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야곡
작사: 유 호
작곡: 박시춘
노래: 신세영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단잠을 못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 아~ 아~
그 목소리 그리워
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길속에 달려간
내 고향 내 집에는
정안수 떠놓고서
이 아들의 공 비는
어머님의 흰 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
아~ 아~ 아~
쓸어안고 싶었소
조약돌(최균식)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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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에 마우스 올리면 멈춤.
흐르는곡: 전선야곡 - 신세영
- 악보 -
◇신세영◇
1926년 부산시 출생이며, 대표곡으로 전선야곡(1951) 등이 있다. 유년 시절을 대구에서 성장한 그는 1947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구 오리엔트 레코드사 주최 콩쿠르 대회에서 입상한 뒤, 이 레코드사의 전속 가수로 발탁됐다. 가수 데뷔 전인 1945년 초 해방을 얼마 앞둔 상황에서 그는 일본군에 의해 강제 징집됐다가 중국에서 해방을 맞은 뒤 귀국하여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전개했다. 신세영이란 예명은 당시 최고의 여가수들이었던 신카나리아의 '申', 장세정의 '世', 이난영의 '影'을 한글자씩 조합해 만든 것이다.
1948년 '로맨스 항로'로 데뷔한 그는 1951년 발표한 전선야곡(1951)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1960년대에는 작곡 활동도 했는데, 나훈아 가수가 불러 유명한 청춘을 돌려다오(1984)를 작곡했다. 대한 가수 협회 원로 가수회 명예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부인 박목련 여사와 슬하에 2남 2녀가 있으며, 모두 미국으로 이민했으며, 2010년 8월 23일 별세하였다.
전선야곡은 1951년 10월 6.25전쟁이 한창이던 때 발표한 한국의 대표적 전쟁가요이다.
당시 문화예술인들이 대구에 많이 모여있었다. 육군본부가 자리잡았고, 정훈부가 대구 계산성당에 자리잡아 대구는 전선문학과 가요의 산실이었다.
당시 박시춘 작곡가도 전쟁중 대구에 내려와 오리엔트 레코드사의 전속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가수 신세영(申世影, 1926 ~ 2010.8.22)은 대한민국의 가수, 작곡가로 1926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故 박시춘 씨가 작곡한 대표적인 한국 전쟁 가요 '전선야곡'의 가수이자, 나훈아가 불러 유명한 '청춘을 돌려다오'를 작곡한 인물이다.
유년 시절 대구에서 성장한 그는 1947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구 오리엔트 레코드사 주최 콩쿠르대회에서 입상한 뒤 이 레코드사의 전속
가수로 발탁됐다.
신세영이란 예명은 당시 최고의 여가수들이었던 신카나리아의 '申',
장세정의 '世', 이난영의 '影'을 한글자씩 조합해 만든 것이다.
1948년 '로맨스 항로'로 데뷔한 그는 1951년 발표한 '전선야곡'으로 큰 사랑을 받았으며 그의 명성을 얻게됨과 더불어 대표곡이 된 전쟁가요로 당시
전선에 메아리친 노래이다.
히트곡으로는 '무영탑 사랑' '영 너머 고갯길' '바로 그날밤' 등이 있다.
'전선야곡'은 1951년 박시춘이 곡을 구상해 작사가 유호에게 노랫말을
부탁한 곡이다.
박시춘은 남인수를 생각하고 곡을 썼지만, 오리엔트 레코드사 사장 이병주가 신세영을 추천했다.
2010년 4월 신씨를 생전 마지막으로 인터뷰 한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 씨는 "해방 이후 현인 씨에 이어 두번째로 가수가 된 인물" 이라며 '전선야곡'은 선생님께 대표곡 이상으로 의미가 각별한 곡이라고 했다.
전선에서 그리는 고향 어머니에 대한 심경을 담은 이 곡은 취입한 그날 어머니가 운명하셨기에 이 노래를 더 애절한 마음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 당시 열악한 시설속에 자동차 경적을 피하기 위해 밤에 모포로 창문을
가리고 취입했다고 한다.
이어 "선생님은 광복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우리 민족이 가장 힘든 시기 가요사의 명맥을 이은 분" 이라며 '전선야곡' 등의 노래로 민초의 아픔을 달래준, 가요 역사에서 의미있는 분으로 2010년 8월22일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대한가수협회 원로가수회 명예회장을 지내기도 했으며2010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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