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대 중반, 영국에서는 시골의 풍경과 풍속을 소개하는 그림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대중들의 호응도
좋았습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급속하게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시골 인구가 감소하고
예전의 모습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화가들은 전통적인 모습들이 완전히 기억 속에서 떠나기 전에
화폭에 남기고자 했는데 요즘으로 말하면 다큐멘터리 작가들이죠.
그 가운데에 헨리 허버트 라 쌩 (Henry Herbert La Thangue / 1859~1929)이 있습니다.
조선소 마당 The boat builder's yard / 1881
배가 만들어지고 있는 조선소 마당에 한 여인이 작업대 위에 앉아 있습니다. 저렇게 배의 뼈대를 보고
용골이라고 한다지요. 여인의 발 앞에 수북이 쌓여 있는 목재들의 잔재를 보면 작업을 하다 만 흔적을
아직 정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인의 표정이 수상합니다. 잔뜩 찌푸린 얼굴에 앉아 있는 자세
마저 맥을 놓고 있는 듯 합니다. 배를 만드는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요? 혹시 배를 만들다 떠나
버린 것은 아닐까요? 바다 위에 돛을 편 배들이 가득한데 햇빛 아래 여인의 마음이 복잡합니다.
라 쌩에 대한 유년 시절 자료는 눈에 띄는 것이 없군요. 첫 번째 기록은 그가 덜위치 대학을 다닌 것부터
시작됩니다. 라 쌩은 덜위치 대학에서 공부를 할 때 오랜 친구가 되는 스텐호프 포브스를 만납니다. 그 후
렘버트 예술 학교에 잠시 적을 두었다가 로얄 아카데미 스쿨에 입학해서 회화공부를 시작하는데 그 때 나이가
열 다섯 살입니다. 그렇다면 덜위치는 요즘은 대학 (College)이지만 그 때는 다른 등급의 학교였을까요?
음, --- 자신이 없습니다.
도피네에서 In the Dauphine 1886
도피네는 프랑스에 있는 지방 이름이라고 합니다. 들로 일을 나가는 부부의 모습이 햇빛 아래 환합니다.
여러 곳을 꿰맨 자국이 있는 푸른 바지이지만 흰 셔츠와 잘 어울립니다. 그래서일까요, 큰 낫을 어깨에
걸쳤지만 발걸음이 가벼워 보입니다. 새참과 물병을 든 여인은 따가운 햇빛에 얼굴을 찡그렸지만 보기 좋은
모습입니다. 돌아 올 때면 흙과 땀에 옷이 젖고 더러워지겠지만 그 것은 열심히 세상을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 증거를 위해 저도 매일 아침 출근을 ---- 아, 요즘은 휴가를 보내고 있군요.
20세가 되던 1879년 12월, 라 쌩은 학교에서 금메달을 수상합니다. 부상으로는 영국에서는 최초로 기사
작위를 받은 화가이자 로얄 아카데미 회장인 프레데릭 레이턴이 프랑스 아카데미즘의 대가 장 제롬 앞으로 쓴
소개장을 가지고 떠나는 유학 장학금이었습니다. 이른 나이에 거둔 성공이었죠. 공부를 확실하게 했던 모양
입니다.
서섹스 지방의 농장 Sussex Farm / 1887
닭의 모이를 주는 소년의 표정이 우울합니다. 눈은 닭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그림 밖에 있는 친구들이 같이 놀자고 울타리 밖에서 부르고 있습니다.
나 지금 닭 모이 주어야 하는데
놀러 갈 생각하지 마라. 닭 모이 다 주고 나면 나하고 들에 나가자.
말을 끌고 옆을 지나가던 아버지의 한 마디에 소년의 입이 조금 더 앞으로 나왔습니다. 바쁠 때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것이 시골 생활이라지요. 손은 모이 통에 들어 가 있지만 마음은 이미 울타리를 넘어
들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파리에 도착한 라 쌩은 에콜드 보자르에 입학, 장 제롬의 화실에서 고전적인 아카데미 화법에 대한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스승의 화법에 충실해야 할 라 쌩은 바리비종파로 대표되는 자연주의와 인상주의에
더 매료되었습니다. 스승인 장 제롬은 인상파에 대해 호된 비판을 한 화가였죠.
아피아 가도 The Appian Way
아마 아피아 가도 근처에 있는 농장인 모양입니다. 앞 선 작품 속 소년은 일하기 싫은 표정이 역력했는데
이 작품 속 소년은 아주 적극적입니다. 말 구유에 건초를 넣는 자세도 능숙하군요. 언젠가는 소년도 생명력
가득 찬 붉은 색깔의 말을 타고 넓은 세상을 향해 달릴 날이 오겠지요. 가슴만 열려있다면 일상은 고단할 수
있어도 삶 전체가 힘든 것은 아니란다. 오른쪽 오래 된 유적이 소년을 내려다 보고 들려주는 말입니다.
당대 가장 뛰어난 아카데믹 화법의 대가 밑에서 딴 곳에 마음을 준 걸 보면 라 쌩이 강한 신념과 힘이
넘치는 개성의 소유자였다는 평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자신에게 맞지 않은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렇게 살았는가라고 자문해보면 항상 그러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이 듭니다.
마지막 고랑 The Last Furrow / 1895
하루 종일 밭을 갈았습니다. 하늘은 어둑어둑 해지고 있는데 이제 마지막 고랑을 남겨 놓았습니다. 몸 안에
있는 모든 힘을 다 써버린 나이든 농부는 더 이상 서 있을 힘도 없습니다. 같이 일을 한 말도 안타까운지
뒤를 돌아 보고 있습니다. 노동의 고단함이야 말 할 것이 없지만 농부는 말과 연결된 줄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농부의 마음이겠지요. 지금이라고, 우리라고 다를까요?
1881년과 1882년 여름, 라 쌩은 친구인 포브스와 함께 부르따뉴 해안에서 그림을 그리며 보냅니다.
한편으로는 르파주를 포함, 외광파 화가들과 함께 작업을 하면서 그들의 영향에 흠뻑 젖어 듭니다. 이 때
심취한 외광파의 기법은 평생 그의 화풍이 됩니다. 그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화가 클라우센은 ‘라 쌩을
매료시킨 것은 햇빛’이라고 말했습니다. 라 쌩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떠돌이 농부들 Traveling Harvesters / 199.5cm x 161.3cm
해가 질 무렵 강을 건너 온 한 식구들이 있습니다. 어머니인듯한 여인이 미는 작은 수레를 어린 소녀가 끌고
있습니다. 큰 낫과 광주리를 든 사내의 표정도 지친 모습입니다. 삶의 고단함이 모두의 어깨에 내려 앉아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데려다 준 배는 이미 건너편 강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돌아 갈 수 도 없게 된 길입니다. 또 어디에 가서 오늘 저녁을, 이 계절을 보내야 할지 알 수 없는
가족들의 얼굴을 석양이 붉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주제가 담긴 라 쌩의 몇 작품들은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3년 여의 파리 유학 생활을 끝내고 라 쌩은 영국으로 돌아 옵니다. 그런데 자료에 따라 귀국한 해가 다르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1884년이라고 되어 있는 자료가 있는가 하면 1886년이라고도 되어 있는데 그 뒤 그의
행적을 꿰 맞춰 보면 1886년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2년의 차이 --- 길게 보면 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추수하는 사람들의 저녁 식사 Harvester Supper / 1898
해가 지고 달이 떴지만 추수 일을 아직 끝내지 못한 사람들은 저녁도 들판에서 먹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일에
지친 여인은 저녁을 먹을 기력도 없는지 짚단에 몸을 기대고 말았습니다. 여인을 바라보는 남자의 표정이
안타깝습니다.
조금이라도 먹어 봐
아니, 나 조금만 더 누워 있을께
볏단의 불빛이 모두를 밝히고 있지만 모두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길게 남았습니다.
런던으로 귀국한 후 라 쌩은 풍경화와 시골의 풍속화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로얄 아카데미를 비롯
여러 곳에서 전시회도 열었습니다. 그런데 라 쌩은 1887년 자신이 배운 로얄 아카데미의 교수법을 반대하는
모임을 만듭니다. New English Art Club 이라는 이름의 단체는 로얄 아카데미의 개혁을 요구하며 한편으로는
라 쌩 자신도 흠뻑 빠져든 외광파를 영국에 소개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1912년 로얄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는데 신념은 신념이고 명예는 명예인가 봅니다.
가을 아침 An Autumn Morning / 1897
땔감을 하러 아침 일찍 숲을 찾은 것 같습니다. 떨어진 나무를 집어 들고는 적당한 크기로 나누려는 여인의
얼굴은 아직 피곤에서 못 벗어 났습니다. 숲은 붉고 노란색으로 가을을 알리고 있지만 굳게 다문 입을 보면
계절의 변화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여인을 힘들게 하는 것들도 저렇게 나무처럼 여인의 무릎에서
꺾여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요크셔 지방의 부유한 방앗간 주인들을 후원자로 둔 라 쌩의 작품은 모두 야외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실내에서는 추가로 어떤 붓 칠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하니까 야외에서 작품을 제작해야 한다는 신념만큼은
대단했습니다. 때문에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델도 배경 앞에 실제로 있어야 했습니다.
모델들이 무척 힘들었겠지요?
새벽 Dawn / 56cm x 69cm
아직 밤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은 하늘은 검은색을 벗고 보라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들판에는 벌써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시골의 삶이 간단치 않은 것은 세상 어디엘 가도 비슷합니다. 흘러내린 머리가 얼굴을
가렸지만 자세는 밀레의 ‘이삭 줍기’ 속 여인들의 그 것입니다. 그러나 손에 든 광주리와 자세는 훨씬 더
고단해 보입니다. 들판에서 무엇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희망도 함께 담는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라 쌩은 실제 삶에서 만나는 장면을 그림 속에 재현하고자 했습니다. 때문에 좀 더 미화되고 연출된 듯한
느낌이 있는 초기 자연주의 화가들의 작품과는 다른 느낌이 있죠. 예를 들면 밀레나 부르통의 작품보다
좀 더 사실적으로 다가 오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영국의 시골 모습이 급격하게 사라져가자 라 쌩은 밖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프로방스의 봄 Provencal Spring / 1903
Spring이라는 영어 단어는 봄이라는 뜻도 있지만 샘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프로방스의 봄일까요,
샘일까요? 영문법 책을 뒤적거려야 할까 봅니다. 그런데 봄이면 어떻고 샘이면 어떻습니까, 생명의 시작이고
삶의 원천인데요. 물 항아리를 들고 물을 길러 온 소녀의 모습도 앙증맞습니다.
물 한 잔만 먹을 수 있을까, 꼬마 아가씨!
오랜만에 만나는 라 쌩의 밝은 그림입니다.
1898년, 라 쌩은 그 동안 자주 찾았던 프로방스와 이탈리아의 리구리아 지방 모습을 그림에 담기 시작합니다.
사라져가는 모습에 대한 기록의 의미가 강했던 그의 작품은 이제 연민의 감정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서부 유럽의 풍경이 그의 작품 속에 담겼고 개인 전시회는 비평가들의 곱지 않은
평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여울 The Watersplash
거위 떼를 몰고 오는 소년의 얼굴은 나무 그림자에 가렸고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린 햇빛은 거위들의
머리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직 물을 보지 못한 거위들은 머리를 세우고 있지만 여울에 가까워 질수록
머리를 숙인 거위들 모습이 연속 동작을 찍은 필름 같아서 웃음이 납니다. 물을 먹기에 바쁜 거위들 중에
가운데 있는 녀석은 다른 곳을 보고 있군요. 뭘 보고 있을까요.
뭘 보는 것이 아니라 빨리 와서 먹은 물을 삼키고 있는 중이지.
아내는 역시 보는 눈이 다릅니다. 역시 먹는 것과 연결 시키는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전쟁이 지나가고 1920년대 오렌지 숲과 정원이 그이 작품의 주요 소재가 되었습니다. 혹시 마지막 전원의
풍경을 그 곳에서 찾았던 것은 아닐까요? 일흔이 된 그에게 안 좋은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뉴질랜드 해변에서
배 한 척이 난파되었는데, 그 배에는 라 쌩의 작품이 실려 있었고 사고로 인해 작품 일부가 못쓰게 되었다는
비보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라 쌩은 울화병에 걸렸고 그 상태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글쎄요, 저라면 그냥 넘어갔을 것 같은데 화가에게 작품은 자신의 분신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라 쌩 선생님, 화병은 좀 가라 앉으셨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