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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태자(麻衣太子)는 신라 제56대 왕인 경순왕과 죽방왕후 박씨의 맏아들이며, 휘(諱)는 김일(金鎰)이다. 마의태자의 이칭은 개골산에서 마(麻)로 옷을 입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강원도 인제에서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신라소국을 세우고 김부(金富)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김부(金富)라는 이름은 개명이 아닌 뜻이 통하는 한자을 취아여 만든 이름으로 당시 향찰 표기법에 의하면 같은 이름이다. 금부대왕(김부대왕)이란 명칭은 김일(金鎰)의 또다른 이름인 김부(金富)에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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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5년(경순왕 9)에 신라는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의 세력에 버틸 길이 없자 군신회의를 열고 논의하여 고려에 항복하기로 하였지만, 마의태자는 “신라 황조 천년을 하루 아침에 버릴 수 없다.”라고 반대하였으나, 결국 고려에 군주의 문서가 전달되었다. 태자는 통곡하며 개골산에 들어가 베옷을 입고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일설에 금강산의 신선이 되었다라고 전해지며, 이로 인해 그의 문조(門祖)는 仙朝라 칭해진다).
마의태자는 무리를 이끌고 금성을 떠났는데, 마의태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일행도 많았다고 한다.[1]
삼국유사에 의하면 마의태자의 할아버지인 효종랑(孝宗郞)은 1000명이나 되는 화랑도(花郞徒)의 우두머리였다고 한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공, 경주를 점령하여 경애왕(景哀王)을 폐위하고 조카뻘인 경순왕을 새 임금으로 옹립한 것도 경순왕이 바로 효종랑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의태자는 그런 훌륭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부왕 경순왕이 고려와 합의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결연히 개골산으로 떠났고, 역시 그런 태자를 따르는 신라의 충신과 의사는 셀 수 없이 많았을 것이다.[1]
마의태자 일행은 강원도 인제 설악산 기슭에 도착한다.[1] 그러나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는 설도 있다.
그의 능은 금강산 비로봉 바로 아래에 있다. 바로 옆에는 그가 타고 다니던 용마가 돌로 변했다는 용마석도 있다. 그 비석에는 “新羅麻衣太子陵”(신라마의태자릉)이라 새겨져 있다. '태자릉'은 둘레가 약 10미터, 높이 1.5미터이다.
강원도 인제 김부리에 마의태자가 살았다. 인제에는 마의태자 유적지비가 있어 이곳이 마의태자와 깊은 관련이 있는 유적지임을 알리고 있다. 실제 마을엔 마의태자에 대한 전설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마의태자가 옥새를 숨겼다는 '옥새바위',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수거너머', 맹장군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맹개골', 군량미를 모아 저장하던 곳이라고 붙여진 '군량리' 등이 그것이다. 특히 '다무리'라는 지명은 고구려말로 국권 회복, 광복이라는 뜻으로 마의태자가 살았다는 전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김부(金富)는 마의태자 김일(金鎰)의 또다른 이름이다. 지난 '87년 인제 갑둔리에서는 고려 초기에 주조된 것으로 보이는 5층 석탑이 발견되었다. 석탑에 새겨진 명문을 판독해 보니 "김부(金富)라는 사람의 수명이 오래되고 또 집안이 오래도록 잘 되기를 기원하며 이 탑을 만들었다"고 전하고 있었다. 명문 속의 김부(金富)는 누구일까? 시기적으로 봐서도 마의태자와 무관하지 않은 김부(金富)는 바로 마의태자 김일(金鎰)의 또 다른 이름임이 이번 조사를 통해서 밝혀졌다. 부(富)와 일(鎰)은 글자로만 본다면 무관해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표기가 향찰이었기 때문에 부와 일을 같이 썼던 것이다. 이러한 예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도 흔히 보이고 있었다.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름을 숨기고자할 때 뜻으로 이름을 표기했던 것이다.
마의태자가 선택한 마지막 행로엔 신라 부흥의 의지가 담겨 있다. 경주에서 인제 가는 길목엔 마의태자에 대한 전설들이 서려 있는 곳이 많다. 계립령 부근과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를 비롯해 인제로 들어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홍천에까지 전설은 계속되고 있다. 마의태자는 쉬운 동해안 길을 두고 내륙의 산길로 이어지는 행로를 택하고 있었다. 신라의 제2의 도시들인 충주와 원주를 지나면서 마의태자는 고려에 저항하는 신라세력이 머물기 좋을 뿐만 아니라, 한계산 정상에 산성이 쌓여 있어 방어기지로 활용할 수 있었던 인제를 택하여 신라 재건을 꿈꾼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마의태자는 경순왕의 맏아들 김일을 지칭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김일과 함께 신라 국권 회복 운동을 하였던 형제들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김일은 김교라는 아들을 하나 두었고 금강산에 입산하였고 그 후에는 고증할 기록이 없다.
삼국유사에는 경순왕의 2남 김굉이 마의태자의 막내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경순왕의 형제들이 마의태자의 아들로 인식되거나, 혹은 동일시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마의태자 김일과 함께 신라국권운동을 도모하던 형제들은 경순왕과 석씨, 박씨 소생의 아들들로, 총 8명이 있었다. 마의태자의 개념은 경순왕의 맏아들 김일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신라 국권 회복을 하던 모든 신리 왕자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할수 있다.
종합하면 마의태자의 후손이라는 개념은 세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 김교의 후손, 둘째 마의태자와 함께 신라 국권 회복 운동을 하였던 신라 왕자들의 후손, 셋째는 삼국유사에 마의태자 아들로 기록된 김굉의 후손등이다. 그러나 기록이 실전되었기 때문에 마의태자을 시조로 하는 모든 성본은 세보로써 명확하게 마의태자 김일, 또는 그의 형제들과의 관련성을 고증할수 없다.
부안 김씨 족보에는 시조을 마의태자라고 하였다. 가능성은 두가지이다. 첫째 통천 김씨 세보에는 세거지로 부여와 부안, 개성을 기록하고 있다. 부안 김씨의 중시조 김구는 고려 중기에 공을 세워 개성에 오랫동안 거주하였다. 통천 김씨의 세거지명과 부안 김씨의 세보을 검토해보면 통천군 김교의 후손이 부안, 부여에 세거지을 만들었고 후에 부안 김씨의 시조 김구가 개성에 거주했다고 추정되지만, 고증할 문헌이 없다.
다른 가능성은 부안 김씨의 선조는 경순왕 2남 김굉의 후손이었을 가능성이다. 고려 시대 편찬된 삼국유사에는 김굉을 마의태자의 막내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김굉이 마의태자의 아들인지 경순왕의 2남인지는 결론은 나지 않았다. 단지 조선 시대에 몇몇 기록에 경순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하였기 때문에, 현재 그 설을 따르고 있다. 김굉의 후손들은 주로 전북, 전남 지역에 세거지을 두었기 때문에 가능성이 많다. 부안 근처에 있는 김천 김씨는 부안 김씨와 시조가 같다고 하였다. 이것은 부안 김씨가 경순왕의 후예이기는 하지만 인접한 김제, 전주 김씨와는 중시조가 다르다는것을 나타내는 기록으로 추정되지만, 이 역시 고증할수는 없다.
삼성연원보에는 부안 김씨의 선조는 경순왕 4남 김은열의 15대손이라고 하였다. 조선 시대 만들어진 조선씨족통보, 삼성연원보의 기록의 일부는 실제 사실과 다른 경우도 소수 있기 때문에, 이 기록을 근거로 부안 김씨가 마의태자의 후손이 아니라는 결론을 낼수 없다. 다만 경주 김씨와 마찬 가지로 경순왕의 후손이지만 중시조가 다른 성본이 부안에 함께 세거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부안에 인접한 김제, 전주 김씨는 김은열의 후손을 시조로 하고 있다.
경주 김씨 대장군공파, 계림공파, 청풍 김씨등은 마의태자의 후손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마의태자의 아들 중에 누구의 후손인지 명확하지 않고, 막연히 마의태자라고 기록 하였다. 이것은 부안 김씨의 기록보다 크게 신뢰할수 있는 기록이 아니다. 마의태자는 공식적으로 통천군 김교 이외에는 아들을 남기지 않았다. 만약에 경주 김씨 계림공파, 대장군공파, 청풍 김씨등이 김교의 후손이라면 통천 김씨에서 분적했다는 기록이 있어야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경주 김씨 대장군공파가 김교의 후손이 아니라면 고려 초기에 마의태자와 함께 항려 운동을 했던 신라 왕자의 후손이라고 추정해 볼수 있다. 당시에 항려 운동을 하던 신라 왕자들은 마의태자 김일의 형제들이었고, 마의태자, 또는 마의태자 아들로 인식됐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는데, 고증할 문헌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실제 사실관계는 알수없다.
만약에 청풍 김씨, 경주 김씨 계림공파, 대장군공파가 통천군 김교의 후손도 아니고, 마의태자로 불린 김일의 형제들의 후손도 아니라면, 마의태자의 금강산 입산 이후 이후에 낳은 아들의 후손이라고 추정해 볼수도 있지만, 가능성은 희박하다. 비공식 기록에는 마의태자 김일은 금강산 입산 이후에는 함경도 영흥을 거쳐 만주로 건너 갔다고 한다. 후손을 남겼더라도 본관은 북한 지역에 존재할 가능성이 많기때문에, 경주에 세거했을 가능성은 적다.
마의태자 후손이라고 기록된 성본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통천 김씨을 제외하면 세보로서 고증하기 어렵다.
일설에는금 태조 아골타의 선조인 김준(金俊) 또는 김행(金幸)도 그의 아들이라고 전한다.[2]
순암 안정복에 의하면 김준의 형제가 삼형제였으며,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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