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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달 착륙 1962년 11월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항공우주국(NASA) 책임자 제임스 웹을 백악관으로 불러 다그쳤다. 제임스 웹은 10년 안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겠다는 케네디의 공약에 회의적이었다. "나의 단 하나 목표는 소련인보다 먼저 달에 첫발을 내딛는 것이오. 우주 자체에는 흥미가 없소. 우리가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는 것은 몇 년 내에 소련을 추월해 때려눕힐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란 말이오." 미·소 우주 경쟁은 순수한 과학 기술 경쟁이 아니었다. 상대 국가를 염탐하는 스파이전(戰)의 연장이자 국력을 과시하는 선전 수단이었다. 미국은 1969년 드디어 아폴로 11호 유인(有人) 달 착륙이라는 초대형 이벤트로 소련을 한방에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우주 경쟁 열기는 그 후부터 급격히 식었다. 달 착륙 비행은 비싼 비용과 위험성에 비해 얻을 게 적다는 비판 속에 무대에서 밀려났다. 이번엔 국력 경쟁이 아니라 실리(實利) 다툼이다. 달에 풍부한 헬륨을 1만t만 가져온다면 이를 핵융합 원료로 써 온 지구가 1년간 사용할 에너지를 만들 수 있다. 무균(無菌) 상태를 이용해 의약품·반도체 같은 고(高)순도 제품의 생산기지를 건설할 수도 있다. 중력이 약한 달에서는 지구보다 훨씬 적은 출력의 로켓으로 화성이나 다른 천체에 우주선을 발사할 수 있다. 미국·소련에 이어 3번째다. 중국이 2003년 유인 우주선 선저우호(號)를 쏘아 올렸을 때 일부에선 한물간 유행을 뒤쫓아간다고 웃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선저우 발사를 계기로 미국·EU·러시아·일본·인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21세기 우주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숱한 파생 기술을 인류의 일상생활에 선물했다. 여성 브래지어 속에는 우주선 안테나를 위해 개발됐던 형상기억합금이 들어 있다. 중국이 키우는 20만~30만명의 우주 산업 일꾼 가운데 10만명 이상이 이런 민수용 기술을 연구하는 비(非)군사 분야 전문가들이다. 냉전시대가 끝나자 미국은 우주 개발 기술을 재빨리 민간 산업 분야로 연결했지만 소련은 체제의 경직성 때문에 민수(民需) 전환에 실패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중국은 소련과는 달리 실속을 챙기는 길로 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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