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황후가 인도에서 왔다고 해서 불교전래와 연관을 시키는 시각이 있지만 이는 명백히 잘못 생각하는 발상입니다.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했다고는 하나 인도지역 종교현황전체중 불교는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유럽에서 기독교비중같은 식의 상황이 아니기에 인도인들 중에서도 불교신자는 일부분에 불과하여 허황후역시 불교와는 무관할 가능성이 크죠.
만일 허황후가 불교를 가지고 들어왔다고 한다면 금관가야뿐만 아니라 그 주변 다른 가야지역이나 신라까지도 조기에 불교전래가 이루어져야 마땅합니다.
현 기록상 고구려의 불교전래시기보다 300년정도 앞서게 되죠.
그러니 허황후로 인한 불교전래설이 맞다라면 한반도 불교전래양상 자체가 종래의 사서와는 완전 다른 방향으로 나가야 맞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허황후와 불교전래를 연관시킨다는 것은 완전 잘못 생각하는 것이되죠.
첫댓글 남당유고 신라사초에는 왕후사의 건립시기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고, 삼국유사의 기록도 같은 시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黑龍 三十六年也
흑룡(黑龍=壬辰)년, 36년(A.D. 452)이다.
二月 銍知與順明 行吉 于綾峴 因謁福壽祠 曰 此地自黃玉聖母后 歷代行吉之地 乃創大宮 曰王后寺
《비교》 삼국유사 가락국기
질지왕(銍知王) :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함. 원가(元嘉) 28년에 즉위. 이듬해에 시조(始祖)와 허황옥 왕후(許黃玉王后)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하여 처음 시조(始祖)와 만났던 자리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에 쓰게 함. 치세는 42년. 영명(永明) 10년 임신(壬申, A.D.492) 10월 4일에 죽음. 왕비는 김상 사간(金相 沙干)의 딸 방원(邦媛). 왕자 겸지(鉗知)를 낳음.
고구려사초에 나오는 본문인데, 해당 기사만 발췌하였습니다.
二十年 壬辰 銍至創王后寺婆娑塔 後稱虎溪寺 云
장수20년(A.D.452) 질지가 왕후사와 파사탑을 창건하였다. 후에 호계사라 불렀다 한다.
개인적으로 이에 대해 카페에 올린 글이 있습니다. 참고 바랍니다. http://cafe.daum.net/alhc/51qG/2434
예전에 어떤 책을 읽었는데 허황옥이 들여온 불교는 남방불교이고..공식적인 기록에 전해진 건 북방불교이며..지금도 경남 와룡산에 있는 절들은 남방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불교양식을 취하고 있다...이런 내용을 본 기억이 나기는 하는데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지금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김수로왕은 외지인이고..왕권강화를 위해선 토착세력중에 한명을 부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건 어쩜 당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쌍어문과 관련해선 김수로왕릉을 복원하는데 정조때 그 주변 스님들이 많이 참여한 영향이며,..많은 가야사 연구가들은 허황옥이 인도나 중국사천성 출신이라는건 믿지 않은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당시 중국 사천성, 인도에서 가야로 올려면 연안항로입니다..수년, 수십개월에 걸쳐서 와야 하는데..설득력이 부족하고 또한 ..지금 김해지역에서 인도 나 중국사천성의 유물이 나와야 하는데 전혀 나오지 않은걸로 알고 있습니다..
허황옥이 인도에서 가야로 왔다는건 아마도...신라말기 또는 고려초기에 그 지역 사람들에 의해서 윤색이 되었다가 일연스님이 삼국유사에 실은 걸로 추측하고 있는걸로 압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