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의 고향이며 6.25 전쟁중에는 피난 온 신부들의 은신처
설악산 입구 도문 공소는 세 명의 성직자와 수녀를 배출한 성소의 고향이며, 6·25 전쟁 중에는 피난 온 신부들의 은신처였던 곳으로 영동 지역 천주교 전래 초기에 강릉 금광리 공소와 함께 단독 공소 건물을 갖추고 신자 수도 약 100여 명에 이르렀던 공소이다.
도문 공소는 1881년에 창설되었고 속초시 설악산 입구에서 설악동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오른쪽에 있는 상도문리에 있다. 이 마을은 오(吳)씨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며, 100여 년의 역사처럼 오정섭, 오세철, 오상철 등 3명의 성직자와 오 마리아 수녀를 배출하였다. 오씨 마을은 성소의 마을로 알려져 있다. 도문 마을은 대부분 옹기를 굽고 사는 산골이라 6·25 전쟁 때 피난 온 신부들이 한때 이곳에 은신하기도 했다.
1864년 오광선의 장남 오춘영, 차남 오하영, 삼남 오우영 삼 형제와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함경도 내평 본당에 속하는 공소를 도문동 옹기 마을에 설립하였다. 해주 오씨 문중의 비문에 의하면 오광선 타대오는 해주 오(吳)씨 추탄공파 23대손이며, 1854년 충청도 청주에서 강릉시 홍제동으로 와 강원도 천주교회 회장으로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1897년 8월에 의혈이 낭자하여 즉시 이주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해 8월 22일에 별세하였다.
그리고 장남 오춘영 바오로는 난을 피하여 양양군 강현면 중곡리 옹골에 정착하여 토기업에 종사하다가 1864년 속초 도문동 3통 구토기 마을을 창건하였다. 또한 함경도 내평 본당에 속하는 공소 강당을 건립하다가 1920년에 삼 형제가 협조하여 영동 지역에 최초로 성전을 건립하였다.
1921년 5월 5일 싸리재 도문 공소 자리에 영동 지구 최초의 성당을 설립하게 되었으며, 최문식(崔文植, 1881~1952, 베드로) 신부가 초대 본당 신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최문식 신부는 상도문동 싸리재에 거주하면서 전교 면에서 볼 때 발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여 1926년 도문 성당 건물을 헐어 양양군 서면 서문리로 이전 건립하였다. 이것이 양양 본당 전신이며, 이후 도문은 양양 본당 공소가 되었고 1935년에는 도문에 새 강당을 건립하게 되었다.
1945년에는 해방과 더불어 38선으로 막혀 공산치하에서 시련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1952년 속초 지역이 탈환 수복되면서 동명동 본당 소속 공소가 되었다. 그해 주임 맥고완(McGowan, 元) 신부에 의해 공소 강당이 신축되었고 매주 미사를 봉헌하였다. 1958년에 강당 건물을 마을 중심지로 이전하였는데 당시 본당은 동명동 성당 소속으로 주임 신부였던 아일랜드인 맥고완 원(元) 신부가 자체 기금으로 건립하였다.
도문 공소는 1990년 2월 5일 13시 30분 폭설로 강당 전체가 무너지면서 폐지됐으며,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현재 대형 십자고상, 십자가의 길, 상본, 쇠종 등의 유품은 설악동 성당에서 보관하고 있다.
◆ 설악동 성당
도문 공소 터에서 설악산 방면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설악(준) 본당이 있다. 이 본당은 1980년 3월 교구장 박토마 주교에 의해 관광사목의 효과를 고려하여 성당건립을 발의함에 따라 설립 하게 된 것이다. 1980년 5월 500평(165.94㎡)의 대지를 구입하여 6월 10일 교동주임 전 꼬르넬리오 신부가 성당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8월 12일 기공식을 가진 후 1981년 7월 12일 속초시 설악동 338-2번지에 건평 365.63m2 의 설악동 성전이 건립되어 7월 15일 설악동 준 본당으로 설립 승인되었다. 설악동 준 본당의 관할 구역은 설악동, 도문동, 양양군 상복리 2리이고 초대 신부는 맹석철(바오로) 신부였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카페 게시글
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선택됨
옵션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