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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신라,가야토론방 김춘추는 아들 김법민에게 암살당했다.
백제사랑 추천 0 조회 1,903 09.12.11 12:43 댓글 4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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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12.11 13:00

    첫댓글 이는 인터넷에서 흔히 떠도는 내용으로 개인적인 추론이며 가능성의 믿음은 개인적인 자유이지요..하지만 저러한 암살적 근거를 보다 뚜렷하게 제시를 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공연히 떡밥적인 수준을 벗어 나지 못하는 내용이라 생각됩니다..무열왕의 사망에 관한 내용은 답설인전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언급된 것으로 이부분을 논파하지 못하고 카더라 통신의 저러한 추론을 믿기는 어려운 내용이지요.

  • 09.12.11 13:04

    본문에서 "보통 즉위직후, 왕이 타국을 침범하는 것은 내부의 결속력을 강화하기위해서이죠. 아무래도 이시기 김법민은 김춘추의 죽음이 뭔가 꺼림직한 내부의 분위기를 외부로 돌리고자 이러한 정벌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것도 아무리 당나라의 요구가 있다 하더라도 왕이 죽은지 겨우 한달밖에 안된 시점에서말이죠." 이부분은 님게서 삼국사기 문무왕조에 있는 답설인귀전을 자세히 검토하고 내용을 충분히 숙지한 연후에 이를 근거로 주장하시는게 옳을듯 합니다.

  • 09.12.11 13:30

    확실히 김법민이 왕위 등극 과정에서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쳤다는 점은 있죠... 거기다 김유신의 등장 타이밍도 여기에 맞춰 보면 미묘하고 말이죠~ 그런데 답설인귀전 내용에 어떤게 있기에, 소호금천씨님은 저러한 가설을 그저 떡밥 취급하시는지요? 저도 그 문무왕조의 답설인귀서 내용은 다 봤지만, ' 선왕의 부고 ' 가 자신으로 인한 것이라고 거기 밝혀지지 않았으면 그게 곧 ' 무열왕은 자연사했다 ' 는 진실이 되는건가요? 사실 이러한 의혹은 김병관 교수님도 긍정하시는 내용입니다만, 뭐가 자세하게 언급되 있다는 건지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 09.12.11 13:23

    무열왕의 죽음은 꺼림직한 부분이 많지만 그렇다고 암살로 추론하는 것은 너무 비약적이라 생각됩니다 예전에 이도형님께서 삼국유사의 내용을 들어 과식에 의한 비만과 스트레스로 급사했다는 추론이 그래도 사료적 근거를 예로 들었기에 개인적으로는 이런 주장보다는 훨씬 공감이 됩니다만

  • 09.12.11 13:24

    떡밥취급이라는 용어에 언짢으시다면 미안합니다..저 내용이 백제사랑님의 순수한 개인의견에서 작성되었다면 추론은 누구나 할 수있는 일이기에 제가 절대로 이러한 용어를 쓰질 않았겠지만 이미 흔히 떠도는 내용과 별반 다른 추론이 없기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 09.12.11 13:33

    ' 근거 ' 가 있다면 ' 논란 ' 거리가 될 성질은 아닙니다. 정설이 되죠.... 고대사가 논란과 난항의 딜레마에 빠지는 사항이 유독 많은 이유도 거기 있는 거 아닐까요? 이 역시 그 중 하나일 테고.... 암살로 추론하는 것이 비약이다라.... 그 시기 같은 일족끼리라도 권력이나 왕위 다툼 때문에 죽고 죽임이 많았다는 점을 보면 꼭 비약이라고만 볼 수 있을지 싶습니다. 이...일단 이세민의 등극에서부터 ㅋㅋ

  • 09.12.11 13:40

    이세민도 자신의 형을 죽이고 태자 자리와 아버지로 부터 강제적으로 빼앗다 시피한 부도덕내용을 뒤에 등극한 후에 막강한 권력으로 흔적도 없이 지워야 했는데 왜? 그런 내용이 전해지는요?..그렇다고 내가 내 형을 죽이고 아버지로 부터 왕위를 반강제적으로 빼았았노라하고 선전하고 떠벌리지도 않았을텐데 말입니다..아무래도 왕 정도가 피살되면 어떤식으로든 새어나오겠지요...^^*

  • 09.12.11 13:43

    역사가 남겨 놓는 것은 불특정입니다. 승자의 역사 인식과 방법론 역시 어떤 시기와 주체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구요 ' 어떤 식으로든 그 당대 주요 모든 사실이 다 남아야 정상이다 ' 라고 전제적으로 못을 박아 버리신다면 할말이 없군요

  • 09.12.11 13:44

    만일에 문무왕이 아버지를 피살할만큼의 왕위 자리가 그렇게 다급했을만한 그리고 다음 태자 자리가 위협을 받을만한 경쟁상대나 혹시 다른 인물에게 왕위를 넘길 낌새가 잇었다면 당연히 피살설에 어느 정도 무게가 실리겠지요..그렇지 않아도 되는데 그런 무리수를 김법민이 왜 강행해야만할 동기라도 납득이 되게 설명되어야 하는것 아닐까요?

  • 09.12.11 13:51

    그 당시엔 김인문이라는 경쟁자는 있었지요.... 물론 경쟁자로 인식하느냐 어떠냐의 여부도 해석에 따라 갈릴 수 있겠지만요 (그러고 보니 본문에도 자세히 나와 있군요) 부연이지만, 확실한 건 김춘추가 정권을 잡을때 그러하듯, 김법민 역시 혼자만으로 될 정국의 구축은 아니었다는 정도? 네요... ^^;

  • 09.12.11 13:54

    어떤 식으로든 그 당대 주요 모든 사실이 다 남아야 정상이다 ' 라고 주장을 한 것이 아닙니다.그렇다면 하필이면 이세민도 못한 일을 왜 문무왕만이 그런 흔적조차 없이 역사조작을 할 수가 있는지?..그것이 납득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 09.12.11 13:57

    납득하지 못할 건 뭔지요? 저야말로 더 이해가 안가네요... 이세민은 감추지 못했지만, 어디서 다른 누구는 치부를 감출 수도 있었던 고대사... 그 그림이 이상한가요? ' 술이부작 ' 의 법칙론을 말씀하시고 싶으신 건지? 더군다나 이세민 등극 때와는 달리 한반도 무대 자체가 전란인데요?

  • 09.12.11 13:57

    그런데 저본문에서 헛점이 보이질 않는가요?..김춘추 사망시점이전에 김인문이 태자자리를 위협할만한 어떠한 징후도 보이질 않고 또한 김인문의 행위가 형의 태자자리를 노린 어떠한 징후도 안보인다는 것입니다..삼국유사에서도 그런 징후조차 보일 않구요...^^*

  • 09.12.11 14:00

    부여장님 차라리 문무왕이 아버지를 피살하고 흔적도 없이 말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란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전란이기에 오히려 단속과 입막음이 더욱 불리할 수도 있다는 것은 왜 염두에 두질 않는지요?

  • 09.12.11 14:08

    소위 정치적 성향과 김인문의 실적이라는 측면에선 충분히 추론될 만한 점이라고 보는데요? 꼭 ' 태자 자리를 위협한 ' 흔적이 직접 나와야 갈등 여부를 가설화할 수 있는 건가요? 묻어버리는 (승자의) 입장에서라면, 혐의가 될 만한 부분은 깨끗이 묻어버리는 것이 낫지요... 직접 기록의 인용만을 의지하라면 고대사에서 담론과 흐름의 그림을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요? 그게 실증'주의'사학 일변도의 한계기도 하구요... 전란이기에 입단속과 입막음이 불리하다? 그건 대놓고 쿠데타를 일으킬 때나 성립되는 명제지요.. 암살이란 은밀한 처리, 쿠데타와 같은 의미를 지니지는 않을 겁니다.

  • 09.12.11 14:09

    중요한 것은 가능성과 담론 체계지, 완벽을 보장해 줄 실증기록에 대한 전적인 의지가 아닙니다. 고대사가 그런 걸로 잡혀 나갈 게재였으면 학자분들이 이렇게 난항을 겪고 계시지도 않지요..

  • 09.12.11 14:13

    부여장님 물론 님의 주장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다만 그럴만한 동기가 문제이지요..아버지인 왕을 살해할만한 동기라든지 주변 여건이 본문에서 주장하는 것 정도로는 너무 미약하다는 것이지요..그것도 아버지를 살해할만한 충분한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단순히 본문으로 제시된 근거로 아버지인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피살한다??..그리고 흔적도 없이 완전범죄를 문무왕만이 가능하다?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일까요?

  • 09.12.11 14:19

    그것은 소호금천씨님 스스로 동기가 잘 와닿지 않는다 의 발로이지, 설득력 없는 추론이다.. 라는 반론의 바탕은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권력의 속성이라는 것은 원래 그러한 동기 부여가 충분히 된다고 봐요. ' 아버지를 죽일 이유까지 되느냐 ' 라는 의문 자체가 그 당시 권력에 사활을 걸던 왕가가 아닌 후대의 강한 유교적 사상의 시각으로 바라보았을 때의 얘기구요... 주변 여건이라... 김법민의 태자로서의 입지가 확고했다고 보십니까 그럼? 오히려 그 여건은 어떤 게 있는지 궁금하군요 (리플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전 문무왕 혼자서 그것이 가능했으리라고는 말한 적 없습니다.)

  • 09.12.11 14:19

    그리고 만일에 김인문에게 그럴만한 야심이라도 잇었다면 나당전쟁을 어떻게 하든 오랬동안 이끌어 내어 형의 왕위를 찬탈할려고 노력했던 흔적이라도 보여야지요..그런 징후가 사료상에서도 남질 않았을뿐더러 문무왕이 뭐가 이뻐서 대각간으로 승진시키고 녹읍도 하사하고 왜 그렇게 해야되지요 김인문 직위가 올라가면 갈수록 왕위 자리가 더욱 위협을 받는데도 말입니다.

  • 09.12.11 14:22

    부여장님 이정도 선에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저는 제표현을 충분히 하였기 때문에 이제 우리 회원님들의 취향에 따라 부여장님의 주장과 제 주장을 비교하면서 참고하시면 될 것입니다..아무튼 좋은 토론에 감사드립니다..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 작성자 09.12.11 15:41

    소호님 말씀에도 일리가있습니다만, 한가지 간과하신점은 김인문이 김법민의 태자자리를 노렸다는 근거나 내용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네. 맞습니다. 사실상 김인문이 신라태자자리나 왕위를 노렸다는 근거는 찾아봐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인문이 김법민이 왕이 되고도 천수를 누릴수 있었던 것이죠. 왕위를 노렸다는 내용이 있었다면 응당, 김법민은 왕이 되자마자 이를 빌미로 그를 처형했을 것입니다. 그래야 하는게 마땅하고요.

  • 09.12.11 17:17

    음....재미있는 추론이군요...그렇습니다. 카오스도 김춘추의 죽음에 의문을 가져왔었는데,..비슷하게 보는 분이 또 있군요...그런데, 카오스는 김춘추가 암살당했더라도 아들에게 암살당한 것이 아니라 (그 배후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당나라에게 암살당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즉, 김춘추의 목적은 우선 백제를 멸망시키는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백제를 멸망시키자 마자 김춘추가 죽었고 그 이후 당나라가 백제를 독차지하려고 했으며, 심지어는 신라마저 속국으로 삼으려고 했었기 때문에 660년 백제가 멸망되자 백제를 누가 차지하느냐에 대해서 당과 김춘추가 대립하였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 09.12.11 18:17

    어떤 논지인지는 대충 이해했습니다만, 그럼 이때 김유신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실 그 전에 정치적 성향을 볼 때 김춘추보다 당 앞에서 훨씬 신라 자국적 입장에서 강경했던 이는 김유신인데... 당 입장에서 오히려 잠재적인 적이라면 김유신을 주목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 시기 김유신은 강등되었는지 어쨌는지 김춘추의 편제에서도, 어디에서도 쏙~빠져 있죠.. 오히려 김춘추는 당 앞에서 온건적이고 조심스러운 교섭의 자세로 일관하고 있었는데, 당의 암살만이라고 보기엔 이 점도 고려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 작성자 09.12.11 17:32

    카오스님의 추론도 상당히 흥미롭군요. 확실히, 김법민이 왕위에 즉위하고 나서 일어나는 수많은 반란사건에서도 당의 개입이 많았기 때문에.. 당의 개입여부를 생각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순 없겠죠, 고대사는 사료상 부족한 부분이 많아 아쉬움도 많지만, 그러한 부족함이 많기 때문에 상상할수 있는 영역도 많다는 점이 매력적이기도 하네요

  • 09.12.12 10:32

    당의 개입이라면 김유신과 문무왕을 피살시켜야지요 .왜 애궂은 무열왕을 피살시켜야 되는지?..이 내용은 더욱 황당하군요??

  • 09.12.12 01:31

    글쎄요..김법민이 김춘추를 시해했다는 건 가정에 불과합니다...사서 어느부분에서도 유추할수 없는 생각이기에 고민을 거듭하여 답글을 달지만....오히려 신빙성있는 부분은 김춘추의 행동으로 인하여 당나라의 의도대로 친당정권의 수립이 뒤로 미루어졌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즉.. 당나라의 의도는 백제의 완전한 멸망이 아니라 친당정권의 수립이었고 이를 간파한 김춘추는 비상식적인 행동을 돌추하여 백제 유민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당나라나 신라의 적개심을 분출하게 하므로써 친당정권이 아닌 백제의 완전한 멸망을 이끌어냈다고 봐야죠..김춘추의 죽음은 백제 유민들의 행동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 더 신빙성이 있죠

  • 09.12.12 09:10

    백제 유민들이라..... 그럼 그들이 반당 감정이 자극되어 이후에 신라와 함께 당에 맞서 싸운 흔적이 있나요? 제가 알기로는 오히려 반대로 알고 있는데......

  • 09.12.12 10:37

    그리운길님의 주장은 예전에 KBS 대하드라마 삼국기(김유신역=서인석, 계백역=유동근, 연개소문역=조경환, 김춘추역=김?창 기억이 안납니다)에 나왔던 내용으로 윤충장군에 의해서 피살되는 그런내용입니다...만일에 백제유민이 그랬다면 당시 정서나 환경으로 봐서 분개한 신라군에 의해 피살지역의 백성들이 도륙을 당했을수도 있지요..

  • 09.12.12 12:21

    글쎄요? 상상은 자유지만 이걸 사실로 주장한다는것은...좀...일단 역사서의 기술을 견강부회하는것 부터 좀 문제지요..김춘추가 죽었을 때 여러 전조를 기술해 놓은 거을 가지고 암살을 암시한다고 견강부회한것 등등은 좀 심하네요...김춘추가 누구에게인가 암살 당했다면 엄연히 사서에 기술 돼 있을 가능성이 90%이상아고 봅니다. 감추었다 어쩌구 하는것은 그냥 음모론적 시각에 의한 억측에 불과하지요...역사서에 암살 독살등 권력자의 죽음에 대한 에피소드가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고 잇다는 사실을 무시하는거죠. 저도 김춘축의 죽음에 대한 추정을 해본다면 자연사가 ㅌ습니다. 50세정도면 그시대 평균수명이상이죠...즉 살만큼

  • 09.12.12 12:24

    산거지요....그리고 김춘추에 대해서는 그풍채가 뛰어났다. 하루에 한말밥과 꿩여섯마리를 먹는 대식가라고 나와있자나요? 풍채가 뚸어났다는게 꽃미남이란 소리가 아니라 상당히 비만한 체구라는게 그당시로서는 옳은 해석아닐까요? 현대의학지식에 의하면 오래살수 없다는건 어쩌면 당연한 현상인지도...(그당시로서는 단명한것도 아니었죠...)

  • 09.12.12 12:27

    그리고 통일산라시대 쯤 되어서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왕이 되어서 아무 문제가 안된 일은 가능성 제로라고 봅니다.

  • 09.12.13 10:18

    이미 댓글 논란으로도 나왔던 겁니다만, ' 그 당시 역사에서 왠만하면 주요 사건은 다 기술되지 않았을 리 없다 ' 는 인식과 그렇지 않고 좀 더 차갑게 뜯어보는 음모론의 차이인 듯 합니다. 논증이니 논파라는 개념으로 가부를 따질 여지는 아닌 듯 싶군요~ ' 친족끼리 ' 라는 후대의 유교/성리학의 사관으로 보라면 분명 패륜 사건으로 인식되어 역사서에 크게 남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여길만 하나, 이때는 사정이 다르고 또한 상황도 다르니까요... 하루에 한말밥과 꿩 여섯마리를 먹는다는 표현을; 설마 실제 식성 그대로를 반영한 직접 표현이라고 생각하시지는 않겠지요? 그만큼 주변과 연회를 잘 베풀었음을 표현한 바라고 봅니다.

  • 작성자 09.12.12 13:47

    물론 제 주장이 극단적인 면이 없잖아 있음은 인정하는 바이고, 제 주장에 많은 댓글과 관심 가져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ooklee님 의견을 들어보니 어느정도 일리도 있다고 보아지고요.(김춘추가 대식가임은 저도 알고 있었지만 풍채가 뛰어났다를 비만한 체구였다라고 주장하신 부분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앞으로 이와 같은 고대사 관련되어서 많은 사료나 금석문이 발견되어 좀더 구체적인 진실이 밝혀졌으면 하네요....

  • 09.12.14 11:30

    음...1. 김춘추가 백제인 혹은 그의 아들에게 암살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분들이 충분히 언급했으므로 생략하고요....김춘추가 당나라에 의해서 암살되었을 가능성과 김유신의 입장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드립니다...아마, 여러분들께는 좀 '의아한 내용들(?)'일 것이므로 그저 참고로만 하시기 바랍니다...1) '김춘추와 이세민 사이의 밀약[나당이 연합하여 고,백을 멸망시킨 뒤 신라에 귀속시킨다]'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당나라의 음모가 있었을 가능성(양 당사자간에 직접 이루어진 '비밀약속'이므로 한쪽 당사자가 사라지거나 부인하면 그 약속은 힘을 잃게 됨)....

  • 09.12.14 11:31

    2. 2) '당나라의 밀약 위반에 대한 김춘추의 반발'이 예상외로 거칠었음(김유신이 당나라군과 충돌했던 것이 그 하나의 사례임).... 3) 당나라의 동아시아 전략의 변화(당초는 신라 등과 함께 동아시아를 분할하는 전략이었으나 나중에는 동아시아의 유일한 맹주가 되는 전략으로 수정됨--->이는 아예 처음부터 당나라가 신라를 속인 것으로도 볼 수 있음)...4) 김춘추 암살공작의 치밀함(당시 불안한 국제정세와 함께 얽혀서 김춘추 암살의 배후가 밝혀지지 않았음-->이는 당시 세력구도상 당나라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문무왕과 김유신은 어쩔 수 없이 김춘추의 사망을 기정사실화하여 받아들임)...

  • 09.12.14 11:36

    3. 5)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과 신라의 전쟁과 당나라의 양보(무려 70여년간 피말리는 전쟁을 한 뒤 결국 양자간의 합의가 이루어진 점--->만일 김춘추가 암살되었다면 {비록 결과는 조금 다르게 나타났지만,} 김춘추의 죽음이 당나라에게 최대의 이익이 되었을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임]...6) 김유신의 입장과 당나라의 시각[김유신은 어디까지나 왕이 아니고 신하이며, 가야의 후손으로서 충분한 지위를 얻었으므로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었고 당나라에서도 이 점을 간파하고 있었음. 즉, 당나라 입장에서 김유신을 자신들의 전략상 최대걸림돌로 보지 않았음(정태수의 머슴론?)--> 이는 흑치상지의 예에서 볼 수 있음]...이상입니다.

  • 09.12.14 13:28

    김춘추와 이세민의 밀약이라 그게 가능할까요?..청병하러 사신단을 꾸려 갔었는데 어떤식으로든 가부간의 답변은 받아 왔다고 보고 진덕여왕에게 보고를 햇었겠지요 특히 김유신에게는 더욱 논의될 문제이구요..이런 맥락에서는 이세민과 김춘추의 둘만의 밀약은 희박할 수 밖에 없다고 보입니다. 또한 김춘추의 외부세력에 대한 암살이라면 특히 당나라라고 추정이 되면 나당전쟁시에 이와 같은 좋은 명분을 신라가 절대로 활용하지 않았을리가 없겠지요..아마도 친당파의 대거 숙청시 이문제도 거론 되어 무슨 낌새라도 사료이든 구전이든 전해져 내려오겠지요

  • 09.12.14 13:38

    그리고 당나라가 김유신을 무시하지 못했다는 근거는 제휴국 왕에 해당하는 1급 직급의 평양군 개국공이라는 작위와 식읍 그리고 이전에는 백제땅을 식읍으로 제의하는 등 또한 소정방과 당나라군대가 평양에서 김유신에게 진 빚이 만만치 않을뿐더러 김유신이 당과의 결전조차 피하지 않았을 정도로 이미 인식이 된 위험 인물인데 그를 당 조정에서 무시했다는 가정은 사료 곳곳의 정황을 보아서도 현실성이 없어 보입니다..전략상 가장 큰 걸림돌은 상대등이자 군권을 쥐다시피한 바로 김유신인데 사료의 내용을 너무 간과한 가설로 보입니다

  • 09.12.14 18:04

    당나라가 김유신을 무시했다는 것이 아니라...'김유신은 어디까지나 신하'라는 것을 당나라가 인식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즉, '정태수의 머슴론(?)'과 같은 맥락인 것이지요...그리고 '김춘추와 이세민의 밀약(당연히 '의아한 내용'일 것입니다만,)'은 훗날 역사서가 기록될 싯점에서는 모두 공개되어 밀약도 아닌 것으로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분명히 '밀약으로 취급'되었다고 보입니다...그 '밀약'의 낌새를 추측할 수 있는 것이 1) 김춘추가 당나라 국학에 수업하고..2)이세민이 지어 준 晉史와 어제시 등등일 것입니다만, 이 문제는 일단 이정도로 하겠습니다..밀약이든 공개약속이든 나당연합을 이루는 결정적인 협상은 있었던 것입니다

  • 09.12.25 08:57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지 않습니다. ㅎㅎ '설마 아들이 아버지를 어찌 하겠어'라는 고정관념을 접어놓고 보면, 김법민의 왕위계승과정이 대단히 수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요. 당시의 어수선한 정황에서는 법민이 굳이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얼마든지 '손을 빌려 줄' 자들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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