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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신학 질문코너 입다의 서원 - 사사기 소고에서 (김홍전 목사님)
구사 추천 0 조회 807 10.08.24 23:51 댓글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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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8.25 02:37

    첫댓글 번제로 드렸다는 생각을 늘 했었는데.. 이 글을 보니 김홍전 목사님의 말씀에도 공감이 갑니다.

  • 10.08.25 07:11

    역시 김홍전 박사님이군요... ^^ 제가 알기로 김홍전 박사님은 목사 안수를 안 받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정확치는 않습니다. ^^) 이분이 조선 마지막 전라도 관찰사의 자제셔서 반가의 자제로서 어려서부터 사서삼경을 줄줄 외셨다더군요, 특이한 이력으로는 음악 박사이시더군요. 균형잡힌 탁월한 해석입니다. 여담이지만 김홍전 박사님과 최낙재 목사님 같은 분들이 우리 곁을 떠난 것은 한국교회에 큰 아쉬움이지요. 최낙재 목사님은 성서 유니온의 윤종하 총무와 처남 매부지간이었습니다. 윤종하 총무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에스라의 초대 학장을 맡기도 하셨죠 말년에 원죄의 교리를 부정하는 책을 내셨습니다.

  • 10.08.25 07:12

    최근에 학자들 중에 원죄의 교리를 부정하는 분들이 꽤 암암리에 있다더군요.

  • 10.08.25 07:31

    안그래도 구원을 잃을수도 있다는 포슨의 책과 윤종하총무가 관련이 있다하여 이해가 안되었습니다,존경받는 분이셨는데 원죄마저 부인하다니 참으로 놀랍습니다ㅡ

  • 작성자 10.08.25 09:37

    전라도 관찰사가 아니라...충청도쪽의 현감을 지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그것도 할아버지가요...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당하자,,,나라의 녹을 먹은 관리가 나라를 지키지 못했으니 어찌 세상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느냐시며...초야에 묻힌 것으로 압니다...그리고 김홍전 목사님의 아버지 되시는 분은 바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셨다고 합니다...그리고...이 곳 전주에 어머니과 함께 내려오셨지요...저도 정병길 목사님이라고 최낙재 목사님의 제자되시는 분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 입니다...음악박사는 명예박사학위입니다

  • 작성자 10.08.25 11:04

    목사안수가 없었지요...칼빈도 누구에게 안수 받았다는 기록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김목사님도 교회 자체에서 목사님으로 인정한 경우입니다.

  • 10.08.25 12:31

    아~~ 그런가요? 구사님.... 저는 성주진 교수님께 들은 이야기인데, 전라관찰사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신학을 하지 않고 목사가 된 경우는 더러 있더군요. 로이드존스 스펄전 모두 신학교 다님이 없이 노회에서 부름을 입어서 목사로 안수함을 받았는데, 칼빈도 그런 기록이 없군요. 혹시 근거 자료를 가지고 계신 게 있습니까?

  • 10.08.25 12:36

    grace님 : 그렇죠 포슨의 책이 윤종하 총무님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는 저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원죄 부인에 관한 것도 그렇구요 그래서인지 급작스럽게 데려가셨지요. 사인이 심장마비였는지 아마 그랬던 걸로 유럽에서 그러셨다고 들었습니다.

  • 작성자 10.08.25 12:38

    제가 정병길 목사님(최낙재 목사님의 제자)에게 김목사님의 안수 문제를 묻자...정목사님이 칼빈의 경우를 말씀하시며...김목사님도 어느 특정 교단에서 안수 받은적은 없다고 말씀하시더 군요...성약쪽에 한 번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 10.08.25 08:11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매우 이해가 가는 글이고 타당성이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자기 부인이 제일먼저 나왔으면 결혼안하고 일생을 바쳐야 하는데 어떠했을런지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만일 김홍전목사님의 견해가 옳다고 하면 제일먼저 나올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부인이나 딸을 예상하고 서원 했을건데 그 이후를 각오하지 않았을리가 없고 딸이 나온다면 딸이 결혼못하고 일생을 수종들며 살것이라 각오했을 텐데 입다의 괴로음이 지나쳐 보입니다.부인이 나오기를 기대했다면 이또한 상황이 이해가 안됩니다,그리고 딸이 주님을 위해 독신으로 보낸다는것은 어떻게 보면 복된일인데 친구들이 그렇게 애곡해야할 일인지도 의아합니

  • 10.08.25 07:56

    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을 기한하고 그를 보내니 그가 그 여자 친구들과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사사 11;37,38)/실제 번제로 드려지는것도 아닌데 2달동안이나 앞으로 처녀로 죽을 일생을 생각해서 애곡한다는것이 도무지 말이 안됩니다)

    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사사 11:40)/해마다 애곡할일일까요?

  • 10.08.25 07:18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만일 자기딸일 가능성도 있음을 분명히 알았고 또한 수종드는일로 바치는것인데 이렇게 괴로와할일인지요?

  • 10.08.25 07:57

    whatever comes out of the door of my house to meet me when I return in triumph from the Ammonites will be the LORD's, and I will sacrifice it as a burnt offering."
    ." then it shall be that whatever comes out of the doors of my house to meet me when I return in peace from the sons of Ammon, it shall be the LORD'S, and I will offer it up as a burnt offering


  • 10.08.25 08:09

    번제라는 단어와 <처녀로 죽음>이라는 번역이 어울어져서 불필요한 오해를 만들어 내는 것 같습니다.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에서 <죽음>은 원문에 없는 의역입니다. 영문 성경에도 없습니다. 직역을 굳이하자면 <처녀로 인하여 애곡함>이 적당한 것 같습니다. 번제는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whole offering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합니다. 우리말은 태울 번자를 써서 꼭 불이 있어야 드릴 수 있는 것처럼 번역을 했지만 원어 <올라>는 <올라간다> 뜻의 완전한 제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애곡함은 처녀로 인한 애곡함이라 봐야 할 것입니다.

  • 10.08.25 08:10

    난해구절이긴 하지만 여자의 해산함은 구원과 관계있습니다(딛 2:15). 당시 문화에서 출산을 하지 못하는 것은 여자로서 큰 수치였습니다. 이건은 야곱의 아내들에게서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들의 의미에서도 충분히 유추가 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입다의 딸은 사무엘처럼 온전히 바쳐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관주와 보다 확대된 관주(NTSK)도 이 해석을 지지합니다. 그리고 시 66:13에 의하면 번제는 서원의 갚음에 대한 관용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입다의 경우처럼 성경에서 번제는 또한 필요의 때에 하나님의 간섭을 바라는 기도(삿 21:4, 렘 14:12)와 더불어 드려졌습니다.

  • 10.08.25 08:19

    게다가 레위기 27:2-3, 28-28에는 사람 역시 여호와께 바쳐질 수 있는 규례가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입다가 번제를 드린다는 표현은 서원을 갚겠다는 관용적 의미 즉, 딸을 온전히 주님께 드린다는 의미로 이해해야지 문자적으로 처녀를 번제물로 받친다고 이해하는 것은 너무 라이브한 해석입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의 사상과 맞지 않습니다. 다만 그럴 가능성이 열려 있다면 사사시대가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것이라는 나레이터 즉 성경저자의 설명을 따라 입다의 잘못된 서원과 그 참혹한 결과로 해석의 여지는 있습니다.

  • 10.08.25 10:36

    '번제'가 '나실인으로 헌신하는 것'이라면 다음의 의문을 해결하여야 할 것입니다. 해당되는 곳에 '성경적인 근거'로 반론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 사사인 입다가 자기 옷을 찢으며 '나를 참담케 하는 자요 괴롭게 하는 자'(삿11:35)라고 하였습니다. 나실인으로 평생 헌신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갚음으로 생각하는 시대(삼상1:11)에 자신의 잘못에 대한 절망적인 표현(또는 회개)인 옷을 찢었을까요? 그러면서 '참담케 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참담(慘憺, miserable, sorrow)이란 괴롭고 슬픔(삿11:35;시143:4)이란 뜻입니다. 나실인이 되는 것이 사사로서 그렇게 괴롭고 슬픈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 10.08.25 17:44

    '번제'에 대한 여러 번역본의 표현입니다.
    (삿11:31) 번제로(개역한글, 개역개정, 바른성경, 공동번역), 번제물로(표준새번역),burnt offering(번제, NIV, NASB, KJV).

    입다의 딸이 '성전 봉사'로 드려졌다면 히브리어 '올라'를 수 많은 번역참여자들이 왜 한결같이 '번제'로 번역했을까요?

  • 10.08.25 10:16

    2. 입다의 딸이 두 달 동안 그 동무들과 산에가서 애곡하였습니다(삿11:37-39). 나실인이 된다는 것은 여호와께 헌신하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헌신하는 것이 본인뿐만아니라 동무들에게 두 달 동안이나 산에 가서 애곡할 만한 슬픈 일이었을까요?

  • 10.08.25 10:41

    3. 나실인에는 임시적인 것과 종신적인 것 두 종류가 있는데, 임시적인 것은 일정기간 누구나 될 수 있으며,서약 기간은 30일부터 평생 동안이었습니다(민6:1-21;삿13:5-7;암2:11,12). 그런데 성경에 실제적으로 종신토록 나실인으로 산 사람은 삼손, 사무엘 ,세례 요한 뿐입니다. 앞의 글에서 어떤 분이 '번제'였다면 후속 조치의 글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고 하였습니다. 같은 질문이 됩니다. 입다의 딸이 나실인이 된 후속 기록은 있는지요?

  • 10.08.25 10:35

    4. 입다의 딸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마다 산에가서 나흘씩 애곡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규례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실인이 되는 슬픔이 이스라엘의 규례가 될 정도로 슬픈일일까요? 그렇다면 삼손, 사무엘, 세례 요한을 위하여 애곡하는 규례나 기록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10.08.25 17:32

    '애곡'에 대한 여러 번역본의 표현입니다.
    1. (삿11:37) 애곡 하겠나이다(개역한글, 개역개정),실컷 울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표준새번역),실컷 울겠습니다(바른성경), 실컷 울어 한이나 풀겠습니다(공동번역), weep(울다, NIV, NASB), bewail(슬퍼하다, KJV).
    2. (삿11:38) 애곡하고(개역한글, 개역개정), 슬피울었다(바른성경), 실컷 울었다(표준새번역). 실컷 울었다(공동번역), wept(울었다, NIV, NASB). bewailed(슬퍼하였다, KJV).
    3. (삿11:40) 애곡하더라(개역한글, 개역개정), 애도하였다(바른 성경), 슬피 우는 것이다(표준새번역), 애곡하게 된 것이다(공동번역), commemorate(기념하다, NIV, NASB) lament(슬퍼하다, KJV),

  • 10.08.25 17:49

    전체를 종합하면 슬픔이 전제된 울음이 아닐까요?

  • 10.08.25 10:43

    부탁드릴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성경 안에서 건강한 토론되기를 원하며, 서로 간에 인격적인 거슬림은 없기를 소망합니다. 위의 질문에서 예의를 벗어난 표현이 있다면 지적하여 주시면 수정하고 사과하겠습니다.

  • 작성자 10.08.25 11:02

    제가 신학이 전공이 아니라...히브리어를 모릅니다...(좋은 주석을 구비해야하는데^^)
    어떤 분이 아래와 같은 주장을 하는데...맞는 말인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애곡하다'란... "타나(히) : (찬양을)‘돌리다’, 즉 ‘경축하다’, ‘축하하다’:-애곡하다, 되풀이 해 말하다"의 뜻을 가진다.

  • 10.08.25 12:08

    본문에 애곡하다는 타나가 아닙니다. <바카>라는 단어로 BDB에 의하면 대략 5가지 사용용례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기쁨의 울음(창 29:11, 33:4, 49:29) 2. 고난 중의 울음(출 2:6, 창27:38, 욥 31:38 등) 3. 죽음에 대한 비탄(삼하 3:32, 창 50:4, 신 34:8) 4. 간구나 불평에 관한 울음(삼상 1:7-10, 에 8:3, 왕하 20:3) 5. 회개의 울음(삿 21:2, 왕하 22:19, 렘 31:9 50:4) 등이 있습니다. 애곡은 문맥에 따라 어떤 의미인지를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 10.08.25 12:09

    애곡이 꼭 슬픈이란 전제는 우리 언어 습관에서 온 것입니다. 성경의 용례라기보다 우리가 이미 문화 속에 해석적 전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위의 용례들이 해석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작성자 10.08.25 12:43

    아! 그렇군요...답변 감사드립니다.

  • 10.08.25 12:54

    하나 더요 ^^ 개역성경에 슬프다로 번역된 단어는 원문상 감탄사입니다. '오호라' 뭐 이 정도로 번역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 작성자 10.08.25 13:57

    신학생이신지요?...아님 합신출신 목회자신지요?...
    바보새라...뛰어난 실력을 가지신 것에 비하면 아주 겸손한 필명을 쓰시는 군요!!!...

    합신출신이시면 네이버 카페 "캘러리 개혁신앙연구회"의 김병혁목사님이 아주 좋아하실 것 같군요...하여튼 이렇게 알게 돼 매우 기쁩니다...

    어두운 평신도를 뛰어난 실력으로 밝게 해주시니...
    밝은새로 닉을 고치심도 괜챦을 듯 싶습니다^^..그냥 제 생각입니다.

    아! 그리고...김홍전 목사님은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 10.08.25 16:03

    겸손은요.... 저같은 인생이 겸손할 축에도 들지 못합니다. 버러지 같은 인생인데 불쌍히 여기셔서 불러 주신 것에 감사할 따름이지요. 저는 좀 바보처럼 살고 싶습니다. 성산 장기려 박사님께서 그러셨다지요. 누가 당신더러 바보라면 성공한 인생이다고 말입니다. 바보처럼 손해도 보고 바보처럼 내어주기도 하고 계산에 밝기보다 그렇게 살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리치몬드 유니온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셨군요... 김병혁목사님을 개인적으로 뵌적은 없는데요. 한다리 정도 건너면 서로 아는 사이입니다. ^^ 오늘 반가왔습니다. ^^

  • 10.08.25 12:16

    참담케 하는 자라 번역된 단어 역시 중의적 뉘앙스를 가진 단어입니다. 원의는 <허리를 굽히다 숙이다 혹은 무릎을 꿇다>입니다. <카라>라는 단어로 성경에서는 13회 정도 예배와 관련되어서 사용되었습니다. 본문 삿 11:35에 카라는 <히필형>으로 <굴복케 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비슷한 용례는 시 17:13. 78:31 삼하 22:40, 시 18:39이 있습니다. 아마도 아시는대로 입다는 기생을 어미로 둔 서출이었습니다. 건달들이 그의 집에 출입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정도 설명하면 짐작하시겠지만 딸이 나옴을 보고 진정으로 하나님께 굴복케 되었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 10.08.25 12:22

    그가 전쟁에 참전했던 직접적 이유는 아비의 집에서 유업을 함께 잇지 못하고 쫓겨난 것에 대한 설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본인도 그 두려움을 잘 알았고 그래서 서원의 의미로 번제를 약속합니다. 이런 입다의 배경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입다의 이 표현은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이 아닙니다.

  • 10.08.25 12:25

    그리고 레퍼런스가 된 레위기 27장은 나실인의 율법이 아니라 서원에 율법에 관한 규례입니다. 이 서원 중에 사람을 드리는 서원의 규례를 2-3절에서 설명하고 있고 28절은 이렇게 서원으로 바쳐진 것은 영원히 속하지 못함을 언급하는 것으로 나실인의 규례와는 다른 성격의 서원 규례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속할 수 없기 때문에 만약 속하게 되는 경우나 거기서 벗어나려는 경우가 발생하면 그는 반드시 죽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입다의 딸이 처녀로 죽는 것을 애곡하는 것도 결국 이 문제와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10.08.25 13:40

    시간이 없어서 대강 김홍전 목사님 글만 보았는데.. 제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짧아서 그런지 자꾸 김홍전 목사님 견해가 동의되려 합니다. 아무리 허용적이라고는 하나 하나님께서 인신제사를 받는다는 것이 여전히 꺼림칙해서.. 시간날 때, 본문을 천천히 들여다 보고 올려주신 글들을 되씹어 보면, 좋은 수확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요즘은 제가 너무 바빠져서 양무리에도 자주 들르기 어려울 듯 합니다. 시간날 때 가끔씩 들리는 것 밖에는..

  • 10.08.25 17:23

    저는 두 해석다 열린마음으로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두개 다 합당한 부분과 약간은 미진한 부분이 있기에 두가지를 다 수용하면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을 취하기로 결심합니다,^^

    바보새님의 설명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가진 성경은 진짜 번제로 드렸다고 주석이 되어 있네요..
    호크마주석은 성전봉사로 해석되어 있구요,,,

  • 10.08.25 17:45

    그러게요... 저도 두 해석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그게 <계시의존사색>이겠지요. 저도 즐거운 나눔이었습니다.

  • 10.08.25 18:25

    제가 애곡으로 번역된 바카의 동일한 구약내에서 형태 검색을 해보니, 위의 11:37외에 4개의 본문이 더 검색되네요. 참고용으로 올립니다.
    1. 삼하 12:22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다윗이 밧세바 사이에서 난 아들을 위해 간구하는 장면에서>

    2. 느 1: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 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예루살렘의 황폐화를 애통해하면서 느헤미야가>

    3. 시 69:10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시편 기자가 금식 중에>

  • 10.08.28 20:23

    4. 렘 9:1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당할 일을 생각하며 부르는 애가 중에서> 위의 4 경우의 공통점은 <회개>인 것 같습니다.

  • 10.08.28 20:24

    게다가 1-4 모두 <칼형>의 <바카>로 <칼형>일 경우 to weep로 <피엘형>일 경우 to lament로 해석이 됩니다. 이 경우들은 모두 <칼 형>으로 쓰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본문인 11:37과 렘 9:1은 히브리어의 cohortative라는 권고법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미완료의 어미에 음절을 첨가해서 만드는 문법 형태로 <나로 하여금 울게 하라>와 같은 뉘앙스를 가지도록 된 문법 형태입니다.
    <칼형>과 <피엘형>과 관계해서 weep와 lament는 저도 그 뉘앙스 차를 잘 모르겠군요. 누가 아시는 분 영어 잘하시는 분 설명 좀 부탁합니다.

  • 작성자 10.08.26 14:27

    킷팝님이라고...미국으로 이민가 대학다니시는 분인데...질문했더니...아래와 같은 답변이 왔네요...

    킷팝
    2010/08/26 13:01답글|신고

    저로써는 자주 접하는 단어가 아니기에 지인에게 물어보니..둘다 쓰임은 비슷하다고 합니다...조금의 차이점을 생각해 본다면 Weep는 울다 라는 뜻이고 Lament는 애통하다로 받아드리시면 될 거 같습니다.

    예를 든다면..
    어린아이가 사탕을 잃어버리면 weeping한다고 쓸 수 있지만...lament라고 쓰기에는 조금 부적절하지요...성경 예래미야 애가 에서 '애가'가 lamentation 이랍니다.

    그런데 lament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는 표현이 아니라고 합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 10.08.26 21:46

    그렇군요. 구사님 감사합니다. 더 이해의 지경을 넓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도움을 받으니 참 좋습니다. ^^

  • 작성자 10.08.26 08:27

    주제가 난제인데다가...김홍전 목사님의 글이다 보니...아주 인기가 대단하내요^^,,,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 10.08.26 01:41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고자 한 입다의 불합리한 서원은 자신의 권력욕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입다의 서원은 인간의 자기의에 대한 집착을 표출하고 있으며 그 죄는 딸의 번제로 대속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결국 입다의 이야기는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힘을 자기의에 이용하지 말고 예수님의 대속을 믿음을 목적으로 하라는 지침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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