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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낯선 그림을 만났습니다. 어색하지만 화려한 색깔과 따뜻한 장면들이 잘 어우러진 작품들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림 속 흑인들의 모습이 아주 자연스러웠는데, 따뜻하게 흑인을 그림 속에 묘사한 최초의 미국 화가라는
말을 듣는 윌리엄 S. 마운트 (William Sidney Mount 1807~ 1868)의 작품들이었습니다. 화가 말고도 다양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던 그를 만나 보겠습니다.
청혼 Courtship / 46.36cm x 37.78cm / 1836
부부인줄 알았더니 남자의 청혼 모습이군요. 꽃이라도 한 다발 가져와서 청혼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은데,
두 사람의 관계가 아주 편합니다. 그렇다면 어제 오늘 만난 사이가 아니겠지요. 아마 같은 동네에서 오래 함께
자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저렇게 기꺼이 실타래를 들어주는 것도 두 사람 사이에는 일상일 수 있겠지요.
꼭 말을 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래도 확인을 받고 싶은 것이 프러포즈입니다.
할 말이 있는데, 내 아내가 되어주면 안될까?
아주 자신 있는 남자의 환한 얼굴이 보기 좋습니다. 여인도 속으로는 벌써 대답이 끝났지요.
그 이야기 기다리다가 늙어 죽는 줄 알았어.
그러나 겉으로는 뺨만 붉어졌습니다. 소박한 두 사람 모습을 보다가 문득 결혼을 앞두고 청혼서를 두 장이나
썼던 기억이 납니다. 하긴, 기다리다가 늙어 죽은 이야기는 소설에서나 가능하지요.
마운트는 뉴욕 주 시토켓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직업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일곱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서른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런 경우 어린 아이들과 함께 남은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가지 없습니다. 마운트의 어머니는 근처에 살던 친정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갑니다. 오래 전부터
터를 잡고 있던 그의 외가는 넓은 농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에게 미술과 관련된 영감을 준 첫 번째 장소가
되었습니다.
무단 결석한 노름꾼들 The Truant Gamblers / 60.96cm x 76.2cm / 1835
아. 이 녀석들 학교를 안 가고 ‘땡땡이’를 치고 있습니다. 그 것도 그냥 노는 것이 아니고 뽑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모자를 들고 있는 녀석의 자세에서는 ‘프로’의 냄새가 느껴집니다. 그런데 큰 일 났습니다.
망을 봐야 할 녀석이 그만 게임에 빠져서 자신의 본분을 잊었습니다. 쇠스랑을 들고 왼쪽에서 살금살금 다가
오는 어른을 못 본 것이죠. 입을 굳게 다문 어른의 얼굴에는 화가 잔뜩 어렸고 회초리를 든 오른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다리를 구부려 소리를 최대한 작게 하고 걷는 것을 보니 아이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인 것
같습니다.
애들아, 빨리 도망쳐!
도망가기에는 너무 늦었을까요? 뭐 그렇게 ‘쥐어 터지면서’ 크는 거죠.
여덟 살이 되던 해, 마운트는 맨하탄에 있는 외삼촌의 집으로 보내집니다. 외삼촌은 극작가와 프로듀서로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사람이었습니다. 도시에서 성공한 사람들 집에 시골에서 올라온 조카들이 모여드는
것은 30년 전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외삼촌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연극과 음악에 대한 정열도
있었고 오페라타 작곡 일도 했습니다. 그가 운영하는 사무실 한 켠에 피아노를 설치하고는 연주를 즐겼는데
이런 외삼촌의 기질이 마운트에게 그대로 전달 되었습니다.
아이들의 다툼 School Boys Quarreling / 51.44cm x 63.5cm / 1830
이 녀석들이 이제는 싸움질이군요. 가만히 보니 맨 왼쪽 아이는 코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아마 손가락으로
아이를 가리키고 있는 가운데 아이에게 맞은 것 같습니다. 그러자 좀 더 키가 큰 두 아이가 편을 들고 나선
것이겠지요. 키 큰 두 아이는 주먹을 들고 으르렁 대지만 효과는 그다지 없어 보입니다. 코피를 흘리던 아이도
소매를 걷고 힘을 합해 볼 생각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가운데 있는 녀석이 아주 강해 보입니다. 안정된 자세나
주먹의 위치가 한 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거든요. 왼쪽에서 두 번째 아이를 보다가 자꾸 개그맨 박명수씨가
떠 올랐습니다. 싸우면서 아이들은 큰다고 어른들은 예전에 그러셨죠 --- 지내고 보니 어른들 말씀은 틀린
것이 없습니다
바이올린을 배운 마운트는 근처 선술집에서 자주 연주 요청을 받았다고 합니다. 미술보다는 음악에서 먼저
끼를 보인 것이죠. 그의 미술 재능을 발견한 사람은 그의 형이었습니다. 뉴욕에서 형들 중 한 명은 간판을
그리는 일을, 또 한 사람은 초상화가로 활동했고 누이 동생도 아마추어 화가였으니까 마운트의 형제들은 미술
재능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외가 쪽 피를 많이 닮았던 모양이지요? 간판 그리는 일을 돕던 마운트를 눈 여겨
보던 형은, 설립된 지 얼마 안된 뉴욕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 (National Academy of Design in N.Y.)에 동생을 입학
시킵니다.
농부들의 휴식 시간 Farmers Nooning / 51.5cm x 61.5cm / 1836
가을걷이를 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꼬마는 건초 더미에 누워 살짝 잠이 든 흑인 아저씨 귀를
간질이고 있습니다. 비록 그늘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작품의 한 가운데, 그 것도 가장 편한 자세로 누워 있는
흑인 아저씨 모습은 작품 제작 년대를 생각하면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장면입니다. 물론 햇빛에 누운
모습과 달리 젊은 백인 총각들 중에는 단아한 모습으로 도구를 손질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묘사와 행동에
차이를 둔 것은 끝내 건널 수 없는 강 같은 것이 마운트의 마음 속에 있었기 때문일까요?
1826년, 열 아홉의 나이에 마운트는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에 입학,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시작합니다. 디자인
아카데미는 유럽식 아카데미 교육 방법을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유럽에서 공부를 하고 온 화가들을 보며 그도
유럽에 갈 꿈을 한 때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렇게 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를 ‘ 너무 유럽을 좋아할까 봐
겁이 났다’라고 했습니다.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알 수 없지만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짐작이 됩니다.
거위를 걸고 추첨하다 Raffling for the Goose / 43.18cm x 58.74cm / 1837
모자 속으로 손을 넣었습니다. 손에 느껴지는 감촉으로 거위를 가져 갈 수 있는 행운의 표를 뽑아야 합니다.
손가락에 모든 신경을 쓰느라고 눈이 살짝 치켜 올라갔군요. 멀쩡하게 생긴 남자들이 거위 한 마리를 놓고
추첨을 하는데 옷차림으로 봐서는 그다지 간절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냥 재미이겠지요.
날아갈 수 없는 거위의 다리를 잡고 있는 남자는 승부욕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아마 이런 마음일겁니다.
누가 뭐래도 이건 내 거야!
아저씨, 세상에는 목숨 걸 것이 거위 말고도 정말 많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마운트는 뉴욕에 머무르게 됩니다. 당시 뉴욕은 1825년 이리 (Erie) 운하가 개통되면서 보스턴
이나 필라델피아 같은 기존의 도시들을 젖히고 미국의 상업 중심지로 떠 오르고 있었습니다. 신흥 사업가 층이
등장 하기 시작했는데 젊은 화가들에게는 더 할 수 없이 좋은 환경이 되었죠. 다른 화가들과의 관계를 넓히고
여러 단체에 가입, 활발하게 활동하는 과정 중에 마운트는 저명한 유력 인사들로부터 주로 주문을 받습니다.
마케팅에도 재능이 상당했었나 봅니다.
점 보기 Fortune Telling / 106.68cm x 132.08cm / 1838
기다리던 점괘가 나왔습니다. 차마 그 결과를 직접 들을 수 없는 여인은 모자로 귀를 가렸습니다. 그래도
손은 점쟁이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좋은 점괘가 나왔을 거라고 안심시키는 남자의 손은 여인의 어깨에
닿았지만 눈은 점괘를 향하고 있습니다. 초초하고 긴장된 순간입니다. 점쟁이의 얼굴이 심각합니다.
괘가 어떻게 나왔더라도 좋은 풀이를 해 주겠지요? 과거는 얼굴에 나타나서 짐작할 수 있다지만 미래를 아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점이 맞았다면 저는 마흔에 관(冠) 위에 관(冠)을 썼을 것입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어렸을 때 제 미래에 대한 점을 보고 해 주신 말씀이셨거든요. 무슨 관을 썼을까요 ---.
거기 젊은 두 사람, 그냥 열심히 사랑하며 살면 됩니다.
당시 젊은 화가들은 아카데미의 과정에 따라 풍경화와 역사화, 성서화 등을 시작으로 경력을 쌓아갔지만
마운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진정한 미국인의 삶을 묘사하는데 그의 역량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 뉴욕은 너무 복잡했습니다. 실제로 그가 뉴욕에 거주하면서 보낸 시간은 꽤 길지만 도시의 풍경은
그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배를 이용한 여행, 낚시, 사냥을 통해 그가 본 것을 그렸습니다.
화가의 승리 The Painter's Triumph / 49.53cm X 59.69cm / 1838
자, 이제 끝났다! 자네 이리 와서 이 것 좀 봐. 정말 근사하게 묘사되었지?
와, 대단하군. 정말 멋있어. 이게 진짜 그림이란 말인가? 내 눈 앞에 있지만 못 믿겠는걸.
이렇게 묘사한 것은 어쩌면 근방에서는 내가 처음일거야.
음, 자네 말에 동의하네. 정말 자네는 대단한 화가야. 수고했네.
아마 친구를 모델로 작품을 막 끝낸 모양입니다. 한 손으로는 팔레트를 높이 치켜들고 한 손으로는 그림을
가리키는 자세는 승리자의 모습입니다. 최선을 다한 결과가 좋았다면 승리한 것 맞습니다. 자신의 작품에
스스로 도취한 화가의 모습도, 기꺼이 허리를 숙여 기쁜 얼굴로 함께 그림을 봐 주는 모델도 보기 좋습니다.
그런데 손에 든 그 채찍은 뭔가요? 소품치고는 좀 고약하군요.
마운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그는 많은 다양한 단체에 가입, 아주 적극적인
활동을 합니다. 그가 참여한 단체 중에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초대하는 모임도 있었습니다. 강신술(降神術)을
믿는 이 모임에서 마운트는 렘브란트의 영혼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렘브란트가 자신이 작품을 제작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믿어지시는지요? 이건야 원 ---- 만약 지금도 가능하다면, 저는 여러 화가들을
초대해서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군요.
토끼 잡이 Catching Rabbits / 45.72cm x 55.25cm / 1839
토끼를 잡는 틀이 저렇게 생겼군요.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저 통 안으로 토끼가 들어갈 것 같지는 않은데
아이의 손에 들린 것을 보니 꽤 실속 있는 장치인 것 같습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토끼 몰이 한 번 못해봤으니
저 기분을 알 수 없지만 토끼를 든 아이의 표정은 자랑이 지나쳐 ‘느끼’하게도 보입니다. 예전 어렸을 때
강원도에 잠깐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눈이 내리는 날이면 동네 어른들과 젊은 형들이
곰을 잡으러 간다고 산에 올랐습니다. 1년 남짓 그 곳에 살면서 곰을 잡았다는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자욱하게 눈이 내리면 검은 점으로 산을 오르던 그 모습들이 떠 오릅니다.
곰보다는 토끼를 잡으실 걸 그랬나 봅니다.
화가로서 이른 시기에 성공한 마운트는 그림을 그리는데 제약이 없었습니다. 밤이면 선술집에 가서 플릇이나
비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을 좋아했고 여행을 할 때는 항상 화구들 가지고 다녀서 가는 곳마다 스케치를 하거나
그림을 그렸습니다. 남북 전쟁 전에는 정치적인 사안에 관심이 많았고 뉴욕과 롱아일랜즈 지역의 민주당원으로
아주 적극적인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니 그의 작품에 정치적인 이슈들이 나타나는 것도 어색한 일이 아닙니다.
새알 채집 Bird-Egging / 32.4 x 43.2 / 1844
아주 심각한 일이 일어 났습니다. 숲 속의 새 둥지를 발견했는데 알이 있었겠지요. 제일 큰 아이는 새 알을
집으로 가져가서 먹을 생각인 모양입니다. 그러자 그 것을 그냥 놓아 두고 싶었던 동생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여동생도 그냥 두자고 말리지만 오빠는 손을 뿌리치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나이를 들면서 잊어 버리는 것 중의 하나는 순수입니다. 세상의 질서를 자꾸 자신의 것에 맞추고 그 중심에
자리를 잡고자 하는 마음이 커졌지요. 결국 훗날 다시 그 세상의 질서에 편입될 것을 알면서도 말이죠.
소년을 쳐다보는 개도 원래 자리에 갔다 놓으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링컨과 관련된 마운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노예제도 폐지에 대해서 마운트의 생각은 링컨처럼 국가 전체에
같은 제도를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각 주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린 그림 속 흑인들의
모습은 유쾌해 보이지만 링컨의 정책에 대해서는 확실한 반대였습니다. 그는 일기에 링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참견 말고 너나 잘해’
밴조 연주가 The Banjo Player / 91.5cm x 73.7cm / 1850
밴조는 원래 그 기원이 아프리카입니다. 아마 미국에 노예로 끌려 온 흑인들과 함께 왔을 것이고 그들의 원래
고향 노래에 사용 되었겠지요. 밴조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어지럽습니다. 대개 흥겨운 노래에 반주로
끼어 들어 맑은 소리를 내지만 그 맑음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슬픔을 하늘로 던져 버리고 난 맑음입니다.
다행히 작품 속 연주자의 얼굴이 아주 밝습니다. 핏속을 흐르는 분노와 슬픔의 유전인자를 노래로 다스렸기
때문일까요? 그건 그렇고 그림이 정확하다면 이 연주자는 왼손잡이이군요.
1841년, 마운트가 서른 넷이 되던 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납니다. 어머니가 남겨 놓은 땅도 꽤 되었지만 그 곳에
살기 보다는 여전히 생활무대는 뉴욕이었습니다. 그래도 그의 작품에는 농부들과 시골의 신사들 그리고 미국
농촌의 일상이 완벽한 구성과 함께 세부 묘사까지 더 해지면서 이제 마운트는 미국 전역에 화가로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발명가와 음악가로로서 마운트의 또 다른 재능이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건초꾼들의 춤 Dance of the Haymakers / 60.96cm x 73.66cm / 1845
작정을 하고 한바탕 춤판을 벌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잠시 새참을 먹으면서 한 잔 한 것이 좀 과했던 모양
입니다.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어깨춤과 발장단이 시작되었는데 어찌 보면 우리 전통 춤사위와 비슷한 구석이
있습니다. 창고의 문을 북 삼아 두드리는 아이도 신이 났습니다. 슬며시 넘어다 보는 여인들의 마음도 이미
춤 판에 어울렸습니다. 노동과 연계된 춤은 언제 봐도 즐겁습니다. 춤과 노래가 없었다면 몸에 묻어 있는
노동의 무게를 털어 낼 수 가 없지요. 저렇게 어깨를 들썩이며 춤을 춰 본 것이 언제인가 싶습니다.
술 한 병 들고 슬쩍 끼어 들어가 볼까요 ----
당시 시골 댄스 파티나 축제 때는 바이올린 소리가 사람들의 소음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마운트는
기존의 바이올린 보다 훨씬 큰 소리가 나는 바이올린을 개발, Cradle of Harmony’라는 이름으로 1852년 특허를
출원하고 다음 해 뉴욕에서 개최된 전미산업박람회에 다양한 바이올린들을 전시합니다. 또한 노래도 2곡이나
작곡합니다. ‘ 음악은 나에게 건강과 행복을 더해 주었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의 작품 속에 음악과 관련 된
소재들이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강도 짓 하는 거 아니야, 정당한 거래지 Fair Exchange, No Robbery / 64.77cm x 83.82cm / 1865
이 아저씨 참 너무 하는구나 싶었는데 한참을 보니 그렇게 나쁘지는 않습니다. 지나가다 보니 옥수수 밭을
지키는 허수아비가 있습니다. 옷이야 그렇다고 해도, 아무리 봐도 모자는 허수아비 것이 더 근사하고 새 것
같습니다. 허수아비가 쓰고 있는 모자와 자신의 모자를 바꿔 쓰는 것이니까 강도 짓은 아닙니다. 허수아비의
의사를 물어 보지 않았으니까 물론 정당한 거래라고 보기는 어렵지만요. 좀 귀여운 아저씨이군요.
모자 크기가 비슷해서 다행입니다. 머리 큰 사람들은 이럴 때가 어렵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서 처음 봤지만 미국의 밭을 지키는 허수아비는 --- 좀 괴기스럽군요.
마운트는 생애 말년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뉴욕에 두고 몸만 왔는지 뉴욕에 있는
미술관들과 엄청난 양의 편지를 주고 받는 한편 정기적으로 전시회도 열었고 초대 받는 전시회에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좋지 않은 건강이 그를 서서히 쓰러뜨렸습니다. 61번째의 생일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
마운트는 세상을 떠납니다. 그 생애 전체에 걸쳐 끝없이 그를 달리게 했던 에너지 창고가 바닥을 드러냈던
것이겠지요. 참 재주 많고 뜨거웠던 열정의 화가이자 발명가이고 음악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