸의 주사와 폭행으로 야기된 박해로 전국에서 약500여 명의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곡성 지역의 천주교 전래는 경상도와 강원도 지역의 신자들이 을해박해(1815년)를 피해 곡성군 오곡면 미산리와 승법리로 피신해 옴으로써 비롯되었다. 이들 신자들은 생계 유지와 신분 은폐를 위해 옹기를 구우며 생활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 비교적 대규모의 박해는 없었으나 전국 각지에서 국부적으로 행해지던 박해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곳 곡성에서 발생한 정해박해는 다시 대규모 박해의 계기가 되었다. 정해박해는 신자들 사이의 불미스러운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827년(순조 27년) 2월 전남 곡성군 덕실현(현 전남 곡성군 오곡면 승법리) 마을의 옹기점에 전 아무개라는 신입교우가 마을 사람들을 위해 주막을 차려 놓았다. 정해박해가 일어나게 된 진원지인 곡성 당고개에는 옹기굴이 있었는데 옹기굽는 사람들은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
정해년 2월 옹기 가마 하나를 증축하여 처음으로 그릇을 꺼내게 되었으므로 축하연을 베풀게 되었는데 주위 동네(미륵굴) 사람들도 모여들었고 흥에 취해 자연 술을 여러 순배 들게 되었다. 한편 이 마을에는 한 토마스라는 유명한 순교자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인 한백겸이라는 사람은 성질이 아주 광포하고 주사가 심해 사람들의 미움을 사고 있었다. 그는 술에 취해 자기의 술그릇이 작다는 등 주모에게 투정, 나중에는 욕을 퍼부으며 난타를 하였다. 이것을 지켜보던 주막 집 주인 전씨는 신입 교우로 신앙심이 약한 터이라 이런 모욕을 참지 못하여 복수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천주교 서적을 들고 곡성읍으로 뛰어가 현감에게 한백겸과 평소에 못마땅하다고 생각한 교우들을 책임자라고 고발하게 되었다.
명백한 증거를 손에 쥐게 된 현감은 즉시 포졸을 풀어 당고개를 포위해 신자들을 잡아들여 심한 고문을 하였다. 고문으로 배교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현감에게서 보고를 받은 감사에 의해 박해가 순창, 용담, 임실, 장성, 전주 등 전라도 전역으로 확대됐다. 정해박해는 여느 박해와 달리 그 기간은 짧았지만 탄압의 정도는 매우 심했다. 두 달간 맹렬하게 계속된 박해는 조정의 태도가 완화됨에 따라 누그러졌지만 얼마나 혹독하고 광범위했던지 전라도 지역에서는 교우들이 집단생활을 전폐하고 심산유곡으로 피신해 생명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정해박해 당시 전국적으로 약 5백여 명의 신자들이 잡혔는데 전라도의 모든 옥은 이때 잡힌 교우들로 초만원을 이루었으며, 전주에만도 240여 명이 넘었다고 전해진다. 전라 감사 이광문이 추위, 더위와 굶주림에 약한 인간의 나약성을 매우 교묘하게 이용해 붙잡힌 교우들 대부분을 배교하게 했다고 한다.
◆ 정해박해
1827년 전라도 곡성을 시작으로 전라도 지역, 경상도 상주, 충청도와 서울의 일부 지역에 일어난 박해이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전국적인 규모의 박해는 없었으나 신유박해의 마무리를 위해 반포된 <척사윤음>(斥邪綸音)은 천주교 탄압의 법적 근거가 되어 1815년 을해박해 등 전국 각지에서 소규모의 박해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교우들은 정하상을 주임으로 교회재건과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26년 일본의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우리나라에 서신을 보내 일본에서 배를 타고 도망친 6명의 천주교인을 체포해 달라고 요청, 관헌들의 천주교인 밀고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정해박해는 시작되었다.
곡성에서 시작된 박해는 전라도 전역에 파급되면서 240여 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어 전주감영으로 이송되었고 이어 4월 22일(음) 전주 포졸들이 경상도의 상주에서 신태보를 체포, 전주로 압송해 가자 이를 계기로 경상도에서도 박해가 시작되어 상주에서 5∼6개소의 교우촌이 습격 당하여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또한 서울에서는 4월 21일(음) 이경언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고, 충청도의 단양에서는 경상도의 박해를 피해 유성태의 집으로 피신해 온 교우들이 체포되어 충주로 압송되었다.
이렇게 해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서울 등지에서 2월부터 5월까지 4개월 동안 500여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었으나 전라도에서 이경언 · 이일언 · 정태봉 등 8명이, 경상도에서 박보록 · 김사건 · 김언우 등 6명이, 충청도에서 유성태 등 500여 명 중 15명 만이 옥사 또는 처형 당해 순교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배교하고 석방되거나 유배되었다. 이것으로 정해박해는 종식되었으나 피해가 가장 큰 전라도 지방의 교회는 거의 폐허화되었다.
▒ 한덕운 토마스(1752~1802)
충청도 홍주 출신인 한덕운(韓德運) 토마스는 1790년 10월에 윤지충(바오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0년 10월, 토마스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떠나 경기도 광주 땅에 속한 의일리(현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로 이주하였다. 다음해 초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덕운 토마스는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을 한 뒤 한양으로 올라가 보기로 작정하였다. 한양으로 올라가는 도중 홍낙민 루카의 시신을 돌보고, 또 서소문 밖에서 최필제(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 주기도 하였다.
결국 한덕운 토마스는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고,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남한산성 옛길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30일(음 1801년 12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 순교자
※ 정해박해의 순교자들 중 이름이 밝혀진 사람들
이경언(바오로), 김대권(베드로), 이태권(베드로), 이일언(욥), 신태보(베드로), 정태봉(바오로),
이유정, 이유진, 김도명, 김지성, 김성집, 김사흥, 유흥순, 김순옥, 신아지, 이도원, 이성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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