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김유신의 첫전투였던 낭비성 싸움에서 그의 직함은 무엇일까?
"건복 46년 기축(진평왕 51년: 629) 가을 8월에 왕이 이찬(伊湌) 임말리(任末里), 파진찬 용춘(龍春)·백룡(白龍), 소판(蘇判) 대인(大因)·서현(舒玄)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고구려인이 군사를 출동시켜 이를 맞아 치니, 우리편이 불리하여 죽은 자가 많고, 뭇 사람들의 마음이 꺾이어 다시 싸울 마음이 없었다. 유신이 그때 중당 당주(中幢幢主) 였었는데, 아버지 앞에 나아가 투구를 벗고 고하였다.
중당당주를 풀어 해석해보면 中幢의 부대장이라는 뜻인대 삼국사기 다른 역사기록 어느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본서 권40 잡지 직관지 하에 실려 있는 仲幢은 문무왕 11년(671)에 설치되었다고 하였으므로 671년에서야 생겨난 중당이라는 관직을 김유신이 갖고 있었다는 소리인가?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51년(629)조의 기록에는 김유신의 이 당시 직함을 ‘副將軍’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라본기 기록이 맞는걸까? 40여년 후에나 설치된 중당의 당주로 있었다는 김유신 열전을 믿어야 하는게 옳을까?
2. 648년 소정방의 20만 당나라군의 백제 정벌. 乃詔許 勑將軍蘇定方 以師二十萬 徂征百濟 時庾信爲押梁州軍主 若無意於軍事 .. 중략... 소호금천씨 의견대로 직역이 아니라 의역하자면, 신라본기에 나와있는 내용처럼 청병을 허락한거라고 할수도 있겠으나, 전혀 엉뚱하게 648년에 소정방에게 20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는 구체적인 문구가 문제가 되는것입니다. 제가 사료를 오독한게 아니라, 왜 하필이면 소정방의 20만군대의 기사가 648년에 뜬금없이 등장하느냐는 말이죠. 이병도의 주장대로 그러한 문구는 660년에 나와야 함에 옳죠. 이병도의 주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겠습니다.
이 때(648) 唐 太宗은 金春秋의 請에 겉으로 허락하였을 뿐이고, 蘇定方에게 출동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정작 蘇定方에게 출동령을 내린 것은 다음 高宗 顯慶 5년(660)이었다(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21쪽). 본서 권5 신라본기 진덕왕 2년(648)에서는 군사출동의 약속을 받았다고 쓰여 있을 뿐이다. 따라서 『소정방에게 명하여 군대 20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는 설명은 잘못된 것이다. -이병도-
3. 당나라의 신라침공 실패계획. 김유신 열전에 660년 백제왕과 신료 93인, 병사 1만 명을 포로로 잡아 9월 3일 사비로부터 배를 타고 돌아가고 낭장 유인원(劉仁願) 등을 남겨 지키도록 하였다. 정방이 포로를 황제에게 바치니 천자가 위로하면서 “어찌 내친 김에 신라를 치지 않았는가?” 하고 물었다. 정방이 말하기를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들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어 아랫 사람이 윗 사람을 부형처럼 섬기니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 141) “신라는 …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唐書에는 보이지 않는다. 《舊唐書》 권3 高宗本紀 上에 ‘責而宥之’했다고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윗 표현은 통일 이후의 윤색으로, 바로 당시의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李昊榮, 〈新羅 三國統一에 관한 再檢討〉, 《史學志》 15, 1981, 28쪽). 당나라 역사서 어디에서도 660년 백제정벌후,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신라를 치라고 명령한 기록내지 시도를 한 흔적 자체가 없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는대, 왜 하필 김유신열전에만 이런 기록이 남아있을까? 그렇다면 신당서,구당서,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모든 기록을 제쳐두고 김유신 열전의 기록이 더 신빙성 있는 기록일까? 김유신을 찬양하기 위해 그의 후손이 당나라도 그를 겁냈다고 왜곡한 내용일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단순히 당서와 신라본기 내용모두를 무시하고 김유신 열전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까?
4.신라군이 남천주에 주둔하였다는 661년 기록? 문무왕 원년] 6월에 당나라 고종 황제가 장군 소정방 등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려 할 때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고 있던 김인문이 명을 받고 돌아와 출병일을 알리고 겸하여 출병하여 함께 치기를 권유하였다. 이에 문무대왕은 유신, 인문, 문훈(文訓)등을 인솔하여 많은 병사를 출동시켜 고구려로 향하였다. 행군이 남천주(南川州)에 이르렀을 때 주둔하고 있던 유인원이 거느린 군사를 사비로부터 배를 태워 혜포(鞋浦)에 이르러 하륙시켜 또한 남천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원년(661) 8월조에서는 대왕이 諸將을 영솔하고 始飴谷停에 이르러 머물렀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옳을 듯하다. 왜냐하면 다음 문장에 『有司의 급보에 의하면 前路에 백제군이 甕山城(현재의 대전광역시 大德區 鷄足山城)에 웅거하여 있다』고 하였으므로, 왕과 유신의 군대가 아직 南川州에 이르지 못한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유인원의 군대도 남천주에 주둔하였다는 표현도 그 사실성이 의심스럽다. 始飴谷停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유인원도 이 때 南川停에 온 것이 아니라 始飴谷停에 와서 신라군과 같이 행군하였던 것 같다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29쪽). 이는 《金庾信行錄》의 찬자가 두찬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군이 옹산성을 지나간 점으로 보아 웅진에서 유인원 군대와 만나기로 약속하였던 듯 하다.
과연 이러고도 일본서기보다 김유신 열전이 사료적 신뢰성이 높다고 단정지을수 있을까? 본기와 열전의 기록이 이렇게 큰차이를 두고있다. 그럼에도 김유신 열전의 내용이 무조건 옳다고만 따질것인가?
김유신의 행록을 읽다보면 찬양하고 높이기 위해 쓴 여러 미사어구와 그를 신격화 하기 위한 신의계시나, 자신이 죽을것을 알고 하늘에서 음병들이 내려와 울었다는 허무맹랭한 내용도 많으며, (이건 건국시조보다도 더 드라마틱하고 뛰어나게 그려져 있다.). 더군다나 신라본기나 당나라역사서에서도 전혀 없는 시기도 전혀 다른 엉뚱한 내용들이 김유신 열전에 수록되어 있다면, 전공정도야 충분히 과장하고 왜곡할 가능성이 매우 클 개연성이 많다. 김부식 조차도 "유신과 같은 이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칭송하여 지금(고려)까지 끊어지지 않으니, 사대부가 알아줌은 당연하지만 꼴베고 나무하는 어린아이까지도 능히 알고 있으니 그 사람됨이 반드시 다른 사람과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평하였다. 또한 김유신을 을지문덕이나 장보고 같은 위인들보다도 더 뛰어나고 훌륭하다고 찬양하며 사론까지 달았다. 김유신의 행록 열전이 김부식에 의하여 오히려 축소되었고 삭감되었다는 주장역시 신빙성이 매우 떨어진다. 또한 이렇게 김유신을 찬양한 김부식 조차도 김유신의 행록이 거짓되고 꾸며진게 많다고 인정하였다. 이렇게 과장되고 오류점이 많은 김유신 열전에서 조차도 대야성을 김유신이 함락하였다는 문구는 전혀 없다. (대야성에서 끝끝내 싸우다 전사한 13번째 관직의 하급관리이자, 가야출신의 인물인 죽죽에게 따로 열전까지 지어서 알린 신라인들이다. 그런대 대야성을 함락한 영광스러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다는것이 말이될까?) 그럼에도 단순히 자신의 개인적 의견만을 내세워 대야성의 수비병력을 물리쳤다는 문구 하나만으로 대야성이 함락되었다고 주장하는것이 과연 옳을까?
누누히 강조하지만, 왜 김유신의 후손들은, 김유신을 신격화 시키며 여러가지 미사어구를 동원해 찬양하면서도 정말 김유신이 대야성을 함락시켰으면서 상징적으로 백제와 고구려 멸망 다음으로 큰 전공이었을 진대., 그러한 내용을 행록에 남겨 가문의 영광으로 후세에 널리 알리지 않았던 것일까???
결론: 물론 그렇다고 하여, 김유신 열전의 모든 내용이 다 거짓이고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것은 아니다. 옥문곡 전투처럼, 본기의 내용에 대해 더 자세히 묘사하고 부연설명한 부분도 많고 이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성을 지니는 바이다. 하지만, 본기의 내용과 전혀 상반되거나 없는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기보단, 한번정도는 그 진위여부를 고려해봄직이 옳다. |
첫댓글 우선 백제사랑님께서 이처럼 본문으로 작성해 주니 댓글에 비해 훨씬 자세하고 여러 회원님들도 이해하는데 여러모로 도움이 되겠지요...우선 님의 성의있는 반론에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우선 김유신의 첫전투였던 낭비성 싸움에서 그의 직함은 무엇일까?..솔직히 아무도 모릅니다..中幢幢主는 열전에 비로소 나와 있는데 幢이라는 부대단위 를 말하고 당주란 단위部隊長을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이견이 없을듯 합니다..中幢이라면 그냥 용춘부대에 소속된 어느 당의 소속인지?..아버지 서현부대에 소속된 중군의 어느 幢을 책임진 당주인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님의 임의대로 오류니 뭐니?하면서 단정을 지울만큼 진평왕대의 당시 정확한 부대명에 대한 자료나 사료를 가지고 있는지요?..오늘날 청룡부대, 백골대대등등..분명히 존재하는 부대명이지요..하지만 정식 군편제 직관에 청룡부대, 백골대대라는 것이 있습니까..예를 들어 OO사단, OO연대, OO대대, 아니면 6171부대등 이러한 것은 정식 부대명이지요..당시 진평왕 시대에 중당이 있었는데 뒤에 다른 명칭으로 바뀌었는지? 아니면 그냥 당시 출정시에 임시적으로 어느 한 부대를 지휘한 당주를 표현 한 것인지? 님이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임의대로 열전의 치명적인 오류니 하면서 단정하는지요.
멋대로라는 표현은 상대방에 따라 기분 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 좀 더 부드러운 표현으로 임의로라는 표현으로 해주시는 것이 어떨까요? ^^;
아~네 그렇군요..수정했습니다..제목에서 뭐가 치명적인 오류인지? 모르지만 어차피 열전이나 본기 역시 오류가 많지요..그런데 뭐가 치명적인지?..그렇게 치명적이라는 단정적인 주장을 할 정도로 당시의 정확한 사건 내용에 대한 증거적인 사료나 유적이라도 발견하고서 김유신 열전에 대한 치명적인 오류를 찾아낸 것인지?..그렇다면 참으로 역사적인 쾌거이겠지요...
당시의 정확한 사건내용에 대한 증거적인 사료나 유적도 없이 대야성 함락을 단정짓는 것 역시 문제가 많다고 봅니다만??...
그리고 본문의 2번 내용은 열전에 정벌케 하였다라는 약속을 받은 것이지요..이병도 주장 역시 틀린 것은 아니군요..당시 당연히 출동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지요, 열전에서 648년에 "소정방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출동했다"라는 치명적인 오류 기사가 있는지요?..저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런 내용을 보질 못했습니다만..그러한 조서야 당태종이 김춘추에게 청병약속을 하면서 내릴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실제 출동하기까지는 규모나 징집등 여러 보급품 징발등 여러가지 복잡한 사안에 조정에서도 여러 논란이 있을 수도 있고 차일피일 미루어지다가 당태종의 사망으로 계획이 무산될 수도 있는 문제이지요.
댓글이 3개가 넘어 나머지 역시 조목조목 반론을 해야 하지만 우선 님의 의견을 듣고 다시금 재반론을 해드리지요.
1. 본문에서도 밝혔듯이 중당이라는 부대가 단순한 부대명이 아니라, 仲幢은 671년에 설치되었다는 본기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기자 부대가 있는대 또 이기자 부대를 신설한다는건 말이 안된다는 것이죠. 더군다나 본기에서는 중당당주가 아니라 副將軍이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다고 하니 서로 상반된다는 점이죠.
2. 보급품 징발이나 징집계획을 하다 연기되고 뭐고 간에 648년 소정방의 20만 출동령은 당서에서도 그러한 내용이 없다는게 문제입니다. 김유신 열전에는 나와있고 당나라 역사서엔 없다는게 말이 될까요? 결국 660년 기록이 648년에 적어놓았다는 연도상의 오류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죠. 이병도 역시 이렇게 말한것이고요
예전에 6.25당시 백호부대가 있었다가 해체되어 없어졌는데 수십년 이후에 다른 부대에서 그런 명칭을 반드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이라도 있는지요?..당시 신라시대에 그런 원칙이 있었답니까?..그러면 본기의 부장군은 무슨 부장군이지요?..당시 부대는 幢이었는데..부장군이라는 직관이라도 있는지요?..삼국사기 본기가 무조건 옳고? 열전이 틀리다?..무슨 근거로요?.
2번댓글 반론입니다...당서에는 이세민이 내린 조서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했다라는 증거라도 있는지요?..소정방의 20만 출동령은 열전에도 없는 내용입니다..조서를 내려 치게 했다라는 내용과 출동령 이것이 똑 같은 표현으로 보시는지요??..국문학자들에게 한번 문의후 출동령표현을 사용해야 할것입니다..열전에는 출동령이라는 기록이 없습니다..하물며 일연스님도 이렇게 해석하여 삼국유사에 이런 기록을 남겼지요..<삼국사기에 의하면 진덕왕 2년의 일로서 이 때 당제는 출사를 약속하였다.>>..이게 바로 올바른 열전내용의 이해와 해석이지요
제가 치명적 오류라 지적한 것은 이렇게, 당나라 역사서에서도 전혀 없는 통일이후 윤색된 부분이라고 주장하는 대목이나, 잘못된 연도 기록, 전혀 엉뚱한 직함이나 전투양상등을 지적한것입니다. 대충 찾아도 이정도인대, 본기에 나와있지 않은 전투양상도 이런식으로 잘못된 허위이거나 왜곡,오류되어 기록될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죠.
잠깐만요 제가 한 질문에 대해 어느 것 하나도 증거의 사료를 제시하는게 없군요..같은 사건에서도 본기와 열전내용이 상충될때 어느쪽이 반드시 옳고, 틀리다 라고 누가 알지요?..오백년이 넘는 훨씬 이전의 일을 열전내용이 옳은지? 본기내용이 옳은지?...그리고 당서니 일본서기니 하는 異國역사서가 자신의 국가내용에 소상하게 기록할뿐, 남의 나라 사건을 뭐하러 반드시 기록해야할 의무라도 있는지요?..편찬자 붓놀림에 엿장수 마음대로 일뿐이지요...그것을 가려가면서 교차 검증해야지 그쪽에 없는 내용을 우리가 신경쓸 이유도 없지요,..그리고 개연성이 높은 것과 치명적 오류라고 단정하는 것은 절대로 동일할 수가 없습니다.
소호금천씨님이 하신 말씀중에 자신의 국가내용에 소상하게 기록할분, 남의 나라 사건을 뭐하러 반드시 기록해야 할 의무가 있느냐고 하였는대, 그렇게 자신의 국가내용에 소상하게 기록한 신라가 대야성을 빼았긴 치욕스런 사건과 남의 나라인 백제가 대야성 함락이후 조치에 대해선 매우 소상히 기록해 놓았으면서 신라가 대야성을 되찾았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냐는 것에 대해선 끝끝내 말이 없네요?
아니, 옥문곡 전투 이후 승리의 여세를 몰아서 악성과 진례성을 함락한 사건을 크게 적어놓고 자랑해놓고선 전쟁없이 양국간에 협상을 통하여 김품석과 고타소랑의 유골반환 사건까지도 자세히 적어서 김유신의 전공을 찬양한 후손이 대야성 함락사건은 전쟁이 없었으니 적지 않았다고요??? 그게 더더욱 수상하다고 여기시지 않으십니까?
더군다나,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대야성 함락사건이 너무 미화되었다고 그 본질마저 삭제했다고 보시는 근거가 대체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최소한 미화되었다 해도 그들은 김유신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고 호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으니, 대야성을 되찾았다는 본질 자체는 기록했음이 옳습니다.
네, 어디까지나 김유신님의 개인적 추측이라고 하셨으니 더는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대야성에 있었던 검일과 모척을 백제가 망하자 마자 사로잡아 산채로 능지처참하여 처단한 김춘추가, 대야성을 함락했었다면 무언가 후속적인 조치가 분명 이루어졌다고 보는게 옳습니다. 그러한 기록자체가 없으며 김유신에 대하여 그 당시 고려인들이 얼마나 호감을 가졌는지는 김부식의 사론을 읽어보시면 분명 알수있는 대목이고요.
자신의 국가내용에 소상하게 기록할뿐, 남의 나라 사건을 뭐하러 반드시 기록해야 할 의무가 있느냐고 하였는데 그것은 전반적인 국가별 사료를 설명한 것인데 참으로 이상한 반론을 하고 있군요, 원래는 대야성을 되찾은 기록이 있었는데 삼국사기 편찬시 구삼국사등 구사료들의 자료에서 좀이 쓸어 낙장 파손 탈락등으로 망실되어 그 자료를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볼수가 없었음은 왜 염두에 두지 않지요?..신라가 기록에 남겼는지?.후대인들이 누락시켰는지?.기록부분이 망실되었는지? 그것을 님께서 어떻게 아시고 신통하게도 "<신라가 대야성을 되찾았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냐는 것에 대해선 끝끝내 말이 없네요?>"라고 하는지 신기하군요
대야성을 되찾았다면 이는 백제측 기록과 신라측 기록, 김유신의 행록 모두에서 기록되었을텐대, 세군대 자료에서 모두 좀이 쓸어 파손되었기에 기록이 없었다고요?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억지라고 생각됩니다만?? 정말 파손되었다면 최소한 설화나 전설등으로라도 구전되어야 함이 응당 옳지요, 대야성이 백제에게 빼앗긴 사건에 대해선 설화나 야사가 지금까지도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답니다. 또한 후대인들이 대야성을 되찾았다는 기록을 고의로 삭제할 이유가 도대체 뭐죠? 그래서 그들이 얻는 정치적 명분이나 실리가 무언지도 궁금하군요.
대야성을 되찾았다면 이는 백제측 기록과 신라측 기록, 김유신의 행록 모두에서 기록되었을텐대, 세군대 자료에서 모두 좀이 쓸어 파손되었기에 기록이 없었다고요?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억지라고 생각됩니다만?? ..제가 그렇게 단정을 했었나요?..님은 우선에 상대의 댓글을 임의로 조작하여 마음대로 결론지어 반론을 하시는군요..그렇다면 반드시 대야성을 되찾았다는 내용을 반드시 삼국사기 본기에 입전시켜야 된다는 법칙에 대해 설명해 주시렵니까?..사료의 내용에 따라 그 정황을 가지고 660년 이전에 신라가 이미 대야성을 회복 하였다는 것을 이미 본문으로 소상하게 주장하였음에도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계속 맴도는것 같군요.
삼국사기 : 잡지 - 신라 직관
중당(仲幢)[주석2948]은 문무왕 11년(671)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금(衿)의 색깔은 백색이었다.
[원문]
仲幢 文武王十一年始置 衿色白
처음 설치되었다라는 문구는 무엇인지요? 같은 이름이 과거에 존재했다면 다시 부활하였다라고 써야 함이 옳지 않을까요?
'처음 설치하였다' 라고 기록되었음에도 그 때 처음 설치된 게 아닌 것으로 보는 사례는 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묘제의 경우, 삼국사기 제사지에 至第三十六代惠恭王 始定五廟 (혜공왕대에 이르러 오묘를 처음 설치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긴 하나 많은 학자들은 오묘제가 최소한 신문왕 대에는 이미 설치되어 있었다고 봅니다. 이유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신문왕 7년의 기록에 그 흔적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잡지의 기록과 열전의 기록이 충돌한다 해도 '당연히 열전을 버리고 잡지를 취해야' 할 이유는 없겠지요. 차분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열전에 과장이 있다는 것과 열전 내용이 신뢰할 수 없을 정도로 엉터리라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소호금천씨님의 표현 중에서 일부가 다른 회원분들이 보기에 다소 좋지 않아 보일수도 있지 않을까란 염려가 듭니다. 토론에 진지하게 임하시는 것은 좋지만, 일정 부분은 주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운영자님들의 고충을 잘알겠습니다..어쩌면 어느쪽에서 상대의 반론내용에 대한 취지를 전혀 이해 못하고 반론이 계속 엇박자로 진행되어 본인 주장을 강변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나 봅니다..사실은 개인적 나름대로의 주장이라면야 그냥 무시하고 넘어 갈 문제이지만 남의 주장을 임의로 고쳐서 단정적인 결론하에 반론을 당하니 아무래도 강변쪽으로 흐르나 봅니다...앞으로는 이점에 대해 어제저녁 대화요청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명치호태왕님의 조언에 따라 최대한 따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음..백제사랑님이 지적해 주신 내용들은..'김유신 열전의 치명적 오류'가 아니라 '삼국사기의 치명적 오류'일 것입니다...즉, 물론 김유신열전에 과장된 부분이 있을 수가 있지만, 구체적인 事實들은 과장이 아니라 史實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즉, 김유신열전과 본기 또는 다른 사서기록들과의 차이점은 비단 이곳 뿐만아니라 아주 많은 곳에서 발견되는데,..이는 '김유신열전에서의 오류'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서들의 태생적인 오류' 때문에 발생된 것입니다...즉, 쉽게 말해서 '역사왜곡과정에서 발생된 사서 기록들간의 不具合'인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불구합'들이 있음으로해서 왜곡사 속에서 '實史'를 복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치명적이라는 용어만 빼면 매우 공감합니다..삼국사기 내용중 오류는 열전에서 보다도 오히려 본기에서 더욱 심하게 나타나지요..물론 카오스님의 댓글에 대한 반론은 아닙니다만....비록 본기내용중 교차검증에서 확실하게 오류로 보이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삼국사기 본기자체를 치명적으로 볼 수는 없겠지요...^^*
'치명적'이라는 표현은 앞에서 다른분이 쓰셨기 때문에 카오스가 그냥 그대로 쓴 것이지만....'치명적'인 것은 틀림없을 것입니다....즉, 날고 뛰는 고대의 한학자들이 목숨을 걸고 쓴 글에 그런 오류가 있다는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입니다....카오스는 아마, 그들이 자신과 자신의 가계 전체의 흥망을 걸고 교묘하게(?) '치명적 오류'를 남겼을 것으로 봅니다....그들은 그런 레벨의 고고한(?) 학자들이었으니까요...'술이부작'이라고 하였지요...
흠... 여러분들의 의견을 종합해 볼때사실상, 김유신 열전과 본기 기록이 서로 상충되고, 이를 어느쪽이 옳다고 단정짓는것은 현재로썬 무리다, 즉, 본기기록이 옳을수도 있고 열전기록이 옳을수도 있으며, 잡지 기록이 옳을수도 있다. 이는 심증일뿐 이를 뒷받침할만한 비문이나 금석문등이 발견되지 않는한 결론을 내릴순 없다... 라는 것이군요. 전체적으로 100%동의는 하지 않겠습니다만, 충분히 일리있는 의견이라 생각하고 이부분에 대해선 더이상 토론을 진행하지 않고 이것으로 끝마치고자 합니다.
역사학은 학문입니다..비문과 금석문이 구태어 없어도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님의 주장에 동의 할 수 없지요 다만 백제사랑님의 개인적 사견에 불과 할 뿐입니다.
물론 역사적 지식의 내공이 부족할때 흔히 님처럼 그러한 인식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물론 본인 역시 그러한 인식을 가지고 주장하다가 비사인님의 반론에 간단하게 오히려 많이 배웠으니까요. 그 내용인즉 일본서기의 인용서가 그냥 어떤 책에 의하면 하기에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냐고 주장을 했었는데 비사인님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하게 너무 그런한 내용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면서 대부분 고대 역사서 인용이 그러하다고 설명하더군요..그런데 참으로 정확한 지적이었지요..삼국사기 인용서인 구삼국사나 고기류가 역시 저자와 편찬시기가 불분명한 어떤책의 수준정도로 보아야 하니까요....^^*
제가 하고 싶은말은, 삼국사기 본기에 분명 오류점이 있는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김유신 열전이완벽한 역사서라는 보장또한 없다는 것입니다. 김유신 행록이 그당시 신라의 시대상을 잘 반영해주는 1차사료일순 있으나 그 책을 쓴 동기가 가문의 영광이라는 한계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즉, 어느사서든, 완벽한 진실을 담을순 없고 그것이 고대사일수록 더더욱 변질되고 왜곡될 가능성이 크니, 지금 상황에서 열전이 옳다, 본기가 옳다고 논하는거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개인적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쨋거나 이번 안건에 대한 토론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좋은 공부가 된거 같군요
장청의 행록10권은 1차 사료가 될수 없습니다..만일에 1차 사료라면 집사성내의 기밀문서들이 되겠지요..그렇다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적어도 2차 사료를 인용한 3차 사료가 되는 것입니다...물론 고대사 자체가 완벽할 수는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