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지은이), 이철수(그림)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한겨레출판, 2011)
화가가 되고 싶었으나 시인이 된 소년, 부드러우면서 곧은 시인, 따뜻하고 열정적인 선생님, 해직과 투옥을 겪으면서도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던 교육운동가 도종환의 에세이. 자신의 삶 이야기가 들어 있는 시들을 골라 그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고 시를 들려준다. 시인의 오랜 지기인 판화가 이철수의 채색그림을 함께 실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부터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쳤던 날들, 교육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간 이야기, <접시꽃 당신>으로 가족과 함께 상처받고 힘들었던 시절, 아파서 숲에 들어가 혼자 보내야 했던 시간들의 이야기까지, 한 편 한 편의 시를 통해 그의 인생을 담담하게 솔직하게 때론 절절하게 담고 있다.
시인은 충북 보은의 황톳집에서 자신의 삶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되짚으면서, 자전적 이야기를 세세히 펼쳐낸다. 가난과 외로움과 좌절과 절망과 방황과 소외와 고난과 눈물과 고통과 두려움으로부터 시작한 문학,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여러 가지 사건들을 겪으며 여기까지 온 삶의 이야기를, 그것으로 인해 시인이 되었던 일들을 이야기한다.
P.7-8 : 나라고 왜 흔들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꽃들이 그러하듯 흔들리면서 꽃을 피우는 겁니다. 흔들리다가 제자리로 돌아와 꽃 한 송이를 피우듯 그렇게 살았습니다.
살면서 수많은 벽을 만났습니다. 어떤 벽도 나보다 강하지 않은 벽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벽에서 살게 되었다는 걸 받아들이고, 벽에서 시작하는 담쟁이. 원망만 하지 않고, 쉽게 포기하지 않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잎을 찾아가 손을 잡고 연대하고 협력하여 마침내 절망적인 환경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꾸는 담쟁이처럼 살기로 했습니다.
가난과 외로움과 좌절과 절망과 방황과 소외와 고난과 눈물과 고통과 두려움으로부터 내 문학은 시작되었고, 그것들과 함께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것들이 없었다면 나는 시인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 많은 아픔의 시간을. 거기서 우러난 문학을. 나의 삶, 나의 시를.
P.21 : 지금도 내 마음의 마당 끝에는 꽃밭이 있습니다. 내가 산맥을 먼저 보고 꽃밭을 알았다면 그 꽃밭은 시시해 보였을 겁니다. 그러나 꽃들을 알고 난 뒤에 산맥을 보았기 때문에 산 너머를 동경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꽃을 보면 가던 걸음을 멈추곤 합니다. 그래서 내 시에는 꽃의 향기가 묻어 있습니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소박한 향기가 묻어 있는 것이.
P.93 : 헤맴 10년, 절망 10년, 방황 10년. 그렇게 10년을 보내고도 “절망이 끝까지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반성할 줄 모른 채 졸렬과 수치 속에서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문득문득 찔레 한 송이보다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아까시꽃만큼이나 향기를 지니고 살고 있는 것일까? 불두화만큼은 뿌리내리고 있는 것일까? 꽃 한 송이를 보며 그 생각이 치밀어오를 때가 있었습니다.
염무웅
: 멀리서 바라보면 도종환은 바른 심성과 부드러운 감성의 서정시인이다. 꽃향기가 코에 닿으면 꽃이 말을 걸기 위해 향기를 흘려보낸 거라고 생각할 만큼 예민한 감각을 지닌 사람이 도종환이다. 그래서 그는 “내가 분꽃씨만한 눈동자를 깜빡이며 / 처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 거기 어머니와 꽃밭이 있었다”고 노래한다. 그러나 조금 가까이서 바라보면 그의 부드러움 안에는 강인한 투지가 들어 있다. 그는 헌신적인 교사이자 교육운동가였고 열성적인 문화운동가인 것이다. 사비를 털어 가난한 아이 학비를 대기도 했고, 비뚜로 나가는 아이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에게 닥친 것은 ‘감시와 처벌’이었다. 《접시꽃 당신》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는 동안에도 학교에서 그가 당한 것은 몇몇 시구절에 대한 터무니없는 닦달이었다. “시를 쓰는 것이 죄가 되는 세상에 태어나 / 몇 편 시에 생애를 걸고 옮겨 딛는 걸음이 무겁다”는 그의 탄식은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 더 깊이 들여다보면 도종환의 인생 역정은 시련과 상처의 연속이다. 소년 시절에는 부모와 헤어져 굶주린 나날을 보내야 했고, 청년 시절에는 ‘한 마리 외로운 짐승’처럼 절망의 감정에 휩싸여 미친 듯이 술을 마시고 자학에 빠지기도 했다. 10년의 힘든 해직 생활 끝에 복직했으나, 자율신경의 실조로 더 이상 교단에 서는 생활을 지탱할 수 없게 된다. 놀라운 것은 도종환이 이 모든 곤경을 딛고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가난과 외로움, 좌절과 방황, 해직과 투옥, 고난과 질병 같은 현실적 악조건은 오히려 그를 더 높은 수준에서 자아의 완성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된다. 시를 쓰는 일과 깨달음을 구하는 일이 근본에 있어서 하나라는 것을 자신의 온 생애를 통해 증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종환의 이 자전적 에세이는 문학과 종교를 넘나드는 드문 감동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