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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신라,가야토론방 김유신 열전은 정말 순수한 의도에서 쓴걸까?
백제사랑 추천 0 조회 411 10.02.02 01:24 댓글 24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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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0.02.02 01:49

    첫댓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김유신 열전을 믿을 만한 역사서가 아니다라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본다는게 아닙니다. 저는 김유신 열전이 쓰여진 시대상과, 김장청의 개인적 상황등을 엮어 보았을때, 김유신 열전을 정말 객관적인 시각에서 쓰여졌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어 쓴 글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 건전한 토론을 하고 싶을 뿐이니, 감정적 대응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 10.02.02 23:16

    그렇지요 안그래도 약점을 못잡아 서슬이 시퍼런 상황에서 증거가 집사성에 그대로 있는데 거짓말로 조상 뻥튀기는 오히려 자승자박으로 더욱 불가능한 현실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만일에 신라말기나 고려시대쯤 행록을 지었다면 백제사랑님이 가지는 의구심이 당연할 수도 있겠지요!

  • 10.02.02 10:33

    순수한 의도가 뭘 말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어떤 역사서도 객관적으로 쓰이는 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비교해 보고 걸러 보고 합리적 해석을 통해 진실의 그림을 그리는 이들은 역사가들의 몫이구요... 사실 역사 논쟁은 저 ' 합리적 ' 이 하나만이 될 수 없기에 존재하는 거죠....

  • 10.02.02 15:31

    삼국사기 하나만으로 비교 대조하라고 한 적 없는데요...

  • 10.02.02 15:53

    죄다 Copy & Paste 라... 뭘 보구요? 그럼 삼국사기 초기기사 뿐 아니라 중국 사서와 충돌하는 내용들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 10.02.02 16:02

    솔직히 대부분은 베낀 거잖아요 ← 그렇게 얼렁뚱땅 들이대면 누가 믿겠나요? 참조한 사항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나 삼국사기 독자적인 기사 내용 역시 많습니다. 다른 뉘앙스의 기사도 많고....

  • 10.02.02 13:35

    아니 역사서를 편찬하고 조상의 기록을 정리 편찬하는데 무슨 순수한 의도가 있을까요?..이유야 어찌되었던 간에 조상의 업적을 후세에 남기려는 목적이야 분명히 있을 것이고 장청의 행록열전은 당시 후손들이 소외되는 과정에서 신라조정에 크게 기여한 가문의 업적을 표방함으로써 직계 후손인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며 또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선조의 후손으로써 자긍심의 고취와 함께 가문 결속을 위한 목적으로 편찬했다는 것이 보편적인 인식이지요

  • 10.02.02 13:35

    다만 그는 기밀문서 취급부서인 집사성의 실무자인 집사시랑으로써 당시 기밀문서인 1차 사류를 접하고 이를 발췌할 수 있었다는 점이 저작자와 편찬시기조차 모르는 고기류에 비해 훨씬 신빙성이 앞설 수 있다는 이유이지요..물론 김부식이 대폭 짜집기하는 바람에 완전히 원형이 변형되어 그 신빙성이 더욱 떨어졌을 뿐이지요..당시 엄연히 유신공의 기록이 존재하는 마당에 신라인들에게 장청이 뻥튀기를 한다고 해서 제대로 먹히기나 했을런지요..비록 조선시대에서도 자신의 조상에 대한 무조건 뻥튀기는 수치(羞恥)로 인식했으니까요.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10.02.02 20:24

    김유신 장군의 전공보다도 저자가 뚜렷한 행록을 인용한 열전이 출처가 불분명한 고기류들을 주로 인용한 본기에 비해 신뢰성을 가지며 원문이 분명한 행록을 나름대로 다듬고 짜집기한 열전이 구삼국사나 고기류가 당대의 것인지? 후대 고려시대의 것인지?도 불분명한 고기류를 입전한 본기에 비해 비교적 객관성이 훨씬 높다고 봅니다...만일에 집사성에 있는 1차 사료에서 발췌된 내용이 행록에 실려 그것이 열전에 입전되었다면 객관성에 있어서도 본기를 훨씬 앞서게 되지요!

  • 작성자 10.02.02 23:26

    적의 숫자가 십단위까지 다 나온다고 하여 그게 역사적 사실이라고 판단하는것도 오류이죠. 적의 출전한 병력 숫자가 그정도인대, 이를 전사시킨 숫자로 둔갑할 가능성도 크니깐요. 또한, 기밀문서를 취급하는 집사시랑인 김장청과 김유신의 역사기록이 무슨 근거가 된다는 것인지요? 김유신이 백제인을 죽인 숫자나 전공과정이라면, 신라본기측 기록에도 소상히 나와있습니다. 기밀사항이라 할수 없지요. 오히려, 본기와 열전을 대조해볼때 대부분이 일치하나, 유일하게 불일치한 악성과 진례성 전투에 대해선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 10.02.03 12:56

    기밀문서를 취급하는 집사시랑인 김장청과 김유신의 역사기록이 무슨 근거가 된다는 것인지요? ...그것 참! 박창화가 일본 궁내성에서 남당 유고를 많이 남겼는데 그사람은 일본 궁내성 자료를 이용하질 않고 무슨 수로 배꼈을까요?..신라본기의 기록을 너무 맹신해서는 아니됩니다..워낙 탈락시킨 내용이 많을뿐더러 서로간 충돌되는 오류가 상당히 많으니 본기 보다는 차라리 열전 내용이 보다 정확할 수가 있습니다.

  • 10.02.03 13:15

    또한 신라본기와 열전이 악성과 진례성 전투에 대해서 유일하게 불일치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불일치 하지요...유일하게 일치하는 부분은 "謂女主不能善理" 딱 이것 뿐인줄 압니다만....!

  • 작성자 10.02.04 23:53

    제글에 심하게 오해를 하시는군요. 삼국사기 전체 기록과 김유신 열전의 전체 전쟁기록을 비교해 보라는 소리였습니다. 소호금천씨님도 지적했듯이, 악성과 진례성 기록은 본기와 열전간에 매우 큰 차이를 보이지만, 다른 전투기록은 개별적인 상황은 다르더라도, 어느정도 일치합니다.

  • 10.02.03 04:58

    김유신열전:드디어 승리의 기세를 타고 백제의 영토에 들어가 악성(嶽城) 등 12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2만여 명을 목베고, 9천 명을 사로잡았다. 공로를 논하여 이찬으로 승진시키고 상주(上州) 행군대총관에 임명하였다.

    삼국사기 : 잡지 - 신라 직관 -지방제도 / 도독 --도독(都督)은 9명이었다. 지증왕(智證王) 6년(505)에 이사부(異斯夫)를 실직주(悉直州) 군주(軍主)로 삼았다. 문무왕(文武王) 원년(661)에 총관(摠官)으로 고쳤다가 원성왕 원년(785)에 도독으로 칭하였다.관등이 급찬(級湌)에서 이찬(伊湌)까지인 자로 임용하였다..

    김유신열전 648년에 김유신장군이 총관이 됩니다..그 당시에 신라는 총관직책이 없었죠

  • 10.02.03 04:59

    자세한 내용은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jabkiDetail?url=jabkidetail&sn=906 를 보셨으면 합니다..

  • 10.02.03 12:11

    오랫만에 좋은 질문을 받은 것 같습니다...^^*..그 당시에 당나라에서는 총관이 유행처럼 되어 있었는데 신라라고 출전하는 장수에게 왜 총관직이 없었겠습니까?..직관지에 있는 총관 내용은 도독을 총관으로 고쳤다가 다시 도독으로 되는 과정을 말한 것입니다..만일에 님처럼 해석을 하신다면 당장에 신라본기 무열왕 7년(660년) 11월 22일 기사와 충돌이 되지요.

  • 10.02.03 12:12

    참고로 신라본기 무열왕 7년(660년) 11월 22일 기사에서 "佐平<忠常><常永>, 達率<自簡>授位一吉찬 充職摠管 (좌평 충상, 상영과 달솔 자간에게는 일길찬의 위품과 총관의 직위를 주었으며,)또한 열전에서는 조부 무력은 신주도 행군총관이 되어 일찌기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왕과 그 장수 네 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을 참수한 일이 있었다.

  • 10.02.03 18:30

    무의미한 답글 같아서 그냥 웃고 넘어갈려고 했는데..생각할수록 대단하시네요
    위의 사이트 ,페이지를 보고서도 어찌 그렇게 해석을 할 수 있는지...
    님이 말한 김유신행록은 1차사료,2차사료로써 가치가 떨어지며,,사료로써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은 그리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집필한게 아니라,
    신빙성이 떨어지는 사료도 재검증없이 짜집기 했다는 것을 말하는거죠..
    더군다나 님이 제시한 문장들을 정리해보면,
    사료로써
    삼국사기 가치가 더 떨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거죠..

  • 10.02.03 21:16

    차라리 그냥 웃고 넘어가시지요..불필요한 댓글은 상호간 감정을 상하게 할뿐입니다..님이 제시한 사이트 내용및 주석 그리고 삼국사기 잡지를 보다 세밀하게 살피시지요..분명히 도독을 총관으로 문무왕 원년에 최초로 고쳤다고 했지요!. 없었던 총관직이 문무왕 원년에 새로 도입되거나 만들어졌다고 사료에 그렇게 나왔는지요??..그렇다면 님께서 보다 정확하게 해석해 주시렵니까..그리고 본기에 1년 앞서 660년에 총관으로 임명된 충상과 상영, 자간에 대해 명쾌한 해석을 부탁드립니다.

  • 10.02.03 22:38

    제가 주장한 김유신 행록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본문의 취지와 달리 님께서 임의대로 정리하여 왜곡되게 반박하시면 아니되죠.. 만일에 제주장에 문제가 있다면 님께서 따로 반론하시든가 아니면 문단을 나누어 오류된 주장을 자세하게 지적이나 반론해 주십시요..차후로는 본인의 모든글에 지금 방식의 냉소적 댓글은 정중히 그리고 무조건 사양합니다.

  • 작성자 10.02.03 23:25

    소호금천씨님, 삼국사기에 대야성이 함락시킨 기록 자체가 없는대, 소호금천씨님이 주장한 내용만으로 648년에 대야성이 함락되었다는 주장역시 어디까지나 개인적 추론에 불과합니다. 분명 사료상엔 그런 기록자체가 없습니다. 저 역시도 661년 이전인 660년 전후 정도로 대야성이 함락되었을 것이라는 개연성 정도이지 확정이 아닙니다. 명확한 사료적 증거나 고고학적 증거가 없는대도, 개인적 추론만으로 648년에 대야성이 함락되었음이 확실시하다고 주장하시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망상에 불과합니다.

  • 10.02.03 23:57

    백제사랑님 제가 본문으로 쓴 김유신 열전의 신뢰성 이라는 내용을 먼저 검토하시고 다시 반론해 주십시요...열전에는 분명이 있는 그까짓 대야성 10개보다도 김유신에게는 훨씬 더 중요한 내용이 본기에서 탈락된 내용이 있는데 하물며 그까짓 대야성쯤이야 얼마든지 누락될 수가 있지요..왜 그렇게 본기에 매달리면서 님의 경솔한 주장으로 남에게 개인적 망상이니 하는 헛소리를 하시는지요?..그리고 무슨 고고학적 증거?..그렇다면 님이 먼저 648년에 대야성이 함락되질 않고 어느년도에 함락되었는지 고고학적으로 증명하시고 난뒤에 이처럼 주장을 하셔야지요.

  • 10.02.05 17:10

    생산적인 논의를 막을 생각은 없습니다만 행여라도 과열 현상이 일어날까 하여 회원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한 분 한 분께서 비사인님과 운영진들을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 10.02.06 17:51

    제가 봤을때 부여장님이나 백제사랑님이나 사료에 근거한 논리적인 토론이 되는 듯 한데 소호금천님은 내가 하면 로망이요 남이하면 불륜이라는 자가당착식의 해석이 지나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토론은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지요. 1급 공인사료와 3급 야사와 다를바 없는 자료를 객관화한다는 것 자체가 오류인데요 이부분은 소호금천님의 크나 큰 착각임을 많은 분들이 지적해도 안들으니 여기서부터 토론이 안되는 듯 합니다. 토론은 여기서 끝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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