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2년 12월6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청주] 실천하는 사람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이사 26, 1 - 6
† 복음 : 마태 7, 21. 24 - 27
★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 시대가 오면 온 유다 땅이 시온 산에서
하느님을 향해 감사의 노래를 부르리라고 예언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베푸신다(제1독서).
★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으며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국화를 키우는 데 대작(大作)을 만들려면 2년을 공들여야 합니다.
겨울에는 온실에서 국화를 가꾸는데 연료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연탄을 땝니다. 연탄을 보면 안도현 시인의 ‘연탄 한 장’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나는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을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요즈음은 그리 흔하지 않지만, 연탄은 사람들이 먹고 잘 수 있도록
자신의 온몸을 태웁니다. 그것도 모자라 다 탄 연탄재는 으깨져
사람들이 넘어지지 않게 미끄러운 빙판길에 뿌려집니다. 연탄이
가르쳐 주는 지혜의 깊이가 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다는 것은 연탄처럼 자신을 태워 남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다른 사람들에게 기꺼이 한 장의
연탄이 되어 주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매일 미사 -
◈ [청주] 실천하는 사람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2년 다해 12월6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
+ 마태오 7,21.24-27
실천하는 사람
많은 눈이 내렸습니다. 신이 나서 뛰어놀며 눈사람도 만들고
즐거워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혹 누가 넘어져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따뜻한 햇살이 길을 열어주기를 희망하고
하얀 눈처럼 마음도 맑고 깨끗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작심삼일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겠다고 다짐하지만 돌아보면 결심과
행동은 언제나 다릅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깊은 맛을 내야 하는데 세월이 가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틀에 박힌 법을 지키는 것보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고 주님의 계명을 합리화 시키는 데 약삭빠르게
움직입니다. 아무리 긴 세월이 흘러도 진리는 변함이 없건만
진리를 대하는 마음은 물러지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율법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대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로마2,13).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그리고 그 실천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위입니다. 신앙고백이나 찬미의 말도 그 진실성은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지순례나
기도회, 피정을 다녀와서는 너무 좋았다고 떠벌립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삶을 보면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좋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새로운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에제키엘서에는 실천의 어려움을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
(에제33,31)고 적고 있습니다. 집을 지으려면 기반을 잘 다지고
그 위에 지어야지 그렇지 않고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기초가 튼튼하면 큰 바람과 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비바람을
걱정할 틈도 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듣고 실행하면 큰 믿음의 사람이 되지만,
듣기만 하는 사람은 환난이 오면 곧 흔들려 방황하게 됩니다.
사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2,17).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2,26). 마더 데레사는 말합니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니까요”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결정한 것은 미루지 말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하십시오”(알베리오네신부). 우리 모두가
실천하면 할수록 더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을
체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고 하셨으니 실행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차지하기를 기도합니다. 한 번에 많은 것을 행하려고 욕심 부리지
말고 작은 것부터 주님의 눈에 드는 것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삼년 동안 돌 하나를 입에 물고
12월 6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마태오 7,21, 24-27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삼년 동안 돌 하나를 입에 물고>
아가톤이라는 큰 스승이 계셨습니다. 형제들, 후배들과 함께
하는 수도생활, 하루하루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100% 다 완벽하게 만들어주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분에게도 큰 고민거리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수도자들, 다들 큰 뜻을 품고, 다들 선한 의지를
지니고 수도 공동체에 들어왔지만, 인간적 나약함이나 부족함,
상처를 모두 다 떨치고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다들 아직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한 ‘약점’ 한 가지씩 다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살아갈수록 점점 더 형제들의 약점이 크게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식탁에서, 또는 노동시간에
형제들의 부족함에 대해서 평가하고, 비판하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남의 말도 자꾸 하다 보니 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인 모르게 ‘속닥속닥’ 험담을 이야기하는
것에 맛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스승 아가톤은
절대 동료들에 대해서 험담하지 말자고 크게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습관이 되어버렸던지 교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크게 실망한 스승은 중대 결심 한 가지를 세웠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답니다.
동료들을 심판하지 않고 침묵을 잘 지키게 되기까지 3년 동안
큰 자갈 하나를 입에 물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대단한 의지요,
정녕 대단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하는 믿음, 실천하는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하고 계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우리가 아무리 큰 믿음, 산을 옮길만한 신앙, 원대한 꿈을
지녔다할지라도, 그 믿음, 그 신앙, 그 꿈이 현실 생활 안에서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 시대 너무나 많은 말들이 넘쳐흐릅니다. 오늘도 수많은
강연대 위에서 펼쳐지는 강론들, 설교들, 귀가 솔깃한 공약들,
당장이라도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 같은 단 꿀 같은 약속들,
그럴듯한 학문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실제 삶 안에서 현실화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실제로 살지 않는다면 별 쓸모가 없습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결실이 뒤따르는 행동입니다. 풍성한 열매
맺는 삶인 것입니다.
정성껏 기도했다면, 그에 따른 결실이 필요합니다. 열심한
신앙인이라면 그에 따르는 결과가 요구됩니다.
열심한 기도의 결과는 온유함와 자비로움입니다. 온유와 자비는
참된 영성과 그릇된 영성을 판단하는 잣대입니다. 하느님을 깊이
체험한 사람은 그 결실로 온유와 자비를 지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체험한 사람은 쉽게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쉽게
상처받지도 않습니다. 쉽게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온유하고
자비하신 그분의 모습을 따라 모든 것을 포용하고, 모든 것을
품에 담습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인천]
몇 년 전,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라는 말을 듣는 희아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희아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신부님, 세상 사람들이 왜 나를 불쌍하게 바라보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불행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저는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지금의
희아로 태어나고 싶어요.”
희아와의 만남은 저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사실 지금의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런데 희아는 지금
자신의 모습을 ‘최고의 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며,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장애가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희아가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성격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무조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어머니와 함께 했던 그
엄청난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이 노력들이 그녀에게 ‘기적의
피아니스트’라는 호칭을 듣게 해 주었으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작은 문제 한두 가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죽겠다, 못살겠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이 사람 곁에 있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짜증도 나고, 이 사람이 안쓰럽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장애는 없지만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면, 어쩌면 세상의 그 어떤 장애보다도 더 큰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몸이 불편한 장애보다 마음이 불편한 장애가 더 큰 장애입니다.
그런데 이런 장애들은 희아의 경우처럼 본인의 노력으로 충분히
치유가 되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을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혹시 너무 많은
불평불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너무 적은 노력을 하고 있는
나는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보다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지금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주셨음을
인정하고 감사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기뻐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지금의 자리에서 행복할 수 있으며, 종국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너무 적은 불평불만과 너무 많은 노력을 하는 나’를 만드시길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고독을 대면할 수 있는 용기다. 외로움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김난도).
희아가 제게 해 준 멋진 사인(signature)
우리의 목적지를 향해...
어떤 분에게 재미있는 유머 하나를 들었습니다.
차 안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급하게 무엇인가를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분이 물었지요.
“뭐 잃어 버리셨어요?”
“응... 차표! 이거 큰일 났네.”
“할아버지. 차표는 이미 타실 때 차장이 확인했으니까, 내릴 때
차표가 없어도 상관없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자 할아버지께서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어허~~ 이봐 차표를 찾아야 내가 어디 가는지를 알지.”
할아버지의 건망증입니다. 자신이 갈 목적지를 잃어버린다는 것,
큰 낭패지요. 그런데 우리 역시 우리의 목적지를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목적지 없이 시간 가는대로 대충대충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 앞에 나아가고 있는 우리를 잊어버리고 세상의 것들만 쫓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모습이 앞선 할아버지의 건망증과
뭐가 다를까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춘천] 실행하는 이
지난 10월 11일부터 우리 모두는 ‘신앙의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신앙의 해는 ‘성경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교회와 함께
주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성찬례 안에서 주님을 기념하며,
사랑의 실천으로 주님을 증언하여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신앙의 해를 보내면서
네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오는데, 바로 만남, 고백, 기념, 증언입니다.
그중에서 오늘 복음 말씀과 관련해 ‘증언’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어릴 때부터 계명을 지켜온 어떤 사람이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마르 10,17-27 참조)는 예수님의 권고에
울상이 되어 떠나갑니다. 사랑의 실천을 하지 못한 삶은 결국 주님
앞에서 우리를 눈물짓게 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어야’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입니다.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아무리 많은 것을 들어도, 아무리 좋은 교육을 받아도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삶이 바뀌지 않으면 헛된 것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말씀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당부이며,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신 그 사랑을
되돌려 주라는 영원한 초대입니다.”(믿음의 문, 14항)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슬기로운 사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말이 아니라 진실한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주님을 증언하는 대림 시기를 기대해 봅니다.
- 엄기선 신부(춘천교구 운천천주교회) -
◈ [기타] 죽을 힘을 다해서(마태 7, 21.24-27)
2012년 다해 12월6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
죽을힘을 다해서(마태 7, 21.24-27)
튼튼한 반석 위에 가톨릭교회를 세우시고,
교회 안에 일곱 가지 성사와 어머니 마리아의 전구와 성인들의
통공을 통해서 끊임없이 믿는 이들에게 은총을 내려주시는
하느님은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성직자들의 성사집전을 통해서 은총을 내려주시고, 수도자들의
기도와 헌신적인 희생을 통해서 끊임없이 교회를 쇄신하고,
이분들을 도와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루는 평신도들의
기도와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는 나날이 성장합니다.
사랑의 주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주님, 저희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무엇이 아버지의
뜻입니까? 저희에게 아버지의 뜻을 가르쳐주십시오.“
주님께서는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밤새 기도하시며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물러 계셨듯이,
기도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아버지의 뜻을 찾을 수 있다고
말씀해주십니다.
저희가 세상의 번잡한 소식들과 세상의 문화 속에 휩쓸려 있을
때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세상은 빠른 문화의 홍수, 정보의 홍수, 뉴스의 홍수, 이념의
홍수로 넘쳐납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이러한 홍수에 휩쓸리면
그 홍수로부터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리하여 자신도 모르게 세상 사람들처럼 세상의 논리대로 교회를
확장하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한다 하여도
세상의 방식대로 한다하면 이는 모래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사랑의 주님, 저희와 교회가 기도 안에 머물러 주님께서 저희에게
주시는 지혜로 복음을 전하고, 주님께서 저희에게 가르쳐주시는
방식으로 하늘 나라를 건설하게 하여주소서.
저희와 교회가 그렇게 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하여
방황하고 있다면 저희와 교회에 겸손함을 주십시오. 그리하여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서 말씀해주고 계신 그 말씀이라도 받아들게
하여주소서.
공연히 이 곳 저곳의 발현을 기웃거리며 호기심으로 바라보기보다
단 한 줄이라도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는 그 말씀을 붙들고
죽을힘을 다해서 실행하는 신앙인이, 교회가 되게 하여주소서.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글 -
◈ [기타] 반석 위에 집을 지읍시다.
2012년 다해 12월6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
(마태오 복음 7장 21. 24~27절)
오늘 복음 마지막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 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본당에 있다 보면 그런 분들을 종종 보게 되는 거 같습니다. 경제적인
압박 때문에 신앙생활을 포기하거나, ‘저 사람이 너무 미워서 다시는
성당에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분들이나, 자연종교의 영향을 받아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신거야... 성당에 나가지 않아도 착하게만 살면
되..’ 하고 성당에 나가고 싶지 않으면 나가지 않는 분들, 그리고
복잡하고 어려운 신앙의 고민들을 외면하고 회피하여 더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이게 공동체인가.. 이런
사람들이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인가..’ 하고 실망하여 떠나가는
분들, 개인적인 욕심과 이익을 생각하여 발을 들여놓았다가 그러한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떠나는 분들.. 그런 분들에게서 모래위에
지은 집이 어떤 것인지, 또 바람이 불고 시련이 불어 닥치면 무너져
버리는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 조금 느끼게 되는 거 같습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하고 슬퍼하시고
안타까워 하시는데요. 모래 위에 집을 짓고 무너지는 분들을 보면
그 비슷한 감정이 드는 거 같습니다. ‘오늘 너도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하고 말입니다.
그들에게 말씀 한 구절이라도 마음에 간직하고 되뇌이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작업이 있었다면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무너졌더라도 완전히 무너져 버리지는 않았겠죠. 언제가 그 말씀
한 구절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난 번에 이태석 신부님에 관한 동영상을 다시 봤는데요. 예전
영상이었습니다. 그분에 관한 영화가 나오기 10년 전 쯤에 나온
다큐였는데요. 거기서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이
미사를 봉헌하는데 톤즈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신부님이 율동과 함께 생활 성가를 불렀습니다. 하나하나
동작을 알려주셨고, 중간에 약간 변형된 재밌는 동작이 있었는데,
그 순간 사람들이 웃음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따라하고 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장면이 인상 깊었는데요. 왜냐하면 때로 저도 공동체 구성원들의
눈빛과 마음에서 그런 벽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 날도 그런
답답함이 있었고 좀 지쳐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이 보여주신
모습은 ‘계속 두드려야 한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라는
걸 그 순간의 장면으로 말씀하신 듯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힘을
얻었는데요.
아마 이태석 신부님도 그곳에 가서 공동체를 만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그분께서
포기하지 않으신 것은 그 기초에 든든한 반석과 같은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다큐에 보면 그분께서 품으신
말씀은 아마도 마태오 복음 25장에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는 말씀이었던 거 같은데요. 말씀에 따라
톤즈를 선택한 신부님께서 거기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자리를 포기할 수는 없으셨을 겁니다.
또 이지선 자매도 화상으로 몸이 망가지고 괴로웠지만,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복지 공부를 합니다. 그 자매가 마음에
간직하고 붙든 말씀은 코린토 2서 4장 16절의 말씀이었던 거
같습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그 말씀이 자매를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또 살아갈 수 있게
용기와 위로와 열정을 불어넣어 주었던 거 같습니다. 자매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더 기쁘고 감사하게 살아가죠. 또 하느님을
찬양하고 섬기는 자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인 거 같습니다. 저희 본당 신자들이 그냥 신도
성당 신자들이 아니라 공동체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는데요.
공동체가 되어 가는 과정이 쉽지 않은 거 같습니다. 순간순간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많이 있는데요. 그럴 때 마다 저를 붙잡아
주는 말씀이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하는 말씀입니다.
지쳐서 무너져 버릴 때도 있지만, 말씀을 되뇌이고 묵상하고
기도하다보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과 용서와 평화를
실천하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드는 그 올바름이
승리할 때까지 다시 한 번 해보자..’ 하게 되는 거 같습니다.
오늘 하루, 단 한 구절의 말씀이라도 마음에 간직하여 되뇌이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삶으로 살아내 봅시다. 그 일이 내 신앙의
든든한 기초가 되어 줄 겁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차동엽 신부님 강의를 들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신다.
어떤 사람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그런데 바닥에 닿기 전에 나무에 걸려서 살았다.
그런 사람을... ‘덜 떨어진 놈’ 이라고 한다고...
- 밤송이 신부님의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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