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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기 프랑스에서는 인상파와 아카데미즘간에 한 판 전쟁이 있었습니다. 세잔은 부게로를 보고 ‘꼴통
중의 꼴통’이라고 비난했고 앙리 루소는 그런 세잔을 향해 ‘그림도 완성하지 못하는 주제에--’라는 말로 응수
했습니다. 고드워드는 결국 자신의 작품이 폄하되는 것을 참다 못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죠.
서로가 서로를 인정 하지 않을 때였습니다. 미술도 철학이 기본이 되는 것인데, 생각해보면 새로운 것과
기존의 것은 늘 자리 다툼을 하고 난 후 서로를 인정했었지요. 레옹 보나(Leon Floretin Bonnat / 1833~1922)는
아카데미즘의 선봉 대장이었지만, 그는 조금 달랐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발 바닥에서 가시를 제거하는 아랍 사람 An Arab Removing a Thorn from His Foot
강렬한 색감과 구성 때문에 무거운 작품인가 싶었는데 그림 속 인물의 자세 때문에 웃고 말았습니다. 맨발인
발 바닥에 가시가 박혔습니다. 박힌 작은 가시 하나 때문에 발바닥이 닿을 때마다 따끔거리는 느낌은 당해 본
사람이 아니면 알기 어렵습니다. 총도 집어 던져 놓고 발바닥 가시를 우선 뽑아야겠다고 주저 앉았습니다.
아픔은 부러지고 잘려 나갈 때 보다 몸 어디엔가 자리를 잡고 두고두고 끝 없이 신호를 보낼 때 견디기
힘듭니다. 그래도 눈에 보이는 가시는 뽑기라도 하죠, 그렇지 못한 것들은 그저 가시가 박힌 곳에서 전해지는
통증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가시도 함께 삭아 없어지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지요.
보나는 프랑스 바욘느의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스페인과의 국경 인접 지역인 바욘느는 전통적으로
바스크족들의 영토였었죠. 1846년, 보나가 열 세 살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식구들을 이끌고 마드리드로
자리를 옮깁니다. 그 곳에서 작은 서점을 열었고 보나는 마드리드에 있는 아카데미에 입학, 미술을 배웁니다.
화가의 어린 여동생 The little sister of the artist / 1850
언젠가 누이 동생을 그린 작품에 대한 화가 이야기를 할 때도 썼습니다만 누이 동생은 모든 오빠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것 같은 순수입니다. 그림 속 여동생을 보면 아마 보나도 그런 마음이었겠지요.
가을 누이에게
문정희
누이야
너를 생각하면
눈물이 목까지 차오른다
아디지오로
낙엽이 지는데
이 세상
어느 슬픈 시집에도 없는
희망 없는 사랑을 앓고 있는
나의 누이야
지금은 밝은 가을 달밤
네 사랑이
뜨락 가득히 쌓여 있구나
보나가 마드리드로 이사오기 10년 전, 마드리드에 프라다 미술관이 문을 엽니다. 근처에 있는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필수 과정으로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탈리아, 플랑드르 그리고 스페인 대가들의
작품을 공부해야 했습니다. 벨라스케스, 무리요 그리고 리베라 같은 화가들은 19세기 스페인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화가였습니다.
잠이 든 소녀 Girl asleep / 1852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요? 혹시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천사였던 시절을 만나고 있는 걸까요?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 옵니다. 검은 배경 속, 빛을 받아 아이의 얼굴은 더욱 환합니다.
지친 얼굴이 아니라, 배고픈 얼굴이 아니라 그저 편한 얼굴로 아이들이 잠들 수 있는 세상이 가장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 녀석 정말 잘 자는군요. 어디엔가 기댄 모습으로 잠이 든 것 같은데 아마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곳에 기댔겠지요. 저도 한 때 누군 가에게는 기대기 좋은 사람이었던 적이 있었을 겁니다.
보나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은 1847년 이후입니다. 스승은 마드라조(Madrazo)였는데, 마드라조 부자가 모두
화가였습니다. 루이스 다비드는 아버지 마드라조의 스승이었고 아들 마드라조는 앵그로의 평생 친구였습니다.
다비드와 앵그로는 19세기 스페인 화가들에게 엄청난 존경을 받았고 영향을 준 화가입니다. 그런데 인상파
화가들은 스페인의 벨라스케스로부터 또 많은 영향을 받았으니, 남의 집 떡이 더 입 맛에 맞은 걸까요?
써 놓고 보니 별로 마음에 드는 비유는 아니군요.
처음 다가 온 슬픔 The First Mourning / 1860
왼쪽 남자의 이름은 아담이고 오른쪽 여인의 이름은 이브입니다. 그렇다면 이브의 무릎을 베고 숨을 거둔
청년은 둘 사이의 둘째 아들 아벨이겠지요. 형 카인에 의해 돌로 살해 당한 아벨의 죽음 앞에 성경은 아담의
죄가 자라 카인이 아벨을 죽이는 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것은 인간이 죽음으로 인해 맞게 되는
첫 슬픔입니다. 구약의 하느님은 미울 때가 많습니다. 자식의 죽음을 넋이 빠져 보는 엄마의 마음이나 자신
때문에 이런 일이 났다고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만 헤아리신 다면 --- 참으셨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카인의 후예’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보나 역시 아카데미 전통에 따라 그림 공부를 합니다. 벨라스케스와 리베라의 작품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의 주요 작품 분야인 초상화를 보면 그 흔적이 있습니다. 1853년, 마드리드로 이사온 지 7년 만에
보나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납니다. 가족들은 다시 국경을 넘어 바욘느로 이사를 가야 했습니다.
바욘느에 도착한 보나는 주정부로부터 150프랑의 장학금을 받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는 그 장학금으로
파리에 있는 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할 생각이었습니다. 누군가의 꿈이 현실이 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입니다.
이탈리아 소녀 Italian Girl / 93cm x 72cm
쑥스러운 듯한 표정을 한 소녀의 입에 걸린 미소가 좋습니다. 지금은 모두가 카메라 앞에서 당당한 모델들의
모습으로 서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아직도 렌즈 앞에 서는 것이 어색합니다. 카메라가 얼굴을 향하는 순간
미소가 가시고 어깨는 굳어지며 차려 자세가 되죠. 내가 어디엔가 기록된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부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직 촌스럽습니다. 아마 그림 속 소녀도 저와 같은 마음 아닐까 싶습니다.
파리에 온 보나는 스물 한 살의 나이로 레옹 코니에의 화실에 입학합니다. 1857년까지 4년 간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살롱전에 세 번 출품을 합니다. 그리고 모두 입선이 되었습니다. 초상화는 그의 평생
주요 장르였고 이 덕분에 꾸준한 수입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1857년 보나는 갈망하던 로마대상에 참여
합니다. 우승자는 정부 지원으로 로마 유학을 보내던 제도였는데 많은 젊은 화가들의 꿈이기도 했지요.
물 주전자를 든 이탈리아 소녀 Italian Girl with a Jug / 46cm x 32.5cm / 1875
그림 속 어린 모델들은 대개 사랑스럽고 귀여운 모습인데 이 소녀는 한 세상 다 산 것 같은 표정입니다.
물 주전자를 잡은 손은 축 늘어져있고 다른 한 손은 허리에 올려 놓았습니다.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보입니다. 보나를 정의하는 화풍을 아카데미즘에 충실한 사실주의 화가라고 하는데 아카데미즘과 사실주의는
사실 같이 사용하기에 어색한 표현이죠. 사실주의는 이상화된 모습마저 지워버리는 것이었거든요. 아이가
항아리를 들고 꼼짝 않고 서 있고 싶겠습니까? 그림을 보다가 그림 속 모델과 보나 사이에 있었을 법한
대화가 떠 올랐습니다.
자 똑바로 항아리를 들고 여길 봐야지
저 이거 하기 정말 싫은데요
그래? 그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봐
로마대상에서 보나는 2등을 차지하고 맙니다. 정부지원으로 공부할 기회를 잃었지만 그의 실력을 높이 평가한
심사위원들의 추천으로 로마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실력이 있고 간절한
마음이 있으면 신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고 하죠. 3년간 로마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보나는 3점의
역사화를 제작합니다. 그리고 작품들은 파리의 살롱전에 보내져 전시됩니다.
샘 터의 로마 소녀 Roman Girl at a Fountain / 1875
아직 키가 닿지 않아 맨발인 뒤꿈치를 들었습니다. 양 손으로는 몸을 지탱하고 물이 떨어지는 입구로 입을
가져가는데 잘못하면 옷이 젖을까 걱정입니다. 비탈진 곳에 세워진 샘 터는 근처를 지나는 사람들 보다는
이 곳에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겠지요. 척박해 보이는 배경이지만 생명의 근원인 물과 희망의
상징인 어린 소녀가 등장하면서 편안해졌습니다. 생명과 희망이 있다면 광야----, 건너 볼만하겠지요.
로마에서 귀국한 보나는 프랑스 예술 문화계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아카데미로부터 환영을 받았습니다.
사실 보나는 개인의 서신을 자신이 모조리 없애버렸기 때문에 보나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전해지는 그에 대한 자료는 정부 기관의 공식적인 자료와 그가 지도 했던 학생들이 남긴 기록을 모아
모양을 추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싶었던 걸까요? 그림만으로 세상에 기억되고 싶었던
걸까요?
스에즈의 이발사 The Barber of Suez / 1876
이발소라고 하지만 거울도 없이 달랑 돗자리 하나가 전부입니다. 이발사가 가지고 있는 도구는 면도칼
하나인 것 같습니다. 이발사나 손님이나 머리를 보니 면도칼 하나면 모든 것이 다 해결 되겠군요.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이 가장 확실한 때가 면도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시퍼런 칼날 아래 자신의 목을
맡기고 잠이 든 모습을 보면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요? 그나저나 두 사내가 보여주는 원초적인 생명력도
대단합니다.
1867년 보나는 레종 드 뇌를 훈장을 받습니다. 그리고 2년 뒤 서른 여섯의 나이로 살롱전의 심사위원이
되면서 그 시대 선두 주자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심사위원은 그가 평생 유지하던 자리였습니다. 이 해
쿠르베의 작품이 살롱전에서 논란이 되었습니다. 보나는 크르베 작품의 변호자였습니다. 까칠한 쿠르베를
옹호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나중에 보나와 정 반대편에 서는 인상파의 드가와는 평생 친구였고
마네와는 스페인에 대한 사랑을 공유하는 사이였던 것을 보면 보나의 인간관계는 이념에 얽매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근사했군요.
빅토르 위고의 초상화 Portrait of Victor Hugo
위고는 사랑하는 아내가 자신의 친구와 바람을 피우는 바람에 아주 힘든 시간을 보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일로 위고 자신도 다른 여배우와 바람을 피우기도 했지요. 나중에는 딸과 사위가 세느강에서 빠져
죽는 사고로 한동안 글 쓰는 것을 포기 한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뛰고 머리가 아파’
혹시 그렇게 말씀 하시는 건 아니죠?
알렉상드르 뒤마 (소 뒤마) Alexandre Dumas Fils
일렉상드르 뒤마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같아서 아버지는 대 뒤마, 아들은 소 뒤마라고 불리죠. 이름의
끝에 아버지는 pre가 붙고 아들은 fils를 붙입니다. 아들은 ‘몬데크리스트 백작’을 쓴 아버지와 창녀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아들이 쓴 소설 ‘춘희’의 주인공도 창녀였습니다.
1870년 대부터 보나는 확실하게 초상화에 전념합니다. 뒤마 같은 유명인들이 그의 모델이었는데 섬세한
묘사로 유명했습니다. 초상화를 완성하기 위해서 모델은 50번 넘게 앉았다 일어 나기를 반복 했다고 하니까
시키는 화가나 모델이나 대단했습니다. 마침내 1888년, 55세의 보나는 에콜 드 보자르의 교수가 됩니다.
제자들을 보면 훗날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화가들이 많습니다. 얼추 훑어봐도 카유보트, 토마스 에킨스,
마담 파스카 Madame Pasca / 104cm x 60cm / 1885
아주 당당한 모습입니다. 어떤 자료에는 여인이 입고 있는 옷이 나름대로 당시 주류 의상이었다는 대목도
보이는데 옷으로도 감출 수 없는 것은 여인의 표정입니다. 마담 파스카가 누구인지 확실한 자료는 찾을 수
없었지만 소 뒤마의 연극으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는 걸 보면 혹시 배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직업이 무엇이었던 간에 자신 있는 얼굴을 만나면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자신감은 세상과 소통하는 굳건한
다리이기 때문이죠.
제자들이 기억하는 스승 보나의 가르침의 핵심은 ‘진실과 논리(Truth and Logic)’였습니다. 아카데미즘과
사실주의가 결합된 그의 작품 세계를 단적으로 정의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토마스 애킨스가 그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중에 스승인 보나에 대해서 쓴 내용이 있습니다.
-- 선생님은 강요하지 않으셨지만 저는 선생님이 했던 방법과 동일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스승 이상입니다. --
훌륭한 스승은 제자들이 먼저 압니다.
첫 발 First Steps
신영복 선생님 글 중에 ‘첫’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에 대해서 쓰신 것이 있습니다.
첫 사랑, 첫 직장, 첫 만남 --- 그 수많은 ‘첫’ 중에서 저는 첫 발이 제일 좋습니다. 육체적으로도 첫 발을
떼는 것이지만 정신적으로도 혼자 서는 시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도 누군가의 도움으로 첫 발을 내 디뎠을
것이고 넘어지는 저를 수도 없이 받았고 일으켜 주셨을 겁니다. 이제는 제가 누군가가 ‘첫 발’을 옮길 수
있도록 팔을 잡아 주어야겠지요. 그리고 언젠가는 또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다음 세상으로 떠나겠지요.
초상화가로 금전적인 여유가 생긴 보나는 대가들의 작품과 당대의 가치 있는 작품들을 수집합니다. 그리고
고향에 미술관을 세우고 수집한 작품과 자신의 작품을 전시합니다. 멋진 인생이었습니다. 보나는 1905년,
72세의 나이에 에콜 드 보자르의 교장이 되었고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농사 짓는 여인과 아이 Peasant Woman and her child
앞 섶이 열린 것을 보니 방금 젖이라도 먹인 것 같습니다. 배가 부른 아이는 잠이 왔습니다. 우리처럼
아이를 업는 풍습이 없다 보니 아이를 물동이 들 듯 어깨 위에 올렸습니다. 햇빛으로부터 아이를 가리고자
엄마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아이에게 씌웠습니다. 맨발의 엄마도 피곤한 얼굴입니다. 그래도 행여 아이가
깰까, 걸음걸음 조심스럽습니다. 세상의 엄마들은 늘 같은 모습입니다.
보나는 쿠르베처럼 논쟁거리가 많은 화가였습니다. 또 19세기 후반 화가들 중에서 보나만큼 영향력 있는
화가도, 또 쉽게 잊혀진 화가도 거의 없습니다. 아마도 20세기 초부터 확실하게 주류로 자리를 잡은 후기
인상파와 추상주의로 이어지는 미술 사조가 그 원인일 수 있겠지요. 그래도 좋은 화가였고 선생님이셨으니,
나쁘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렇지요, 보나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