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2년 11월13일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청주] 그저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신부
† 독서 : 티토 2, 1 - 8. 11 - 14
† 복음 : 루카 17, 7 - 10
★ 바오로 사도는 티토에게 여러 부류의 신자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지 지시한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를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준다고 말한다(제1독서).
★ 종은 주인이 시킨 일을 충실히 하였다고 해서 주인에게서
고맙다는 말을 듣지 못한다. 온갖 덕을 다 실천하더라도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은 것이다.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는 겸손한 봉사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소나 개처럼 짐승이 사람의 말을 잘 들으면 ‘순하다’고 말하지
‘겸손하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겸손’은 사람에게만
쓰이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겸손한 사람의 특징은 어떠할까요?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바라보며 한계와
약점을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또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모든
재능이나 능력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은 물론이고,
이 세상의 주인은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며 하느님께 늘 의지하면서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대를 남다르게 보아 줍니까?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인 양 자랑합니까?”(1코린 4,7)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받은 것이기에 우리가 자랑하려면 그 모든 것을 주신
주님을 자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그의 말과 행동에서 겸손이 드러납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고 나서도 “그저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며 자신을 낮춥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좀 가졌다고 으스대지 않고, 이웃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결국 겸손은 자신은 물론이고, 이웃의
품위를 드러내는 덕입니다. 이 겸손이야말로 영적으로 가난한
이들만이 피울 수 있는 아름다운 꽃입니다.
-매일 미사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나를 알아야 행복하다
2012년 나해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
복음 : 루카 17,7-10
< 나를 알아야 행복하다 >
2012년 5월 20일 방영된 동물농장이란 프로그램에서는 오토바이를
쫓는 개 뭉치가 방영되었습니다. 뭉치는 하루 종일 동네 슈퍼 앞에
앉아 있다가 오토바이만 지나가면 그 앞을 가로막고 마구 짖어댑니다.
그런데 사실 뭉치가 쫓는 오토바이는 단 한 대 뿐이었습니다. 다른
오토바이는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 오토바이는 슈퍼 앞 쪽에
있는 한 마트의 배달용 오토바이였습니다. 처음엔 경쟁 마트의
오토바이기 때문에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슈퍼 앞에서
매일 지키고 있었지만 그의 집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
그의 공격 상대는 오토바이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마트에서
기르고 있는 누렁이 때문이었습니다. 1년 전에 누렁이에게 서너
번 물린 적이 있기 때문에 누렁이가 무서워서 그 마트까지는 가지
못하고 그 마트의 오토바이에게 괜한 화풀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복수를 계획한 것이 어언 1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뭉치는 기회를 노렸다가 오토바이와 동행하는
누렁이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누렁이도 화가 나 뭉치를 덮쳤고
순식간에 싸움으로 번졌습니다. 뭉치는 누렁이의 힘에 못
당하면서도 끝까지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떼어놓아서
간신히 뭉치가 큰 상처를 받지 않았지만 여전히 뭉치는 끝까지
싸울 기세였습니다.
결국 전문가들이 왔습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뭉치가
자신의 서열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뭉치와 누렁이가 자유롭게 싸울 공간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이제 누렁이와 뭉치는 입과 발에 보호대 등을 착용하고 철창으로
만든 좁은 공간에서 싸움을 벌이도록 놓아두었습니다. 결국
승자는 누렁이가 됐고, 뭉치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뭉치가 다시는 집을 나가 슈퍼로 가지 않고 모든
것을 잊고 편안하게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종이 하루 종일 일을 하다가 돌아와서 주인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종은 집에
돌아와서도 주인의 시중을 들어야합니다. 종은 종일 따름입니다.
만약 종이 주인에게 그렇게 고생하고 왔으니 보상을 달라고
청한다면 이는 충실한 종의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하느님을 위해 봉사를 하고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의 지위를 격하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처지를 바로 알아 교만해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교만해지면 불만만 쌓이고 절대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뭉치는 자신이 누렁이를 이길 수 있는데 당하기만 했다고
여기고 끝까지 복수할 기회를 노립니다. 이 뭉치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대신 복수를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누렁이가 자신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해 주는
것뿐입니다. 그것을 인정해야만 자신의 마음 안에도 평화가
옵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처지를 너무
모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일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하느님을 위해서 무언가 해주고
있는데 하느님은 그만큼 나에게 행복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며칠 단식하여 굶고 나니 내 자신의
나약한 처지를 알게 되고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나를 구원해 주시고 당신 도구로 써 주심에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행복을 위해서는 내가 누군지를
깨닫는 것이 지름길임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 앞에서 누구도 무언가를
해 드리고 있다고 당당하게 보답을 청구할 수는 없습니다.
종으로 써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귀가 예수님께 보답을 원해야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귀는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처지이고 또 주님께서 자신의
등에 타셨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을 써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합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마구간이 성가정의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다고
해서 그분들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버려진 마구간을
하느님의 탄생지가 되게 해 주신 하느님과 마리아 요셉께 오히려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처지를 알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마지막 날엔 그리스도는 우리의 노고를 보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이 알아서 할 일이지 우리가 요구할 사항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그저 보잘 것 없는 우리를 봉사하게
불러주신 그분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 알면
행복합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그저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 루카 17,7-10
그저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
우리는 살아가면서 작은 노력에도 남이 칭찬해 주고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기대를 하였는데 채워지지 않으면 섭섭해 하고 화를
내며 다투기도 합니다. 때로는 남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에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주님 눈에 들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주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변사람들의
반응에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는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언젠가 ‘아름다운 손’이라는 제목으로 한 시민이 거액의 돈을
주워 경찰에 맡김으로써 주인이 잃은 돈을 찾을 수 있었다는
기사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순간적인 유혹도 있었겠지만 주인에게
돌려준 귀한 마음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 마음 항상 지켜지길
희망합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돈은 분명 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런데 너무도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보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카17,10) 하는 사람이 미련한 사람,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런 바보라면 얼마든지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교부 실루스는 “모든 일이 당신의 생각에 가장 좋은 방향으로
되기를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되기를 바라라.
그러면 혼란에서 벗어나 기도 중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하는
사람이 그리운 세상입니다. 여러분은 공을 이루고 물릴 줄 아는
사람,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참된 노고는 남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남의 눈에 띄는 노고는 허영심만 키울 뿐입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들
11월 13일 연중 제32주간 화요일-루카 17,7-10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들>
아이들이 사는 집에는 언제나 매일 산더미 같은 일거리들이 쌓이게
됩니다. 한 두 명도 아니고 백여 명 가까이 되는 대식구들이 한
울타리 안에 살아 가다보니 언제나 일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희 집은 언제나 고마우신 분들로 넘쳐납니다. 여러
고마우신 분들 중에 특별히 인상에 남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분들의 특징은 언제 도착했는지 모르게 조용히 오셔서 꼭 필요한
일들만 소리 없이 조용히 해치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실 때보다
더욱 조용히 사라지십니다. 수고했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을
죽기보다 싫어들 하십니다. 말마디 그대로 천사들이십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는
오늘 복음말씀을 그대로 살고 계시는 분들이시지요. 그분들의 삶
앞에 저 같은 날나리 수도자들은 부끄럽기만 합니다. 말로는
그럴듯하게 "봉사 없는 삶은 무의미한 삶입니다. 봉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첫 번째 가는 의무입니다!"라고 습관처럼
외쳐대지만 공허한 메아리로 제게로 되돌아옵니다.
몇 년 전 성목요일 최후의 만찬 예식 때의 일이었습니다. 여러
신부님들이 공동으로 미사를 집전했었는데, 강론을 맡으셨던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사제들은 도대체 언제 봉사를 합니까?
우리들은 일년 내내 형제들이나 신자들로부터 봉사만 받다가
1년에 딱 한번 성목요일 세족례 예식 때만 그럴듯한 표정을
지으며 봉사를 합니다. 우리의 사제직은 무엇보다도 봉사하기
위한 직분입니다. 우리 사제들의 봉사는 1년에 한번만이 아니라
365일 지속되어야 하며, 제대 위에서의 성무집행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델 예수님은 섬김의 왕이었지 섬김을 받던 왕이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높다란 왕좌에 앉아 백성들 위에 군림하던
왕이 결코 아니셨습니다. 산해진미가 그득한 주안상 앞에 편안히
앉아서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호의호식하던 왕도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왕이셨습니까? 호화찬란한 왕궁은 고사하고 초라한
여인숙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겸손의
왕이셨습니다. 쓰디쓴 고난의 잔을 기꺼이 받아 마셔야 했던
고통의 왕이셨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눈물을
머금고 차마 가기 싫었던 형극의 길을 걸어가야 했던 슬픈 모습의
왕이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하나 하나 씻어주셨던 섬김의
왕이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사제, 모든 수도자, 모든 교회 지도자들이 이런
섬김의 왕으로 살아가도록 마음 모아 기도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 최선의 봉사를
다한 뒤에 조용하고 겸손하게 물러나는 우리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노력, 우리의 수고, 우리의 땀, 우리의
봉사가 인간들로부터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쭐대지 않고 티내지 않고 오버하지
않고, 조용히 침묵 속에 묵묵히 참된 봉사를 실천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인천] 나와 주님의 관계는 어던 관계입니까?
제가 고등학교 겨울방학 때였습니다. 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선배님께서 겨울 낚시를 하러 간다고 제게 같이 가겠냐고
물었습니다. 솔직히 낚시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지만
낚시가 무척이나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또한 호기심에
그 선배님을 무작정 따라갔습니다. 어떤 호숫가로 들어가
꽁꽁 얼은 얼음을 깨고 뚫은 구멍에 낚싯대를 드리웠습니다.
겨울이라 무척 추웠지요. 그런데 물고기가 많이 잡히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추운데 낚싯대를 통해서 어쩌다 올라오는
물고기도 아주 조그마한 것뿐이어서 맥이 풀립니다. 그런데도
이 선배님의 표정은 너무나도 즐거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어린 저로써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었습니다.
‘이 추위에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어떻게 즐거워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저절로 생겼습니다.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큰
물고기를 잡는 것, 또 물고기를 많이 잡는 것. 그러면 좋겠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냥 낚시를 하러 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쁘고 행복해 합니다.
저 역시 저만의 취미를 가지면서 이 취미를 할 때에는 그렇게
놀라운 성과가 없어도 취미생활을 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움을 얻습니다.
저의 취미는 자전거 타기지요. 이 자전거를 타고서 땀을 뻘뻘
흘리며 언덕을 올라갈 때면 사람들이 왜 그 고생을 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분명히 즐겁고 행복합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생활을 생각해보세요. 반드시 커다란 보상이
있어야지만 기쁠까요? 예를 들어 많은 돈이 생기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야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있어,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말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취미 생활을
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것처럼,
신앙생활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얼마나 이 안에서 주님을 느끼고 주님과 함께 하려는
노력이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과 주인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은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보다 윗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대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보상만을 원하면서 살아간다면 분명히 행복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가지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늘 커다란 만족과 행복을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내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나와
주님의 관계는 어떤 관계입니까?
그대에게 일어나는 각각의 일 속에는 그대의 영혼을 깊어지게
하는 가능성이 숨어 있다. 경험은 그대 가슴 안에 새로운 영역을
탄생시킨다(존 오도나휴).
간밤의 비바람으로 모든 낙엽이 떨어지지 않았을까요? 낙엽사진
구경하세요.
부모님께 감사~~~
저는 지금 혼자 삽니다. 신부라는 위치에서 독신으로 살다보니
당연히 혼자살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신부라는 위치에
있지 않더라도 어렸을 때부터 저는 혼자 살고 싶었습니다. 워낙
식구들이 많다보니 내 방 하나 얻기가 힘들었고, 그래서 자기만의
공간을 가지고 있는 외아들인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드디어 부모님을 떠나서 신학교라는 곳에서 나만의 공간을
간직하면서 살 수 있게 되었지요.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책상 정리를 하지 않아도 어머님의
잔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전기 플러그를 빼놓지
않아도 어느 누구하나 저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께서 이토록 많은
일을 하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더군요.
방이 지저분하면 청소도 직접 해주셨고, 빨래 역시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에는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당연히
부모님께서 사줘야 한다면서 떼를 쓰곤 했는데, 신학교에 들어와서는
한 푼 한 푼 신경을 쓰면서 한 학기 동안 용돈을 절약하며 살아야만
했지요. 특히 여기에 그 많은 식구들의 식사까지 준비하셔야만
했으니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이렇게 힘들고 손이 많이 가는
것들을 저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신학교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제
마음을 보면서 부모님께 죄송했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생각을 떠올리면서, 어쩌면 하느님 아버지께도 이러한 불효를 계속
저지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우리가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그 많은 것들을 주고 계신데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저희들의 모습들. 잘한 것은 나 때문이고, 내 마음에 잘 들지
않는 것은 하느님 때문으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모습들에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서운해 하실까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연중 제32주간 화요일(루카 복음 17장 7~10절)
섬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을 때, 제가 저를 걱정하는 것보다
신자들이 저를 더 걱정해 주었던 거 같습니다. ‘젊은 신부가
섬에 들어와서 얼마나 힘들까.. 식복사도 없고, 젊은 사람도
없고, 나이 많은 신자들을 상대해야 하고, 농사 일 하고 작업
하는 것도 그렇고... 또 공소 건축 모금 하러 다니느라 얼마나
힘드실까.. 더 고생 안 하시게 빨리 도시로 발령이 나셔야 할
텐데...’ 하는 말들을 들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그런 말이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힘들지도 않았고, 첫 본당이라 ‘그냥 열심히...’ 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배워보자.. 성실히 살아보자..’ 하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에, ‘잘 하고.. 못 하고.. 어떻고..’ 하는
평가와 시행착오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고, 그저 일이 주어지면
집중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런 마음이 조금 시들해진 거 같습니다.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평가와 반응에만 민감해진 거 같은데요. 그
이유를 오늘 복음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알게 된 거 같습니다.
복음 마지막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라는 종의 마음’... 첫 마음은 그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이런 일도 하는데.. 열심히 글도 썼는데...
쉬는 날도 상관없이 일하는데.. 휴가도 제대로 못 쓰는데.. ’
하면서, 좋은 평가를 기대하고, 반응과 동참에 높은 기대를 했던
거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이 동참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 신자들의
모습이나, 내가 한 일을 알아주지 않고 감사함을 느끼지 않는 분을
보면 실망하고 의기소침해 져서 ‘해서 뭐 하나...’ 라는 감정에
사로잡히곤 했었던 거 같은데요.
돌아보면 사람들의 평가에 상관없이 주님의 일을 하는 거 자체가
보람 있고 의미가 있을 때가 있었고, ‘넘어져도 괜찮아’ 하고
가뿐이 다시 일어설 때가 있었습니다. 또 신자분들이 많지 않아도
동참한 분들에게 감사를 느끼고 더 유익한 무언가를 생각할 때가
있었고, 내가 준 것을 생색내지 않고 자랑하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부로 살아가는 자체가 감사하고 미소를 짓게 되는 때가
있었습니다.
요즘 그런 모습이 그려지고 떠올려지곤 했었는데, 그런 모습을
만들어 내는 원천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러던 차에
오늘 복음 말씀이 ‘종의 마음.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라는
겸손한 마음. 이걸 잊고 있었다..’ 하고 가르쳐 준 거 같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섬기면서 ‘내가 이런 일들을 해 주고 있는데..’ 하고 자랑하며
보상을 바라고 있는지, 아니면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맡은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아이들이 미사 시간에 멍하니 있었다.
그러자 한 할머니가 미사 후에 아이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멍하니 있지 말고 신부님 강론 잘 들어~”
그리고 옆에 있는 나에게 “얘들이 뭘 알아야지...” 하셨는데,
문득 몇 주 전에 강론을 마칠 무렵에 할머니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할머니, 제가 이야기 한 거 중에 기억나는 단어나 문장 아무거나
이야기 해보세요~”
“몰라요...”
- 밤송이 신부의 묵상 글 -
◈ [대전] 그 이유
제가 초등학생 때, 간혹 성적이 오르면 부모님은 장난감을 사주곤
하셨습니다. 그 덕에 저는 문구류, 로봇, 농구공은 물론,
롤러스케이트까지 받을 수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이
사주시지 않는 장난감이 하나 생겼습니다. 바로 ‘재믹스’라는
게임기였습니다. 텔레비전에 연결해서 다양한 전자오락을 즐길
수 있던 그 게임기가 제게는 환상의 기계였지만, 부모님께는
아이의 삶을 망칠 수도 있는 위험한 기계였나 봅니다. 결국
부모님은 게임기를 사주지 않으셨고, 그때부터 저는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했으면 사줘야지 왜 안 사주세요!’, ‘약속은 지켜야
하는 것 아니에요?’, ‘맡겨놓은 세뱃돈 안 줄 때부터 알아봤어!’
등, 목이 쉬어라 부모님의 부조리(?)에 대해 칭얼거렸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부모님이 아닌가 봐.’라는 일기까지 썼었죠.
금지된 것이 더 달콤해 보인다고 했던가요. 저는 거의 필사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얼굴 화끈거리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를 먹여주고 키워주고 지켜주신
분들이 부모님입니다. 저를 위해서라면 아무 거리낌 없이 당신들을
희생하시는 분들이죠. 공부를 시키려 하신 것도 저를 위함이요,
게임기를 사주지 않으신 것도 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판단을 자신이 아니라 자녀를 위해 내리시는 분. 그런 부모님
앞에서 어떤 자녀가 합당한 거래를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명을 주신 이유.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난하고
죽고 부활하신 이유.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는
그 이유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그분 앞에서 어느 누가
시키는 대로 했으니 내놓으라고, 시키는 대로 했는데 왜 이러냐고
따질 수 있겠습니까. 이미 그분은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분, 당신의 모든 판단을 우리를 위해 내리시는
분, 바로 우리 아버지이신데 말입니다.
- 양동혁 신부(대전교구 월평동천주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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