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 중에는 기사 작위를 받은 화가들이 몇 있습니다. 작위가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대에 어떤 형태로든 그 공로나 영향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언뜻 떠 오르는
이름을 보면 최초로 작위를 받은 프레데릭 레이턴, 그리고 알마 타데마, 프랭크 딕시, 애드윈 랜시어가 있는데
조지 클라우센 (Geoge Clausen / 1852~1944)도 그 중 한 명입니다.
등불 옆에서의 독서 Reading by Lamplight / 1909
턱을 괴고 있는 독서에 빠진 여인의 주변에 고요와 평화가 내려 앉았습니다. 커튼 사이로 보이는 창 밖은
푸른 빛이 돌고 있습니다. 혹시 책을 읽다가 밤을 넘은 것은 아닐까요?. 해가 뜨기 바로 전 하늘은 코발트
색으로 일어납니다. 그 때 세상은 푸른 색에 담기죠. 가슴 두근거리며 책을 읽다 보면 날이 밝은 적이 언제
였던가 싶습니다.
런던에서 태어난 클라우센의 아버지는 덴마크에서 이민 온 실내 장식가였고 어머니는 스코틀랜드 출신
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클라우센을 자신과 같은 실내 장식가로 키우고자 14살이 되던 해에 장식가들의 회사에
도제로 보내서 드로잉 수업을 받게 합니다. 간혹 화가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자신의 직업을 아들에게
따르게 하는 아버지들이 있는데,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이 있기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삭 줍는 사람들 Gleaners / 1882
추수가 끝난 밭에서 이삭을 줍는 풍습은 어디를 가도 같은 모양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이삭을 주울 수 있는
계급과 사람들이 정해져 있었지만 영국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림 속 이삭을 머리에 이고 있는 여인의
눈을 봤더니 눈길을 얼른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입성을 봐서는 이삭까지 주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이삭을 머리에 올린 모습이나 손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 아무래도 여인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여인 앞에 이삭 뭉치를 만들고 있는 소녀의 뒤 모습은 짜증이 어려있군요. 그나저나 여인이 쓰고 있는 모자가
참 재미있어서 ‘이삭 운반 전용 모자’라고 제가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보자기 속에 모자가 숨어
있는 것이라고 ‘바로 잡아’ 주었습니다. 그런가요?
클라우센의 운명을 바꾸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문 장식을 하러 간 집이 있었는데 집 주인이 아카데믹 화가로
이름 높은 에드윈 롱(Edwin Long)이었습니다. 롱의 작품도 알마 타데마나 윌리엄 고드워드와 비슷합니다.
롱은 클라우센의 솜씨를 보고 전업 화가로서 성장할 수 있는 재주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클라우센
에게 화가로서의 길을 걷도록 권유합니다.
꽃 파는 집시 여인 Flora, The Gypsy Flower Seller / Water color on Paper / 30cm x 26cm / 1883
삶에 지친 여인의 모습입니다, 헝클어진 머리와 남루한 옷 그리고 검붉게 그을린 얼굴과 투박한 손등에 모진
세월들이 내려 앉았습니다. 그러나 노란 꽃 한 송이를 굳게 쥐고 있는 손과 파란 눈동자 그리고 다문 입술을
보다가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 정도 삶의 무게쯤이야 하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뒤에 꽃을 사러 오는 여인이
오고 있습니다. 아주머니, 눈에 힘 그만 주시고 꽃 파셔야죠.
오늘날 왕립미술학교 (Royal College of Art / RCA)의 전신인 국립미술학교 (National Art School) 야간부에
다니던 클라우센은 롱의 화실에서 일을 하며 그의 추천으로 2년간 사우스 켄싱턴 예술학교 장학금을 받게
됩니다. 15세부터 21세가 되던 해까지 클라우센의 회화공부는 대단히 성공적이었습니다.
겨울철 농사 Winter Work / 196.85cm x 233.68cm / 1884
밭에 널린 일이 산더미 같은데 아이는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딸이 안쓰럽게
보이는 모양인데 겨울 찬 바람에 얼굴이 붉게 그을린 엄마는 생각이 복잡합니다.
‘집에 가서 할 일 많은 거 알지?’
겨울의 차가움과 흐린 날씨 그리고 힘든 시골 생활을 표현하기 위해 부드러운 색을 사용했는데 장 바스티엥
르파주의 영향입니다. 자료를 보면 작품 속에서 자르고 있는 것은 양의 먹이라고 합니다. 저것이 무엇인데
양이 먹는 것일까요? 그림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양도 길러야 할 모양입니다.
공부를 마친 클라우센은 23세가 되던 1875년부터 2년간 벨기에와 네델란드 지방을 여행합니다. 여행 중에
엔크워프 아카데미에서 잠시 공부를 하게 되는데 이 때 호쾌한 풍경과 세부 묘사가 특징인 네델란드
자연주의영향을 받습니다. 1876년 클라우센의 작품은 로얄 아카데미에 출품이 되었고 호평을 얻었습니다.
시작이 좋았죠? 그러나 로얄 아카데미가 시골의 팍팍한 삶을 묘사한 그의 후기 작품까지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풀 베는 사람 The Mowers / 31.5cm x 35cm / 1885
햇빛 좋은 가을, 추수하는 사람들 몸에서 활기가 넘칩니다. 키 보다 더 큰 낫이 이제는 낯설지 않지만 여전히
작업하는 모습을 보면 저는 겁이 납니다. 우리 낫에 비해 효율은 좋을지 모르겠지만 살벌한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밭 너머 사람들은 흰색으로 적당히 묘사 된 것 같아도 모자의 그림자만으로도 생명력을 얻었습니다.
1881년 아그네스 웹스터와 결혼을 한 클라우센은 시골로 이사를 해서 전원의 풍경을 본격적으로 담기 시작
합니다. 그리고 다음 해 파리로 건너가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몇 달 동안 공부를 했습니다. 이 때 선생님이
윌리엄 부게로입니다. 요즘 이렇게 저렇게 제 블로그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 부게로와 르파주입니다.
문 앞의 소녀 The Girl at the Gate / 171.45cm x 138.43cm / 1889
‘무슨 일이신가요?’
마당 안을 슬쩍 드려다 보고 있는데 소녀가 의심 많은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마당에 풀어 놓은 닭,
울타리 밑의 흰 꽃들, 붉은 색 흙이 주는 생명감과 달리 소녀의 표정은 좀 지쳐 보입니다. 소녀를 뒤에서 바라
보는 여인의 표정에도 근심이 살짝 어렸습니다. ‘빨리 시집을 보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겠지요?
그림 속의 여인은 메리 볼드윈이라는 클라우센 집안의 보모입니다. 이 작품의 무대가 되는 지역은 클라우센이
살았던 쿡햄 이라는 곳인데 메리가 쿡헴 출신이었죠.
파리에서 클라우센은 야외의 풍경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묘사한 르파주의 작품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리고
그의 작품에 르파주의 느낌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걸인 소녀 Pauvre Fauvrette / 1882 / 장 바스티엥 르파주
갈색 눈동자 Brown Eyes / 1891
흑요석 같이 빛나는 아이의 눈에 비친 것을 알아내고 싶었지만 쉽지 않습니다. 꿈을 꾸고 있는 걸까요?
모험이 뒤 따르지 않는 꿈은 없습니다. 모험은 때로 목숨을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꿈을 꾸는 것은
젊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특권이기도 하고 나이를 먹지 않는 비법이기도 합니다. 나이를 먹으면 걸만한
목숨도 없기 때문입니다.
르파주의 ‘걸인 소녀’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되는 이 작품은 인상파 화가들이 사용했던 기법으로 배경을
처리했습니다. 1880년대 초기부터 클라우센은 일상의 시골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전원 자연주의자’로
작품 활동에 몰두하기 시작합니다.
건초 만드는 사람들 The Haymakers / 1903
건초를 만들다 점심을 먹기 위해 집에 들어오는 순간을 화폭으로 옮긴 것 아닐까 싶습니다. 슬쩍 관객을 향해
얼굴을 돌린 남자를 보다가 우연히 찍힌 사진 속 인물들이 떠 올랐습니다. 화면 속에는 햇빛 아래에서 빛을
반사하는 사람과 실내로 들어오면서 빛을 빨아 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작품 구도는 아래의 작품과도
비슷합니다
창고 문 The Barn Door / 76.2cm x 63.5cm
인상파 화가들이 발코니에서 빛의 효과를 보았던 것 처럼 클라우센은 외양간이나 그늘진 창고의 입구를 묘사
하면서 빛의 효과에 깊숙하게 매료되었습니다. 안과 밖에서 빛에 따라 변하는 모습과 효과를 화폭에 옮기는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던 클라우센은 ‘반 인상파 기법(Semi – Impressionist Style)’이라고 일컬어지는
기술을 선 보였습니다. 제가 이해한 범위로는 인상파와 사실주의의 절충 정도 아닐까 싶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이삭 줍는 사람들 Gleaners Coming Home / 1904
이 정도면 이삭을 줍는 것이 아니라 정식으로 추수를 한 것 같습니다. 어깨와 머리, 그리고 팔에 매고 진 이삭
무게 때문에 여인들의 거친 숨소리가 화면을 타고 흘러 나오고 있습니다. 나뭇잎에 부서진 햇빛은 여인들이
돌아 가는 길 위에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데----, 그래서인가요, 여인들의 퀭한 눈들이 더 크게 다가 옵니다.
이삭 줍는 사람들의 귀가 The Gleaners Returning / 1908
이 작품도 위의 작품과 같은 구도와 표현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클라우센은 풍경화와 인물화에 이르기까지
빛과 대상에 대한 효과를 확대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는 빛이 느껴집니다.
1903년 클라우센은 로얄 아카데미의 회화 교수가 됩니다. 그의 강의는 명 강의로 소문이 났고 강의 내용이
책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책 또한 대단한 성공이었습니다. 그림도 잘 그리고, 강의도 잘 하고 그리고 명예도
확실히 쌓은 클라우센 선생님, 복이 많으신 분이셨습니다.
울고 있는 젊은이 Youth Mourning / 1916
눈부시게 흰 나체의 여인이 십자가 앞에서 고개를 묻고 울고 있습니다. 세상은 어두운데 여인의 몸만 하얗게
빛나고 있습니다. 순백의 몸입니다. 그렇다면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은 젊은이의 몸이겠지요. 울고 있는 여인
건너로는 검은색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강 너머는 죽음의 신 하데스의 땅이겠지요. 여인의 울음소리가 멈추지
않는 것은 전쟁에서 무참하게 사라진 수 많은 젊은 영혼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계속 남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흰 몸에서 이렇게 처절한 슬픔을 느껴 본 것은 처음입니다.
이 작품은 제 1차 세계대전 중 1916년, 서부전선에서 목숨을 잃은 수 많은 젊은이들을 위한 클라우센의
조사(弔辭)입니다. 개인적으로 클라우센은 1차 대전 중 딸의 약혼자를 잃기도 했습니다.
겨울 아침 길 The Road, Winter Morning / 1923
초겨울 아침, 냉랭한 기운이 가득하지만 푸른 옅은 안개가 부드러운 커튼처럼 세상을 덮었습니다. 아침 일찍
길을 떠나는 마차 옆으로 들 꽃들이 가득합니다.
‘동산에 아침 햇살, 구름 뚫고 솟아와, 새하얀 접시 꽃 잎 위에 ---‘ 글쎄요, 차가운 공기를 가슴 속 깊이
들이키고 천리길이라도 걸어 보고 싶은 아침 풍경입니다.
그림 속에 햇빛을 채우는 클라우센의 능력은 더욱 세밀해 졌습니다. 1차 대전 중에는 종군화가로도 활약한
그는 전쟁이 끝나자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중의 한 명이 되었고 수 많은 명예가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 납니다. 세상을 즐길 만큼 되는 나이 아닌가요?
어린이들과 장미 Children and Roses / 1899
평온하게 화가로서의 일생을 마친 클라우센이었습니다. 가끔 인생에 극적인 요소가 많았던 화가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제 3자인 저는 재미있지만, 당사자가 쏟아 붓는 에너지를 보고 있으면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작품으로 다시 탄생되어 우리를 전율케 하지만요. 클라우센은 그런 에너지를 조금씩 조금씩
끝없이 우리에게 보여 주었던 화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