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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화가들의 작품은 선입견 때문인지 몰라도 무겁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깊숙한 곳으로 끌어 당깁니다.
그래서일까요, 한 번 눈길을 주면 좀처럼 그 마력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잊을 만 하면 머리 속을
툭툭 건드리며 ‘요즘, 우리 잊었어?’ 하는 느낌이 듭니다. 잊기는 --. 그런데 아주 밝고 유쾌한 작품을 남긴 화가가
있습니다. 나중에는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에 앉았지만 행복한 내용의 작품을 남겼던, 그리고 다른 러시아 화가 들과도
구별되는 보리스 쿠스토디에프 (Boris Kustodiev / 1878~1927)입니다.
볼가강에서 At Bolga
러시아 화가 이삭 레비탄의 작품 중에도 비슷한 위치에서 거대한 회색 구름 밑으로 흐르는 볼가강을 묘사한
작품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물빛과 풀빛 그리고 아득한 먼산의 푸른빛까지, 화면 속 분위기는 느긋하고
사랑스럽습니다. 흰 허리의 자작나무와 성당의 첨탑, 강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볼가강, 끝없이 펼쳐진 땅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것들이지요. 기타를 치다 내려 놓고 건너를 바라보는 남녀의 시선이 닿는 곳이 궁금합니다.
언덕에서 저렇게 엎드려 지나가는 배와 강의 이야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한나절을 보내고 싶습니다.
쿠스토디에프는 아스트라한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그 지역의 신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문학사와
철학을 강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쿠스토디에프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납니다. 신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하던 쿠스토디에프에게 인생의 길을 결정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러시아 방랑파의 미술 전시회를
보게 된 것이죠. 작품에 담긴 사실적인 묘사는 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겨우 아홉 살의 쿠스토디에프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아홉 살 때 저의 꿈은 빵집 주인이었습니다. 세상에는 꿈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끝없이 꿈을 바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꿈을 꾸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요.
마슬레니차 Maslenitsa
마슬레니차는 춘분 무렵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는 러시아인들의 축제입니다. 일주일간 행해지는 축제 기간 중
많은 파티가 벌어지며 사람들은 실컷 마시고 신나게 놀았다고 합니다. 아직 눈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지만 이제
봄에게 자리를 내 주어야겠지요. 동화 속 세계처럼 선명한 색으로 묘사되어서 춥다기 보다는 오히려 환하게 다가
옵니다. 혹한의 겨울 동안 집안에 갇혀있다가 밖에 나오면 누구를 만나도 반갑겠지요. 생명이 시작되는 시기는
늘 소란스럽고 유쾌합니다.
생계를 책임지게 된 쿠스토디에프의 어머니는 부유한 상인의 집에 달린 작은 방 한 칸을 빌려 생활합니다. 어린
쿠스토디에프가 생활의 양과 질에서 엄청난 차이가 났던 ‘주인집’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 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꾸준하게 ‘주인집’의 생활을 관찰했고 나중에 그의 작품의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마슬레니차 (참회의 화요일) Maslenitsa (Pancake Tuesday) / 1916
마슬레니차 둘째 날은 유희의 날입니다. 유희의 날에는 러시아의 민속놀이가 시작되는 날인데 젊은 남녀들은
얼음 덮인 산에서 미끄럼을 타거나 썰매를 탔답니다. 앞 부분에는 마차 썰매를 타는 모습이 있지만 저는 왼쪽
뒤편 언덕에서 미끄럼을 타는 모습에 눈길이 갑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눈 덮인 비탈을 얇은 판에 앉아 미끄러져
내려올 때는 한없이 이렇게 내려갔으면 했었지요. 집에 와서 젖은 옷 때문에 혼나는 것은 다음 문제였습니다.
이야기 소리는 명쾌하지 않지만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건너오고 있습니다.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쿠스토디에프의 어머니는 아들의 꿈을 위해 미술 개인 레슨을 받게 해줍니다. 세상 모든
어머니의 마음은 어디나 같습니다. 그를 지도한 선생님은 얼마 전 소개한 바실리 페로프의 제자였던 블라소프
였습니다. 훗날까지 그가 스승을 따뜻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블라소프는 좋은 선생님이셨겠지요.
슈로브타이드 Shrovetide
슈로브타이드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 전 3일을 말하는데 참회의 3일이라고 합니다. 러시아에서는
가장 기쁜 축제였다고 합니다. 그 기간은 겨울과 확실하게 작별하는 기간이었습니다. 흰 눈과 대비되는 화려한
색상의 옷과 장식에는 이미 봄이 왔습니다. 어린아이는 아이대로, 좌판을 벌인 사람들은 또 그들대로 모두들
신이 난 모습입니다. 눈이 쌓인 나무들은 땅에서 시작되어 하늘로 오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겨울이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이 되는 건가요
18세가 되던 1896년, 신학교에서 교육을 끝낸 쿠스토디에프는 본격적인 미술 공부를 위해 상트페테르스부르그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합니다. 그 곳에서 그를 지도한 선생님은 레핀이었습니다. 쿠스토디에프에 대한
레핀의 사랑은 각별했습니다. 미술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자연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제자에게 레핀은
큰 희망을 걸었습니다. 결과를 놓고 본다면 레핀의 희망은 이루어졌습니다.
제국의회 100주년 회의 (일리야 레핀) Ceremonial Meeting of the State Council / 1903.
레핀은 제국의회 100주년 기념 작품을 의뢰 받았는데 쿠스토디에프를 같이 작업할 조수로 임명합니다. 작업을
스승과 함께 하면서 그는 초상화에 대한 보다 깊은 공부를 하게 됩니다. 훗날 그의 초상화는 심리적인 면까지
담고 있다는 평을 얻었는데 이 작업이 기초가 되었던 것이죠. 레핀의 오른팔 역할을 훌륭히 해 낸 쿠스토디에프
였습니다.
시장 The Fair / 1908 / Gouache on paper
시장이 재미있는 이유는 내 안에 숨어 있는 소유욕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과욕이 아니라면 눈으로,
말로 즐기는 소유욕은 아주 건강한 것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시장에 가면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됩니다.
오른쪽 여자 아이는 인형들 앞에서 발길이 멎었습니다. 왼쪽 사내아이가 서 있는 곳은 먹을 것을 파는 곳처럼
보입니다. 농기구를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사람 사이를 다니면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도 보입니다. 아마
홍보하는 역할이겠지요. 가운데 두 분은 아주 심각합니다. 잠깐 들어볼까요
자네 지난 번에 빌려간 돈, 왜 아직 안 갚는 건데----
뭐라구? 잘 안 들려.
1903년 여름, 쿠스토디에프는 졸업 작품을 구상하기 위해 리빈스크에서 고향인 아스트라한까지 배를 타고
볼가강을 따라 내려갑니다. 강변을 따라 늘어선 색색의 시장들과 고요한 시골길, 시끌벅적한 강가 선창들의
모습은 그의 머리 속에 오랜 기간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해 그는 결혼을 합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아내와
아이를 모델로 한 것 들이 있지만 결혼 생활이 어떠했는지는 자료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1904년
학교 후원으로 프랑스와 스페인 여행길에 오릅니다.
아침 Morning / 1904
엄마가 아침 목욕을 시키는 중이군요. 아주 튼실한 아이입니다. 욕조의 모습이 큰 조개 껍질을 닮았습니다. 예전
우리 어머니들은 붉은 색 고무 대야를 썼었죠. 빨래통으로, 목욕 욕조로 그리고 가을이면 김장 김치를 버무리는
용도로 쓰였던 전천후 붉은 색 대야가 생각납니다. 아이는 물이 좋고 엄마는 그 모습을 바라 보는 것이 좋습니다.
빛도 공기도 모두 아늑한 아침입니다. 파리에서 머물 때 제작된 이 작품은 쿠스토디에프의 것 중에서 가장
서정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파리에서는 잠시 르네 에나르 밑에서 공부를 배웁니다. 이어진 스페인 여행에서는 벨라스케스의 작품에 감탄을
합니다. 여행하는 기간 중에 많은 작품들을 그리고 명승지 이 곳 저 곳을 다녔지만 정작 고국 러시아로 돌아
가고 싶은 마음은 커져갔습니다. 쿠스토디에프의 작품을 보면 그가 ‘축복받은 우리의 러시아 땅’이라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러시아의 모든 것을 정말로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잠든 상인의 아내를 훔쳐보는 도모보이 Domovoi Peeping at the Sleeping Merchant Wife
옛날 이야기의 한 장면 같습니다. 침대에서 잠이 든 여인은 쿠스토디에프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계층인 상인의
아내입니다. 벽난로의 열이 높았는지 이불이 흘러내렸습니다. 이 때 도모보이가 나타났습니다. 슬라브 민족들
사이에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도모보이는 집마다 살고 있는 ‘도깨비’입니다. 대개 남성인 이 ‘집도깨비’는
나쁜 짓을 하지는 않지만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대개 집 주인이 잠든 모습을 지켜 본
다고 하는데 --- 도깨비인데도 불구하고 등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음 ----, 여인의 몸을 본지가 오래되었나요?
1905년 1월, 러시아 동궁 앞에서 평화 시위를 벌이던 군중들에게 제국주의 군대가 무차별 발포를 하면서 시작된
혁명은 러시아 사회의 모든 것을 흔들었고 쿠스토디에프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혁명 기간 중 그는
풍자 잡지 ‘Zhupel (귀신)’과 ‘Adskaya Pochta (지옥의 편지)’에 생생한 캐리커처를 연재합니다. 또한 전제주의에
대항해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모습을 그림에 담아 냈습니다. 그러나 혁명은 그 해가 가기 전에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쿠스토디에프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추수 Harvest / 1914
해는 서쪽으로 지고 있는데 아직 추수해야 할 밭은 까마득합니다. 흐르는 땀을 닦느라 일어선 여인들의 손에는
낫이 들렸습니다. 수건도 아니고 옷에 그냥 문지르면 끝입니다. 밀을 베느라 허리를 숙인 여인들 위로 저무는
햇빛이 붉게 남았습니다. 아스라한 푸른 지평선 너머 하늘인가 싶었는데 그 곳도 땅의 색깔과 같습니다.
여인들이 노동은 노란 하늘을 걷어 낼 때까지 인가요? 풍요롭지만 또한 고단합니다.
1905년이 쿠스토디에프에게 의미를 갖는 것은 이 해에 ‘예술 세계 (Mir Iskusstva)’라는 혁신적인 화가들의 모임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910년 그는 이 모임에 가입하고 그 후 계속 모임의 전시회에 참석합니다.
또한 러시아 고전의 내용에 어울리는 삽화 그리는 일을 시작하는데 쿠스토디에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
했던 일이었습니다. 훗날 그가 레스코프의 ’ 므첸스크 거리의 마크베트 부인’이라는 소설에 그린 삽화는
이야기와 너무 잘 맞아 러시아 책 디자인 역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상인의 아내 Merchant’s Wife / 1918
쿠스토디에프는 여러 장의 상인 아내를 묘사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이 가장 유명합니다.
풍만한 몸매에 어울리는 동그란 얼굴은 테이블 위의 음식과 함께 풍요로움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그림 속에 나와
있는 식기들과 장식은 러시아 전통의 멋을 마음껏 보여주고 있습니다. 쿠스토디에프가 어린 시절 보았던 상인의
아내 모습인지는 알 수 없지만, 풍요로운 러시아를 남기고 싶었던 그의 열망이 담겨있겠지요. 그런데 여인의
푸른 눈은 정말 매력 있군요. 어둠 속에서고 파랗게 빛날까요? --- 빛나면 납량특집의 한 장면?
1907년과 1909년 쿠스토디에프는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독일을 찾습니다. 1909년에는 왕립 미술 아카데미
화원으로 선출되는 등 바쁜 일상을 보내던 그에게 불행이 찾아 왔습니다. 결핵이 그의 몸을 덮쳤고 의사로부터
긴급한 요양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은 것이죠. 스위스로 자리를 옮겨 1년간 요양을 하는 동안에도 떠나 온
고향을 그리워했고 끝없이 러시아적인 것들에 대한 생각으로 그의 머리 속은 가득했습니다.
창문 옆에서 By Window / 1921
푸른 화병과 장미의 색깔 대비가 강렬합니다. 저 화병은 원래 저 자리에 있던 것일까요? 제 생각에는 창문 밖
활짝 웃고 있는 남자가 선물로 올려 놓은 것 같습니다. 창문이 안쪽으로 열리게 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아마 여인은 창문을 열고 책을 보고 있었겠지요.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가 화병에 꽃을 담아
창문 위에 올려 놓고 한 마디 합니다.
날씨도 좋은데, 데이트 어떠신지요?
여인은 남자의 말보다 장미의 향기가 더 좋은 모양입니다. 제가 봐도 진지함은 좀 떨어지는 남자 같습니다.
요양에서 돌아 오고 난 얼마 지나지 않은 1911년, 쿠스토디에프는 무대 디자인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첫 무대 디자인이 성공을 거두자 추가 주문이 이어졌습니다. 그가 디자인 한 무대에 올려진 작품 중에서 특히
오스트로프스키 작품이 빛을 발했다고 하는데 상인들의 일상을 쉽게, 빠르게 묘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돌아보면 그가 가난한 어린 시절, 세 들어 살던 부유한 상인의 집에 대한 기억과 관찰의 결과였겠지요.
러시아 비너스 Russian Venus / 1926
참 기골이 장대한 아가씨입니다. 집에서 사우나를 즐기고 있는 여인의 손에 든 것은 자작나무 잎이겠지요.
황금색 머리카락은 허리에 닿았지만 얼굴은 부끄러운 듯 순박합니다. 비너스도 러시아에서 쿠스토디에프를
만나면 저렇게 귀여워지는군요. 비너스가 피어 오르는 수증기를 타기에는 ---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1916년, 38세가 되던 해 쿠스토디에프를 괴롭히던 결핵은 마침내 그의 하반신 마비를 가져옵니다. ‘이제 내 방이
나의 모든 세계가 되었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휠체어에 앉아야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몸이
가져다 준 불행과는 관계없이 즐겁고 생생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본 주위 사람들이
오히려 놀랄 정도였습니다. 이런 부분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괜히 코 끝이 시큰합니다. 어떻게 살고 무엇을 보여
줄 것 인가는 철저하게 자신의 문제입니다. 정말 자신의 문제입니다.
볼셰비키 The Bolshevik / 101cm x 141cm / 1920
볼셰비키라는 말의 원 뜻은 ‘다수’입니다. 1917년 10월, 성공한 혁명에 대한 기쁨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거리를
메웠습니다. 거인의 얼굴에는 앞만 보고 가겠다는 굳은 의지가 보입니다. 그가 들고 있는 깃발은 온 세상의
하늘을 덮고 있습니다. 저 때만 해도 휴머니즘에 입각한 공산주의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었죠.
그러나 공산주의는 그 후 휴머니즘을 버렸고, 휴머니즘이라고는 아예 생각도 없었던 자본주의는 그 것을 받아
들였습니다. 진화의 결과가 죽음에 이르는 길이 될지 또 다른 단계로의 길이 되는지, 우리 사회도 고민해야
합니다. 하긴 그 것이 조직만의 문제일까요 ----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지만 쿠스토디에프의 작품은 육체적 고통을 숨기고 화려하고 기쁨에 찬 것들이었습니다.
낙천적이고 즐거운 삶의 모습은 그의 머리 속에 남아 있던 것들이었습니다. 밖을 나갈 수 없던 그에게 기억은
다시 없는 작품 소재의 창고가 되었습니다. 1917년, 마침 내 세계 최초로 공산 혁명이 성공합니다.
혁명 다음 해부터 쿠스토디에프는 다방면에 걸친 창작에 몰두합니다.
봄 Spring
쌓였던 눈이 녹고 봄이 왔는데, 그만 봄을 재촉하는 비가 너무 많이 내린 모양입니다. 세상은 맑고 깨끗하지만
길 곳곳이 물에 잠겼습니다. 얇은 널빤지 위를 건너는 여인들의 발걸음이 조심스럽습니다. 여인을 기다리고 있는
사내의 자세가 좀 음흉스럽습니다. 손을 뻗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열고 있습니다. 아직 물이 덜 빠진 곳에는
나무 통들이 떠나고 있고 길을 가로지르는 마차 바퀴는 물에 반이나 잠겼습니다.
제일 신이 난 것은 오리들입니다. 봄은 역시 물을 앞세우고 옵니다.
여러 미술가 단체에 가입을 하고, 회화와 무대 디자인, 삽화에 매진하던 쿠스토디에프는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내가 내 작품 속에 표현하고자 했던 것을 제대로 그렸는지 알 수 없지만, 삶에 대한 사랑과 행복함, 즐거움
그리고 러시아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이 바로 내 작품의 주제였다’
그의 말처럼 그는 진정으로 러시아의 모든 것을 사랑한 화가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러시아 화가의 것
같지 않지만 러시아의 진정으로 행복한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쿠스토디에프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