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2년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청주] 그래도 속 마음은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묵시 14, 1 - 3. 4ㄴ - 5
† 복음 : 루카 21, 1 - 4
★ 요한 묵시록은 시온 산 위에 서 계시는 어린양과 그분을 따르는
십사만 사천 명의 사람들을 소개한다. 어린양은 그리스도이시며,
십사만 사천 명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고난과 박해를 참고
이겨 낸 이들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는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믿음으로 바친 예물을 더 좋아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구약 성경에서 과부는 고아나 떠돌이와 함께 공동체의 보호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의 대표로 자주 언급됩니다. 오늘 복음의 바로 앞부분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이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도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하는 위선자들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사실 율법 학자들이 가난한 과부들의 재산을 관리해 준다는 명목으로
과부들을 속여 먹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장면을 유심히
보셨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전부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과부의 헌금은 비록 적은 액수였지만 하느님께는
부유한 그 어떤 사람의 헌금보다도 소중한 것입니다. 그녀가 가진
것을 모두 바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서 보살펴
주신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모두 넣고 난 뒤의 손은
빈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빈손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하느님께 바친 손이었습니다. 비록 손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친 그 손이야말로 가장 거룩한 손입니다. 그녀의 가난한
손에는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가장 풍요로운 부(富)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매일 미사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
2012년 나해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랩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
복음: 루카 21,1-4
<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 >
오래 전 미국의 보스턴 시에 ‘스트로사’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큰 꿈이 있었지만 자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 거부인 사람 중에 바턴 씨라는 사람에게 2천불을
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에게
담보는 없지만 일에 대한 꿈과 용기가 있으니 믿고 빌려주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노라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바턴 씨의
주위 사람들은 경력이나 담보, 후원자도 없는 사람에게 돈을
꾸어 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바턴
씨는 왠지 그 청년의 용기가 마음에 들어 모험을 한다는
생각으로 2천불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스트로사는 얼마 되지 않아 정말 빌린 돈을 모두
갚았습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습니다. 갑작스레 닥친
대공황에 바턴 씨는 대비를 못해 파산 직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트로사는 바턴 씨를 찾아가
빚진 돈 7만 5천불을 갚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바턴씨는
깜짝 놀라 “자네가 가져갔던 돈은 10년 전에 다 갚았는데
자네가 왜 내 빚을 갚는단 말인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스트로사는 “분명히 빚진 돈 2천불은 옛날에 갚았지만 회장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는 평생 갚지를 못합니다. 그때에 2천불로
장사를 해서 오늘날 이렇게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돈으로 갚을
수 없는 신뢰를 저에게 주셨지요. 회장님이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은 영원히 갚을 수 없는 큰 빚입니다.”
담보도 없이 돈을 꾸어준 바턴이란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일까요,
아니면 돈을 다 갚았음에도 큰 액수의 돈을 더 갚아준
스트로사라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일까요? 어쩌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이 둘 모두가 어리석어보이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리석은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정말 어리석게도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습니다.
사람들은 “그건 하느님이 입에 풀칠이라도 하라고 주신 돈인데
그걸 다시 헌금함에 넣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라며 나무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과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네 맞아요. 어리석은 짓일 수 있죠. 제가 굶게 생겼으니까요.
참 어리석습니다. 그러나 저보다 더 어리석은 분이 계신데
어쩌겠습니까? 그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당신 외아드님을
우리 죄의 희생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누가 개나 고양이를
위해 자기 외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겠습니까? 인간은 개나
고양이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을 만드신
분입니다. 개나 고양이와 인간의 사이보다 인간과 하느님의
거리가 더 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 아드님을 주셨습니다. 제가 아무리 어리석어도 그 분보다는
덜 어리석을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갚아드리려 해도 그 분께
온전히 보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스트로사는 2천불만 갚으면 그만이었습니다. 우리도 나름대로
봉사를 드린다는 것으로 만족해하기도 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대학 다닐 때, 청년회, 성가대, 교리교사, 레지오 등 청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봉사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만큼 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신학교에 들어갔으니 이젠 하느님께 내가 무언가
더 해 드리고 있다고 착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봉헌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과부보다는
훨씬 많은 돈을 봉헌하기에 주님께 다른 이들보다 충분히 보답해
드린다고 기고만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많은 보답을 하더라도 그분께 충분히
보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스트로사가 2천불이 없었으면
어떤 돈도 벌 수 없었듯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그 분께서 주신 것이고 목숨까지도 원하신다면 당연히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봉헌하는 금액과 봉사하는 시간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무언가 해 드린답시고 고개를 뻣뻣이 들 수
있겠습니까?
스트로사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계 제1의 철강 왕으로 미국 재계를 주름잡은 카네기(1835-1919)
는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 결혼한 그는 가족과 홀어머니를 편안히 모시기 위해 사업에
최선을 다했으나 급기야 파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온 식구가
길바닥으로 나 앉게 되었습니다. 곤궁에 처한 카네기는 마지막
수단으로 모험과 불안이 도사리고 있는 미지의 땅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나 갈 여비가 없었습니다. 남은 돈과 어머니가 지니고 있던
낡은 금반지, 아내에게 결혼 선물로 준 목걸이를 다 팔아 긁어모아
보았지만 역시 부족했습니다. 이때 어머니의 친구 되시는 핸드슨
부인으로부터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헨드슨 부인이 20파운드를
선뜻 빌려주겠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언제 돌려받는다는 보장도 없이
멀리 낯선 땅으로 이민 가는 사람들을 믿고 빌려 준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빌려간 돈은 이 다음에 꼭 갚겠습니다.”
카네기 가족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들은 많은
고생을 참아가며 닥치는 대로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루에
꼭 50센트씩 핸드슨 부인의 돈을 갚기 위해 저축하였습니다.
어느덧 어렵게 모은 그 돈이 20파운드와 맞먹는 200달러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빚을 갚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카네기 가족은 200달러를 송금
수표로 바꾼 다음 파티를 벌였습니다. “이제 빚을 갚고 자유롭게
되었다.”라고 서로 축하해 주며 그간의 고생을 위로했습니다.
이때 카네기는 상기된 얼굴로 가족 앞에 서서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빚은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은혜는 영원히
갚지 못합니다.”
적어도 스트로사나 카네기, 혹은 어리석은 과부처럼 남들이 보기에
어리석게 봉헌한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는
항상 부족하여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읍시다. 그래야 봉헌하고
봉사하면서도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 성체나 죄의 용서, 혹은
영원한 생명을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있겠습니까?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그래도 속 마음은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 루카 21,1-4
그래도 속마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자!’고 말하면서도 자꾸만 비교를 하게
됩니다. 본당 사목을 하면서도 전임본당과 견주게 됩니다.
추수감사미사를 봉헌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본당규모가
큰 것에 비하면 감사예물과 곡식이 적게 봉헌되었다고 생각하며 서운해
하였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준비시키지 못하고, 믿음을
성장시켜드리지 못했으면서도 그것은 잊고 있었습니다. 예물에 매이지
않고 믿음에 마음의 중심을 둘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어린시절을 생각해 봅니다. 명절이 되면 기대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삼촌이나 누나로부터 용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기쁨중의 하나였습니다.
처음에는 그 액수가 많고 적음에 관계하지 않고 그저 받는 것이
좋았습니다. 때로는 돌아 서서 액수를 헤아리며 ‘에게, 요것밖에
안돼!’하며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받을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인데
속마음은 욕심이 가득했습니다. 받는 것도 익숙해지면 결국 감사함도
잊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빈곤한 과부를 칭찬 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활비
전체를 예물로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부자들은 풍족한 데서
일부만을 바쳤습니다. 부자가 바친 예물은 가난한 이의 것에 비하면
훨씬 많은 금액이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먼 훗날 잘 되면 크게 돕겠다는 마음은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만큼 한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돈의 액수보다 마음을 헤아리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정성보다 돈의 액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의 잣대로 판단합니다.
제 모습이 꼭 그랬습니다.
오래 전일입니다. 수녀원과 교육관 건축 기금을 모으면서 나름대로
모금액수를 정하고 아무개는 얼마, 아무개는 이 정도는 해 주겠지!
하며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들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힘이 들었습니다. 정성을 보고,
마음을 보아야 하는데 돈의 액수로 사람을 보았습니다. 저도 별수
없었습니다. 물질에 약한 저를 보며 다짐했습니다. 돈 이야기를 많이
하지 말자! 물질의 봉헌을 아까워서 마지못해 한다면 아무리 많은
액수를 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믿음이 크면 모두가 주님의
것이다. 믿음을 키우는 것에 마음을 두자. 믿음의 성장에…..
그리고는 비로소 자유로워졌습니다.
속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물질보다 주님을
선택하는 지혜로 모든 것을 차지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도둑의 뉘우침
한 성직자가 물건을 훔쳐 나가는 도둑을 붙잡았습니다.
그에게 “도둑질을 한다는 것은 인생에 오점을 남기는 것입니다.
순간의 잘못으로 큰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도둑은 깊이 반성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네 맞아요, 물건을 훔쳐 나오면서 발자국을 닦지 않았어요. 바로
가서 닦아야 하겠어요.”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자기가 무슨 성인 군자라고
11월 26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 루카 21,1-4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자기가 무슨 성인군자라고>
어린 시절 "친척은 자주 만나야 된다."는 어머니의 압력에 못
이겨 제일 만만한 사촌 형님 집에 자주 놀러가곤 했습니다.
당시 사촌형님 내외는 대부분의 서민들이 그랬듯이 겨우겨우
생계를 꾸려갔었지만 언제나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왠만 해서는 서로 언성을 높이지 않는 화목한 부부였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둘이 큰 목소리로 언쟁을 벌였는데, 바로 외투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툼한 외투 하나로
겨울을 거의 나다시피 했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사촌 형님의
"불쌍한 사람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약점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당신 외투는 어쩌고 그냥 셔츠차림으로 들어와요?"
우물쭈물하던 사촌형님은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아 외투? 공장에 두고 왔나봐." 즉시 상황을 파악한 형수는
매몰차게 몰아 부칩니다. "지난번에도 그래놓고 또 그러내. 자기가
무슨 성인군자라고. 그게 얼마짜리 인줄 알아요? 도대체 누굴
줬어요?" 계속 다그치는 바람에 겨우겨우 사실을 말합니다.
"버스에서 내렸는데, 글쎄 적선하는 사람이 이 추운 날 거의
내복차림으로 앉아서 떨고 있잖아? 그래서 빌려줬지."
벌써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사촌형님의 따뜻한 마음은
아직도 제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습니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걸인들을 끝내 물리치지 못하고 집까지 데려와서 씻기고 밥 먹여서
보내던 기억들도 생생합니다.
단 한 벌뿐인 자신의 겨울 외투를 형수로부터 혼날 줄 알면서도
서슴없이 벗어 걸인의 어깨에 걸쳐준 사촌형님의 모습에서 가난한
과부의 체취를 느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극구 칭찬하십니다.
빳빳한 십만 원 짜리 수표를 헌금 궤에 넣은 부자들에게는 한마디
칭찬도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동전 단 두 개를 헌금 궤에 넣은 과부를
극구 칭찬하시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과부의 헌금은 비록 그
액수는 적었지만 전적인 봉헌, 순수한 봉헌, 사심 없는 봉헌, 목숨까지
건 봉헌이었기에 극구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이리저리 다 빼돌리고 바치는 봉헌, 우려먹을 때까지
다 우려먹고 빈껍대기만 바치는 부자들의 봉헌을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리가 만무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의 여가 활동을
위한 시간은 철저히 지키면서도 하느님 앞에 잠시 머무르기는 왜
그렇게 힘든지요? 우리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끝없이 시간과 돈을
투자하지만 하느님을 위한 투자에는 왜 그리도 인색한지요?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인천] 윌의 봉헌을 생각해 보세요.
전에 본당신부로 있었을 때가 생각납니다. 당시에 교육관 부지 마련
때문에 기금을 모으고 있는 중이었지요. 적은 돈이 아니었기 때문에
걱정도 많았고 어떻게 하면 기금을 하루 빨리 모을 수 있을까를 고민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고민을 들었던 어떤 형제님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 본당 사정이 요즘 그렇게 좋지 않지요? 그래서 제가 복권을
샀습니다. 복권에 당첨되면 전액 모두 본당 건축기금에 봉헌하겠습니다.”
농으로 하신 말씀이겠지만, 말씀만이라도 고맙더군요. 그런데 문득
정말로 복권에 당첨되시면 전액 모두를 봉헌하실까 라는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지요.
“이렇게 복권을 사시다보면 언젠가는 분명히 당첨되실 거예요. 그러니
미리 앞당겨서 봉헌을 먼저 해주시면 어때요?”
이 형제님께서는 다음부터는 복권에 당첨되면 본당 건축기금으로
봉헌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더군요.
정말로 남을 돕고 또 봉헌을 하고자 한다면, 당첨되지 않아도 또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도 그렇게 남을 돕고 봉헌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조건들을 항상 걸고 있는 우리들이지요. 그 조건들 때문에
마음에서 외치고 있는 행동을 하지 못하고, 조건에 만족되어야
하겠다면서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말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과 이러한 조건으로 타협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채워줘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조건들……. 그러나 주님은 타협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협하려는 순간, 주님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녀는 아주 적은 예물을 봉헌했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보이는 예물의 양을 보시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마음에 담겨있는
봉헌의 크기를 보십니다. 그래서 그녀가 어떻게 봉헌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채신 것이지요. 그래서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을 봉헌하는
사람들보다,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 모두를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조건이 없을까요? 지금 가난하기 때문에 또한
생활비를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에, 경제적인 조건들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바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조건이
먼저 채워지고 봉헌하겠다는 자세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봉헌이 먼저였습니다. 그래서 적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먼저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봉헌을 생각해보세요. 혹시 내가 원하는 조건이 먼저 채워져야
봉헌하겠다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한다면, 또 주님께서 정말로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면 먼저 봉헌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더 큰 사랑으로 분명히 갚아
주실 것입니다.
항구에 있는 배는 안전하다. 하지만 배를 만든 목적은 항구에 정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그레이스 호퍼).
성소후원회 모집 미사다녀왔습니다. 수고해주신 은행동성소후원회
감사합니다.
방에 들어온 벌을 보면서...
언젠가 제 방의 창문에서 벌 한 마리가 윙윙 거리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랐지요. 웬 벌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창문의 열린 틈 사이로 벌이 들어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벌이 계속해서 필사적으로 유리창에 몸을 부딪칩니다.
아마도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 같은데, 바로 옆에 자신이 들어온
열린 창틈을 보지 못하기에 계속 유리창에 몸을 부딪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벌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이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고자 하는 곳만 바라볼 뿐, 겁에 질려서 열린 창문 찾기를 잊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갈 수 없는 유리창에 몸을 계속해서
부딪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밖으로 나가기를 원한다면 열린 창문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 역시 행복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찾고 그 길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
길은 바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엉뚱한
곳, 예를 들어 물질적인 것만을 만족시킬 수 있는 곳에만 있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계속 막혀 있는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는 어리석은 벌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 되지 않을 수 있도록 오늘도 힘차게 생활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전주] 예수님을 감동시킨 과부
사람들은 많든 적든 물질에 애착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고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과부가 비록 동전 두 닢이지만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몽땅 헌금함에 넣은 것은 자신의 전 존재를 주님께 봉헌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부자들은 보란 듯 많은 헌금을 내며 거들먹거렸겠지만
초라한 과부의 전 재산인 동전 두 닢에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시는 예수님은 이를 간과하지
않으셨다. 그 과부가 하느님께 얼마나 지극한 감사와 찬미의 제사를
드리고 있는지를 보시고 감동하신 것이다.
언젠가 주일미사 봉헌시간에 지갑을 열며 큰 금액의 지폐는 밀어넣고
작은 금액의 지폐를 꺼내는 이를 보았다. “우리 신자들이 하느님을
초라하게 만든다.”고 하신 어느 신부님의 말씀을 실감하던 순간이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고 말씀하셨다. 예물
봉헌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 사랑의 결정이기에 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는 지극한 정성이 따라야 할 것이다.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옥합에 든 향유를 부어 발랐던 한 여인처럼 내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봉헌하는 자세. 주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그러한 열정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갈수록 물질적인 가치가 하느님을
대신하며 믿는 이들마저 이런 세상 풍조에 흔들리고 있는 시대다.
그러나 주님은 이 시간에도 가난한 과부처럼 자신의 전 존재를
아낌없이 투신하는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신다.
- 신현숙(전주교구 나운2동천주교회) -
◈ [기타] 사랑의 고백(루카, 21, 1-4)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사랑의 고백(루카, 21, 1-4)
저희보다도 저희를 더 잘 아시고, 저희보다도 저희를 더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저희들은 하느님께서 얼마나 저희를 사랑하시는지 몰라 멀리 계신
분으로 생각하고 주님의 현존을 친근하게 느끼지 못하옵니다.
주님께서는 온 세상 곳곳 아니 계신 곳이 없사옵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 하나하나 돌보시지 않는 것이 없나이다.
그러기에 마음으로 죄를 짓는 것도 간음하는 것이고, 살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주님!
저희는 저희 마음으로 죄를 짓기보다 주님께 사랑의 고백을 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으로 죄를 짓는 것도 죄라 하셨으니 마음으로 사랑 고백하는
것도 전부 사랑으로 받아주시리라 믿습니다.
바쁜 가운데에도 틈틈이 “예수님,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면
주님께서 지체 없이 “나도 너를 내 목숨을 바쳐서 사랑한다.”
라고 응답하여 주심을 믿게 하여주소서.
저희보다 더 저희를 사랑하시는 주님!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없어서 기도를 못한다고 말하고, 시간이
없어서 봉사를 못한다고 말하고, 재물이 없어서 희사를 못한다고
말하고, 건강이 받쳐주지 못하여서 봉사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게
하여주소서.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많은 시간도, 봉사도, 재물도, 건강도
아니고 그 사람의 정성스러운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주소서.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칭찬하신 주님!
저희도 주님의 그 사랑스러운 눈길의 미소를 느낄 수 있게 하여주소서.
저희의 일상 삶 안에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하는 모습을 바라보시듯이
저희를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고 계심을 믿고 저희도 저희의 사랑을
고백하게 하여주소서. 아멘.
- 희망 신부님 묵상 글 -
◈ [기타] 마음을 다해..
2012년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루카 복음 21장 1~4절)
<예수님게서는 가난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어제 점심을 먹고 나서 공소에 가려고 선착장에 나갔습니다.
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받아보니 제 출신 본당의 어떤 할머니셨습니다. 아드님이
누구누구라고 얘기하시면서 누구이신지 기억나게 해 주셨는데요.
얼굴은 알지만 대화는 거의 해 본 적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무슨 일이실까.. 하고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요즘 제가 공소
건축 때문에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고 전화를 거셨답니다.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하셔서
불러드리는데, 한참 걸렸습니다.^^; 할머님이라 그런지 듣는
것도 그렇고, 받아 적는 것도 그렇고, 어려워하시더라고요.
몇 번을 불러드리다가 안 돼서 옆에 할아버님을 바꿔주셨습니다.
다행히 할아버님은 금방 받아 적으시더라고요.
그리고 다시 할머님과 통화를 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많이는 아니구.. 조금 도와 드릴려구요... 많이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아마도 전화해서 계좌번호를 물어볼 정도면
이 정도는 도와드려야지.. 하는 어떤 수준이 할머님에게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억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통화를 하면서 내내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던 거 같습니다.
제가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화를 할 용기를 내신 할머님의
마음과 도와주고 싶어 하시는 그 마음이 너무나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서툴고 소박하지만 그 마음이 제게 전해졌고, 그
일이 제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 거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에게도 그러한 느낌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과부 손에 들린 헌금은 소박했고, 죄인은
아니지만 더 많이 드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송함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지 않았을까... 그래도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고 싶어서, 내게 주어진 작은 의무를 성실히 하고
싶어서 앞으로 나아가는 과부의 모습... 아마도 그 소박하고
성실한 마음이 예수님에게 전해졌던 거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 과부를 칭찬하시며 이런 말씀을 하시죠.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넣었기
때문이다.
만약 신자들이 내시는 헌금이 제 생활비나 다른 무언가에 연결이
되어 있다면 아마도 제 눈은 신자들이 내시는 헌금의 액수에
관심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신자들이 얼마를 내시던
저와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양이 아니라 그 마음을
보게 되는 거 같은데요.
아마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일 거 같습니다. 하느님이 살아가는
데에 우리가 내는 헌금이 더 보탬이 되고 아니고가 아닙니다.
그런 하느님께서 그 양을 보실까요, 아니면 그 마음을 보실까요?
아마도 그 마음을 보시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마음을 다해 봉헌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고
실천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어제 본당에서 혼배가 있었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셨는데, 사회자가 마지막에 신부보고 신랑
발목을 잡으라고 했다. 그리고 신랑에게 ‘나 발목 잡혔다...’
라고 말하라고 시키고, 신부에게는 ‘봉 잡았다.’ 라고 말하라고
시켰다. 나이 드신 두 분이 어색하고 서툴지만 시키는 대로 다
하셨다. 그 모습이 본당 식구들과 마을 분들에게 작은 웃음을
주었던 거 같다.
- 밤송이 신부의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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