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초창기에 있어서 나타난 성만찬은 중세기 가톨릭교회
의 말씀과 성만찬의 불균형을 회복하고 초대교회로 돌아가려는 운동이
었다. 그들은 말씀이 신앙과 예배의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의식과 형식주의 예배에서 말씀 중심의 예배로 복귀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결코 성만찬을 경시
한 것은 아니었다.
개혁자들에게 성만찬은 초기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기독교의 개혁이 아무리 거세게 일어나는 현장에서도 성
만찬에 대한 신학적 내용은 초대교회의 그것과 큰 차이는 없었다.
60) 정장복, op.cit., p.194.
그러나 개혁의 주역들은 성만찬론을 자신들의 특유한 입장과 신학에
따라 재조명하면서 최우선적인 신학적 과제로 삼게 되었다. 그 이유
는 예전을 통하여 구속의 그리스도를 언제나 새롭게 만날 수 있으며,
한 인간과 주님과의 생동력있는 역사적 연접(historical link)을 이룩
할 수 있기 때문이다.
61) Oscar Cullman, 원시기독교 예배 , 이선희 역 (서울:대한
기독교서회, 1984), p.17.
이와 같은 맥락에서 종교개혁자들의 성만찬의 견해를 다음에 살펴보기로 한다.
① 루 터
루터(Martin Luther)는 말씀은 주님이 제정하시고 구원의 은총을
전달해 주는 방편이 되는 성례전을 절충해 주는 것이므로 말씀이 없는
성례전은 있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62) 정용섭, 교회갱신의 신학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91),p.143.
루터는 1530년에 저술한 그의 논문 교회의 바벨론 포로
(The Babylonish Captivity of the Church)에서 로마교회의 성례전 제
도와 신학적 과오를 지적하면서 로마교회가 범한 세가지 잘못을 논박
하였다. 첫째는 평신도에게 떡만을 허락하고 포도주는 주지 않은 것
이고, 둘째는 마술적인 화체설의 과오이며, 세째는 성례전을 희생의
반복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과거 가톨
릭의 전통을 모두 개혁하고자 한 것은 아니고, 다만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개정하고자 하였다. 예를 들어 성찬을 받기 전에 시행
한 부분 중 불을 켜 놓는 것, 제복의 사용, 향을 피우는 것은 그대로 존속
시켰으며 이에 반해 성찬 예배에서 성별의 기도는 변화시켰으며, 화체론을
수정하여 공재론을 수립하였다. 루터는 초대교회에서 사용한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었고, 처음에는 매일 성찬식을 거행하라고 권했지만 매주일 시행하
라고 권장하였다. 63) 박은규, 예배의 재발견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 1988),p.122.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 물질이 있는 곳에 현실로 임재한다
는 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주장한다. 즉 주님의 몸이 성찬 물
질의 안에, 밑에, 함께 (in, under, along with) 계신다고 했는데, 이
는 14세기에 있었던 오캄의 유명론에서 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루터는 믿는 성도들이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그
리스도를 접할 수 있도록 되는 것이며,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의 임재를 믿었고, 공간 속에 연장된 몸 (body extended in apace)
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64) 박형용, 루터와 칼빈의 성례관 비교
, 1968:로고스, ⅴ.20 (서울:크리스챤 헤럴드사), pp.52-53.
루터는 이것이 내 몸이다 라는 주님의 제정어에서 ...이다 를
윤리적,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의 반복과 화체교리를
거절했다. 루터의 성찬에 대한 견해는 여러번 변화가 있었다. 첫째
는 1519년 성찬에 관한 교설 을 쓴 때이고, 둘째는 1520-1529년 교
회의 바벨론 포로 를 쓴 때(쯔빙글리와 말부룩 회담을 하기까지)이고,
세째는 말부룩 회담 이후이다. 65) 전경연, 루터신학의 제 문제
, 복음총서 11 (서울:기독교서회, 1974), p.76.
첫째, 성찬에 관한 교설 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떡과 포도주
아래 두고, 성물인 떡과 포도주는 도장(siggel)으로 그 아래 참된 그
리스도의 몸과 피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성례는 본체의 표징이라고
했다. 66) Ibid.
둘째, 교회의 바벨론 포로 에서는 로마교회의 화체설을 반대하고
성찬의 결정적 요소는 신앙이라고 했다. 성찬은 약속이며, 성찬의 은
혜에 도달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와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앙에 의
해서라고 했다. 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첫째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둘째가 우리의 신앙이며, 세째가 사랑이라고 했다. 67) Ibid., p.78.
세째, 말부룩 회담이후에 성찬에 관한 루터의 견해는 공재설로 형
성되었다. 또한 그는 쯔빙글리의 견해에 반박했는데, ① 떡과 포도주
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표상한다는 것과 ② 이것은 내 몸이다 를
이것은 내 영적 몸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에 반박했다.
루터는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평신도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서도 피를 흘리셨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루터는 성만찬에서 평신도를 제외시키는 행
위는 사악한 행위라고 하였으며, 그러한 권한은 천사에게도 없고 교황
이나 공의회의 권한에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68) 지원용, 루터의
사상:신학과 교육 (서울:컨콜디아사,1982), p.141.
이처럼 루터는 평신도들의 성만찬 참여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성
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평신도들의 권리는 교황이나 공의회의 사제가
빼앗을 수 없는 것임을 역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