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방어의 요충지로서 교회 창립시기부터 인연을 맺고 있는 강화도
경기도 서해안의 강화도는 수도 방어의 요충지로서 교회 창립 시기부터 인연을 맺고 있다. 강화도는 19세기 후반,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가 만나 첨예한 갈등을 빚은 곳으로 상징되는 곳이다. 이 때문에 병인박해 때부터 시작하여 강화도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며 그중 갑곶 나루터에서 세 명의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강화도는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 또 운양호 사건(1875년)에서 강화도 조약(1876년 2월)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외세와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었던 지역으로 외세와 충돌의 현장이었기 때문에 박해 또한 극심하였다.
이곳은 고려 고종(高宗, 재위: 1213~1259)이 원나라의 침공을 받아 피난할 때, 군사의 갑옷만 벗어서 쌓아도 건너갈 수 있을 거라고 한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을 만큼 큰 개천 정도로 밖에는 볼 수 없는 해로를 앞으로 한 방어 진지였다.
1866년 10월 14일 프랑스는 함대 7척을 강화도 근해에 정박한 후 이곳 갑곶진에 육전대를 상륙시켜 점령하고, 이곳을 정찰한 후 16일에는 강화부(江華府)를 습격하여 점령하고, 각종 군기와 양식, 서적 등을 약탈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강화 지방에서는 새로운 박해가 일어났다.
1866년 성연순(일명 전손)과 원윤철(元允哲, 1787~1866, 베드로/요한)이 서울 양화진(절두산)에서 참수되었고, 1868년에는 박상손(朴尙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최인서(崔仁瑞, 요한), 조서방, 박서방, 최영준, 장치선 등이 강화에서 치명하였으며, 1870년에는 권 바오로가 통진에서 순교하였다. 그중 갑곶 나루터에서 세 분의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병인양요 이후인 1871년 신미년 4월에 강화도 해역에 미국 함대 4척이 나타나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평양에서 조선인에 의해 방화된 사건의 책임을 묻고 통상을 요구했으나 대원군은 이를 거절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였다.
미국 군함이 물러간 5월 25일 고종은 더욱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할 것을 좌우 포도대장에게 교서를 내리게 되고, 이때에 미국 함대에 왕래한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 등이 첫 번째로 잡혀가 갑곶진두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게 된 것이다.
이곳 갑곶 해안은 김대건(金大建,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와 초기 외국 선교사들이 드나들던 해로이기도 하다. 1845년 5월 14일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Ferr´eol, 高, 1808~1853, 요셉) 주교의 명으로 선교사를 비밀로 입국시키는 해로를 개척하기 위해 서울 마포를 떠나 이곳 강화 갑곶 앞바다를 지나 연평도, 백령도를 거쳐 순위도에서 관원에게 체포되었다.
▒ 진정 나의 죽음은 (강화 갑곳돈대에서) <김영수> ▒
숲 사이로 하늘 안고
가득히 밀려 오는 바다
백사장에서 올라 오는 피 어린 햇살들
목숨들이 제 빛을 내는 언덕에는
거룩히 허락된 죽음들 있고
뜨거운 기억들 있습니다
세월을 이어 오는 벌레들 소리에서
하루가 천년
천년이 하루일 수 있음을 깨달으며
나는 순결한 고통 한 자락 마련합니다
진정 나의 죽음은
어느 바닷가에 서성이고 있을까요
어느 백사장에 무르익어
기도로 헹구는 꿈에 들까요
마음 뜨거이 돌아오는 바람 한 줄기에
나를 바라보던 나뭇잎 하나가
아픔으로 흔들립니다
■ 순교자
◆ 최인서(崔仁瑞 요한)
◆ 장치선(張致善) 회장
◆ 박서방(박순집의 형)
◆ 조서방
◆ 박상손(朴常孫)
◆ 우윤집(禹允集)
◆ 최순복(崔順福)
◆ 박순집(베드로) 증거자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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