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幼年)의 강 / 임보
고개를 넘으면 강이 있었다.
정초(正初)면
강은 항상 은빛 얼음 속에
잠들어 있었다.
우리가 떠나는 날은 으레
눈이 오셨다.
조부(祖父)의 명주 두루마기보다도
부드럽고 흰 눈이
내 왕골 꽃신을 적시며 내렸다.
강을 거슬러 40리
예닐곱 내 유년의 하례(賀禮) 길은
무거운 순례(巡禮)였다.
정오가 지나면
조부의 고희(古稀) 푸른 수염에
나의 무명 대님 끝에
고드름이 열렸다.
주막이 하나 있었다.
인가(人家)도 없는 외딴 강가에
주막이 하나 있었다.
조부가 한 잔의 청주로
목을 덥힐 때
나는 화롯가에서
마른 은어(銀魚) 안주를 씹었다.
40리 강은
내 유년의 좁은 걸음으론
쉽게 재지지 않았다.
해가 한참 기운 뒤
열녀문(烈女門)이 보여야만
우리들의 외롭고 더딘 행군은
끝이 났다.
곡천(曲川)
강이 구부러진 언덕 위에
대나무 숲,
그 속에 눈을 인 초가 지붕들이
고막껍질처럼 누워 있었다.
조부가 태어난 마을,
이가 하나도 없는 증조모(曾祖母)님은
으레
우리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종일 봉창문을
열어 놓으셨다.
첫댓글 음악은 뉴에이지 곡으로 10곡 정도 계속 나오도록 되어 있으니 음악 감상으로도 좋으실 듯 합니다
유년의 강, 이 시를 읽다 보니 제가 살았던 어린시절의 눈이 쌓인 길, 추억도 떠올라서
선생님 작품을 통해 그 시절을 거슬러 올랐습니다..
은도 님이 이 아침에 아득한 유년의 눈길을 다시 걷게 하는군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