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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간 걸까? 오랜 시간 왼손 두 번째 손가락에 끼고 있던 묵주반지를 얼마 전 잃어버렸다. 촬영을 위해 의상을 갈아입을 때면 스타일리스트에게 액세서리를 맡기곤 하는데, 그 중 소중한 것은 직접 지니고 있어주기를 당부한다. 그런데 다른 반지들과 함께 그 사람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내 묵주반지가 사라진 것이다.
모태신앙인 나는 성당 이야기를 빼면 유년시절 기억이 없다고 할 만큼 성당에서 놀고 자랐다. 성가대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연습하고 이야기를 나눴고, 가을이면 성탄축제 준비에 열심이었다. 그때쯤 가장 친한 친구와 '우정반지'를 맞췄는데, 묵주반지 두 개를 사서 나눠 끼었다. 이것이 묵주에 대한 첫 기억이다.
그 묵주반지는 우정반지 이상으로 내게 큰 의미였고, 묵주를 꼭 쥐며 화살기도하는 버릇도 생겼다. 나의 묵주와 내 마음이 만나 올리는 기도 주제는 늘 짧지만 다양했다. 특송을 하기 전, 친구에게 힘든 일이 있을 때, 가족 건강을 기원할 때, 길을 걷다 가여운 사람을 만났을 때 등 나는 늘 묵주반지에 신경을 모으고 '주님 지켜주세요!' 하고 기도했다. 그러면 이내 곧 기도 응답이라도 듣듯 심장이 고르게 뛰는 느낌이 찾아오곤 했다.
생활 속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마련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아주 지극한 정성과 성실함이 필요하다. 치열했던 10대를 지내고 어쩌면 더욱 치열한 20대를 살아가면서도 나는 늘 삶 속에 깊이 자리하시는 주님을 만난다. 따로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는 것이 마땅한지 모르겠으나, 나의 가장 큰 기도는 삶을 기도화했다는 것이다. 그 매개체가 바로 묵주다.
어린 시절 묵주기도에 대한 습관이 가장 큰 연습이 됐다고 생각한다. 기도는 연습이고 실천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묵주를 선물했다. 지니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을 기도의 삶으로 한 걸음 가까이 오게 하는 작업이라고 할까.
나는 그렇게 수년 동안 소박한 나무 알로 된 묵주팔찌를 많은 사람에게 전했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말이다. 물론 선물하기까지 나 또한 많은 생각을 하고 조심스러워 염려하기도 한다. 나는 묵주를 건네며 "부담스러우면 제가 건네는 일방적 기도라고, 당신을 위해 내 신앙으로, 내 마음으로 언제나 기도한다고 생각해주세요"라고 말이다.
그러면 그들은 모두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가 준 묵주를 차에 걸어두거나 팔목에 걸고 다니기도 했다. 한 냉담교우는 어느 날 기도를 시작하게 됐다고도 했다.
'삶과 기도가 어떻게 따로일까'하는 마음에 시작한 묵주 선물은 나를 비롯한 다른 이들을 향한 응원이고 기도의 실천이다. 내게 더 큰 기도가 돼줬던 묵주 선물은 지금도 내게 큰 의미다. 그런데 내 묵주반지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괜스레 그간의 평온함은 사라지고 집착처럼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반지를 잃어버린 스타일리스트는 안절부절못한다. 하지만 아이처럼 어리기만 한 내게 곧 주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네 기도는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하고. 그 묵주는 이미 내 마음속에 새겨지듯 존재한다고 말이다.
아, 나는 어쩌면 그동안 세상에서 가장 큰 묵주를 마음에 새기는 시간을 보내왔는지도 모르겠다. 묵주반지 가출 사건은 주님께서 내 마음속 묵주를 보게 하시기 위해 만드신 작은 사건이 아닐까. 게다가 얼마 전 시작한 '대풍수'라는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분실했으니, 현장 사람들을 위해 그곳에 반지를 두는 것이 오히려 낫겠다며 큰소리까지 친다.
묵주는 이렇듯 나와 주님을 이어주는 무선 인터넷 같은 기분 좋은 매개체다. 많은 사람이 나의 작은 이야기를 읽고 묵주를 조금이나마 생활 속으로 가깝게 끌어들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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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얼굴도 고우시고 연기도 잘 하시고 참 멋 있습니다. 복 많이 받으시고 화이팅~^^
이 분 이름이 안 나와 있네요. ??? 글도 참 잘 쓰시네요. 진심에서 쓴 글이라 이렇게 술술 쓴 것처럼, 술술 읽힙니다.
요즘 청년에게서 보기 드문 보석같은 마음을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넘 사랑스러워요
그리고 감사해요
마음속 묵주를 보게 하심이라는 글에 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