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김씨의 시조가 누구인지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오랜만에 역사추적을 보던 중
문무왕비문편을 보고 게시판의 글들을 살피다 보니 몇가지 의문점이 생겨 여쭤보려고 합니다.
1. 미주가효님은 반론의 예로 임진왜란의 포로들을 거론하셨습니다. 물론 그러한 포로들이 일본에서 살다보면 당연히 조선의
문화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당에 끌려갔던 고구려의 유민이나 반대로 고구려에서 살았던 수당의 포로들도 마찬가지겠죠.
심지어 자의로 고구려로 이주했던 중국 국가들의 백성들도 고구려문화에 동화되었겠죠.
하지만 김일제의 경우 본래 휴도성에 살던 흉노인 수만을 데리고 산동에서 투국을 세워 살았다고 하는데, 과연 이 경우도
마찬가지일까요? 김일제로부터 증손자 김당까지 100여년인데 정부의 의도적인 문화간섭 없이 수만명이 모여 살았다면, 그 기간동안
완전히 한의 문화에 동화되어 흉노의 문화적 특성을 유지할 가능성이 없다고만 보기는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 신농님은 김씨일가가 왕망 정권에 참여했고 왕망은 유교적 사상에 찌들었기 때문에 북방문화를 전달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습니다. 김씨가 왕망과 관련된 것은 단지 외척이었던것 뿐입니다. 김씨가 어떠한 정책에
관련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는 추측일 뿐입니다. 만약 신농님이 이것을 부수적인 근거로 거론하셨다면 모를까
추측에 불과한 것을 주된 논거로 언급하셨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신라의 문화가 흉노의 문화와 관련이 있더라도 굳이 뚜렷한 문화적 습성이 남아있어야 하는 것인가 의문입니다.
의식주를 이어가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면 설사 김일제 후손이 신라에 건너왔어도 신라 고유 문화에 자연스럽게 흡수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목적이 있다면 다르게 볼 수도 있죠.
김일제 후손이 신라의 김씨가 되었다면 비록 신라의 주체세력중 일부이지만 후발주자에 불과합니다. 보통 이런 소수세력이
관심과 집중을 받고 성장하려면 독특하고 화려한 문화를 선보이는 것이 가장 적합하죠. 문화적 흔적만 가지고도 신라에서
북방계통의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3. 신라의 문화는 고구려나 백제와는 다른 독특한 성격을 지녔으며 유물을 보더라도 북방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가야나 신라 모두 해양세력의 유입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되는 북방문화의 흔적은 대체로
해양문화의 유입이 원인이라는 것이 주류적인 입장인 것으로 압니다.
김일제의 후손이 산동에 자리를 잡았다면 신나라의 멸망 이후 바닷길을 통해 가야와 신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당시 김해를 통하는 무역을 위한 바닷길이 이용되었음을 본다면 김씨일가의 일부는 이미 오래전부터
김해 등에 거점을 두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여기서는 민족기원의 차원같은 딱딱한 시각으로 접근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설사 김일제의 후손이 신라김씨와 연관이
있다고 해도 신라가 흉노의 후예가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조상이 흉노가 되는 문제도 아니잖습니까.
문무왕비와 김인문묘지에서 명백히 김일제와의 연관성을 언급하고 있는데, 왕건의 시조문제와 같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함과
동시에 당시 사람들에 의해 반박, 논파된 바 없다면 결국 김일제시조설도 가능성일 뿐이고 그 반대인 관념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추측일 뿐입니다. 다만 문화의 특성과 해양세력의 유입 및 문화의 이동 경로등을 보아 가능성이 있는만큼 충분히 개방적으로
바라볼 문제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참고로 재미있는 점은 동복에 대하여 역사스페셜에서는 부여의 영향이라고 하고 역사추적에서는 흉노의 영향이라고 하는군요.
첫댓글 1. 투국에 휴도성 흉노족 수만을 데려가서 살았다는 식의 기록은 없습니다. 김일제는 평생을 궁궐에서 내시, 즉 황제의 측근으로 살았고, 투후로 임명된 것도 거의 죽기 직전의 일이었습니다. 10대 소년일 때 끌려와 노년까지 궁궐에서만 살아온 김일제에게 뭐가 남아 있었을까요. 물론 수만 명의 흉노 백성 같은 것도 기록에 전혀 없습니다.
2. 투국이라는 말부터가 이미 에러입니다. 전한대의 봉작은 사실상 이름뿐인 것으로, 왕으로 임명된 종실들조차 자기 봉국을 다스리지 못했는데 일개 현후가 투국이라는 정체를 가졌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죠.
어...그렇습니까? 이런...잘 알지도 못하고 글을 썼군요. 물론 투국이란 말이야 현을 다스린 의미로 받아들였지만,,, 프로그램에서는 중국 교수의 인터뷰를 통해 한서와 사기에 각각 3만과 5만, 그리고 산둥에 이주했다고 했는데 모두 뻥이란 말입니까? 사서를 찾아보는 프로그램에서 뻥을 쳤다니 믿기지 않는군요.
적어도 한서와 사기 본문에는 김일제와 관련해서 3만, 5만이라는 숫자 자체가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사기는 김일제가 투후로 책봉되기도 전에 완성된 책인데 투후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이지요. 뭐, 주석문까지 확인한 것은 아니라 확실하게 부정하긴 어렵습니다만, 일반적으로 한서와 사기를 말할 때는 주석은 제외니 역시 그 중국 사학자는 거짓말을 했거나, 방송에서 거짓 번역을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흉노족 수만을 데려가서' 부분을 지적하려 했는데 이미 야스페르츠님이 언급하셨네요. 야스페르츠님 지적처럼 김일제는 어린 시절에 한나라에 끌려온 뒤에는 '흉노인 집단' 속에서 살았던 것이 아니라 궁중이라는 '한족 집단' 속에서 살았던 인물입니다. 보통 청소년기에 '사회화' 가 이루어지고 사회화를 통해서 개인이 내면화하는 문화를 받아들인다는 점을 고려할 때 소년 시절 잡혀와 궁중에서 한족에 둘러싸여 성장한 김일제는 간단하게 생각해도 '한족으로서의 사회화' 를 겪었다고 봄이 옳을 것입니다.
좀 더 부언하자면, 4대 이치사선우 때 흉노의 돈황 지역(아직 돈황이 있기 이전) 제후왕으로 혼사왕과 휴도왕이 있었는데, 혼사왕이 한무제의 공격에 겁을 먹고 휴도왕을 죽이고 자진 투항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휴도왕의 두 아들 일제와 윤은 한에 포로로 잡혀들어온 것이지, 집단적으로 한에 이주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더욱이 두 아들이 한의 궁중에서 자랐다는 것은 이미 지적하신 바와 같습니다.
^^ 그럼 달랑 김일제 집안만 잡아온 모양이로군요. 흉노가 한나라에 들어올 때 한무제가 영접해서 대신들의 불만을 산 것은 무엇일까??? 한무제 이전에는 흉노가 한나라의 조공을 받았는데 김씨 집안이 왜 '화관지후'란 표현을 썼을까? 한나라의 문화에서 자랐다면서 한나라를 뒤집은 신제국에서는 오히려 대접을 더 했을까??? 절대군주 한무제가 투후의 딸을 후궁으로 앉히려할 때 어떻게 감히 NO라고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좋은 기회를 왜 스스로 버렸을까??? 간이 부었었나? 한무제가 세상을 뜨기 전 섭정을 투후에게 부탁했을 때도 절대 천운을 버리고 곽광에게 양보했을까??? 정말 외국인라 그랬나??? ㅉㅉ
달랑 김일제 집안만 잡아온 건 아니고 백명 남짓 정도 흉노 고위층을 잡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린 김일제는 황궁에 들어가 말이나 키우는 노예로 전락했다가 훗날 한무제의 눈에 들어 운 좋게 성공한 케이스였지요.
100명 외의 다른 흉노인들 없이 전쟁하거나 투항했을까요? 적어도 흉노는 당대에는 한나라 위에 군림하면서 세계를 호령하던 세력이었는데요. 100명의 흉노고위층은 설득력이 매우 부족합니다. 다른 흉노는 다 죽였을까요? 운 좋은 건 한나라였다고 생각됩니다만...물론 한무제가 제왕이 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김일제의 아비(휴도왕)가 살해당하고 어미와 김일제 본인 및 동생들이 포로로 끌려오던 상황은, <사기 흉노전> 의 곽거병의 흉노 정벌에 대한 기사나 <한서 김일제전> 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전투 역시 김일제가 잡혀가던 단일 전투 1회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오래 지속되니 누적된 총 포로수는 꽤 됐을 겁니다.
그리고 다른 흉노는 다 죽었는가? 다 죽기야 했겠습니까만 한무제 무렵의 흉노는 곽거병의 군사활동으로 인해 핵심 지역들까지 정벌당하고 '기련산을 잃어 가축을 먹을 수도 없고, 연지산(언지산)을 잃어 여인의 얼굴을 물들일 수도 없다' 라고 한탄할 정도가 되며 제사를 지내는 '금인(金人)' 까지 빼앗기는 지경에 이르지요.
그리고 '운 좋다' 라는 말을 뭔가 이상하게 오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김일제의 운이 좋다는 것은, 다른 흉노 포로들에 비해서 한나라 내에서 그가 중국 황제의 눈에 들어 출세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김일제가 다른 포로보다 딱히 운이 좋은 건 아니다' 라는 반론이라면 몰라도 '한나라가 더 운이 좋다' 라는 반론은 좀 제가 말하는 '운 좋다' 는 말과는 맥락이 좀 다른 듯 합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말씀하시는 취지를 정확히 이해하기가 힘들군요. 조금 더 자세하게 써 주셨으면 합니다.)
한무제가 적극적인 흉노정벌을 감행하기 전까지는 한나라는 조공을 바치는 신세였습니다. 한무제에 와서 국운을 걸고 총력전을 펼쳐서 겨우 우위를 점했습니다만, 나라의 재화가 거덜날 위기에 처한 한나라의 심각성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신들의 적극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과단성있는 흉노정벌을 단행한 한무제는 대신 거개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속도로를 놓은 박통과 오버랩되는 것이죠. 김일제가 황제의 눈에 든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것은 적어도 한무제가 사전에 김일제에 관한 프로필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추정케 합니다.
흉노의 태자였음은 자연히 알게 될 것이고 포로로 잡혀온 흉노의 통제를 위해서도 김일제를 대우할 필요가 절실했을 것으로 봅니다. 비록 포로로 잡혀왔다고는 하나 이들이 하나의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은 있었으니까요. 사기는 자기들의 은혜를 베푼 것으로 말하고, 그럴 수 있습니다만 이면에는 以夷制夷의 전략이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우리의 시각으로 본다면 투후가 역사전면에 등장하는 일은 필연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면에서 김일제의 등장은 행운이라기 보다는 필연적 귀결이라고 본 것입니다. 또한 역사방송에서 중국의 학자?가 투국에 흉노인이 거만이었다는 설명은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sorgai// "투국에 사는 흉노의 수"를 "특정한 사료"에 근거해서 "정확한 수치"로 언급한 것이 해당 중국사학자(?)의 발언입니다. 물론 저도 그분의 말을 직접 듣고 해석할 능력은 되지 않으니, 결국 제작진의 자막을 믿어야 겠지요.
그런데 그 발언, 혹은 그 자막은 100% 틀렸으니 뭐라고 해석해야 할까요? 어쨌든 그 중국사학자도 뭔가 근거가 있긴 할거다라고 해석해야 할까요? 그걸 왜 우리가 해야 할까요? 증거 제시도 못하는 주장, 아니 증거조차 거짓으로 대는 주장을 우리가 먼저 옹호해줘야 할 이유가 뭘까요?
야스페르츠// ^^ 증거조차 거짓으로 대는 주장이 확실한 것인가요? 그렇다면 앞으로도 영원히 그런 내용은 등장할 수 없겠군요. 한편으로는 우리 비석에 있는 인물에 관한 내용을 오로지 중국의 기록과 그들의 노력에 기대려는 태도는 웬지 씁쓸합니다. 우리는 눈과 손이 없는 것 같아서...
야스페르츠// 투후로 임명된 것도 거의 죽기 직전의 일이었다고 하면서 투후의 지위를 낮추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비쳐집니다. 한무제가 죽기 직전 곽광과 투후에게 섭정을 당부한 것을 거절한 것은 투후의 자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싶은데 ... 투후가 그리도 높은 자리로 보이나봅니다.
sorgai // "역사방송에서 중국의 학자?가 투국에 흉노인이 거만이었다는 설명은 이유가 있을 것" 이것이 님께서 하신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저 설명의 근거로 댄 것들이 모두 사실 무근임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이것이 제작진의 농간인지 아니면 진짜 저 중국학자가 거짓말을 한 것인지는 모릅니다. 이런 "주장"을 왜 우리가 신경을 쓰고, 우리가 그 이유를 찾아야 합니까? 그 이유를 찾는 것은 주장을 한 사람이 할 일입니다. 아니면 그것에 관심이 많으신 님께서 하시길 바랍니다.
증거가 부족한 주장은 그냥 기각하면 땡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힘을 낭비해가면서 증거조차 거짓으로 댄 주장을 옹호해줄 필요는 없습니다.
야스페르츠// 형식적으로는 님의 주장은 쿨하고 옳습니다. 그러나 기계적인 논리죠. 적어도 비문에 등장하는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남 얘기하듯이 남의 입과 손에 결론을 맡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어찌 보면 우리가 해야할 일을 중국인이 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자기를 아는 일을 남에게 맡길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나저나 거짓주장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인지 알려주시죠. 물론 직접 확인하신 내용일 것으로 믿습니다만... 필요하면 방송국에 문의해볼랍니다.)
sorgai // 이 댓글의 맨 위로 올라가 보시면 다 제시가 되어 있습니다. 뭐, 일단 다시 제시해드리죠.
프로그램에서, 중국 교수의 인터뷰를 통해 한서와 사기에 각각 3만과 5만이 산동의 투국에 이주했다는 내용이 자막으로 방송되었습니다. 그래서 한서와 사기의 흉노열전, 무제기, 김일제전 등 김일제와 관련된 모든 항목을 찾아 본 결과 저런 내용은 없다는 것을 확인했죠. 3만, 5만이라는 숫자 자체도 나타나지 않고, 물론 투국에 이주했다느니 하는 내용도 없습니다. 물론, 주석까지 확인한 것은 아닙니다만, 일반적으로 사기나 한서를 이야기할 때는 주석은 빼고 말하는 것이니 거짓 증거라 말해도 과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글쎄요. 아마도 산동의 김씨 일족의 족보에 기록되어 있거나 산동의 투지역 향토역사에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중국에 거주하는 김씨 일족의 족보에서 투후의 행적을 기록한 내용을 본 기억이 납니다. 향토사에는 기록이 있어도 사마천이 기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면 ... 사마천이 거짓말 혹은 오류를 남겼어도 인정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군요. 하기사 공자까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해도 성인의 말씀으로 여겨서 다들 지당대신이 되는 모양새니까.
단순히 사서에 그 내용이 없다고..무시할 수는 없죠...한서에 나온 김일제전에 보면 그러할 가능성은 농후합니다...그당시 김일제와 그 후손들은 실세였으며..한서 김일제전을 보면 그러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죠...역사에서 단순한 운 이라고 보기는 힘들뿐더러 ..단순한 운 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입증해야 하는게 정상적이고 상식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사서에 그러한 내용이 없으니..입증의 책임을 묻는다면...사서에 화장실 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분은 화장실에 전혀 가지 않았다...이것과 뭐가 다릅니까..
사서는 상징적인것만 기록할 뿐이죠.
사서에 없으니 무시해야 한다고 하면..역사 매니아가 아닌 사서 매니아죠
그리운길 님// 죄송합니다만, 제 글을 똑바로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기록이 없다고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중국인 사학자가 말한 내용이 "거짓말"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중국인 사학자는 분명하게 어떤 책에 어떤 내용이 있다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확인해 봤더니 없다는 말인데, 여기서 무슨 기록이 없다고 없는게 아니다는 말이 나옵니까 ^^;;;
sorgai// 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향토 기록이 있건 말건 그건 "지금 이 문제"에서는 제가 신경쓸 일이 아닙니다. 저는 그 중국인 사학자가 한 말의 진위를 논했을 뿐입니다.
솔직히 기가 막히네요. 수많은 자료와 사료를 통해 검토된 많은 학자들의 의견은 가볍게 깔아뭉개시는 분께서, 중국인 사학자의 명명백백하게 거짓말을 근거로 제시한 주장에는 "그래도 뭔가 근거가 있을 것이다"라고 실드를 치시다니요.
그냥 내가 믿고 싶어서 믿는다고 말씀하십시오. 구차하게 이게 뭡니까?
역사매니아 가 아닌 사서 매니아...그 시각에서 벗어나지 않으시는 군요..물론 그러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습니다....하지만 ..서사에 나온 내용으로 봐서는 그 학자분의 발언 내용이 사실이 아닐수는 있어도 틀렸다고 볼수는 없죠..
사서에 없으니 무시해야 한다....그렇게 볼수 없는 이유가....틀렸다고 말할수가 없기 때문이죠..
님이 말한건 없다이지만....그렇게 봐서는 안 되는 이유가 ..또한 님이 말한 사서의 내용때문이기도 하죠...
그리운길// 이보세요. 제가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서 사서매니아니 하는 말 하지 마십시오. 저는 기록이 없다고 무시한 적도 없고, 단지 그 중국 사학자가 거짓말을 했다는 말을 하는 것 뿐입니다. 제가 김일제 관련 내용을 부정하는 것은 기록이 있고 없고 같은 단순한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글귀 좀 헤아리고 답글을 쓰세요..
실수, 착각 이라는 것이지 거짓은 아니라는 겁니다.
거짓은 역사학자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고,,다큐 프로 전체의 내용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
실수, 착각의 차원인지..거짓의 차원인지...헤아리면서 다큐를 보시고,,얘기를 하십시요..
독심술이라도 하십니까? 실수인지 거짓말인지 무슨 근거로 판단하십니까?
그리고 거짓말이던 실수던, 틀린 근거를 대는 주장을 왜 우리가 나서서 옹호해줘야 하는 건가요? 하다못해 사서에 나온 내용이 그 주장과 어느 정도 관련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전혀 관련이 없는데 말입니다. 역사적 사실도 관련이 없고, 주장의 근거도 틀렸는데 그걸 옹호하시겠다구요?
그냥 믿고 싶어서 믿는다고 하십시오. 그리고 그런 자세로 역사 운운 하시지 마십시오. 그건 종교지 학문이 아닙니다.
조금만 관심갖고 생각하면 다 알고, 사서를 조금만 훓어봐도 다 아는 사실들을
인터뷰 잘못했다고 학자을 매도하는 방향으로 흐르는지...
다큐 내용 중에서도 걸려서 봐야 한다는거 상식 아닙니까..사서를 얘기하면서 자기의 생각을 은근슬쩍 얘기하는건 학자들의 본능에 가깝고 절제를 해야하지만, 그렇지 못한 미숙함도 있죠..미숙함 때문에 전체내용을 폄하해서는 안 되죠
사서에 있는 기록들만 얘기한다면 그게 학문입니까..종교지..
사서에 나와 있는 내용과 관련이 없다구요....??...그건 님의 융통성없는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죠..그 프로의 주요흐름도 제대로 간파하지도 않으셨군요
글쎄요...그 프로와 그 프로 후속편의 의도는..
김일제 -- 산동지역의 김일제의 흔적 -- 낙랑국 -- 가야, 신라의 연결고리를 얘기하는걸로 압니다....또한 현재 사학계도 그 쪽에 관심이 많은걸로 압니다..
야스페르츠// 님의 주장은 '중국인 학자의 설명과 근거가 틀렸다는 것이지 흉노 거만이 산동에 살았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이해되는군요. 그런데 제가 수많은 자료와 사료를 통해 검토된 많은 학자들의 의견을 깔아뭉겐 기억이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님께 해야할 말인 것 같은데 말이죠. 그렇게 말씀하시려면 일전에 금문해석을 한 학자의 이름부터 알려주시죠. 차라리 그분과 대화하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수많은 학자간에도 의견이 다른 것은 다반사지만 발전된 근거가 발견되면 기존의 주장은 햇빛에 달빛이 사라지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학문은 다수결이 아니니까요.
우리 역사에서는 '투후'라는 존재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이는데도 정작 이분에 관한 연구는 최근에야 시작되었다는 것은 우리 역사인식과 연구의 반성을 촉구하는 사건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신라인에게는 투후라는 존재는 자신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것이었으며, 이는 <大唐故金氏夫人墓銘>과 "김행거 묘지(金行擧 墓誌)"에 "김일제"와 "금천(金天)" "휴도(休屠)"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어서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투후의 전반에 대해 사마천이 남긴 기록외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흉노 거만은 우리의 무지 가운데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겠죠.
투후에 대한 기록이라고는 최근에 당의 묘비명이 발견되기 이전까지 문무왕릉비 달랑 하나였는데 무슨 절대적인 비중입니까? 수많은 학자들, 심지어 100년이 넘도록 쌓인 전 세계 고고학의 성과를 부정하는 분께서 하실 말씀이 아니십니다.
귀하와는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를 못느끼겠네요. 아무도 듣지 않는 주장, 혼자 열심히 하십시오.
야스페르츠// '투후에 대한 기록이라고는 최근에 당의 묘비명이 발견되기 이전까지 문무왕릉비 달랑 하나'였던 것이 어느 덧 3개가 되었네요. 앞으로도 더 나올 것 같은데... 투후란 존재는 신라의 시조로 인식되는 터에 왕릉비에만 쓰여있다고 해도 비중이 가벼운 것일까요? '달랑 하나'라는 님의 주장에 역사를 보는 시각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어쨌거나 이번에도 그 학자님의 이름은 알려주지 않으시는군요.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주장도 반박받는 터에...
토론이 좀 과열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야스페르츠님, sorgai님, 그리고 그리운길님께서는 주의해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글을 쓴 이유는 방송 내용이 사실이라는 전제에서의 가능성을 언급하고자 함입니다. 방송에서 언급한 구체적 내용을 확인하지 않은 제 불찰도 있지만, 어쨌든 방송내용의 그 부분은 거짓이므로 제가 언급한 가능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북방문화가 유입될 수 있는 경로는 김일제가 아니어도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방송을 다시 보니 김씨 족보를 근거로 진행하고 있던데 문제가 많습니다. 족보란 과장도 많고 새로이 만들거나 심지어 사들이기도 하는데, 그것도 수백년 후에 등장한 족보를 바탕으로 역사를 추적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습니다.
비문 문제도 그렇습니다. 기존에 어느곳에서도 언급되지 않던 투후의 존재가 삼국말기의 시점에서만 등장한다는 것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문의 투후만을 기준으로 하시면 돌부터님의 주장이 타당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비문에 거론되는 선조들의 기록, 즉 화관지후라는 말을 보면 투후의 선대는 결코 우리가 인식하는 흉노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흉노라는 것이 중원지방을 벗어난 중국의 선조도 흉노가 된 사례가 있고, 오늘날에도 흉노의 정확한 실체는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흉노를 다민족연합체로 보고 있으니 자기의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하는 다민족 연합체로 볼 수도 있겠지요.)
이런 화관지후라는 말에 대해 우리가 연결선상에서 파악한다면 고대 한민족의 나라들이 고대삼황오제에 두고 있는 것을 사대로 규정짓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흉노 - 낙랑 - 신라, 가야 로 인식하였지만...흉노에서 낙랑으로의 연결고리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불완전했는데..투후 김일제와 그 후손들이 매개체로 부각됨에 따라 어느정도 논리가 완성되었다고 보는데요...
다큐를 보실때 주요흐름을 보셔야지..개별인터뷰나 개별사실들을 위주로 보신다면 볼만한 다큐는 없는걸로 압니다...
중국의 고대기록에도 대륙을 탈출하여 흉노가 된 것으로 기록된 예가 있습니다. 그만큼 흉노는 중국의 역사에서 낯선 존재가 아닙니다. 고구려가 다물을 내세워 고토회복을 기도했던 것처럼 흉노 속에서도 시도를 했던 것이 투후의 예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결국 투후의 자손들은 왕망과 함께 전한을 뒤엎고 신제국을 세우는 것이겠고, 오래지 않아 다시 실패하게 되자 또 중국땅을 떠나 현재의 신라땅까지 오게 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다큐 뿐 아니라 역사 전반도 흐름을 살피고 그 속에 있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역사적 사실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