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2년 11월29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수원] 가장 안정적인 것이 가장 위험하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독서 : 묵시 18, 1 - 2. 21 - 23 ; 19, 1 - 3. 9ㄱㄴ
† 복음 : 루카 21, 20 - 28
★ 요한은 환시를 통해 본 바빌론의 멸망을 전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바빌론은 사치로 얼룩진 부의 남용과 부도덕한 비행을 저지르는 로마
제국을 말한다. 당시 로마는 하느님을 잊어버린 비인간적인 제국이었다
(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스라엘의 구심점이 사라진다는 것이지만,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에게는 희망과 구원의 사건이 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도의 시인 타고르의 『기탄잘리』라는 시집이
있습니다. 이 시집은 절대자에게 바치는 노래입니다. 타고르는 이
시집에서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인생의 성취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죽음은 시간의 장벽이 무너진 임의 세계, 곧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임을 암시하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 생의 마지막 성취인 당신, 죽음이여, 나의 죽음이여, 오시어
나에게 속삭이십시오! 날마다 나는 당신이 오시는지 지켜보고 있었어요.
당신을 기다려 생의 기쁨과 고통을 나는 견디어 왔습니다. 나의 온
존재, 내가 가진 모든 것, 나의 희망과 사랑의 전부는 언제나 당신을
향해 은밀히 흘렀지요. …… 내가 나의 임종을 생각하면, 시간의
장벽은 무너지고 나는 죽음의 불빛으로 하여 보물로 가득 차 있는
임의 세계를 엿보게 됩니다. 거기서는 비천한 자리도 없거니와 생의
비굴함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재난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말씀하신 이유는 사람들을 겁먹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의도는 사람들을 깨우쳐 회개시키시려는 것입니다.
종말은 주님의 자비를 믿고 그분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을 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파멸의 사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희망과 구원의
사건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믿느냐, 주님의 엄하심을 믿느냐에
따라 종말을 대하는 태도는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매일 미사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가장 안정적인 것이 가장 위험하다.
2012년 11월29일 나해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
복음 : 루카 21,20-28
< 가장 안정적인 것이 가장 위험하다 >
TVN 스타특강쇼에서 스타강사로 이름이 나있는 김미경씨의 강의를
잠깐 들었습니다.
김미경(48)씨는 증평이라는 시골에서 양장점 딸로 자랐습니다.
서울에 올라와 대학을 다니며 사귀었던 남자들은 다 가난한
남자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압구정동이 집인 아이들과 미팅을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미팅에서 가족 관계를 묻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합니다. 자기의 아버지는 돼지를 키우고 어머니는
양장점을 하고 할아버지는 증평 경로당 대표였습니다. 시골에서는
그래도 못 사는 집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 나온 서울 학생들의 어머니들은 이화여대 출신에다가
아버지는 의사나 교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놀란 것은
한 할아버지가 서울대 정치학과 명예교수라고 하는데 젊었을 때부터
미국 유학을 다녀왔고 미국 대사를 거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1910년대 분인데 어떻게 무슨 돈으로 미국까지 가서 영어를 배워
유학을 할 수 있었다는 말일까요? 1910년대라면 대부분 다 가난했던
것 아니었던가요? 이런 의문에 사로잡혀 김미경씨는 바로 신촌에
있는 홍익서점으로 달려가서 한국 근대사 책 10권을 구입해서
1880~1980년대까지 100년 동안 우리나라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읽어나가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189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우리나라에 큰 부자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일본 상인들이 교역로를
터 주었고 장사하는 것을 가르쳤고 금광이 개발되기 시작하였고
땅 투기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땅 투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1910년도 어떤 기록을 보면 청진 땅 하나의
소유주가 하루에 30번이 바뀌었고 1달 동안 땅 값이 1000배가
뛰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때 많은 부자들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실로 나라가 들썩들썩 대던 때였던 것입니다.
김미경씨가 이런 사실을 알고 하도 억울해서 할아버지에게 그 때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을 알고 계셨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온 나라가 그렇게 들썩거렸는데도 워낙 시골에서
사셨기 때문에 그런 사실을 몰랐다고 합니다.
또 1950년 전쟁을 겪으면서 피난민들이 여기저기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누구는 탄피를 주워서 이구산업이라는 구리회사를
만들기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할아버지는 전쟁
때도 피난도 갈 필요가 없었고 산골에서만 안정되게 사셨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김미경씨는 안정되게 혹은 고립되어 살아온 할아버지를 보면서,
‘가장 안정되게 사는 것이 가장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위험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도 학원생이 200명이나 되는 피아노 학원을 접고
남편도 말리는 강사의 길을 새롭게 시작했으며 지금은 국민강사
대열에 들게 된 것입니다. 안정적인 것만을 원하는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기에 도전하지 못하여 발전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스키시즌이 시작될 텐데 스키의 기술과 속도, 재미를
높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더 높고 가파른 곳으로 올라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크게는 세상의 멸망, 작게는 우리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셔서 우리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시고
계시는 것일까요? 사실은 전혀 두려움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삶의 희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내일 또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오늘을 안정적으로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당장
오늘 죽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야 하루하루 의미 없이
지나가지 않습니다.
오늘 은빛성경대학에서 어르신들에게 새롭게 꿈을 가지라는
강의를 해 드렸습니다. 어떤 분들은 ‘죽을 날이 내일이 될지
모래가 될지도 모르는데 무슨 꿈을 가지겠느냐’는
표정들이셨습니다.
저는 엘리사벳의 예를 들었습니다. 역사상 그리스도 이전에
세례자 요한만큼 커다란 획을 그었던 인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인물을 낳은 분은 나이 많은 할머니 엘리사벳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나이에 상관없이 당장 내일 죽을 사람을 통해서도
역사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요즘 고해성사에 누가 들어오거나, 면담을 하고, 미사를
할 때 분명 이 중에 누군가는 이번 고해성사를, 이번 미사를
마지막으로 하고 냉담하여 결국 돌아오지 않을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려합니다. 누가 오늘 미사에 나온
신자들이 다음 미사에 그대로 다 나올 수 있다고 보장해 줄
수 있겠습니까? 나도 마지막 미사가 될 수 있고 신자들 중에서도
마지막으로 미사를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고해성사 한 번 줄 때도, 미사 때 강론을 할 때도
자세가 달라짐을 느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저는 김미경 강사의 말에 동의합니다.
종말이 멀었다거나 죽음이 멀었다고 생각하여 안주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정적이지 맙시다. 매일
새로운 꿈으로 새롭게 도전하고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 살아갑시다.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시는 때가 바로 이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영원은 현재를 사는 사람 것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현혹되지 마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 루카 21,20-28
현혹되지 마라.
겨울의 문턱에서 일교차가 큽니다. 건강관리에 마음을 써야하겠습니다.
건강한 것도 나 자신은 물론 이웃에게도 큰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서민들은 따뜻한 겨울을 바라지만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병충해가 덜 한 봄을 맞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녹음을 즐기고 가을에 풍성함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겨울에 휴식을 하며 새 생명을 준비합니다. 이처럼 인생여정도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하고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 온 사람과 세상에 매여
산 사람이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심판을 이기지만
그에 걸맞은 준비는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재앙이 닥칠 때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에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루카21,21).
생각해 보십시오. 도시는 화려함과 편리함 속에 누릴 수 있는 온갖
것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사람의 욕심과 계획이 지배하는 곳이요,
그곳에 맛들이면 빠져나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결국은 도시는
하느님의 다스림 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이 가득한 곳입니다. 인간이
지배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그곳으로부터 빠져나가라고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발을 빼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요. 내일 망할
것을 알면서도 예나 지금이나 온갖 죄악이 거기서 사람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도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그에 비해 산과 시골은 순수함과 깨끗함이 거기에 있습니다. 오염
되지 않은 맑고 소박한 정겨움이 있습니다.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와 법칙이 살아있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에 목을 적시고
발을 담글 수 있어 좋고, 메뚜기가 뛰어 놀고 다람쥐가 활개를 치며,
까치밥을 남겨 놓은 감나무가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빙판 길에
모래를 뿌리시는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러니 그곳을 두고 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순리가 살아있는 곳에
생명도 있습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치면 결국은 죽고
맙니다.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죽게 만듭니다.
4대강개발이 얼마나 큰 위험을 안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기도해야
합니다. 더 이상 순리를 거역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기를.
주님께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8)하고 말씀하시니 이제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화려하고 편리한 인간적인 생각에 머물러 재앙을
자초하거나 세상 것, 이상하고 신비한 일에 현혹되지 말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지혜,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머리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임을
말고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시련은 은총의 기회일 뿐입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그분만을 따릅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낙화(落花)>
2012년 나해 11월 29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루카 21,20-28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낙화(落花)>
최근 암환자들이나 그 가족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고 있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제목이 "암과 싸우지 말고 친구가 되라"입니다. 서울대
병원장을 지낸바 있는 한만청 교수가 저자이지요.
저자 자신이 실제로 회복 불가능한 간암에 걸렸었고, 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지 두 달 만에 암세포가 폐로 전이되었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가망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지요.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치료에 전념하여 기적적으로 회복되는
결실을 얻었는데, 저자는 치유의 비결로 "나에게 찾아온 암을 적이
아니라 친구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나를 지키고
치유하는 힘이 내 안에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일이라고 강조합니다.
요즘 계속되는 복음의 주제는 주님의 날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이지요.
요즘 계속 지겹도록 같은 주제의 복음을 되풀이해서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생각해봤을 때 "죽음"과 친구가 되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보다 죽음과 친숙하게 지내며 보다 자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묵상하라는 주님의 권고라고 생각합니다.
늙음, 죽음이란 단어들은 떠올리기도 싫을 정도로 거부감을 지니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이 들어감, 늙음, 죽음 같은 단어처럼 친근한
단어가 또 없습니다. 죽음을 보다 관대한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겠지요. 죽음은 생의 끝맺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을 시작하기 위해
묶은 껍질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꽃과 잎이 다시 뿌리로 돌아가듯이
말입니다.
나무가 여름에 애를 쓴 이유는 화려하고도 장엄하게 떨어져 내릴 그
낙화의 순간을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죽음은 인생
곡선의 가장 하한선을 긋는 순간이 아니라 절정의 순간입니다.
나이 들수록, 주님의 날을 가까이 느낄수록 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보다 덜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보다
단순하고 보다 소박하게 살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지닌 것이 많으면
그 지닌 것들에 신경을 쓰다가 한 세상 다 가버리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날 신속하게 그분을 맞으러 일어서야 할 텐데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노력이 무게를 줄이는 노력, 덜어내는 노력, 깎아내는
노력, 집착과 애증을 훌훌 털고 일어서는 노력입니다.
낙화 - 이형기 -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인천] 주님을 만나는 날이 불행의 날이 되지 않도록
어제 동네 편의점에 들어갔다가 재미있는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4~5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엄마에게 무엇인가를 사달라고 조르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엄마는 집에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안 돼’
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엄마의 고집을 도저히 꺾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편의점이 떠나갈 듯 사달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엄마도 대단하지요. 아이는 쳐다보지도 않고
‘안 돼!’라고만 말하더군요.
이제 아이는 편의점 바닥에 큰대 자로 누워서 팔다리를 움직이면서
떼를 씁니다. 그러자 결국 엄마가 졌습니다. “알았어. 빨리
일어나.”라고 말했으니까요.
이 아이를 보면서 ‘참, 밉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갖기 위해서 이 아이처럼 간절하게 노력했던 적이
있었는가 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온 힘을 다해 소리치고, 온 힘을
다해 떼를 쓰고.... 그 결과 자신이 원한 것을 얻을 수 있었지요.
물론 어떤 이들은 아이 버릇 나빠진다고도 말하지만, 그 간절한
노력만큼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저 적당히, ‘좋은 게 좋은 거야’ 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살아왔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다보니 간절한 노력보다는
합리적인 선택이 더 옳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정작 내게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때가 많습니다.
간절한 노력이 동반되어야 하는 주님께 대한 뜨거운 열정보다는
미지근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다가서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주일미사 한 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은 내가 아닌 남의 일인
것처럼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까? 봉사와 희생은 나의 입에서만
나오는 공허한 말이었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당연하다고 합리화 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대재난의 모습, 즉 징벌의 날을 너무나도
생생히 보여주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재난의 날이
다가왔으니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살라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대재난의 날, 큰 징벌의 날에 바로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온다고 말씀하시지요.
바로 대재난의 날이 바로 주님을 만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인에게는 큰 불행의 날이 되겠지만, 의인에게는
주님을 만나는 큰 행복의 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깨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금과 같은 안일한 마음으로는
잘 준비할 수 없습니다. 앞서 나오는 그 아이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노력해야 제대로 준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우리는 얼마나 잘 실천하면서 주님을 만날 준비를
잘하고 있었을까요? 주님을 만나는 날이 불행의 날이 되지 않도록,
주님의 뜻을 더욱 더 철저하게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길을 잃을 수도 있지만, 실패라는 경험을 얻게 될 것이다
(솔 벨로).
매일 이 앞을 지나가며 보는 성당인데, 어제는 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행동이 가진 힘(‘행복한 동행’ 중에서)
한 잡지책에서 본 좋은 글을 함께 나눠 봅니다.
평소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회사 내 모든 상을 휩쓰는 남자가 있었다.
그가 내놓는 아이디어는 신선할 뿐만 아니라 고객들의 요구에도 정확히
부합되는 것들이라 제품을 만드는 족족 크게 히트했다. 당연히 남자는
사장의 신뢰를 한몸에 받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남자의 마음속에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회사는 파죽지세로 성장하지만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미미한 포상금 정도였기 때문이다. 남자는 슬슬 돈에
욕심이 생겼다. 결국 자신이 직접 회사를 차리기로 결심하고 사표를
던졌다.
의기양양하게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남자는 성공을 확신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남자의
사업은 제자리를 맴돌 뿐이었다. 끙끙 앓던 남자는 자신이 다니던
회사의 사장을 찾아갔다. 그러고는 아이디어에 관한 온갖 자료를
펼쳐놓고 물었다.
“제 생각에는 이 회사에 있을 때보다 훨씬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많아요. 그런데 왜 고객들은 제 아이디어를 원하지 않는 거죠?”
그의 자료를 찬찬히 살펴보던 사장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이디어를 생각하는 시간도 중요하지만, 당신에게는 행동하는
시간이 없군요. 물론 이 아이디어는 당신이 생각한 거지만, 난
이 아이디어를 살아 움직이게 만들어줬죠. 행동하는 시간을 늘리세요.
행동 안에는 마법의 힘이 들어 있으니까요.”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 해도 실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쓸모없는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머릿속으로만 만들어 내는 수만 개의 성공보다
발로 뛰는 하나의 노력이 중요한 것이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전주] 변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은 마치 공상과학
영화를 보는 듯하다. 세상이 극심한 혼돈과 공포에 휩싸이고 하늘의
세력들조차 흔들릴 것을 예견한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신다. 순결한 그분의 신부는 몸단장을
끝내고 혼인 잔치에 참여할 기쁨에 가슴 설렌다. 그래서 그날에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야 한다. 예수님은 오늘도 천국 잔치에 참여할 당신
백성을 찾고 계신다. 바로 먼저 선택받은 우리를 통해서다.
얼마 전 내가 교리봉사를 했던 예비신자 9명이 세례를 받았다. 처음
교리를 시작하던 날 유독 눈에 띈 얼굴이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잔뜩 화가 난 듯 웅크리고 있는 청년이었다. 난 그를 가르쳐야 한다는
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몇 번 나오다 그만두려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교사의 모습을 보였고 매주
한 번씩 하느님을 기억할 수 있는 상큼한 글귀의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예비신자들한테 복음서의 성경 필사를 과제로 내줬다. 그
청년한테는 아예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내 예감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는 교리시간에 맨 먼저 왔고 말씀 나누기 시간에는
자신의 생각도 곧잘 표현했다. 그 청년은 성실하고 열심히 교리에
임했다. 막바지에는 그 무겁던 표정이 마치 구름 걷힌 푸른 하늘처럼
환하게 변해 주위에서 모두 놀랄 정도였다. 그리고 성경 필사를
다했다고 나한테 노트를 내밀 때의 그 감격이란! 난 그 청년을 통해
교회의 희망을 읽었다. 그리고 젊은이들 또한 하느님께 목말라 있음을,
그래서 우리의 복음 선포는 더욱 확장되어야 함을 분명히 깨달았다.
- 신현숙(전주교구 나운2동천주교회) -
◈ [기타] 그 때를 기다리는
2012년 나해 11월29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
그 때를 기다리는 (루카 21, 20-28)
해와 달을 만드시고, 땅과 바다와 그곳에 생명체를 만드시고,
인간을 창조하시어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신 하느님은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모상으로 창조하시고, 영혼과 육신을
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배려하셨나이다.
특별히 이스라엘을 선택하시어 만방에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하느님의 업적을 알리게 하셨나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길에서 너무나도 자주 벗어나고,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시켜서 하시는 말씀들을 따르지 않았고,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문자와 율법의 하느님만을
따랐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양심이 다 무디어져 그 안에 악이 가득차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하느님의 외아드님을 판단하여
단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때를 알지 못한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겪어야
했고,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라고 말했던 것처럼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2천 여 년을 떠돌이 생활 하게 됩니다.
사랑의 하느님!
저희를 세례성사로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저희의 삶을 통해서
주님께 영광을 드리도록 선택해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저희도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여주시어, 저희의 삶을 통해서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리고 주님께 영광 드리는 언행을 하게 하여주소서.
살아계신 주님!
저희 삶에 함께 계시어 저희의 말이 주님의 말씀이 되고, 저희의
생각과 눈빛이 주님의 생각과 눈길이 되고, 저희의 행동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이 되게 하여주소서.
그리하여 저희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저희는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 주님의 기쁨과
평화와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하여주소서.
사랑의 주님!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실 때,
저희를 심판함이 아니라 속량하시기 위해 오심을 깨닫게 하여주시어
그 때를 기다리는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주소서. 아멘.
- 희망 신부님 묵상 글 -
◈ [기타] 공동체 안에서 느끼는 행복
2012년 나해 11월29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무너졌다, 대 바빌론이!>
(요한 묵시록 18,1~2.21~23; 19,1~3.9)
오늘 독서 마지막에 보면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 가운데 ‘혼인잔치’
라는 단어가 있는데요. 요즘 공동체에 관한 책들을 보고 있어서
그런지 그 단어가 ‘공동체의 어우러짐, 모임’ 이라는 의미로
느껴졌고, 자연스럽게 ‘나는 공동체 안에서 언제 행복했나...’
하는 것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몇 가지 떠오른 것들이
있는데요.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기도 안에서 일치 되었을 때입니다. 사제품을 받을 때
주교님과 다른 모든 사제들에게서 안수 기도를 받았었는데요.
기도를 받으면서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사제단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깊은 일치감과 유대감이
느껴졌는데요. 당시의 느낌으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오지로 가더라도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사제단 안에서 일치되어 있는 거고 함께 하는 거다..’
라는 마음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 일치감과 유대감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요.
지금 본당 신자들도 서로서로를 위해 많은 기도를 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를 위해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고, 저녁 9시가 되면 서로서로를 위해 주모경을
바치고 있습니다. 또 공동체 안의 여러 가지 일들이 잘 될 수
있도록, 특별히 공소 건축이 잘 될 수 있도록 레지오 단원들이
열심히 묵주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기도의
끈이 연결되어 있는데요. 그러한 연결을 느끼고 체험하게 될 때,
또 그러한 기도가 버팀목이 되어주고 의지가 될 때, 공동체
안에서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깊은 속내를 드러낼
때입니다. 신학과 2학년 때 선배의 권유로 어떤 기도 모임에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 2학년부터 부제님, 그리고 신부님까지
대략 10명에서 20명 정도 모였던 거 같은데요. 첫 모임에서 약간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복음을 읽고 나서 생활 나눔과 복음 나눔을
하는데, 선배 신학생들과 신부님들이 진솔한 삶의 이야기들을
들려주시는 겁니다. 다른 자리 같으면 보통 지시하거나 가르치는
모습이었을 텐데, 그 자리에서는 나약해 보일 수도 있는 마음속의
이야기를 꺼내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때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그런 자리가 있다는 게 좋았습니다. 여러 학년이 섞일 수 있다는
것도 그렇고, 마음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참 행복한 일이었던 거 같은데요.
지금 내가 모임을 하고 있는 본당 공동체, 구역 공동체, 그리고
단체는 어떤가요? 다양한 계층이 모여 있나요? 나의 속내를 드러내
보이나요? 속내를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분위기나 환경이 만들어져
있나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비난하지 않고 비밀을 간직하는
분위기가 되어 있나요?
아마도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공동체 구성원들이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고, 들어주고 지켜줄 수 있다면, 아마도 그
공동체 구성원들은 모임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먹을 게 있을 때입니다. 지금 섬 본당에 와서 일주일에
한 번 공소에 가는데요. 미사가 끝나고 나면 늘 음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보통 일은 아닌데 신자들이 늘 그렇게 준비를 하십니다.
더 대단한 건 메뉴가 같은 게 거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미사가 끝나고 나면 행복합니다. 먹고 나누고 대화하고
웃고.. 할 수 있는 자리가 너무 좋은 거 같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을 막 시작한 사람도, 또 오랜 냉담을 풀고 돌아온 사람도
쉽게 동화되고 어울릴 수 있기 때문에 그 자리를 좋아하는 거
같습니다.
오늘 하루, 공동체 안에서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려 봅시다. 그
모습들이 지금 보이지 않는다면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사목회의를 하고 나서 밥을 먹는데,
자매님들이 모인 곳은 밝고 즐거웠는데,
나와 형제님들이 모인 곳은 어둡고 칙칙했다.^^;
- 밤송이 신부님의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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