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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블로그에 올랐던 화가들의 국적을 훑어보니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미국과 러시아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화가를 많이 배출한 탓도 있겠지만 제가 ‘편식’한
결과이겠지요. 스위스 사람들에게 19세기 화가 중 ‘가장 사랑 받는 화가’라고 불려지는 알베르트 사무엘 앙커
(Albert Samuel Anker / 1831~1910)의 작품을 보면서 눈을 더 크게 떠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탁아소 The Creche / 1890
제가 자랄 때 들은 탁아소는 우울한 이미지였습니다. 가난과 버려짐 같은 것들이 머리 속에 자리를 잡았죠.
벽 앞에 앉아 있는 좀 더 큰 아이들은 풍성하지 않은 음식을 스스로 먹고 있습니다. 더 어린 아이들은
수녀님이 음식을 먹여주고 있는데 기다리다 잠이 든 녀석도 있고 치통으로 머리를 동여 맨 아이도 있습니다.
끝에 있는 아이는 너무 오래 기다렸는지 짜증이 났습니다. 오른쪽에 혼자 앉아 있는 아이에게 눈길이 갑니다.
몸집이 작은 것으로 봐서는 혹시 음식을 빼앗길까 봐서 혼자 먹는 걸까요? 수녀님의 안타까운 눈빛이 닿지
않는 곳, 우리가 봐야 할 곳이겠지요.
앙커는 스위스 인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수의사였는데 베른 주 의회의 의원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앙커도 마흔이 되던 해 베른 대의회의 의원을 지냈었죠. 어려서 미술에 재능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11세 되던 해, 뉴사뗄에서 개최된 미술 전시회에 갔다가 미술에 흥미를 가지게 됩니다. 인생을 결정하는
‘한 방’은 이렇게 장소와 때를 가지리 않고 갑자기 나타납니다.
학교 시험 The School Exam / 103cm x 175cm / 1862
예전에는 시험을 저렇게 본 모양입니다. 언뜻 세어봐도 40명쯤 되는 인물들이 빼곡하게 묘사 되어 있습니다.
크게 세 그룹으로 나뉘어지는군요.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심사위원인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평가도
있지만 선생님에 대한 평가도 하고 있는 걸까요? 어딜 가도 심사위원들은 늘 저렇게 딱딱한 얼굴입니다.
그래야 권위가 서는 모양이죠? 키가 작은 아이는 까치발을 하고 지시봉으로 궤도에 적힌 글자를 읽고 있습니다.
지켜보는 선생님은 조마조마한 눈치입니다. 곧 순서가 되는 아이들은 좀 더 굳은 얼굴입니다. 저런 느낌, 저도
많이 겪어 봤습니다. 순서가 가까워지면 심장 뛰는 소리가 귀까지 들렸죠. 의자에 앉은 아이들은 다양합니다.
몸을 뒤로 젖히고 있는 자신 있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자신이 시험을 보듯 칠판에 시선을 고정시킨 아이도
있습니다. 그 중에 돋보이는 아이가 있습니다.
저게 뭐였더라 ---
손을 이마에 대고 고개를 돌려 기억을 해보지만 안 떠오르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하나를 해도 제대로 했어야지!
뉴사뗄에 있는 초급학교에 입학한 것은 앙커가 열 네 살 되던 해였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는 드로잉
수업을 3년간 개인적으로 받았습니다. 김나지움을 졸업 한 후 독일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 신학을 배우는데
앙커의 꿈은 사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화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독일에서 만난 명화들이 그를 움직인 것이죠.
스물 세 살이 되던 해 앙커는 아버지로부터 마지 못해 화가가 되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로 자리를 옮깁니다.
일요일 학교 소풍 The Sunday School Walk / 90cm x 150cm / 1872
햇살 좋은 일요일 수녀님을 따라 소풍을 나섰습니다. 꽃을 들어 수녀님에게 자랑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맨 뒤 쪽에 있는 아이들은 놀기에 더 좋은 곳을 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자 아이들은 대개 들꽃 한 묶음씩
들고 있는데 아직도 들꽃에 몸을 숙인 아이도 보입니다, 저렇게 걷다 보면 줄이 한 없이 길어지겠지요. 신발을
신고 있는 아이와 맨발인 아이가 뒤섞여 있지만 들판을 건너가는 아이들의 짤랑 거리는 웃음소리와 재잘거리는
소리는 같겠지요. 그 것이 아이들 세상이고 천사들 사는 세상입니다.
파리에 도착한 앙커는 에콜드 보자르에 입학, 같은 스위스 출신 화가인 샤를 글레이어 화실에서 공부를 시작
합니다. 샤를 글레이어는 학생들에게 빛의 변화를 그리기 위해 야외에 나가 그릴 것을 권유했었던 화가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상파 화가들의 탄생지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인데 실제로 그의 제자들 중에는 나중에 한 시대를
주름잡는 인상파의 대가들이 배출 됩니다. 앙커는 화실에서 공부하고 있던 모네, 르누아르, 시실리를
만납니다.
잠든 아이를 바라보는 젊은 엄마
Young mother contemplating her sleeping child /36.5cm x 46.5cm / 1875
엄마가 촛대를 들고 와서 살며시 휘장을 걷고 잠든 아이를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엄마의 얼굴에는 사랑과
안도 그리고 대견함이 떠 있습니다. 잠든 아이를 바라보는 세상 모든 엄마의 얼굴이 아마 저와 같겠지요.
지금은 저의 잠든 모습을 엄마 대신 아내가 내려다 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자꾸 엄마나 누나처럼
저를 대하기도 합니다. 잘 때 복면을 써야 할 모양입니다.
5년간 파리에 머물면서 화실에서의 공부와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가 작품을 모사하던 앙커에게 아버지께서
돌아 가셨다는 연락이 도착합니다. 못 마땅했지만 아들이 화가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을 허락했던 아버지였죠.
다시 스위스의 인스로 돌아온 앙커는 부모님 댁 다락방에 화실을 차립니다. 그 때 서른의 나이였습니다.
그리고 서른 세 살 때 여동생의 친구였던 안나 뤼풀리와 결혼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모두 여섯 명의 아이가
있었는데 어려서 두 아이를 잃습니다. 여동생이 없는 저는 친구 여동생의 친구가 좋았던 적이 있습니다.
엄마와 아이들이 있는 실내 풍경
An Interior with Mother and Children / 30.5cm x 48cm / c.1870~1877
엄마가 일을 하는 동안 언니가 동생을 보고 있는데, 동생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우는 동생의 입이 커질수록
언니의 입도 덩달아 커지고 있습니다. 아직 동생을 업을 만큼 자라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동생이 떨어질까 봐
동생을 안고 있는 깍지 낀 손에는 힘이 들어 가 있습니다. 저렇게 동생이 울면 괜히 내가 잘못한 것 같아
마음을 졸였던 기억이 납니다.
무슨 일이니, 왜 아이가 울어?
문을 열고 엄마가 들어 오고 있습니다. 스위스 가난한 시골 농가의 저녁 무렵입니다.
파리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앙커가 주로 그린 주제는 역사적인 사건이나 성경 속 장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 온 후 시골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묘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꾸미지 않은 수수한 시골 생활의
단면들이 주제였는데 앙커가 활동하던 시기, 주류 화풍은 사실주의였습니다. 쿠르베나 밀레처럼 사회 비판적인
시각이 없다는 평을 받았지만 앙커는 아예 그런 주제에 눈길을 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앙커의 시각이 또 다른
왜곡일 수 도 있지만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 목표와 선택한 길에서 결코 한 발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학생 Schoolboy / 56cm x 42.5cm / 1881
그 녀석 참 또랑또랑합니다. 작은 칠판과 책 그리고 물고기 모양을 한 연필 통을 들고 있는데, 칠판을 든
자세가 어찌나 단호하고 빈틈 없는지 그대로 크면 나중에 꽤 괜찮은 남자가 될 것 같습니다 책도 너덜너덜
해졌고 필통도 색깔이 벗겨진 것을 보니 아마 형에게서 물려 받은 것이겠지요. 앙커의 그림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아이들의 모습이 천사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저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연필 통 물고기가 눈을 번쩍 뜨면서 한마디 하는군요.
모른다고 그렇게 함부로 이야기 해도 되는 거야?
앙커의 생활은 아주 규칙적이었다고 합니다. 매일의 일상을 완벽하게 사전에 계획된 대로 살았고 가계부에
수입과 지출을 꼬박꼬박 기록했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였을 때는 나름대로 치밀했지만, 나이를 먹을 수록
계획 없이 사는 것이 편한 저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그런 그도 첫 아이가 태어나자 그림 판매와 함께 새로운
수입원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한 때 앙커는 집안 장식 일도 했습니다. 책임감 강한 남자 아닌가요?
고트헬프 소설을 읽는 사람 A Gotthelf Reader / 59cm x 42cm / 1884
고트헬프는 스위스 소설가 이름입니다. 베른 지역 농촌의 삶을 묘사한 작품으로 유명한데, 사람 사이의 미덕과
가정 생활에 대한 ‘건전한’ 소설이었다고 합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이불과 옷들을 오른쪽 침대 위에 쌓아
놓은 채 소설에 눈길을 뺏기고 말았습니다. 침대 밑 벗어 놓은 신발을 보다가 혹시 일어나자 마자 책을 든
것은 아닐까요? 부유한 살림살이는 아니지만 늘 저렇게 책을 본다면 조만간 머리가 부자인 사람이 되겠지요.
치마 위를 달리고 있는 하늘색 스트라이프 무늬처럼 그녀의 꿈도 그렇게 하늘을 날고 있나 봅니다.
파리에서 공부를 할 때부터 정기적으로 파리 살롱전에 출품을 계속하던 앙커는 1866년 금메달을 수상합니다.
그 후로도 여러 번 수상을 하면서 앙커는 생전에 유명한 화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아이들에 대한
깊은 애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실제로 주문 받은 작품이 아니었지만 매일 만나는 아이들과
화실로 그를 보기 위해 놀러 오는 아이들을 모델로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생활은 엄격했을지 모르지만 가슴은
따뜻했습니다.
신고 결혼 Civil Marriage / 1887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올려야 할 결혼식을 그냥 서류에 서명하는 것으로 대신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신랑과 신부는 예복처럼 갖추어 입었군요. 공무원 앞에서 허리를 숙여 장부에 서명하는
아내의 모습을 내려다 보는 신랑의 얼굴이 어둡습니다. 같이 따라온 식구들도 우울한 표정입니다.
혹시 결혼식을 교회에서 올릴 수 없을 만큼 두 집안이 가난하기 때문에 신고로 결혼을 대신하는 걸까요?
그 것 때문에 식구들 모두 가슴이 아파서 표정이 어두운 건가요?
음, 그렇다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물론 어른들 입장에서 아이들의 결혼은 완성이겠지요. 그러나 당사자들
에게는 시작입니다. 시작이 작으면 어떻습니까? 점차 커 나갈 거라는 희망이 있지 않은가요? 처음을 크게 시작
해서 끝 없이 더 큰 것을 찾다가 결국 파멸하고 마는 사람들 이야기를 해드릴까요?
여러분 걱정 마세요. 잘 살 겁니다.
앙커는 식구들과 함께 파리와 인스를 오가며 삽니다. 여름에는 시원한 스위스의 인스에서, 겨울에는 추위를
피해 파리에서 사는 것이었죠. 계절에 따라 나라를 오가며 사는 삶은 어떨까요? 자주 유럽 여행도 하는데
특히 이탈리아 여행이 많았습니다. 대작들을 보기 위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또한 가벼운 풍경 수채화를 제작
하기 시작한 것도 여행으로 얻은 또 다른 선물이 되었습니다.
정물 - 남은 음식 Still life : Excess / 48cm x62cm / 1896
참 단출한 식탁입니다. 빵과 햄 그리고 맥주 한 잔이 메뉴의 전부입니다. 먹다 남은 음식 옆에는 피다 만 담배,
성냥갑과 성냥개피, 담뱃재가 있습니다. 극 사실주의 작품처럼 보이는 앙커의 묘사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그런데 식사하다가 어디 간 걸까요? 그리고 식탁에 저렇게 담배를 털어도 괜찮을까요? 요즘 기준으로 하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남자군요.
비록 풍속화에 가려졌지만 앙커는 30점이 넘는 정물화를 남겼는데 그의 뛰어난 솜씨는 장르에 관계없이 빛이
났습니다. 프랑스 정물화의 대가인 샤르뎅의 전통적인 기법에 따라 시골과 도시의 식탁들을 묘사했는데 조화와
질서를 중시했던 앙커의 취향을 볼 수 있습니다.
도자기 가마 위에서 잠이 든 아이들 Sleeping Children on porcelain stove / 1895
도자기를 굽고 난 가마의 온기가 어린 소녀들을 꿈나라로 데려 갔습니다. 언니 가슴을 베게 삼은 동생은
세상에서 가장 편한 모습입니다. 입이 살짝 벌어진 언니는 아주 깊은 잠에 빠진 모습이죠. 원래 꿈은 얕은 잠
일 때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런 과학적인 이야기를 이 순간만큼은 지워버리고 싶습니다. 좋은 꿈 꾸고
있겠지요. 푹신한 침대가 아니라 딱딱한 도자기 가마 위이지만, 그래서 더욱 행복한 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건초더미 속에서 잠든 소년 Boy Sleeping in the Hay / 1897
어쩌다가 건초더미에서 잠이 들었을까요? 아마 놀다가 집으로 돌아 왔지만 어른들은 모두 일하러 나간 모양
입니다. 신나게 놀았으니 몸도 힘이 들었겠지요. 푹신한 건초 위에 누웠는데,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걱정 없는 시절이죠. 저 나이 때는 세상이 자신을 향해 돌고 있다는 것을 모를 때입니다. 생각해보니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나에게로 향하던 세상에서, 내가 세상을 향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멈춘다고 세상이 멈추지 않는다는 알게 되었거든요. 그나저나 아이의 발바닥이 조금 더 까맣게 묘사
되었으면 훨씬 좋을 뻔 했습니다. 혹시 흙 묻은 발을 닦은 후에 잠이 든 걸까요?
친숙한 배경 속에서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묘사하던 앙커에게 불행이 찾아 왔습니다.
1901년, 70세의 앙커에게 발작이 옵니다. 그러나 비록 발작으로 인한 고통으로 작품 제작이 힘들기는 했지만
그림 그리는 것을 아주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앙커가 그 때까지 살아 온 생활 태도를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할아버지 The Grandfather / 63cm x 92cm / 1893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를 위해 책을 읽어드리고 있습니다. 앞에 치마를 두른 것을 보니 다른 일을 하다가
할아버지가 부르자 달려 온 것 같습니다. 참 착한 아이군요. 무릎에 손을 올려 놓은 할아버지는 이제 많이
힘든 얼굴입니다. 손자의 책을 읽는 낭랑한 소리에 잠시 고통을 내려 놓고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문득
지나간 한 시절이 떠 오르셨던가요. 가느다란 한 숨 소리가 들립니다.
할아버지, 그래도 손자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는 저는 부럽습니다. 먼 훗날 할아버지가 앉아 계신 자리에 지금
책을 읽는 손자가 앉겠지요. 그 때도 아마 손자의 손자가 책을 읽어 줄 겁니다. 이제 우리 곁에서는 쉽게 찾아
보기 어려운 장면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보는 것 만으로도 행복합니다.
1848년의 시골 학교 Village School on 1848 / 1896
1848년이면 유럽이 혁명으로 정신 없을 때입니다. 정신이 없기는 이 시골 학교 교실도 마찬가지 입니다.
선생님이 회초리를 들었지만 회초리의 위력은 맨 앞 줄 뿐입니다. 두 번째 줄부터는 대 놓고 친구와 수다를
떠는 녀석들이 있는가 하면 ‘영구’같은 아이도 있습니다. 자리가 좁아서 앞 줄에 의자만 놓고 앉은 여학생도
보이고 바구니를 들고 온 할머니도 보입니다. 영락없는 ‘봉숭아 학당’입니다. 그래도 공부는 해야겠지요.
그림을 보다가 저의 초등학교 때가 떠 올랐습니다. 그 때 다니던 학교도 전학생이 갑자기 많아지면서 한 반의
학생이 100명을 넘었고 한 책상에서 3명이 앉아서 배웠습니다.
서울 오류초등학교 2학년 7반 103번이었습니다. 103번 ---
앙커는 스위스의 ‘국민화가’라고도 불립니다. 한편에서는 앙커가 당시의 시대 상황에 눈을 돌려 평화로운 시골
모습만 남겨 놓아 현실과 동떨어진다는 평을 내 놓기도 합니다. 또한 평생 인상파나 표현주의 같은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작품 활동만 한 것이 앙커의 특징이라고 하는 평도 있습니다.
무엇이 맞고 그른지는 제가 판단할 문제는 아닙니다. 물론 능력 밖의 문제이지요. 저는 앙커의 작품에서
사람을 바라보는 따뜻한 앙커의 눈길을 느꼈는데, --- 어떠셨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