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2년 11월3일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수원] 하느님을 아시는 분 -
수원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독서 : 필리 1, 18ㄴ - 26
† 복음 : 마태 14, 1. 7 - 11
★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그의 기쁨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생의 전부이기에 그의 기대와
희망은 살든지 죽든지 오직 그리스도를 전하고 찬양하는
것이다(제1독서).
★ 세상의 질서와 하느님 나라의 질서는 같지 않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사람을 당신 영광에
참여시키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중국의 철학자 왕양명(王陽明)은 오만(傲慢)이야말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큰 병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아들로서 오만하면 반드시 불효하고, 신하로서 오만하면 반드시
불충이 된다. 아버지로서 오만하면 반드시 자비롭지 못하고,
벗으로서 오만하면 반드시 불신(不信)이 된다. 따라서 오만에는
단 한 가지도 좋은 면이 없고 모든 악의 근원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탐내고 길거리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자들의 공명심과 오만함을 질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누가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말고 끝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을 낮추시고, 겸손한 사람을 들어 높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7)
하며 예수님의 겸손을 찬양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앉을 자리는 예수님께서 택하신 맨 끝자리입니다. 끝자리에
앉으면 아무도 우리를 시샘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을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끝자리에 앉아야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매일 미사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느님을 아시는 분
2012년 나해 11월 하느님 섭리의 동정 마리아 신심 미사
<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
복음: 요한 2,1-11
< 하느님을 아시는 분 >
항상 “폐하, 잘된 일입니다”라고만 말하는 신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과 그 신하가 함께 사냥을 하러 갔는데 신하가 왕의
총에 총알을 거꾸로 장전해서 왕의 손가락 하나가 잘려나갔습니다.
그러자 신하가 말합니다. “폐하, 참 잘된 일입니다.” 왕이
분노해 그 신하를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이듬해, 왕이 다시 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잃어 식인종에게
붙잡혔습니다. 식인종들이 가만히 살펴보니 왕의 손가락 하나가
없었습니다. “이 음식은 흠이 있구나”라며 그들은 왕을
풀어줬습니다. 식인종에게 풀려난 왕이 감옥에 가서 그 신하에게
말했습니다. “자네 덕분에 살았어. 미안하네.”
그러자 신하가 말했습니다. “폐하, 참으로 잘된 일입니다. 제가
감옥에 안 들어왔다면 폐하와 같이 사냥을 나갔을 것이고 저는
흠 없는 음식이기에 저들의 밥이 되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은총이다.”란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항상 좋은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멸망하기를
원하시지 않고 모두가 구원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좋으신 뜻입니다.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이는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고 또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는 것, 이것이 내 아버지의 뜻입니다.”
(요한 6,40)
그런데 모든 이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좋으신 뜻은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통해 성취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사실 하느님의 섭리는 그분을 사랑하는 인간들의 받아들임으로
완성됩니다.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 당신 뜻을 따르는
이들을 통해서 선을 이룬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이런
구원의 섭리를 너무나 잘 아시고 그 섭리가 세상에 실현되게
하신 분이셨습니다.
오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은 혼인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포도주를 주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당연한 거부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곧 교회에 성령을 주시기를
거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함으로써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다고 그 상태가 끝까지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곧
다시 죄를 짓고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맙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부당한 인간들에게 당신 전부를 주시기를 거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그리스도의 뜻을 꺾으신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성모님이신 것입니다. 악의 순환으로 더 이상 선이 들어올 수
없는 곳에 성모님의 중재로 선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에스델서에서 에스델이 목숨을 걸고 자신의 백성을
구한 장면과 같습니다. 왕비인 에스델이 임금으로부터 내침을
당하느냐, 아니면 유다 백성을 살리느냐의 기로에서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다가갔듯이, 성모님도 당신의 목숨을 걸고
예수님께 포도주를 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작정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명령한 성모님을 당신 뜻에 따르지
않는다고 내치셨다면 성모님 역시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살리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음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고 반드시 인간
구원에 꼭 필요한 성령님을 내려주실 것이라고 믿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기적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모님만큼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고, 성모님만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성모님의 믿음을
통해 교회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할 때 하느님의 섭리는 무엇이었을까요? 죄를
지으라고 창조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칼뱅이 주장한
예정설대로라면 하느님께서 이들을 창조하실 때부터 죄를 짓도록
예정되게 창조하였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는 하느님을 좋지
않은 의도를 지진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이들이
죄를 짓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섭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인간 자신들입니다. 섭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그래서 몰랐고 그래서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섭리란 ‘하느님의 당연한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당연한 마음은
모든 이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항상 그분께서
좋은 것만을 주시는 분이심을 확실히 믿고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성모님 닮은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분을 더 사랑하기 위해 더
알려고 노력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내려가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루카 14,1.7-11
내려가라
저는 이런 저런 모임에 가면 제 자리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와서 그 자리까지 안내해 주기를 바랍니다. 더더욱 낯선 곳에 가면
저를 소개해 주기를 기대하며 한 말씀 해달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구역 모임에 가면 음식을 나누게 되는데 설거지의 어려움
때문에 일회용 접시를 많이 쓰게 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일반
접시를 사용하도록 해줍니다. 제일 먼저 음식을 챙기고 저만
특별대우 받는 것 같아 죄송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어쩌다
똑같이 일회용 그릇을 쓰게 되면 속으로는 누군가가 바꿔주기를
바랍니다. 삶은 따르지 못하면서도 인정받고 칭찬 받기를 원하며,
누군가가 바른 소리를 하면 서운해 하고 오기를 부리기도 합니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대접 받기에 익숙해져 있고 또 특별한
예우를 원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루카14,11)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우리가 겸손하다면 그 무엇에도 우리는 초연할
것입니다. 비난을 받는다 해도 낙망하지 않을 것이고, 칭찬을
듣는다 해도 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성 토마스 아 켐피스는 “겸손한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해도
평화를 잃지 않고 잘 있으니, 그는 세상에 마음을 붙이지 않고
하느님께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접
받고 싶은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했으니 겸손의 길은 멀고도
멀게 느껴집니다.
혹 윗자리에 앉을 욕심으로 끝자리를 청하는 이가 있다면 결코
윗자리에 오르지 못할진대 언제 겸손이 몸에 익을 수 있을까?
“임금 앞에서 잘난 체하지 말고 지체 높은 이들 자리에 서지
마라. “이리 올라오게!” 하는 말을 듣는 것이 귀족들 앞에서
“내려가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낫다”(잠언25,6-7). 기회가
되면 더 낮은 자리를 잘 선택해야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맨 끝 자리를 찾아서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루카 14,1.7-11
맨 끝 자리를 찾아서
담당하고 있는 직책상 어쩔 수 없이 꽤나 거창한 공식적인
자리에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수행비서쯤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자신들은 자신들이 모시고 있는 ‘크신 분’들을
서로 단상 상석에, 중앙에, 앞쪽에 앉게 하려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너무 노골적으로 그러니 참으로 보기 민망하고
안쓰러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한 높은 바리사이가 초대한 잔치에서 비슷한 상황을
접하셨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 정말이지 인간미라고는 조금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잘 차려진 음식 앞에서 자리가 무슨
대수입니까? 차려진 음식 맛있게 잘 먹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담소도 나누고, 흥겨운 시간을 보내면 될텐데...그들의
머릿속엔 어떻게 해서든 높은 자리를 먼저 차지하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경직된 형식주의, 관료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던 예수님 눈에 정말이지
웃기기도 않았을 것입니다. 따끔한 한 마디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들이 미성숙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 하십니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그들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했던 한 가지는 ‘겸손의 덕’이었습니다.
겸손의 덕은 어떤 덕일까요? 사람들은 때로 이 겸손의 덕에 대해
조금 오해도 합니다. 열등감에 의해, 심성의 나약함으로 인해,
또는 무지(無知)로 인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겸손의 덕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관계 사이에서 요구되는 것이 겸손의 덕이기도 하지만,
하느님과 나 사이에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덕이 겸손의 덕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 앞에 피조물인 인간으로서의 자기 낮춤,
하느님의 영원성 앞에 시간에 종속된 유한한 존재인 인간임을
인식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느님 앞에 상대적 존재인 인간으로서의 겸손,
필연적인 존재인 하느님 앞에 우연적인 존재, 무한하신 하느님
앞에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따지고 보니 하느님 앞에 선 한 인간이 취해야할 너무나도 당연한
태도는 겸손입니다. 겸손이란 하느님 앞에서 우리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이고 최선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아무런 자격도 없으면서 하느님 나라 잔칫상에 초대된
것은 순전히 그분 은총 덕분이기에 맨 끝 자리라도 감지덕지하면서
앉아야 하는 것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입니다.
겸손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이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기본적이고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덕입니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주제넘음입니다. 아예 높은 자리는
넘보지 말 일입니다. 높은 자리는 오직 하느님께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자격을 전혀 갖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 자비와 은총으로 우리 모두를 당신
나라에 초대하십니다. 그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고 외치며
기쁜 마음으로 가장 아랫자리를 찾아 앉을 일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인천] 이제 어던 길을 가시겠습니까?
2011년 3월, 이웃나라인 일본에서는 엄청난 자연 재해가 있었습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진도 9.0의 대지진으로 인해
거대한 해일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어마어마한 재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특히 지진으로 인해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가 파괴되어
유출된 방사능으로 인해 상상하기 힘든 피해로 확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진이 일어났을 당시, 바다에서 조업을 하던 어부들에게서
아주 흥미 있는 반응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선 지진이 일어나자마자
바다에 있는 어부들에게 신속하게 대피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어부들은 급히 육지로 대피했지요. 하지만 육지로
대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심이 깊은 바다로 나가는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심이 깊은 바다에서는 해일이 높이 일지 않기
때문에 항구보다 안전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항구로 대피했던 배들은 항구를 덮치면서
마을의 흔적을 지우는 해일의 위력에 의해 완전히 박살 날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오히려 수심이 깊은 바다로 나아간 어부들은
죽지 않고 대신 멀리서 높은 해일이 항구와 마을을 집어삼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바다에서 조업을 하는 어부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갑자기 해일이 온다고 급히 대피하라고 말합니다. 과연
우리들은 오히려 거센 파도가 이는 바다로 나갈 수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어부들이 항구로 들어가는 모습에 저 역시 그 길을 따를
것 같습니다. 나만 잘 났다고 항구가 아닌 거센 파도가 일고 있는
바다로 나아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랜 경험으로 인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었고 이 판단이 맞다는 굳은 확신이
있다면 다른 어부들의 모습을 따르지 않고 나만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의 생활도 이렇지 않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가고 있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첫째 자리에 둔다고 우리
역시 그 길을 쫓아가는 것이 과연 정답일까요? 아닙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과감하게 그 길을 역행해서 주님께서 제시하는
길로 갈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일부러 윗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지요.
세상 사람들은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지만,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은 윗자리가 아닌 끝자리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용기와 결단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을 높여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고 있는 길을 쫓아가는 것이 안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해일이 났을 때 안전하다고
대피하는 항구가 오히려 가장 위험한 곳인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가고 있는 그 길이 주님과 나를 더욱 더 멀어지게 하는 가장
위험한 곳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어떤 길을 가시겠습니까?
당신을 제한하는 것은 당신 자신의 상상력뿐이다(티나 실리그).
인천 천주교 묘원에서의 위령미사. 정말로 많은 신자들이
오셨어요.
내 몸 하나도 내 마음대로 다루지 못하는 연약한 우리
지난 번 호주를 다녀오고 나서 목이 잘 움직이지 않고 어깨가
많이 아픕니다. 아마 3박 5일이라는 짧으면서도 바쁜 일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그리고 좁은 비행기 안에서
오랫동안 힘들게 있다 보니 몸이 좀 쉬자고 항의를 하나
봅니다. 그래서 침을 맞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침을 놔주시는
원장님께서 힘을 빼라고 말씀하십니다. 침이 들어가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힘을 쫙 빼고 누워있음에도 불구하고 힘이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제 딴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힘을 빼고
갓난아기처럼 온 몸을 맡겼건만 왜 그렇게 말하실까요?
원장님께서 거짓말을 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힘이 저절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내 몸이지만 내 몸을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우리 인간이 나약하고 부족하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내 몸도 이렇게 내 뜻대로 다루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판단하고 또 그것도 부족해서 심지어 하느님까지 판단할까요?
겸손한 내가 되어야 합니다. 부족해도 너~~~무~~~ 부족한 나임을
기억하면서 주님께 온전히 내 자신을 맡길 수 있는 겸손함을 꿈
꿔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걸림돌 안에는 이러한 숨은 뜻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루카 14,1.7-11
걸림돌 안에는 이러한 숨은 뜻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너를 받아들일 수 없어."
"나는 너를 밎지 않아."
"너의 느낌은 타당하지 않아."
"네가 틀렸어. 너는 나빠."
"너의 판단은 아직은 미숙해."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상관없어."
"너는 현실을 잘못 인식하고 있어?"
이러한 생각이 들게 된다면 상대방은 방어하거나, 죄책감에
빠지거나, 논쟁하거나, 변명하게 될 수 있습니다.
흔히 잘쓰는 걸림돌 중에 하나는 "너는 항상, 늘, 언제나,
매일..." 이라는 단어입니다.
이런 단어를 사용하여 "넌 왜 늘 그렇게 부주의 하니?" 라고
한다면, 상대방은 즉각적으로 "내가 언제 늘 부주의 했냐?"고
반발하게 될 겁니다.
그럼 상대방이 문제를 소유했을 때 어떻게 하면 될까요?
PET에서는 반영적 경청을 가르쳐줍니다.
반영적 경청이란 주의를 기울이고,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내포된 사실과 느낌을 헤아려서, 이해한 대로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든다면 엄마가 설겆이를 하고 있는데 자녀가 와서
무언가 불만을 얘기할 때, 엄마가 설겆이를 계속하면서 "엄마
듣고 있어! 말해봐!" 라고 한다면, 이것은 반영적 경청에서
주의기울이기가 부족한 경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설겆이를 멈추고, 자세를 낮추어 자녀와 눈높이를 같이하여
"음 무슨 힘든 일이 있니?" 라고 자녀의 마음을 이해한 대로
응답하는 것이 반영적 경청의 기본 자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난 번 학교에서 돌아와 가방을 철퍼덕 놓은 자녀의 예를
반영적 경청으로 해봅시다. 자녀가 학교에서 돌아오자 마자
가방을 철퍼덕 놓으며 "미치겠어"라고 말했습니다.
엄마는 달려가서
부모: "어머! 우리 *** 학교에서 무슨 속상한 일
있었나보구나!" (속상한 마음을 읽은 대로 표현)
자녀: "네"
부모: 가방을 철퍼덕 놓으면서 "미치겠어"라고 말할 정도로
무척 속상한가보구나!"
(행동에 가감없이 사진을 찍듯이 본대로 그대로 표현하기)
자녀: "네! 저 오늘 학교에서 선생님께 혼났어요."
부모: "저런, 선생님께 혼이나서 무척 괴로웠겠다."
(이해한 대로 표현하기)
자녀: "네, 어제 밤 늦게까지 제가 숙제한 것 엄마도
아시잖아요? 그런데 그만 아침에 깜빡하고 숙제를 갖고 가지
않아 선생님께 혼났어요."
부모: "저런 어쩌나! 어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 나도
보았는데...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선생님께 혼나서 무척이나
억울했겠다. 그리고 친구들 앞에서 혼이 났으니 무척 부끄럽기도
했겠네.(이해한 대로....)
자녀: "음,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다음부터 까먹지 않고 잘
챙겨갈께요."
부모: "그래 우리 "이! 엄마는 네가 잘 할거라 믿어."
이렇게 훌륭하게 대화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또 반영적 경청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렇게 되지는 않으리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대화를 하면, 걸림돌을 사용하여 대화를 할 때 보다 훨씬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문제를 소유했는데, 나까지 그 문제를 소유하게
되지도 않고, 또 상대방도 그 문제에서 벗어나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게 해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자시신이 꾸준히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주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대화를 하다보면 상대방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또 상대방의 속깊은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습니다.
흔히 청소년이 되면 어렸을 때와는 달리 부모와 깊은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끊임없이 자신의 입장에서 정답을
제시하고 자신의 의도대로 자녀에게 말하고 강요하기 쉽습니다.
자녀의 속깊은 말을 듣고 싶으면, 자녀의 속깊은 생각을 알고
싶으면, '자녀와 친구처럼 따뜻하게 지내고 싶으면, 자녀의 말을
많이 들어주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건성으로, 나의 의도를 담아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을 공감하면서
들어주는 것입니다.
PET의 T는 트레이닝이다. 즉 훈련입니다. 권투선수나, 씨름선수,
혹은 축구선수들이 땀을 흘려 반복되는 동작을 통해서 기술을
익히고, 근육을 단련시키듯, 대화법도 꾸준히 의식을 하고
노력할 때 조금씩 자연스럽게 상대방과 좀 더 편안하고 깊게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희망 신부님 묵상 -
◈ [청주] 권위 있는 삶
사람이 지니는 권위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권위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내부에서 나오는
권위입니다. 외적인 권위는 신분과 직책을 통해 부여받는 것입니다.
곧 그가 맡고 있는 역할이나 신분에 따라 오는 것입니다. 내적인
권위는 자신이 지닌 생각과 신념 등이 행동으로 드러날 때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외적인 권위보다 내적인 권위를 지니신 분이었습니다.
외적으로는 목수의 아들에다 별 볼 일 없는 베들레헴 출신이기에
그다지 큰 권위를 지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내적 권위에서는
그분을 따르는 많은 추종자가 생겨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권위를 느꼈고 또 많은 군중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다른 ‘권위’가
느껴졌다고 이야기합니다.(루카 4,31-32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진정 지녀야 할 모습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받아 스스로 첫자리에 앉으려 하는 사람은 외적인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일지 모릅니다. 남들이 알아봐 주는 자리에
가서 스스로를 돋보이고 싶어 성구갑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도
길게 늘이며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는 사람일지 모릅니다.(마태 23,5-7 참조)
반면 스스로 선택해서 끝자리에 앉는 사람은 다른 이들의 시선이나
눈치 그리고 보이기 위한 행동보다는 자신의 내적 가치와 질서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은 비록 끝자리에 앉아 있더라도
그곳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이루며 빛을 낼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그리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신분과 직책의
힘보다 그가 지닌 정신과 가치 그리고 신념에서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한테 보여주신 것은
그러한 삶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내 권위는 무엇이며 어디에서
힘을 얻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루카 14,10)
- 김선영 신부(청주 성모병원 원목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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