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2년 9월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수원] 관계와 의무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신부
† 독서 : 히브 5, 7 - 9
† 복음 : 요한 19, 25 - 27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이다. 자식의 아픔은
어머니에게 더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시메온은 성모님의
그 고통을 이렇게 예언하였다. “……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고 기억하는
신심은 오래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으며, 1688년 인노첸시오
11세 교황 때 이 기념일이 정해졌다. 1908년 비오 10세 교황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인 9월 15일로 기념일을 옮겨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연계하여 기억하도록 하였다.
★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하느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셨다.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그 순종이 모든
이를 구원으로 이끌었다(제1독서).
★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어머니 마리아께서 함께 계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은 어머니의 고통이 되었으며, 고통을
통해 어머니는 구원의 협력자가 되셨다(복음).
◈ 오늘의 묵상
지난해에 세상을 떠난 소설가 박완서 씨는 남편과 사별한 지
일 년도 채 안 되어 외아들을 잃었습니다. 26세밖에 안 된
외아들이 죽자 그녀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벽에
달린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너무도 화가 나 그것을 땅바닥에
던져 버렸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아들을 데리고 가신
하느님을 그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긴 세월 동안 하느님을 원망하고 증오하던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온종일 하느님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 번 고쳐 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하느님,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殺意), 내 살의를 위해서도
하느님은 계셔야만 해.”
시간이 흘러 그녀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며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때 나에게 포악을 부리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하느님께서 안 계셨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지 가끔
생각해 봅니다. 살기는 살았겠지요. 그러나 지금보다 훨씬 더
불쌍하게 살았으리라는 것만은 환히 보이는 듯합니다.” 그녀가
하느님을 원망하고 울부짖을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십자가에 처참하게 못 박히시는 아드님을 보러
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아드님께서 겪으시는 고통
하나하나가 어머님의 마음을 찔러 꿰뚫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사람들의 미움과 증오가 끝까지 아드님을 괴롭히는 그 자리에
고통을 참으며 아드님과 함께하셨습니다. 성모님을 그토록
강하게 만든 것은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믿음, 이 믿음이
성모님께서 우리를 깨우쳐 주시는 가르침입니다.
- 매일 미사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관계와 의무
2012년 나해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 >
복음 : 요한 19,25-27
< 관계와 의무 >
2003년 12월 19일, 당시 나이 24세였던 이진우씨는 자신의
6살짜리 아들과 5살짜리 딸을 동작대교 위에서 한강으로
던져 죽게 하였습니다. 한 시민이 이것을 목격하고 아이를
던진 이씨의 차량번호를 급히 적어 경찰에 신고했고 그는
바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잡히고 나서는 자신은 정신분열
병력이 있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잡아뗐지만 조사결과
정상인으로 판정이 되었습니다.
그는 고등학생 나이에 결혼을 하여 자녀를 두었고 온전한
직장 없이 놀음판에 드나들어 수천만 원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부모의 돈으로 생계를 꾸려가기는 하였지만 부부싸움이 잦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아이들만 없으면 삶이 한결 가벼워지겠다.’는
생각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놀이공원에 가자며 데리고 나와 차에서 수면제와 신경안정제
한 알씩 먹이고 아이들을 짐짝처럼 추운 겨울 강물에 던져버린
것입니다. 목격자에 의하면 마치 가마니를 내던지듯이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가 강으로 던져버렸다고 합니다.
사실 2주 전부터 범행을 계획하여 동작대교 인근의 물 깊이를
재기 위해 답사를 하고, 인터넷으로 ‘한강에 투신했을 때
살아날 수 있는지’ 등의 정보도 조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현장검증을 마친 이씨에게 기자가 질문하였습니다.
“왜 같이 안 죽었어요?”
“기독교인이라서 자살은 못 했습니다.”
“기독교인인데 사람 죽이는 건 괜찮아요?”
“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
사실 죗값은 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천국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은 죄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죗값을 씻고 구원받는다고 하더라도 하늘나라에서 아이들의
얼굴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성당에서 봉사자로 임명을 받는다는 것은 명예인 동시에
부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봉사를 하라고 하면 주저하고 뒤로
물러나는 신자들도 적지 않게 존재합니다. 봉사자로서
나중에라도 신부님과 식사 한 끼라도 함께 하고 싶지만
봉사를 하느니 그냥 미사 끝나고 인사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관계와 함께 의무도
동시에 짊어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위의 이진우씨는 어린 나이에 한 여자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었지만, 그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의무는 원치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의무까지 함께 짊어지지 않으면
관계도 끊어지고 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당신과
더 가까운 관계를 원하는 사람에게 더 무거운 십자가를
주십니다.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다는 증거는 그분이 지신 십자가의 무게로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시는 부담감은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시메온은 그 십자가의 무게가 바로 영혼이
칼에 찔리는 아픔처럼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은 큰 영광이지만, 그만한 십자가의 의무도
동시에 감당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인류구원을 위해
아버지께서 지워주신 십자가의 무게도 상상할 수 없지만,
그 구원자의 어머니가 되어야 하는 고통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녀를 잘 낳고 키울 수
있는 책임감 있는 여인을 찾으셨는데, 그 부담감을 감당할
수 있으셨던 분은 인류역사상 오직 성모 마리아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는 부담감은
없을까요? 당연히 개신교 신자들보다는 더 큰 십자가를
져야 성모님을 우리 어머니로 모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에 마리아를 받아들여 그 집에 모심으로써
받게 되는 의무는 바로 교회인 우리가 짊어지어야 하는
의무이고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모님을
어머니로서 모시는 것을 택해야겠습니까, 아니면 성모님만
없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부담스러워
성모님과의 관계를 포기해야겠습니까? 성모님은 그
십자가의 무게가 아무리 무거워도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위해서는 능히 그 의무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함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도 매일의 십자가가 너무 무겁다고
불평하기 이전에 그 십자가 덕분에 얻게 된 하느님과
어머니 마리아와의 관계에서 오는 행복으로 감사와 찬미를
드리도록 합시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고통의 성모마리아 기념일 -
우리의 어머니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부속가)
+ 요한 19,25-27<또는 루카 2,33-35>
우리의 어머니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유언입니다. 세상을 떠나시면서 아들의
역할을 다하고 계십니다. 자기가 하지 못하는 것을 이제
제자들이 다해 주기를 바라며 어머니를 맡깁니다. 또한
어머니께서 당신 제자들을 아들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어머니와 제자, 제자와 어머니의 관계가 새롭게 형성됩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제자들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요한 19,26-27) 하심으로써
어머니를 제자들의 어머니, 믿는 이들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로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마리아를 어머니로
받아들이고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수락하고 이행한 것입니다. 이제 성모님은 나의 어머니이십니다.
집회서를 보면“마음을 다해 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고
어머니의 산고를 잊지 마라. 네가 그들에게서 태어났음을
기억하여라. 그들이 네게 베푼 것을 어떻게 그대로 되갚겠느냐?”
(집회7,27-28)고 적혀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함으로서 어머니와 제자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그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곁에 서 계신 어머니의 고통이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어머니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하느님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급기야 아들의 시신을 품에 안게
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아들의 시신을 안은 동상에
‘피에타’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피에타’는 이태리어로
‘충실한 믿음’을 뜻합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는
자신의 온 마음으로 오직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원하고
그대로 따른 “충실한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뜻에 대한 충실한 믿음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묘비에도 ‘피에타’ 라고 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에 고통 안에서 믿음을 드러내신
어머니를 통하여 ‘고통이 하느님의 섭리요, 은총의 기회이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십자가의 성 요한)라는 것을 일깨우시기 바랍니다.
성모님은 구세주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크나큰 고통을
감당하셔야 했는데 흔히 일곱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하실 분이며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는
시메온의 예언입니다.(루카2,34-35)
2).헤로데를 피하여 ‘에집트로 피난을 가셔야 했습니다.
(마태2,13-18)
3).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으신 고통(루카2,41-51)
4).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과 서로 만나신 고통
(루카23,26-32)
5).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보신 고통(요한19,38-40)
6).예수님의 성시를 품에 안으신 고통(요한19,41-42)
7).예수님의 성시를 돌무덤에 장사지내심을 보신 고통
(요한19,41-42)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성모님의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을 겪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모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치셨고 하느님이 당신의 전부였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을 거울삼아 자진하여 고통을 참아 받으며 하느님과
이웃에게 희생의 제물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고통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신앙으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의 수난을 함께 나누고
예수님께 대한 우리 사랑을 보여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마더 데레사) 그러므로 “여러분의 생각은 언제나
성모님께서 울고 계시던 구세주의 십자가 곁에 머물도록
하십시오. 항상 성모님과 함께 울도록 하십시오.”(교부 푀멘)
십자가위에 높이 달리신 당신 아드님 곁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함께하신 어머니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여 마침내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케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신부 -
◈ [수도회] 서 있다는 것
9월 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요한 19장 25-27절
“그때에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서 있다는 것>
살다보면 때로 너무나 큰 고통, 감내하기 힘든 깊은 슬픔에
서있기조차 힘겨울 때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두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예외 없이 겪을 수 있는
상황이겠지요.
금쪽같은 사람이었는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그였는데,
너무나 갑작스럽게, 먼저 간다, 잘 있어라, 작별의 인사말
한 마디 없이 떠나갔을 때의 그 당혹함, 그 비통함은 사람을
제대로 서있지 못하게 만듭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비보(悲報)에 자신도 모르게 무릎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맙니다.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서 계셨던 성모님의 고통은 그
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출산한 아들이었습니다. 온갖 정성을 다해 애지중지 키워왔던
아들이었습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아들, 어머니의
삶을 늘 큰 기쁨과 보람으로 가득 채워주던 든든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런 아들이 이 세상을 떠나가고 있습니다. 사랑이 떠나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가장 처참하고 혹독한 사형대인 십자가
위에서 천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아들 대신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단말마의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피투성이의 아들 밑에 서
있던 성모님의 다리는 자신도 모르게 후들후들 떨렸겠지요.
너무나 처참한 아들의 몰골에 성모님의 가슴은 그야말로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겪으셨던 고통 그 이상의
고통을 성모님은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있는 힘을 다해 아들 예수의 십자가 밑에
꿋꿋이 서 계셨습니다.
극심한 고통, 하늘이 내려앉는듯한 슬픔 가운데서도 성모님은
혼절하지 않으십니다. 분노의 절규도 절망의 비명도 외치지
않으셨습니다. 병사들이 당신의 아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하도록 말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성모님은 극심한 고통 중에도 당신 아들이 건네는 시선에서
지금이 ‘그 때’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아들 예수가 견뎌내고
있는 극심한 고통과 자신이 감내하고 있는 깊은 슬픔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인류 구원 계획이 실현되고 있음을
파악하셨습니다.
그래서 오직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최선의 노력,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비극적인 상황 앞에 꿋꿋이 서
계셨습니다. 침묵 중에 온 몸과 마음을 다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에 우리 각자에게도 한 가지
과제가 주어집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십자가 위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응시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시선에 우리 시선을
맞추는 일입니다.
그분의 고통 앞에서 마냥 슬퍼하고 망연자실할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고통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큰 고통에 우리의 작은 고통을 합치시키는 일입니다.
나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는 내 이웃들의 고통을 응시하는
일입니다. 내게 일상적으로 다가오는 숱한 고통 앞에
성모님처럼 꿋꿋이 서 있는 일입니다. 이해하지 못할 큰 고통
앞에서도 성모님처럼 끝까지 직면하는 일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대구] 구원을 위해 바쳐진 성모님의 고통
성모님은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로 원죄에서 해방되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성모님은 영광된 삶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의 삶을 사셨습니다. 성령으로 인해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파혼과 죽음의 위협이 있었고, 호적등록을 하러 가던
중에 마구간에서 출산했고, 어린 아들 예수님과 함께
이집트로 피난 가야만 했습니다.
성전에서 아들을 잃어버려 찾아 헤매셨고,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아들의 핀잔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수난의
길을 가는 당신 아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성모님은 아드님 예수를 봉헌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을 때 시메온으로부터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루카 2,35) 고통을 당하리란 예언을 들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단말마의 고통을 겪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성모님의
영혼은 칼로 꿰찔리는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당신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하시고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구세주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이 모든 믿는
이의 어머니, 인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성모님이 겪으신 고통은 죄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분의 고통은 인류
구원을 위해 바쳐진 지극한 사랑과 당신 아드님 예수와 이루는
일치 그리고 하느님 뜻에 대한 순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분의 고통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분의 고통을 묵상하며 우리의 고통을
인류의 구원을 위해 바쳐야겠습니다.
- 김명현 신부(대구가톨릭신학대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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