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2년 11월17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수원] 믿음의 열매인 의지와 인내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독서 : 3요한 5 - 8
† 복음 : 루카 18, 1 - 8
엘리사벳은 1207년 헝가리에서 공주로 태어났다. 남부럽지 않게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참회와 고행의 생활을 하며 많은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엘리사벳은 남편이 전쟁으로 사망하자 프란치스코 재속 형제회에
가입하여 기도 생활과 자선 활동에 전념하였다. 1231년에 선종한
그녀는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으로, 또한 프란치스코 재속 형제회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 요한은, 선교사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길을 나선 사람들로,
이교인들에게서는 아무것도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 선교사들을 돌보아
주는 것은 결국 진리의 협력자가 되는 것이다(제1독서).
★ 불의한 재판관도 계속해서 매달리는 과부를 모르는 척할 수 없었듯이,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청하는 이의 간청을 결코 거절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하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들어주신다
(복음).
◈ 오늘의 묵상
불의한 재판관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끄러움을 모르던 한 과부의 끈질긴 청원
앞에서는 손을 들고 맙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한 여인의 끈질긴 청을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야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 오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부하시는 기도는 긴
기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필요한 것은
겸손과 끈기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의 기도가 하느님께
들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꾸준히 드리는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사람은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합니다. 사람들 대부분이
평소에는 하느님을 잊고 지내다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
매달립니다. 곤경에 처할 때에 기도드리는 것도 물론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닥칠 때에만 기도한다면 너무 이기적입니다.
궂은 날이건 좋은 날이건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늘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며 사는
복된 사람입니다.
-매일 미사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믿음의 열매인 의지와 인내
2012년 나해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으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
복음 : 루카 18,1-8
< 믿음의 열매인 의지와 인내 >
며칠 전에 연세가 좀 있으신 한 자매님이 오셔서 당신 친구 분의
병자성사 신청을 하셨습니다. 저는 성체를 모시고 수녀님과 몇몇
분들과 함께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환자는 상태가 좋지 않아
중환자실에 있었습니다. 저희는 중환자실에서 병자성사를 여러 번
해보았기 때문에 중환자실은 하루에 30분씩 오전 오후만 문을 열어
인원수 제한을 두며 들여보내고 다른 시간에는 닫아놓고 가족도
면회가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면회시간도 끝난 지가 30분 이상이 된 후였습니다.
저와 수녀님은 오늘은 안 되겠으니 내일 면회시간 맞춰서 오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매님은 걱정 말라는 눈짓을 하고는 막무가내로 중환자실
문을 열었습니다. 문은 두 겹으로 되어 있었는데 다행히 밖의 것은
잠겨있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문이 잠겨 있자 그 분은 문을 흔들어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안에 있던 간호사들이 놀라서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자매님은 신부님을 모시고 왔으니 잠깐이면 되니까 기도
좀 해 달라고 청했고 그래서 그 분들은 마지못해 허락해 주었습니다.
10분이 지나서도 병자성사 예식이 끝날 생각을 하지 않자 간호사들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빨리 좀 나가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매님은 이번엔 들은 척도 안 하셨습니다. 저는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병자성사를 마치고 바로 나와 버렸지만, 그 자매님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한 5분 정도 더 환자와 함께 있다가
간호사들에게 환자에게 시간마다 물을 좀 더 주라고 부탁까지 하고
나오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거침없는 자세 앞에서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자매님은 당신 친구가 돌아가시기 전에 신부님의 기도를 받게 하기
위해 당신 창피한 것도 무릅쓰고 노력했는데, 저는 사회의 규칙만
생각하여 안 좋은 소리 안 들으려고 물러나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전부터 생각해 온 것이지만, 그 자매님과 같은 막무가내식의
끈기는 반드시 당신이 노력하면 다 받아주게 되어 있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것일 것입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때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조금 찾다가 못 찾으면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이 여기 근처에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끝까지 찾을 수 있는 끈기가 생깁니다. 믿음과 확신은 이렇게 의지의
인내, 끈기를 선물해 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큰일을 한 사람들은
바로 이런 믿음과 소명의식이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대단한 일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하시며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던 재판관을 끈기와 인내로 움직이게
만든 여인의 비유를 들어주십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괴롭히면 못된
재판관이라도 귀찮아서 자신의 청을 들어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런 끈기와 인내가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낙심하지
말라는 뜻은, 우리가 하는 일에 믿음을 가지라는 말과 같습니다.
자살률이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높습니다. 이 말은 가장 빨리
절망하고 포기하는 나라라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도 기도뿐만 아니라
어떤 일을 하기 시작해서 얼마나 빨리 포기하고 맙니까? 결혼을 일
년에 세 쌍이 하면 이혼을 한 쌍이 한다고 합니다.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요? 바로 이 ‘믿음’이 부족하기에 끝까지 버티어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제가 대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읽기 시작한 책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읽기 시작한 것인데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란 10권짜리 책입니다. 글씨도 작고 분량도 많아서
신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선뜻 시작을 하지 못합니다. 제가 이 책을
한 번 읽는 데 5년 걸렸고 그 때 사제가 되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거의 매일 22년째 읽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읽으라고 주신 책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는 해에는 우연히 술자리에서 아는 형이 기도문을
하나 주었습니다. 자기는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신학교에 들어가는
저에게 준 것인데, ‘비르짓다의 7기도’입니다. 12년 동안 매일
예수님의 핏방울을 하루에 일곱 방울씩 묵상하며 바치면 순교자의
지위에 오르고 연옥도 가지 않는다고 예수님께서 성녀에게 일러주신
기도입니다. 굳이 순교자의 지위에 오르려 노력하지 않아도 이 기도만
바치면 된다는 생각에 이것도 역시 지금까지 16년째 매일 바치고
있습니다. 12년이 지났지만, 죽을 때까지 매일 바치고 싶은 기도가
되어버렸고 이것 역시 주님께서 주신 기도문이라는 확신과 믿음이
있기 때문에 꾸준히 바쳐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꾸준히 하다가 보니 느끼는 것은 ‘이 기도문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 그런 지위에 오르고 싶다는 의지와 끈기 때문에 결국 그런
지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의지만 있다면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 계기가 된 것들입니다.
어느 추운 날, 달팽이가 사과나무를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그가
느린 속도로 조금씩 위를 향해 올라가고 있을 때 나무껍질 틈새에서
벌레 한 마리가 튀어나오더니 달팽이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는구나. 저 위에는 사과가 하나도 없단
말이야.”
그러자 달팽이가 계속 기어오르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저 꼭대기에 도달할 때쯤이면 사과가 열릴 거야.”
이런 믿음이 없다면 달팽이는 중도에 멈추어 말라죽게 됩니다. 믿음이
나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의지를 주는 것입니다.
사랑도 의지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란 서로 간에 이
의지와 끈기가 절대적인데 이 의지는 바로 하느님께서 맺어주셨다는
믿음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믿음 때문에 끝까지 갈 수 있도록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인지 먼저 묻고 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확신을 가졌다면
그 의지를 꺾을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번 주일은 평신도 주일이라 강론이 없습니다. 좋은 주말되시기
바랍니다. ^^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떼를 쓰면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으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 루카 18,1-8
떼를 쓰면
어린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면 떼를 써서 이룬 것에 죄송함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께서 “30센티미터 자”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자를 가져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자를 사달라고 했지만
자를 살만한 돈이 없었습니다. 다음에 구입해 준다고 달랬지만 저는
막무가내였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옷을 재단할 때 쓰는 꼭 필요한
긴 ‘나무자’를 30센티에 맞춰 자르고 말았습니다. 그날 구지
가져가지 않아도 될 것인데 저의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어머니의
모든 것을 포기하게 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떼를 쓰는 아들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기위해
당신의 것을 포기하셨던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면 죄송한 마음입니다.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어버이의 마음이 우리를 기억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18,1)는
뜻으로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재판관이 한과부의
끈질긴 청을 못 이겨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는 자신의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때나 지치고 싫증이 나서 그만
두고 싶을 때에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다가 “얼마나 더” 청해야 하는가?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야 말로 기도할 때입니다. 끈기 있는 기도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끈기 있는 기도가
‘꼭 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를 하되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한 두 번이 아니라 천번 만번 거절을
당해도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열릴 때까지 두드리지 않으니까 문이
안 열리는 것입니다. 문 안에는 반드시 그 문을 열어줄 하느님의
손이 있습니다. 모든 기도는, 그냥 한번 건성으로 해보는 기도가
아니라면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조금도 의심을 품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구하십시오. 의심을 품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흔들리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예 주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6-7).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일편단심으로
하느님을 찾아야겠습니다. 시편에도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라고
적고 있습니다. 부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청하면 그 청을 반드시
들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께 떼를 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한 그루 느티나무가 되기를
11월 17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루카18,1-8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으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한 그루 느티나무가 되기를
때로 기도하기 힘들어질 때가 있습니다. 악이 선을 능가하는 듯
여겨질 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아갈 길이 없다고 느껴질 때,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이 차갑게 식어버릴 때...
그래서 과연 하느님이 계시긴 하는 걸까? 계신다 하더라도 과연
내 간절한 부르짖음, 내 이 끝도 없는 기도를 들어주시기나 하는
걸까? 내 이 혼신을 다한 외침이 공허한 메아리로 허공을
떠돌아다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 때도 많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적당하게가 아니라, 들어주시면
좋고 아니면 말고가 아니라, 더 큰 열정을 지니고, 혼신의 힘을
다해, 지극정성으로,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열심히 기도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러다
보니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재판관, 공정한 재판이라고는
기대하기 힘든 날라리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한
과부가 재판관을 찾아와 자신의 억울함을 털어놓습니다.
처음에는 별것도 아닌 일 같아 짜증도 나고 해서 그냥 돌려보내곤
했겠지요. 그러나 세상에 찰거머리도 그런 찰거머리가 없었습니다.
귀찮다고, 짜증난다고, 그러니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 그렇게 화를
내도 절대로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매일같이 찾아와 계속 졸라댔습니다.
재판관 입장에서 다른 것보다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스트레스가 하늘을
찌르고 귀찮고 짜증나 죽을 지경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과부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가는데 마다 따라다니며 졸라대니 사생활도
없고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짜증나고 귀찮은 나머지 재판관은 어쩔 수 없이 그 과부의
억울함을 들어주고,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지 않겠냐는 예수님의
논리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모든 것, 자신의 미래와 현재를 영원하신
재판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는 사람입니다. 거듭되는 실패와 좌절,
절망과 괴로움 속에서도 항구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큰 희망을 안고
하느님 집의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나는 과연 무엇을 집요하리만치 하느님께 청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봅니다.
작고 이기적인 바람, 터무니없고 허황된 소원, 지상에서 결코 이뤄질
수 없는 황당한 희망을 청해서는 결코 안 될 일입니다.
상처 입은 이웃들을 넉넉히 감싸 안을 큰마음을 청할 일입니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삶임에도 불구하고 그 삶마저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큰 영혼을 청할 일입니다. 이 세상이 결코 다가 아니기에,
이 세상 너머에 더 큰 세상이 있음을 믿기에 이 세상에 몸숨 걸지
않게 되기를 청할 일입니다. 더 원대한 꿈, 하느님 안에 더 큰
일취월장을 청할 일입니다. 내안의 가능성을 120% 발휘할 수 있기를
청할 일입니다. 하느님 안에 끝도 없이 성장하기를, 그래서 하느님
계신 곳까지 도달할 수 있게 되기를, 다시 말해서 성인(聖人)이
되기를 청할 일입니다.
자라고 자라서, 성장시키고 성장시켜서 한 그루 큰 느티나무가 되기를
청할 일입니다. 그래서 힘겨운 사람, 상처 입은 사람, 죄인들이 내
그늘에서 쉴 수 있게 되기를 청할 일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인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보십시오.
어렸을 때,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을 때를 떠올려 보세요. 그때에
누군가가 “노래 한 번 해볼래?”하면 자신 있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춤 춰봐~~”라고 말하면 신나게 개다리 춤을 췄습니다. 그림 그려보라고
하면 마치 세상에서 그림을 잘 그리는 것처럼 자신 있게 그렸습니다.
실제로 유치원을 방문했던 어떤 사람이 노래 부를 줄 아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더니 전원 즉각 속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춤을 출 줄
아는 사람, 그림 그릴 줄 아는 사람을 물었을 때에도 유치원생들은 똑같이
반응했습니다. 그런데 이 똑같은 질문을 대학생에게 했을 때 어떻게
되었을까요? 손을 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어른이 되면서 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할 수
없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즉,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줄어드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감탄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항상 감탄하며 살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를
보고서도 “와~ 개미다!!”라며 감탄하기 때문에 사소한 것도 소홀히
하지 않지요. 그래서 모든 면에서 적극적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큰
것을 보고도 그렇게 적극적이지 못합니다. 실제로 강의를 나가서 보면
어떤 이야기를 해도 무표정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도 ‘피식’ 웃을 뿐이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해도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적극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보니, 무슨 일에 적극적으로 어떻게 임하겠습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마음이며, 그래서 감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은 매사에
적극적이며, 자그마한 일에도 감탄하며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을 어른이 되면서 점점 잃어버리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의 시작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말씀을
해주시지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이지만 과부의
끈질긴 청을 결국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불의한 재판관도 들어주는 끊임없는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받아들이시겠느냐는 것이지요.
만약 그녀에게 올바른 판결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그렇게
매달릴 수가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매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재판관과 과부,
둘 다 고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좀 더
고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거역하는 불의와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사악함을 과부의 끈질긴 청원이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는 의미가 이곳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들은 끊임없는 기도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지요? 보통의 어른들처럼 점점
약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좋은 삶은 과정이지 체류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이다(칼 로저스).
브라우니! 물어!! 주교님 방에 있더라구여.. 그래서 찰칵!!
하느님은 내게 괜찮다고 하신다(케이린 호트)
너무나도 감동적인 글이라 그대로 옮겨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인생을 멜로드라마처럼 살아도 괜찮은지.
하느님은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키가 작아도 괜찮은지
물었습니다. 하느님은 물론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또 물었습니다. 매니큐어를 발라도 괜찮은지, 혹시 그러면
안 되는 건지. 그분은 대답하셨습니다.
아가야(그분은 가끔 나를 이렇게 부르십니다), 네 맘대로 하려무나.
하느님께 감사하다고 말하고 저는 또 물었습니다.
편지를 쓸 때 문단 나누기를 하지 않아도 괜찮은지.
내 귀여운 강아지야(대체 그분이 이런 말을 어디서 배우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대답은 언제나 똑같단다.
괜찮다, 괜찮아, 괜찮고말고...
하느님께서는 괜찮다고 하는데, 왜 우리는 안 괜찮다고 할까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갈망을 간절하게
끊임없이 기도해야 함을 가르치시기 위해 주님께서 드신 비유를
보면서 불경스럽지만 과연 적절한 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하느님은 비유의 재판관처럼 성가시게 굴어야지만 들어주시는
분인가?하느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는
분이고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청하지 않아도 들어주실 분이신데
우리가 꼭 필요한 것을 청해야 하고
그것도 성가실 정도로 끈질기게 청해야 하는가?
우리 인간 가운데는 다른 사람의 아픔과 필요에 무감각할 정도로
인간에 대해 불성실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인간 가운데는
자기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웬만한 자리에는 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인간 가운데는 자기의 호의가 더 드러나게 하기 위해
웬만한 요청은 의도적으로 들어주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도 이러한 의도로 우리의 청을 쉬 들어주지 않으시는가?
만일 그러하시다면 하느님도 아닌 좀팽이다. 만일 그러하시다면
하느님 자리 내 놓고 그런 하느님을 떠받드는 좀팽이들의
왕국에로나 가시라!
그러나 하느님은 절대 그러실 리 없다. 하느님은 체면 떨어지게
인간을 상대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호의를 뽐내실 분이
아니시다. 그러니 하느님이 우리에게 끈질기게 기도하라 하심은
우리의 갈망을 더욱 간절히 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호의가 은총이
되게 하심이다.
갈망이 간절하지 않으면 보석도 짱돌이 되나니!
갈망이 간절하지 아니 하면 하느님의 사랑과 호의도 흘려버리는
물이 되나니!
- 작은 형제회 김찬선 신부 -
◈ [대전] 부르짖음
당시 과부들은 내세울 것 없고 무력하며, 권리를 요구할 수 없던
약자였습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일도, 또 도움을 받을 길도 거의
없었기에 손쉬운 착취의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재판관들이 그들을 보호해 주도록 구약의 여러 규정들과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재판관은 아랑곳하질
않습니다. 그는 불의한 재판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득 될 것 없는
과부의 청을 그가 들어줄 리 만무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부르짖습니다.
과부의 부르짖음은 단순한 억울함의 표현이나 동정심을 향한 호소가
아니었습니다. 부르짖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탄원이며,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임이 드러나는 모습 중 하나입니다.
노예생활의 절망과 고통 속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졌던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은 결코 공허하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소리를
귀여겨 들으시고, 그 부르짖음에 대해 의로운 재판관으로서 구원의
응답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결코 우리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어떠한 어려움 중에도, 어떠한 난관이 있어도
우리는 그분의 사랑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단지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끝까지 부르짖지 못할 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 양동혁 신부(대전교구 월평동천주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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