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덕여왕2년 (648년) 대량성을 회복하고 백제 경내에 들어가 악성 등 12성을 함락시키고,
2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9천 명을 사로잡았다.
왕은 공을 논하여 유신에게 이찬의 작위를 주고 상주 행군 대총관으로 삼았다.
라는 내용으로 보아 김유신 장군은 648년에 2관등인 이찬에 올랐으며
무열왕 7년(660년)에 대각간(잡지 관직에 의거)에 올랐다면
본기에서 무열왕2년(655년) 겨울10월 기사중 "왕의 딸 지조가 대각찬 유신에게 시집갔다"는
내용은 잘못된 기사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각간(1관등)을 대각간 으로 誤記한 것으로 보입니다.
윗글은 소호금천씨님이 쓰신글입니다.
지금 소호금천씨님은 글의 제목에서도 알수있듯이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과 본기에 대한 차이에 대하여
주장을 하며 각각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누가봐도 이 글의 내용을 통해 본다면,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마치 김유신이 대야성을 회복하여 상주대총관에 올랐다는 기록이 정말로 있는것으로
착각하게끔 만들고 잇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말은 대야성 회복의 진위여부가 아니라, 삼국사기 그 어디에서도 대야성 회복의 내용이
전혀 없음에도, 소호금천씨님은 대학교수들의 논문에 의거하여, 그것이 사실이니 삼국사기에도 기록되어
있다고 전혀 터무니 없는 엉뚱한 주장을 내세우고 있으니 기가막힐 따름입니다.
다시한번 강조합니다만, 저는 지금 대야성을 김유신이 회복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것이 아니라,
삼국사기 본기와 열전을 비롯한 그어떤 역사서에도 대야성을 김유신이 회복하였다는 기록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 논점입니다. 다시금 예전처럼 무의미한 대야성 회복의 진위여부를 가리고자 하는것이 아닙니다.
대야성이 정말 김유신이 회복하였고, 그것이 논문을 통해 입증되어 기정 사실이니, 삼국사기에 그러한 기록이
없다 하더라도, 기록되어 있다라고 우기시는 건지요???
첫댓글 백제사랑님.......혹시? 님께서 이성을 잃고 본문을 쓰신 것은 아닌지요?..저게 토론을 할 수 있는 글인지? 다시 확인바랍니다.
본인의 필명을 거론 했으니 하는 수 없이 댓글을 답니다만 차후로는 백제사랑님의 주장에 일체의 댓글을 달지 않을 것이니 님 역시 어떠한 이유로든 본인의 글에 댓글을 달지 말것이며 본인의 필명을 거론하면서 반론하는 것을 삼가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