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참수 치명한 하느님의 종 박대식 빅토리노의 묘
순교자 박대식(朴大植, 1812~1868, 빅토리노)의 세례명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순교 사실과 무덤은 후손들의 증언으로 알고 있었지만 기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시적으로 노렌죠(라우렌시오)라 불려 왔다. 그러나 그에 관한 기록은 있었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과 《병인치명사적》(제23권 91쪽)에 등장하는 ‘박 위도서’가 ‘박대식’이었는데 몰랐던 것이다.
경남 김해 지방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다. 경상도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의 다른 지방들과 마찬가지로 천주교도들을 징계하기 위해 떠나보낸 귀양길이 오히려 유배지에 복음을 전파하는 계기가 되곤 했다는 것은 어쩌면 천주의 섭리일지도 모른다. 박해의 서슬에 체포되어 유배형을 받은 이학규(李學逵, 호 洛下, 1770~1835)에 의해 김해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밀양 박씨 문중에 천주교가 전해지고, 순교자 박대식 빅토리노 가정의 선대가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다. 박대식의 부친 박만혁( ?~1810)이 김해군 진례면 시례리에서 이학규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후 그의 아들 대붕, 대흥, 대식 삼 형제가 모두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병인박해 때는 가족 모두가 피신하여 잡히지 않았으나 1868년 무진박해 때 박대식은 조카인 박수연과 함께 붙잡혀 김해 관아에서 삼일 간 문초를 받은 뒤 대구의 경상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박대식은 이곳 대구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연일 배교를 강요당하며 고문을 받아 뼈가 부러지고 몸이 뒤틀렸다. 가족들이 면회 왔을 때 험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 웃옷으로 몸을 가렸다고 한다.
박대식은 1868년 10월 12일(음 8월 27일) 조카 박수연과 함께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참수 치명하였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당시 조카 박수연은 예비신자 신분이었다. 박대식의 가족들은 시신을 염습한 뒤 선산에 모시려 하였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과 집안의 외인들이 반대하여 하는 수 없이 그의 아들 삼 형제(종립, 종반, 종철)와 친척들이 마을 뒷산인 유씨들의 문중산에 평장으로 매장하였다.
그후 120년이 지난 1956년 봄에 후손들이 무덤의 봉분을 크게 하고 순교자 부인의 묘도 이장하여 완전한 묘역으로 가꾸었다. 그리고 1966년 4월 15일에는 당시 진영 본당 주임이었던 유창호 도마 신부의 주선으로 비석을 세워 그의 순교를 기리게 하였다.
▒ 박대식(朴大植)의 세례명
“박 위도서-본디 김해 예동 살더니 무진(1868년) 칠월 칠일에 대구 포졸이 본읍 포졸과 더불어 잡아, 본읍으로 들어가 있다가 삼일만에 대구로 올라가서 팔월 이십 칠일에 참수 치명하니 나이는 오십칠 세라.
증참(증인 참석자) 박 안당은 죽고 그 아우 도마가 그 형에게 들었습니다. ” 도마가 살기는 김해 중북면 안평동, 字는 文七. 박선달 위도서(威道瑞)는 한자식 표기로서 원본인 병인치명 사적의 ‘위도리(威道理)’를 전사하는 과정에서 오타가 생긴 표기로 보이며, 우리말로는 빅토리노(victorinus)다. 박 위도서가 박대식 임을 밝힌 사람은 사학자 마백락(글레멘스)과 순교자의 4대손 박영식(요아킴)이다(2001년 8월). 위의 《병인치명사적》에서 증인으로 등장했던 도마(文七)가 박대식 순교자의 둘째 아들 종반(宗班)이란 사실을 족보를 통해 증명한 것이다.
■ 순교자
◆ 복자 박대식 빅토리노(1812∼1868년)
박대식 빅토리노는 경상도 김해 예동(현 경남 김해군 진례면 시예리) 사람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로는 언제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68년의 박해 때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과 김해 포졸들이 함께 그의 집으로 몰려와 빅토리노와 그의 조카 박수연을 체포하여 김해 관아로 압송하였다. 당시 그의 조카는 아직 예비 신자였다.
김해 관아의 옥에서 빅토리노는 송 마태오와 박 요셉을 동료로 맞이하였다. 이후 그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한 뒤 3일 만에 대구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다. 이에 따라 빅토리노는 조카와 동료 2명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가 참수형을 받았으니, 그때가 1868년 10월 12일(음력 8월 27일)로, 당시 빅토리노의 나이는 57세였다. 가족들은 그가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대구로 와서 그의 시신을 찾아다 고향에 안장하였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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