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2년 11월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청주] 하늘의 참된 가족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즈카 2, 14 - 17
† 복음 : 마태 12, 46 - 50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했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님이 세 살이 되던 해에 성전에 바쳤다고 전해
온다. 이날은 본디 6세기 중엽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모 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날이었으나, 1472년 식스토 4세 교황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로 선포하였다.
★ 즈카르야 예언자는 환시를 통해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돌보실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즈카르야는 구원 시기의 시작을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이라고 보았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은 모두
천상의 혈연으로 맺어진 주님의 가족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형제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신 성모님께서는 인간적으로 섭섭하셨을까요?
아니었을 것입니다. 성모님이야말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가장 완전하게
따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철 스님이 어머니에게 돌멩이를 던져 쫓아 버렸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성철 스님은 유림(儒林) 집안의 장남임에도
출가하였습니다. 귀한 아들이 출가하자 그의 어머니는 수시로 옷가지와
음식을 준비하여 아들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결코 어머니를
맞아 주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산속으로 도망치기도 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어머니가 절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어머니에게 돌멩이를 던져
대기도 했답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돌멩이를 던졌다는 것은 분명 불효입니다. 그러나
더 큰 깨우침을 얻고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곧, 혈육의 정을 넘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더 많이 사랑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보편적입니다. 우리가 더 많이 사랑하는 길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매일 미사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소명을 깨달으면 운명이 바뀝니다."
2012년 나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복음 : 마태오 12,46-50
< "소명을 깨달으면 운명이 바뀝니다." >
인생이란 기차를 타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표를 끊고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자기 좌석 번호를 찾아 자리에 앉았습니다.
앞좌석에는 이미 앉아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안녕하세요. 어디까지 가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러면 어디서부터 오시는 거예요?”라고
묻습니다. 역시 이번에도 곰곰이 생각하더니, “글쎄요,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합니다. 마지막으로 또 묻습니다.
“그러면 이 기차는 왜 타고 계신 건가요?” “...”
기차를 타고 가는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은 물론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기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 중엔 자신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또 나의 삶의 의미와 목적, 혹은 소명이
무엇인지 찾아보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 전 평화방송에서 멕시코에서 선교하시는 최강 스테파노 신부님이
“소명을 깨달으면 운명이 바뀝니다.”라는 제목으로 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 분은 멕시코 가장 가난한 지역에 가서 대단한 선교활동을 하고
계셨습니다. 40도가 넘는 곳에서 냉담자 회두를 위해 길거리에서도
미사를 드리고 많은 가정을 방문하고 또 주일에는 몸이 땀으로
흠뻑 젖으면서도 하루에 8대의 미사를 봉헌한다고 하였습니다.
미사 한 대만 주례를 해도 피곤이 밀려오는 저로서는 정말 대단한
열정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자신의 일만
생각하다가 사랑을 실천하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사랑이 많으신
분이 얼마나 저를 섭섭하게 생각했을지 부끄러워졌습니다.
이렇게 열성을 다하는 이면에는 그 분이 사랑에 대한 참 소명을
깨달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국에서 1년 남짓 선교를
할 때였는데 그 때는 한국 사람도 없는 곳에서 오로지 당신 혼자만
매일 벽을 보며 미사를 드려야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미사 드릴
때 벽이 응답을 할 정도로 너무나 외로워서 죽을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산책하면서 이문세씨의 ‘옛 사랑’이란 노래를
듣다가 자신의 처지와 너무 비슷하여 너무 슬퍼서 집에 돌아와서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가슴을 찔렀던 그 가사 내용은 이렇습니다.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 누가 물어도 아플 것 같지 않던 지나온 내 모습 모두 거짓이야
...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 내 맘에 고독이 너무 흘러
넘쳐...”
그러면서 느낀 것은 사랑하지 못하는 고통보다 더 큰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사랑의 소명, 그것을 느끼니 삶이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신부님께 하느님께서 참으로 귀한 경험을
하게 해 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으로 하느님의 뜻, 부르심, 혹은 성소를
느낀다는 것은 삶을 바꾸게 합니다.
오늘은 요아킴과 안나께서 나이 들어 얻은 딸을 성전에 봉헌한
날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성모님은 어려서부터 성전에서 자라셨다고
합니다. 봉헌이란 말은 자기 것을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것을
포기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훌륭한
분들은 봉헌할 줄 아는 분들이었습니다. 봉헌하시는 분들은 소명을
깨달은 분들입니다.
성모님 또한 아드님을 성전에 봉헌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뜻이 더 중요하여 구원자라는 소명에 당신 개인적인 뜻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아드님을 봉헌하실 때 예언자 시메온에게 당신의 영혼은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장차
인류 구원을 위한 소명을 완수하시기 위해 세상의 반대 받는 표적이
되겠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요아킴과 안나가 성모님을 봉헌하는
것도 성모님의 소명을 위해 당신들의 부모로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크신 분들은 당신들의 소명이
무엇인지 명확히 아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총알택시를 타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택시답지 않게 매우
천천히 돌아다니는 택시를 본 적도 있을 것입니다. 왜 이들의 속도가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총알택시는 손님이 있어 목적지를 명확히
알기 때문이고, 빈 택시는 목적지가 없기 때문에 어슬렁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빨리 소명을 깨달아야 달릴 수 있습니다.
물론 성모님도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기까지는 당신의 소명을 온전히
알고 있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엄청난 소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이것이 성모님께서 당신의 소명을 끊임없이
묵상해 오셨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들도 끊임없이 하느님께서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의미가 무엇이고 나에게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찾아나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하늘의 참된 가족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복되신 동정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 12,46-50
하늘의 참된 가족
선거철에 가장 많이 드러나는 색깔은‘생색’이랍니다. 참된 정치는
당장에는 생색나지 않더라도 궁극적으로 국민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기에 편승하여 갖은 생색을 다 냅니다. 책임지지도
못할 온갖 공약을 남발하며 혈연, 지연, 학연을 들먹이고 지역적
분리를 고착화 시킵니다. 그 모든 것을 떠나서 하느님의 눈에 드는
참된 지도자를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잘났건 못났건, 경건한 사람이건
죄인이건 상관없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입을 수 있고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위한 예수님의
행동은 오해를 사기도 했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가족과
친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미쳤다고 여기면서 그를 붙잡으려
나서기도 하였습니다(마르3,2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12,48)고 반문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대한 기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가족은 더 이상 혈연관계에 기반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데에 기반을 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결속시키는 데 초석이 되는 것은
혈연, 학연, 지연이나 좋은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 비로소 그분의 참다운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7)
성모님의 삶을 보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하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지닌 복된 분으로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속하십니다. 비록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분의 가족이 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고백했습니다. 해와 달은 생겨난 뒤로 하느님을 거역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면 예수님의
가족이 됩니다. 믿음으로 형성되는 새 가족의 품위를 지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더 큰 사랑
11월 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 마태12,46-50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더 큰 사랑
올 초 돈보스코 성지순례를 떠났다가 돈보스코가 롤 모델로 삼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고향 프랑스 안시에 들렀을 때의
일입니다. 안시는 이탈리아에 인접한 도시로 알프스 산맥 바로
아래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크기의 안시 호수 건너편으로는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이 병풍처럼 줄지어 서있었습니다. 도시 전체가
그야말로 한 폭의 수채화였습니다.
소도시 곳곳에 남아있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자취를
돌아보면서, 시내 곳곳을 흐르는 운하를 따라 걸으면서, 바닥까지
환히 내려다보일 정도의 깨끗한 안시 호숫가를 따라 걸으면서 제
입에서는 저절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가 흘러나왔습니다.
사랑의 박사, 온유의 성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서는
이토록 아름다운 대자연을 배경으로 배출된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영성적이고 내면에 깊은 평화를 간직했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성덕은 이토록 평화롭고 향기로운
도시를 거닐며 묵상하며 쌓아나갔던 것입니다. 대성인, 혹은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교육 환경’의 상관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꽤나 오랜 시간 수도자 양성담당자로 살아온 것을 되돌아볼 때
마다 가장 후회되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예비 수사님들에게
보다 쾌적한 양성 여건을 조성해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음을
자주 반성합니다.
그들을 좁은 공간, 작은 틀에 가두지 말고 보다 넓은 창공으로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풍요로운 성장의 장을 제공했었어야
했는데, 그들이 한없이 성장하고 또 성장해서 나를 넘어설 수
있도록 뒷받침해 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참 사랑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귀엽고 사랑스런 그를 내
품안에 꼭 안고 어루만져 주는 것도 사랑이겠지만 때로 그가
더 성장하도록 내 품에서 떠나보내는 것은 더 큰 사랑입니다.
때로 흙부스러기같이 연약한 그, 어린 새처럼 걱정스런 그를 꼭
붙들어주는 것도 사랑이지만 때로 위험하겠지만 더 큰 창공으로
날아가도록 놓아주는 것은 더 큰 사랑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과 성모님은 큰 사랑의 소유자인 동시에
부단히 보다 큰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신 분들입니다.
때가 되자 예수님은 30년 세월 동안 정들었던 고향 나자렛을
떠나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아쉽지만 따뜻하고 포근했던
어머니 성모님의 품을 떠나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모님 역시
큰마음으로 아들 예수를 더 큰 바다로 나아가도록 놓아 주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는 예수님의 말씀,
꽤나 의아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서로를 더 성장시키기 위한
말씀입니다. 더 큰 바다, 더 큰 세상,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가자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으로 인해 더 이상 혈연이나 인종, 종족이나
민족적 단일성 같은 요소들은 구원의 결정적인 요소가 되지
못합니다. 가족이나 친족, 상하, 주종과도 같은 관계들의 결속력이
아무리 근본적이고 강력하다 할지라도 말씀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절박한 요구는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제 예수님으로 인해 도래하게 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영적 가족이 육적 가족보다 훨씬 가치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영적 혈연이 육적 혈연을
능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이제 육적인 혈연도 중요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매개로 엮어지는 영적 혈연도 중요합니다.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영적 가족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은 보다 큰 사랑, 보다
성숙한 사랑,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랑에로 초대되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인천] 우리 역시 하느님께 봉헌된 몸입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의 집을 찾아오려고 합니다. 그런데 길을 모르겠다면서
여러분에게 전화를 걸어서 물어봅니다. 이때 여러분은 어떠한 식으로
길을 가르쳐 주겠습니까? 당신의 집에서부터 시작해서 물어본 사람이
있는 위치까지 안내하겠습니까? 아니면 그 사람이 있는 위치에서부터
시작해서 당신의 집까지 안내하겠습니까?
당연히 후자겠지요. 그래야 훨씬 길을 찾는데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내가 있는 위치부터 안내를 하면 상대방은 도저히
길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중심이 아닌 상대방이
중심이 되어야 할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언제나
내가 중심이 되려고만 합니다. 그 결과 원만한 문제의 해결을 가져오지
못하고 갈등만을 부추길 뿐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도 언제나 당신 중심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인 우리
중심이셨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인간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생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시기도 하셨지요.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인간들을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모습은 과연 어떠할까요?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말하면서 과연 주님처럼 나 중심이 아닌 나의 이웃들을
중심에 놓고 살고 있습니까?
사실 자기중심이 아닌 삶을 살아갈 때 스스로 행복해지는 것은 물론
자신과 연관된 다른 사람들 역시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즉,
행복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성격이 있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아버지가 중병에 걸리게 될 때는 모든 가족이
근심에 쌓이게 되지요. 또 아들이 좋은 대학에 합격하면 온 가족이
기뻐합니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행복할 경우 나의 행복감은 15.3% 증가한다고
하더군요. 결국 이웃이 행복하면 나 역시도 행복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웃은 상관없이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자기중심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복되신 종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인 것입니다. 사실 성모님의 삶을 떠올려
보면 그렇게 부러워 보이는 삶은 아닙니다. 결혼도 하기 전에 성령에
의해 예수님을 잉태해서 파혼의 위기를 맞이하는 것을 시작으로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최후에는 사랑하는 외아들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는 큰 아픔까지도 감싸 안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철저히 자기중심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자기중심의 삶을 사셨다면 도저히 견디기 힘든 삶이지요. 철저하게
하느님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극복하셔서 하느님의 어머니,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실 수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께 봉헌된 몸입니다. 그런데 과연 어디에 중심을
두고 살고 있습니까? 진정한 행복을 찾는다고 말하면서 혹시
자기중심의 삶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께 봉헌된
성모님께서 철저히 하느님 중심으로 살면서 하느님 뜻에 맞게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 모습을 철저히 따라야 합니다. 그때 우리가 원하는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오늘 일만 생각하고, 한 번에 모든 것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
이것이 현명한 사람의 방법이다.(세르반테스)
신학교 방문했다가 발견한 학생회의 순찰일지. 이렇게 신학생들이
삽니다.
인생이란 놀이(‘행복한 동행’ 중에서)
어느 잡지에서 본 글입니다. 감동적이라 그대로 옮겨 봅니다.
한 노인이 산책하는데 낯익은 동네 꼬마가 공터에 앉아 울고 있었다.
그는 아이에게 다다가 물었다.
“엄마에게 혼났니? 왜 그렇게 우는 거야?”
그가 손수건으로 눈물 콧물을 닦아 주자 아이는 겨우 말문을 열었다.
“친구들이 아빠를 놀려요. 아빠는 다른 아저씨들처럼 돈을 많이
벌지 못하거든요. 우리 아빠는 실패한 사람이에요?”
노인은 대답 대신 아이 옆에 쪼그려 앉았다.
“할아버지랑 재밌는 놀이할까?”
그는 주위에 있는 모래를 모아 작은 더미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가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모래 더미 가운데 깊숙이 꽂았다.
“한 명씩 번갈아 가며 모래를 조금씩 가져가는 거야. 그러다
가운데 나뭇가지를 쓰러뜨리면 지는 거지.”
그는 처음부터 반 가까운 모래를 가져갔고 그 모습을 본 아이는
약간의 모래만 가져갔다. 다음번에도 그는 많은 양의 모래를
가져가려다 나뭇가지를 쓰러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아이는 까르르
웃으며 노인을 놀렸다.
“할아버지 바보네요. 그렇게 많이 가져가려고 하니까 나뭇가지가
쓰러지잖아요.”
그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인생은 말이다. 누가 모래를 많이 모으는지가 아니라,
누가 쓰러지지 않는지 겨루는 놀이란다. 네 아버지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진 것이 아니란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류해욱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에서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계시다는 말을 전해 들은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문하신
뒤 당신 제자들을 가리키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나아가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밖에 서 계시던 어머니한테는
상당히 섭섭하셨을 말씀으로 들리고 언뜻 너무 심한 표현으로 느껴집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묵상 안에서 예수님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며 저한테 온 것은 늘 예수님의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것, 당신이 사람들한테 분명하게 인식시켜 주고 싶은 것은 육신의
어머니보다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며, 그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이 온전히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감안하고 이 말씀을 들을 때, 단순히 글자에
드러난 표현 너머에 있는 예수님의 진정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진정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는 가족의
의미를 확장시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소중하지만 우리가 서로 깊이 나누어야 하는 사랑은 그 가족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믿음으로 맺어진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서도 깊이 헤아리게
됩니다.
- 류해욱 신부(예수회) -
◈ [수도회]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때로 루가 복음을 읽다보면 마치 한 장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오늘 예리고의 소경을 고치시는 복음처럼 복음의 여러
장면에서 루가 복음 사가는 살아 움직이는 그림을 그리듯
예수님과 다른 이들의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곤 합니다.
머리속으로 예수님이 예리고의 군중들 사이를 지나가는 그림을
그리며 이 복음을 묵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랍비들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줄 때,
먼지 나는 길을 천천히 걸으며 가르치곤 했습니다.
아직 큰소리로 연설하는 것이 통용되지 않던 시대이기에
거리에서의 랍비들 혹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두 다 잘 알아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한 눈먼 거지가 소리치는 것에 대해 화를
내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 당시에는 “눈이 먼 사람” 즉 소경은 자신의
죄 혹은 부모나 다른 가족의 죄로 인해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은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그를 불쌍히 여겨 도와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죄인이 예수님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행렬에 끼여 예수님을
부르다 못해 소리소리 지르게 되었으니 사람들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천천히 길을 걸으며 가르침을
주시는 것을 들어야 하는데 옆에서 다른 잡소리가 들려 그것을 들을
수 없다니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하다못해 TV를 보다가도 옆에서 아이들이 떠들면 “조용해 못해!
시끄러워서 도대체 무슨 말인지 들을 수가 없잖아. 다른데 가서
놀던지, 방에 들어가 공부나 해!” 하며 아이를 야단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물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며 걷는 그 길을
방해하는 눈먼 죄인은 사람들의 마음을 짜증과 화를 불러 일으켰을
것입니다.
신앙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떨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며 살아간다는 우리는, 예수님께 귀
기울이며 그분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걸어간다는 우리도 역시
예수님께 너무 집중하다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 지 묻고 싶습니다. 성당에는 열심히 다니면서,
기도는 열심히 하면서도 가까이 있는 가족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따라가지만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는 의미는 다른 말로 예수님의 마음이
자신 안에 머무르게 한다는 초대와 방문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찾아오는 곳, 예수님의 마음이 머무르는 곳. 그곳은
예수님이 마음이 있는 곳, 하느님의 사랑이 필요한 곳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필요한 곳에 우리의 마음과 눈을 또한 둘 때 우리는 예수님이
그곳에 우리 자신과 함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한다면 그분과 함께 걸을 수는
있지만 그분의 발걸음이 여러분 안에 머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살아갈 때
비로소 예수님은 여러분 안에 머무르시며
구원의 은총과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줄 것입니다.
주님께 귀 기울이듯 다른 이의 아픔과 마음의 소리에도 귀
기울이십시오. 화부터 내지 마시고…
“주님, 입으로조차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용기없는 저를
이끌어주시어, 오늘은 ‘사랑한다’고 말하게 하시고, 내일은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있게 하시며, 마침내는 서로의 사랑을 이해하고
당신과 함께 나누게 하소서. 아멘.”
- 글라렛 선교 수도회 이회진 신부 -
◈ [기타] 그리스도의 지체(마태 12, 46-50)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그리스도의 지체(마태 12, 46-50)
가난한 이, 어린이와 같은 이, 순수한 이들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그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일들을 펼쳐나가시는
주님은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저희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하시고, 저희에게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녀 되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신 주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저희도 매일의 삶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게 하여주소서.
그리하여 저희도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주님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로서 살게 하여 주소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상속자가 되었지만 그 행실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고 세속의 자녀처럼 세속을 상속받고
싶은 사람처럼 살 때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해 부모와 재산과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다 버렸던 것처럼 저희도 기꺼이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소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신 주님!
저희도 주님의 형제자매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저희 삶의 자리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며 살게 하여주소서.
사도들의 모후이신 마리아여, 당신은 구세주를 낳아주신 구세주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신앙에 있어서도 사도들과 모든 인류의 모범이
되셨나이다.
부족한 저희들도 사도들처럼 인도하시고 가르쳐주셔서 저희의 삶으로
주님을 증거 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여주소서.
사랑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인류의 어머니 마리아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어머니
마리아의 전구로 거룩하게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매일의 삶에서
주님을 증거 하는 주님의 참다운 자녀가 되게 하여주소서. 아멘.
- 희망 신부님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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