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2년 12월5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수원] 사랑과 희망과 믿음의 관계와 초자연적 도우심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독서 : 이사 25, 6 - 10ㄱ
† 복음 : 마태 15, 29 - 37
★ 만군의 주님께서 잔치를 벌이시는 날,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고,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며 당신 백성의
수치를 치워 주실 것이다. 그날에 모든 사람은 그분이 자기들의
하느님이심을 선포할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을 고쳐 주신다. 그리고 먹을 것이 없는 군중을 위해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로 기적을 베푸시어 그들을 먹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대구역 가까운 곳에 ‘요셉의 집’이 있습니다. 노숙자들과 홀몸
노인들을 위하여 1988년에 문을 연 무료 급식소입니다. 한 끼에 백
원을 받는데, 찾아오는 손님의 자존심을 살려 주려는 배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얻어먹는 것이 아니라 돈을 내고 먹는다는 당당함을 심어
주려는 따스한 마음씨인 것이지요. 이곳에서는 주일과 수요일을 뺀
나머지 날에는 찾아오는 분들에게 어김없이 점심을 대접합니다.
누가 이렇게 많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대접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들은 예수 성심 시녀회 수녀들입니다. 물론 자원봉사자들도
있습니다. ‘시녀’라 함은 ‘종’을 뜻합니다. 예수 성심 시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닮은 종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성심
시녀회는 소외되어 불우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남달리 정성을
쏟는 수녀회입니다. 하루 한 끼 ‘요셉의 집’에서 먹는 것이 전부인
사람들을 위하여 수녀들은 종처럼 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함이란
예수님의 마음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고정 수입도 없는데
어떻게 그 엄청난 먹거리를 마련하는지도 궁금합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요셉의 집’을 운영해 올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이름 모르는
사람들의 후원 때문입니다. 지금도 ‘요셉의 집’에서는 수녀들,
자원봉사자들, 후원자들이 함께 매일 밥의 기적을 통하여 사랑의
기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매일 미사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랑과 희망과 믿음의 관계와 초자연적 도우심
2012년 다해 12월5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빵을 많게 하셨다. >
복음 : 마태오 15,29-37
< 사랑과 희망과 믿음의 관계와 초자연적 도우심 >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진통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EBS의 ‘지식채널e’
에서는 진통제의 역사와 인류가 발견한 최고의 진통제를 소개하였습니다.
인류 최초의 진통제는 양귀비에서 얻은 아편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아편에서 진통효과 물질을 추출해 만든 진통제를 ‘모르핀’이라고
합니다. 세계 제1-2차 대전을 거치면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이들에게
모르핀을 투여하였고 그래서 그들의 많은 고통을 감소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모르핀의 치명적 부작용이 존재하는데 바로 “중독”입니다.
양귀비에서 얻은 아편이 본래 마약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진통효과
물질을 뽑아낸다고 하더라도 그 마약성분을 완전히 걸러낼 수는 없는
것이기에, 진통제와 마약을 동시에 투여 받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망이 없는 환자들에게 죽기 직전까지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모르핀을 투여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던 중 1975년 약리학자 코스테리츠가 진통 효과가 있는 ‘물질x’
를 발견합니다. 그 효과는 모르핀의 300배이고, 중독성도 없으며,
가격도 0원입니다. 이것이 바로 몸 안에서 분비되는 진통제,
‘엔돌핀’입니다.
엔돌핀은 인간의 몸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최고의 진통제인데 극한
고통의 순간에 다다랐을 때 스스로 자신의 몸 안에서 분비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라톤을 하는 사람이 극도의 고통을 느끼며
힘들어 할 때 분비되기도 하고, 산을 오르는 사람이 극도로 힘이
들 때 고통을 잊게 하는 강렬한 쾌감을 주는 엔돌핀이 분비됩니다.
또한 아기를 낳을 때도 많은 양의 엔돌핀이 솟구쳐 고통을 참아낼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도 더 많은 엔돌핀이 분비되는 때가 있는데 바로
‘죽음’ 직전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모르지만 인간은 넘어설 수 없는 극도의 고통으로 끝나버리게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그 한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생명과 세상을 만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급기야는 또 사흘 동안이나
당신을 쫓아다니는 군중들을 먹이시고 싶은 마음이 드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그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불가능하다는
말밖에는 하지 않습니다. 한 번 해 보려는 마음도 가져보지 않고
불가능하다고만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들이 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냐?”라고
묻습니다. 즉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빵 7개와 물고기 몇 마리 있다고 말씀드리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원하심’은
그 한계를 넘어서십니다. 그리고 그 한계에 도달했지만 더 멀리 가야
한다면 그 한계를 넘게 해 주는 초자연적인 도움을 하느님께서 주실
것임을 아시고 계십니다.
기적은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알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서 도움을 주고
싶다는 강한 사랑의 원의에 의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면 하느님께서 도움을 주실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도움은 사랑과 희망과 믿음의 덕이
함께 어우러져 얻게 되는 것입니다.
김재중 요셉 형제님이 노회장에 부임하여 쫓겨나게 생겼을 때 목숨을
다 하여 죽은 사람을 살려야 했고, 병든 아이를 치유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죽이고 아이를 살려달라고 목이
터져라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자신의 한계는 잘 알지만 또한 그 한계를 넘어
하느님께서 도움을 주실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누군가를 내
목숨을 바꾸어가면서까지라도 도와주려는 사랑이 부족하고, 또
희망하지도 않고, 하느님의 도우심도 믿지 않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의 모델은 당연히 성모님이십니다. 특별히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의 기적을 얻어내십니다. 당신의 힘으로는 안 되는 줄 알지만,
성령님을 받지 못해 목말라 하는 당신 자녀들인 교회가 너무
안타깝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당신 아드님이 그들을
배불릴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로 향합니다.
그리고 아드님이 당신의 청을 반드시 들어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은총의 중재자가 되신 이유입니다.
믿는 대로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긍정의 힘을 믿으라고 합니다. 우리는
긍정의 힘을 믿을뿐더러 불가능한 것까지 희망해야 합니다. 불가능한
한계에 도달하면 그 때부터는 하느님의 도우심이 시작됩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빵 몇 개로 수천 명을 먹이려는 사랑의 마음을 갖고,
또 내가 할 수 있는 한계를 인정하고 도움을 청하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실 것임을 확신합시다. 모든 성인들은 바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들을 희망했던 것이고 그렇게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으셨던 분들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으면 희망하지 않게 되고 희망하지 않으면 믿음으로
청하지도 않게 됩니다. 절실하게 청하여 하느님의 도우심을 이끌어내는
가장 큰 힘은 바로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싶은 절절한 ‘사랑’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품어 생각하면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빵을 많게 하셨다.>
+ 마태오 15,29-37
품어 생각하면
아침잠에서 깨면서 ‘살아있구나’‘오늘 하루를 또 허락 하셨구나.’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날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고, 기대하시는
바가 있는데 얼마나 알아듣고 그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반성합니다. 그리고 하루의 끝에서 어떻게 감사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새로워지면 매일이 새 날인데 새날을 만들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안고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왜 오늘날엔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냥 버려두십니까?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지 않으시는 주님이 야속합니다.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체적인 질병을 고쳐 주셨고 육체적인 굶주림을 채워주셨던 주님께서
오늘도 여전히 당신의 능력을 밝히 드러내시길 기도합니다.
사실 세상의 굶주림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베풀면 세상의 기아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무리 큰 기적을 하신다 해도 내가 베푸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굶주림은 여전히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신 의미를 품어 생각하면 능력의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매여 있으면 언제든지 풍요롭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은 뵙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총의 열매보다도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감사를
드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에 새겨야겠습니다.
예레미야서 31장 33절을 보면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게 된다고 하시며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하고 말합니다. 이스라엘백성의 하느님이 되신 그분이 오늘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켜주시고 앞길을 열어주십니다.
허물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적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도구 삼아 당신의 할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고 제자들이 다시 군중에게 나누어준
행위는 바로 나눔의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은 자기들끼리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모든 이와
함께 나눠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적을 보지 말고 오히려
주님의 능력에 응답하여 기적을 이루는 사람, 기적을 전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먹고도 남는 일곱 바구니는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역 광장에서 만난 천국(天國)
12월 5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 마태오 15,29-37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빵을 많게 하셨다."
<역 광장에서 만난 천국(天國)>
얼마 전의 일입니다. 회의 차 지방에 갔다가 밤늦은 시간에 집 가까이
있는 국철 역에 도착했습니다. 역 광장으로 내려오니 참으로 흐뭇한
광경이 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국철 역을 배경으로 숙식을 해결하고 계시는 노숙자분들을 위해 인근
한 교회신자들의 무료 급식 봉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저희 수도회에서도 노숙청소년들을 위해 뭔가 해야 되지 않겠냐는
논의가 있어 저는 한참동안 바짝 다가가서 유심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봤습니다.
저를 놀라게 한 것은 봉사자들의 일사 분란함이었습니다. 손발이
척척 맞 았습니다. 배식봉사를 하시는 분들, 뒷정리를 하시는 분들,
질서를 잡는 분들...아마도 많은 연구과 시행착오, 기도 끝에 얻어진
결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봉사자들이 환한 얼굴로 기쁜 마음으로 봉사에 전념하고 있음에
보기가 좋았습니다.
줄은 모두 세 줄이었습니다. 첫 번째 줄에서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 가는 쇠고기 국밥을 나눠드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한 그릇
받아먹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냄새가 그럴 듯 했습니다.
국밥을 받아든 분들의 얼굴이 일순간 환해졌습니다. 잠시나마
행복함을 맛보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분들에게 그 순간은 아마도
천국을 맛보는 순간이겠지요.
그리고 두 번째 줄에서는 긴 밤을 꼬박 새우잠을 자야할 노숙자
형제들의 새벽녘 출출함을 달래주기 위해 먹음직스럽고 커다란 빵이
하나씩 나눠지고 있었습니다. 보너스로 빵까지 받아든 분들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깃드는 것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 번째
줄에서는 후식으로 커피를 원하는 분들에게 일일이 타드리고 있었습니다.
노상이었지만, 소박했지만 정성이 담긴 풀코스 서비스를 받은 분들의
모습이 행복해보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생겼습니다. 20분 이상 배식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저를 흘끔흘끔 바라보시던 봉사자 아주머니께서
참다 참다 못해 제게 한 소리 크게 외쳤습니다.
“아저씨, 백날 여기 서 있어봐야 소용없어요. 아저씨도 저 뒤로 가서
줄서세요!”
아주머니의 한 마디에 제가 받은 충격이 컸지만 당시 역 앞에서 저는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밤늦은 시간 잠깐이었지만 역전에서 있었던 그 소박한 행사(무료급식)는
진정 감동 깊은 축제의 한마당이었습니다.
소박하지만 정성을 다해 준비한 따뜻한 음식들이 세파에 지친 이웃들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사랑과 나눔의 축제, 다름 아닌 최후의
만찬, 즉 미사였습니다.
오늘 복음 역시 예수님의 측은지심이 발휘되는 복음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능력을 전해들은 수많은 불치병환자들과 그 가족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실낱같은 마지막 희망을 안고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의 옷자락 끝이라도 붙잡아보려고 필사적으로 예수님께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서 한번 벗어나고 싶어
기를 쓰고 예수님을 에워쌌습니다. 병자들과 그 가족들은 자신들의
차례를 놓칠까봐 끼니마저 거르면서 자신들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간은 흘러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났습니다. 허기에 휘청휘청 거리며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예수님 눈에 목격되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의 측은지심이 발휘되는 순간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 한 끼 제공하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바로 복음이 실현되는 행위, 구원을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무료급식에 대해 말들이 많습니다. 단기처방에 불과하다. 노숙인들을
더 양산시키는 일이다. 그들에게 근본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들 나름대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온 분들인지 모릅니다. 가난의
악순환을 한번 벗어나 보려고 얼마나 발버둥 쳐온 분들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공정한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냉혹한
우리 사회의 피해자이자 희생자들일지 모릅니다.
점점 쌀쌀해져가는 날씨에 노숙인들을 위한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강구되길 기원합니다. 수많은 노숙인들, 또 후보 노숙인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이 우리들의 손을 통해서 작동되길 바랍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인천]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철없었던 학창 시절, 저 역시 당시 보통의 남학생들처럼 외모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잠깐 교복자율화가 있었던 시대에
살았던 저였기 때문에 더욱 더 두발이나 옷에 신경을 썼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길게 기르기 위해 노력했었고, 또 소위 명품이라는 좋은 옷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집이 부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도
했었지요. 부자라면 두발 자율이 없는 우리나라에 살지 않고 외국에
살지 않을까? 또 부자라면 옷도 멋진 옷을 사 입지 않을까? 등등의
쓸데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적도 꽤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야지만 행복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의 저를 만들어준 것은 당시에 원했던 물질적인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많은 돈과 높은 지위만 가지고 있으면 행복할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행복을 느끼고 있는 지금의 저를 만들어준 것은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이었습니다. 즉, 주님께 대한
신앙생활, 많은 독서, 그리고 내 이웃들과의 좋은 관계 등이 지금의
저를 있게끔 해준 것입니다.
곰곰이 따져보니 정작 과거의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세속적인 것들은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그렇게 되지 못함에 얼마나 안타까워했고, 남들을 부러워했는지
모릅니다.
지금 내가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이것이 먼 훗날의 나를 만들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주는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당신 곁에 머무르느라 사흘 동안이나 먹지 못한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시기 위해 빵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라면 충분히
아무것도 없이 기적을 행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배불리 먹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약간의 불편을
가져오십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빵과 물고기를 통해서 먼저 감사
기도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주시지요. 그리고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이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우리들의 나눔을
통해서 하느님의 큰 영광이 드러날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또한 항상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함이 가장 중요함을 전해주시는
것입니다.
순간의 만족,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만을 추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더욱 더 우리에게 유익함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진실은 빛과 같이 눈을 어둡게 한다. 반대로 거짓은 아름다운
저녁노을과 같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카뮈)
예전에 올렸었지만 다시 한번 제 가족사진 올려 봅니다.
부모님께 감사하며...
저의 부모님은 연세가 많으십니다. 아버님은 올해 여든 넷, 어머님은
여든 둘이시지요. 연세는 많으시지만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가르침을
저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전해주십니다. 그 중에 제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이 다음의 두 가지입니다.
먼저 아버지에게는 늘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아버지는
지금도 젊으셨을 때처럼 아주 열심히 공부하십니다. 노안으로 책의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커다란 돋보기를 꺼내들어 늘
책을 읽고 글을 쓰십니다.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임을 하신 지 벌써
20년 가까이 되셨지만, 지금 역시 책을 손에서 떼지 않으시면서 열심히
글을 쓰고 계시지요.
또한 어머니에게는 신앙을 배웠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늘 기도하는 모습을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항상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으실 정도로 어머니의
일 순위는 언제나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새벽 3~4시면 늘 깨어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편찮으셔도 또 급한
일이 있어도 기도를 미루지 않는 모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남들은 제가 일찍 일어난다고 또한 매일 빠지지 않고 글을 쓴다고
대단하다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그러나 사실 부모님의 영향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보여주셨던 그 모습을 저 역시 아주 조금 비슷하게
따르고 있을 뿐인 것이지요. 그래서 부모님께 늘 감사하고 동시에 미안한
마음입니다. 부모님께서 받으실 칭찬을 제가 대신 받는 것 같아서 말이지요.
제게 큰 영향을 주신 부모님. 이제는 저 역시도 남들에게 그러한 영향을
끼치며 살아야 할 텐데, 과연 그렇게 살고 있는지 반성을 해봅니다.
그리고 부모님께서 늘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춘천] 류해욱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는 대목입니다. 얼핏
보면 별로 특이할 것 없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양파의 껍질을 하나씩
벗겨내는 것처럼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면서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속내의 독특한 맛과 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옮겨 가셨고, 산에 오르시어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는 대목을 묵상하며 전율을 느꼈습니다. 이제 당신의 때를
아셨고, 분명하게 당신이 누구신지 보여주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결의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왜 조상들의 전통을 어기냐고 따집니다. 그후 예수님은 잠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시고 거기에서 다시 갈릴래아 호숫가로 옮겨가셔서
자리를 잡고 앉으신 것입니다. 마치 피정을 하듯이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진 후에 구원자로서 십자가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구원자를 갈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한테 깊은
위로를 주시는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셨고, 복음은 바로 구원자로서의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구원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 류해욱 신부(예수회) -
◈ [서울] 많은 병자를 낫게하시고, 빵의 기적을 베푸시다
오늘 복음[마태 15,29-37]에서 예수께서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주린 자를 먹여주시는 사건을 통해, 우리 인간에게 대한 예수님의
자비, 불쌍히 여겨주시는 마음이 어떠한지를 찾아볼 수 있고, 또
그것은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어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에게도 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예수님의 자비심과 인간을
사랑하시는 차별 없는 순수한 사랑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그 사실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 가를 알아볼 수
있는 점이라고 하겠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
1) 예수님은 당신에게로 오는 절름발이, 불구자, 맹인들과 벙어리들을
고쳐주심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신체적인 장애와 고통을 당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동정을 베풀고 계심을 알 수 있으며,
2) 먼 길에서 온 사람들이 지쳐있음을 알아주시면서, 험한 길을
되돌아 걸어 갈 수 있게끔 힘을 주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예수님의 마음씨는 인생에서 나그네 된자, 세상일로 고되게
시달리는 사람들, 피곤한 사람들의 그 고됨을 알아주시면서, 삶의
용기를 주시는 모습이다.
3)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무엇보다도 주린 자를 먹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의 영혼 구령의 관심을
크게 가지신 만큼, 인간 육신에 대한 관심도 가지셨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복음 전파의 생활을 3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예수께서는 그 각각의 단계를 끝마칠 때마다 자기를 따르는
백성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주셨다는 사실이다.
1) 5,000명을 먹이신 사건으로서, 그것은 갈릴레아 지방의 전교생활을
끝마칠 때 일이었다. 그 후 예수님은 다시는 갈릴레아 지방에서
가르치시거나, 설교하고 병 고쳐주시는 일이 없었다는 점이다.
2) 4,000명을 먹이신 사건으로서, 이것은 팔레스티나의 국경을 넘어
뚜로와 시돈 지방, 데가뽈리 지방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끝맺으실 때 일이었다.
3)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만찬을 베푸신 일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삶을 마치실 때 일인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당신을 따르며 당신과 함께 길을 걷는
자에게는 힘이 되어 주셨고, 또한 생명의 빵을 주셨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간에게 대한 예수님의 애정을 생각할 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어떠한 환경에서나, 예수님을 찾아갈 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그분께서 주시는 빵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생활해야 하겠다.
- 서울대교구 김웅태 신부 -
◈ [기타] 주님의 말씀에 심취해
2012년 다해 12월5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빵을 많게 하셨다.>
+ 마태 15,29-37
주님의 말씀에 심취해(마태 15, 29-37)
매일 똑같은 태양이 뜨고 새날이 오지만, 언제나 변함없이 세상에
필요한 은총을 내려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수많은 이들을 모두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은총을
매일 매일 내려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사랑은 식을 줄 모르고, 주님의 사랑은 포기하지 않으며,
주님의 사랑은 자기 자신을 다 내어 주어서라도 우리를
구원하시고야 맙니다.
그토록 저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느님!
그 사랑에 사람들은 놀라워하고 경탄하며, 감사드리며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군중들은 주님의 사랑의 행위에 넋을 잃고 바라봅니다. 군중들은
주님의 말씀에 심취해 배고픔도 잊고 빠져듭니다.
사랑의 주님!
저희도 주님의 그 사랑에 심취해 한없이 감실 앞에 머물고
싶습니다. 너희에게 주님께 대한 사랑을 주시어 아무리 머물러도
지치지 않고 배고픔도 추위도 모를 정도로 그 경외로운 사랑에
빠져들게 하여주소서.
사랑의 주님!
저희도 주님의 말씀에 심취해 밤새도록 성경 말씀에 머물게
하여주소서. 주님의 말씀이 달고도 달아 잠시도 눈과 귀를
떼어놓을 수 없게 될 정도로 저희의 귀와 저희의 눈을
열어주소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수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고, 일곱 바구니나 남겨주신 하느님!
저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 하느님을 굳게 믿고 감사드리는
삶을 살게 하여주소서.
수많은 군중 앞에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수많은 사람들을 다 먹이고도 남으리라는 믿음이 있으셨기에
예수님은 그렇게 감사드릴 수 있었습니다.
사랑의 주님!
저희에게 그러한 믿음을 주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인류를
하느님께서는 다 먹이시고도 남을 사랑을 갖고 계심을.... 저희가
그토록 끝이 없는 사랑을 가지신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여
가진 것을 나누지도 않고 감사드리지도 않을 때, 주님께서는 저희의
한계를 시험하시고서라도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고야 말 것입니다.
사랑이 많기에 자녀에게 매를 들듯이 하느님께서도 인류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에 아픔을 감수하는 사랑을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다.
사랑의 주님!
매일의 삶에서 햇빛처럼 내리쬐는 아버지의 은총에 저희들이
감사드리고, 인류가 감사드리며 살아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세상에
감사가 넘치고 하느님 아버지를 세상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게
하여주소서.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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