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2년 7월7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청주] 미래 지향적인 삶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아모 9, 11 - 15
† 복음 : 마태 9, 14 - 17
★ 아모스는 허물어진 성읍의 재건과 풍요로운 포도밭의
모습을 묘사하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고 있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은 단식을 할 때가 아니라고 강조하신다. 단식을 해야
할 때는 신랑을 빼앗길 날, 곧 예수님께서 수난하실 때이다
(복음).
◈ 오늘의 묵상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지나칠 정도로 따지며 세부적인 규칙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의무적으로 단식을 하는 속죄의 날은
물론이고, 매주 두 번씩 단식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인간이
정한 형식과 전통을 지키는 것을 경건한 자세라고
여겼습니다. 요한 세례자의 제자들도 회개의 표시로 자주
단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이 단식
문제를 두고 예수님께 시비를 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혼인 잔치의 신랑으로
자처하시면서 신랑이 있는 동안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잔치를 베푸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잔치에
초대된 손님들이 단식하며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잔치
때에는 기뻐하고 장사 때에는 곡을 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에게서 비롯된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사고와 삶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세리나 창녀와 같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고 우정을
나누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세리나 죄인에게까지도
두루 미친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삶입니다.
- 매일 미사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어머니 마리아
2012년 나해 7월 성모신심 미사 - 어머니 마리아
우리가 잘 알듯이 2차 세계 대전 때 히틀러 정권은
6백만이라고 하는 유태인들을 학살하였습니다. 거기서
전해지는 이야기들도 수없이 많지만 오늘은 특별히
어머니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를
소개합니다.
수용소에 아버지와 어머니, 또 아들 둘이 잡혀 들어왔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작업을 시켰고 작업을 할 체력이 없는
사람들은 가스실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아들
중 하나는 매우 병약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늘
걱정이었습니다. 작업이 끝나고 나면 가족은 서로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곤 하였는데 특히 나약한 아들을 먼저
찾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그 병약한 아이와 어머니가 한꺼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둘이 가스실에 들어간 것이
확실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아버지와 남은 아들에게
어떻게 된 사실인지 설명하였습니다.
어리고 병약한 아들을 감시원이 끌고 가려고 하자 아이는
울며 발버둥을 쳤습니다. 어머니가 그것을 보고는 아이에게
뛰어가서 아이를 안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울지 마라, 이 어미가 같이 간다.”
그러자 아들은 다시 안정을 찾았고 어머니는 아들을 안고
당당히 가스실로 들어갔습니다.
오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의 어머니의 마음도 이 어머니의
마음과 같았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당신의 전부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잃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성모님의 자녀들인 교회에 포도주를
주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이 당신과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 자녀들인 교회에 성령님을 주시기 위해
어머니는 목숨을 거십니다.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예수님은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거시는 마리아를 사랑하지
않으실 수 없으십니다. 그리고 그 분의 청을 들어주셔서
은총을 교회에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녀를 위해
목숨을 걸 줄 아시는 분이 어머니이십니다.
불란서 혁명 때 어떤 어머니가 세 아들과 함께 집에서
쫓겨나 며칠 동안을 산 속과 들판을 헤매었습니다.
부인과 아들들은 나무뿌리와 풀잎을 먹고 연명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군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덩굴 속에
숨었습니다. 군인상사는 덩굴 속에 인기척이 잇는 것 같으니
찾아보라고 병사에게 명령했습니다.
한참 후에 어머니와 아이들이 끌려나왔습니다. 군인상사가
그들을 본 순간 그들이 굶어 죽기 직전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군인 상사는 너무 측은해서 빵 한
덩어리를 어머니에게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굶주린 이리처럼
그 빵을 얼른 받아 세 조각으로 나누더니 아이들에게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을 본 군인 상사가 말했습니다.
“애들에게만 주고 자기는 안 먹는구나!”
그 옆에 있던 사병이 “아마 배가 안 고픈가 보죠.”라고
말하자, 다시 상사가 하는 말이 “아니다. 어머니라서
그렇지.”라고 말했습니다.
성모님은 오늘도 은총을 얻어 우리에게 나누어주십니다.
성체와 성혈을 주시는 그리스도께도 감사해야 하지만
그것을 받아 우리에게 나누어주시는 우리 어머니께 당연히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미래지향적인 삶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 마태오 9,14-17
미래지향적인 삶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중요하지만 과거의 허물이 또는 옛
생각이 오늘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되겠습니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하기 위해서는 오늘에 충직해야 하고 오늘에 충실
한다는 것은 희망의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만큼 오늘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옛 것에 매여 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오늘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지를
마음 써야 하는 것입니다. 껍데기에 치중한 삶이었다면
알맹이를 찾으라는 권고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께 우리는 단식을 많이 하는데 왜
스승님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사실 단식은 그저 맹목적으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단식을 하는 것은 밥을 굶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식할
합당할 이유가 있어서 단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단식을 한다고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면 그분과 함께 기쁨을 나누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잔치집에서는 함께 웃고 축하하는
것이요, 상가에서는 함께 울고 슬픔을 나누면 됩니다.
슬픈 일이 생기고 새 삶의 시작을 위해서, 회개와 보속의
삶을 살기 위해서, 이웃과의 나눔을 위해서라면 단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식을 통해 새 생활의 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에페4,22-23)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흔히 말하는 다이어트와는 분명 다릅니다. 단식의 정신은
주님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합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풍요로운 마음으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단식 대신 더 많은 사랑을
단식 대신 더 많은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의롭고 거룩하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하느님을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도 관리할
줄 아는 사람들, 즉 금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즐겨 실천하던 자기 통제 방식은 단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도자였던 모세는 대단한
단식가였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단식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위대한 대예언자 엘리야 역시 단식을 통해 깨어
기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구약 시대의 마지막 대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은 또 어떻습니까? 그는 거의 음식과는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그의 주식은 메뚜기요 들 꿀이었습니다.
거의 먹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바리사이들 역시 철저하게 단식을 했습니다. 놀랍게도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빼먹지 않고 단식을
실천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성덕과 단식은
늘 함께 가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단식은 영혼이
육체를 지배하는 수단이었고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준비하는 도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로
들어가셔서 40일간이나 단식을 하시며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단식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서 충분히 인식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십니다. 광야에서 단식하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가시는 곳 마다 잔치를 벌이십니다.
사람들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기쁜 마음으로
잔치자리에 앉으십니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시며
포도주잔을 기울이시고 마음껏 축제를 만끽하십니다.
종래 대예언자들의 모습과는 너무도 상반된 예수님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묻습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그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판을 완전히 뒤집는 놀라운 대답,
바로 문제의 본질이자 핵심부로 우리를 인도하는 기가 막힌
대답을 펼쳐놓으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즉 당신이 이 지상에 머무시는 기간은 인류 전체가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대축제의 기간임을 선포하십니다.
혼인잔치 때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산해진미 앞에서 우울한
얼굴로 단식한다는 것은 혼주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입니다.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로서 혼주를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준비한 음식 맛있게 먹어주는
것입니다. 벌어진 축제 마당에서 흥겹게 놀아주는 것입니다.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부인 교회 공동체를
맞아들이시어 혼인잔치가 벌어졌는데 이 기간 동안
단식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색한 행위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자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는 이 장엄하고 축복된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인 것입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이 대축제 기간 동안
우리가 취할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말 참된 단식은 기쁘게 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쁘게
지낸다는 것이 그냥 희희낙락하며 기쁘게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꼭 기쁜 일이 있어서 기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바오로 사도께서 그러셨듯이 고통 속에서도,
거듭되는 환난과 박해 속에서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비록
오늘 내 삶이 고통과 십자가의 연속이어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니, 하느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시니 기뻐하는 것이 참된
단식입니다.
참된 단식은 더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것이 사랑스러운 사람만 골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 내 편에 선 사람들, 나를 챙겨주고
인정해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를 헐뜯고 공격하고
깎아내리는 사람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수용하고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그 사랑이 참된 단식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서울] 그리스도인의 단식
저는 가끔씩 식사 후에 동네 주변을 산책하곤 합니다.
처음에는 동네 길을 잘 익히기 위해서 여기저기
기웃거렸지만 요즘은 나날이 불러오는 제 배가 ‘주인님!’
하고 원망할 것 같아서 불러오는 배를 부여잡고 산책길에
나서곤 합니다.
저도 군대를 제대한 직후에는 나름 아주 눈을 크게 뜨고
보면 보일락 말락 한 식스팩과 손대면 날카로워서 베일 것만
같은 턱선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글동글한 호빵형 얼굴과
푸근한 원팩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좀 관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고민은 비단 저뿐만이 아닐 것 같습니다.
시원한 바다로 그리고 수영장으로 마냥 놀러 가고 싶은
요즈음, 형제님들은 멋있는 초콜릿 복근을 갖기 위해서,
자매님들은 예쁜 S라인 몸매를 만들기 위해서 구슬땀을
흘리며 운동도 하고 몇 날 며칠을 굶어가며 다이어트를
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온 유다인들도 단식을 했습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율법 정신에 입각해서 단식을 실시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단식을 시작하면 음식은 물론 물과 포도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라고 따져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들한테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사실 진정한 단식은 내가 움켜쥐고 있거나 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을 비워내고 그 자리를 하느님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한테는
매 순간이 단식의 때라 할 수 있습니다.
- 백종호 신부(서울대교구 서초동천주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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