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2년 12월22일 대림 제3주간 토요일
[청주] 비천함을 돌보시는 하느님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사무 1, 24 - 28
† 복음 : 루카 1, 46 - 56
★ 자식이 없던 한나가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낳은 아이 사무엘을
데리고 성전으로 올라가 사제 엘리에게 보인다. 주님께서 보내 주신
아들이기에 주님께 돌려 드리는 것이다(제1독서).
★ 엘리사벳의 축복의 인사에 마리아 역시 노래로 화답한다. 이
노래를 통해 마리아는 전능하신 분께서 자신에게 하신 일을 찬송하며
이스라엘이 구원될 것임을 예고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는 다른 이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 기쁨을 느낍니다.
더욱이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에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듭니다. 성모님만큼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를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께 받은 사랑과 신뢰에 대한
환희의 노래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감사하며 사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니다.
앤서니 퀸이 주연한 ‘길’이라는 오래전의 흑백 영화를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주인공 잠파노가 유치장에 들어가자 주인공의
여자 친구인 젤소미나는 실의에 빠집니다. 그러자 주인공의 친구가
그녀를 위로해 주려고 돌멩이 하나를 손에 쥐어 들고 이렇게 말합니다.
“젤소미나, 돌멩이 하나에도 의미가 있어. 이 돌멩이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세상 모든 것에도 의미가 있을 수 없어.” 돌멩이
하나에도 의미가 있다면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요?
‘마리아의 노래’를 들으면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헤아려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낮고 천한 우리를 보살피시면서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궁핍과 질병, 두려움과 불안 등 온갖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참으로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일 미사 -
◈ [전주] 악을 통해서도 구속사업을 하시는 아버지 하느님
유다 왕 아하즈는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거역한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적인 꾀를 내어 아시리아와
연합함으로써 시리아의 침입을 물리치려고 한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그가 당신과 특별한 계약 관계 안에 있음을
상기시키시며 그가 원하는 징조를 청하라고 말씀하신다. 징조는
예언의 성취와 약속의 진실성을 보장하는 하나의 증거이다. 그것은
놀라운 이적(38,7,8; 출애 4,8)이나 미래 사건을 가리키는
상징(8,3-4.18; 에제 12,6)으로 나타난다.
만일 아하즈가 예언자의 예언을 의심한다면, 그는 징조를 구함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불신앙을 확신에 가득한 신앙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믿었기 때문에 “아닙니다. 나는 징조를 요구하여
야훼를 시험해 보지는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신명기(6,16)의
계명을 들어 자신의 불신앙을 포장하려고 한 것이다. 그는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것이다. 그의 마음은 완고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가득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언자는 경고한다. 다윗 왕실이 백성들을 그렇게 학대하고도
마치 그것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하느님 앞에서 경건을 가장하고
불신앙으로 하느님의 은총마저 거절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며
하느님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주시리라고 예언한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예언은 동정녀
마리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시어 낳으시리라는 예언으로
교회는 믿어온다.
신앙이란 자신을 하느님께 맡기고 의지하는 것이다. 비록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과 다를지라도 그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심(마태 7,11)을 믿고,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투신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투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고
자신을 투신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하느님에 대한 체험 없이는 대단히 어렵다.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조금씩 깊어지고 자신 안에 쌓여져 큰 체험이 되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하느님이 좋으신 아버지이심을 깨닫고 이를 믿을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하느님에
대한 체험 없이 신앙이 깊어지기 어렵다.
아하즈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강대국인 아시리아의 왕을 섬김으로써 시리아의 침략을 물리치려고
하였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징조를 보여주시리라고 했지만,
그마저도 거부했다. 그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마저
외면할 정도로 하느님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유다는
아하즈가 그처럼 믿고 의지했던 아시리아에 의하여 유린당하고
만다.
인간적인 생각이나 꾀가 대단한 것처럼 생각되고, 자신의 어려움에서
구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결국 그로 인하여 망하게 된 것이다. 마음이
돌처럼 완고한 사람,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는
사람이 가져오는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유다는 아시리아의 종노릇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하즈의 불신앙을 통하여서도 인류구원을 위한
포석을 하시며, 예언자를 통하여 임마누엘을 보내실 것을 예언하도록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그처럼 악을 통해서도 선을 이끌어 가신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당신을 거스르는 자들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처럼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이시며, 인류구원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아버지이심을 믿고, 아버지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신앙인이
되자.
- 전주 교구 경규봉 신부 -
◈ [청주] 비천함을 돌보시는 하느님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2년 다해 12월22일 대림 제3주간 토요일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
+ 루카 1,46-56
비천함을 돌보시는 하느님
성탄이 코앞에 다가 왔습니다. 낯선 카드와 선물을 받으며
죄송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저는 아직 카드를 쓸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과분한 선물을 받기만 하며 빚을 지게 됩니다. 저는
최근 몇 해 동안은 카드를 보낸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매일 같이 우편물을 확인 합니다. 어느새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탄을 맞이하여 무엇보다도 받는 것에 익숙해진 자신에 대해
거듭 태어나야하겠습니다.
마리아는 시골의 보잘것없는 여인이었습니다. 힘없고 가난하고
비천한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말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루카1,47-48) 비천함을 굽어보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기쁨이며
또 희망입니다. 우리의 비천함도 돌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믿고 순명 하는 가운데 세상 사람들이 그를 복된
여인,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 거룩하신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의 가르침을 믿고, 믿는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게 될 때 비로소 복된 사람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때때로 자신의 처지나 여건, 환경을 비관합니다.
능력이나 성격을 상대와 비교하며 위축되어 힘들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 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1,51-53) 하느님께서는 지금 나의 처지를
인정해 주시고 그 안에서 구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지금은
보잘것 없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면 빛나는 존재입니다.
젊은 날에 아이를 배지 못하는 돌계집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엘리사벳도 늙은 나이에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일을
해주셨구나”(루카1,25)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자신의 처지나 환경을 탓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을 믿고 충실한
삶을 살았으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전능하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나의
비천한 처지를 돌보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봇물 터지듯이
2012년 12월22일 대림 제3주간 토요일 - 루카 1, 46 - 56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
구세사란 큰 무대에 비중 있는 조연 역할에 충실했던 두 여인,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상봉 장면은 참으로 특별합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희극적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비극적이기고 합니다. 마리아가 처한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외관상으로 마리아는 미혼모였습니다. 물론 '말 못할 사정'이
있었지만, 누구에겐가 탁 털어놓고 속 시원히 이야기 할 상대도
없었습니다.
엘리사빗은 또 누구였습니까? 복음사가의 표현에 따르면 '그
늙은 나이에도 아기를 가진'여인이었습니다. 그녀를 바라보는
주면 사람들의 시선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엘리사벳이
지나가면 뒤돌아서서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야,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저 나이에 그게 가능한 일이냐구?"
이런 두여인이 극적인 상봉을 합니다. 그간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간 얼마나 털어놓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에게나
털어놓았다가는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음껏
털어놔도 아무 문제없는 대상을 만난 것입니다.
만나자 마자 드 여인의 입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마치 봇물 터지듯이
말이 터저 나오는데, 그 말은 다름 아닌 아름다운 노래였고,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칭송하는 찬미가가 되었습니다.
대림 시기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놀라운 업적에 너무나
감사한 마음에 자동으로 우리 입이 '쩍' 벌어지는 시기입니다.
대림시기는 부족하고 비참한 나란 존재를 살리시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땅에 오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격한 나머지 우리 입에서
자동으로 찬미의 송가가 터져 나와야 하는 시기입니다.
성모님의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느님께 바쳐드린 아름다운
선율의 찬미가였습니다. 오늘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마리아의 노래'
'성모 찬가'에는 성모님의 삶과 신앙, 좌우명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그녀의 한 평생은 하느님을 찬미했던 나날이었습니다. 그녀의
하루하루는 기쁨에 찬 여행길이었습니다. 그녀는 앉으나 서나, 길을
걸으나 늘 하느님께서 온전히 자신을 동행하고 계심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비록 지금은 뚜렷하지 않으나 언젠가 반드시
하느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고, 그 날이 오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약속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하루도 마리아의 노래처럼 기쁨과 감사의 찬미가가 될
수 있었다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입에서 악담과 저주와 거짓된
말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한님의 크신 업적을 기리는 감사의 찬미가가
하루 종일 흘러나왔으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인천] 하느님과을 관계를 놓아서는 안됩니다.
어제 어디를 가다가 갑자기 “신부님”이라는 우렁찬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급하게 걸어가다가 갑자기 들은 소리라 깜짝
놀랐지요. 놀란 상태의 저는 얼른 고개를 돌려 그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저를 부른 사람은 예쁜 여학생인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제가 그 여학생을 잘 모르겠다는 것이고요.
순간적으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어디서 만났더라?
교구에서? 본당에서? 아니면 성지에서?’ 짧은 순간에 제가 지나왔던
과거의 부임지를 떠올려 보았지만, 그 안에서 이 학생의 존재가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누구....?”라고 말을
흐리며 물어보았지요. 그러자 “신부님! 기억나지 않으세요?
저 **이에요. **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잘 아는 학생인 것입니다. 거의 3년
만에 만났는데 예전의 모습보다 훨씬 더 예쁜 모습인 것입니다.
“너 왜 이렇게 예뻐졌니?”하면서, 제가 몰라본 것을 마치 이 학생의
외모가 바뀐 것 때문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학생의 외모가
바뀌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이지요.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에 마치 외모가 바뀐 것처럼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주치고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면 알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다면, 이 만남을 계속 가지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과의 만남도 그렇지 않을까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 일이 너무 바빠서 이 일을 마친 뒤에야 신앙생활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뒤로 미루면 주님과 가까워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더욱 더 주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제가 앞서 그 학생을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주님께서 바로 옆에 있음에도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세요?”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찬미하는 ‘마리아의 노래’를
부르십니다. 이 노래를 보면 하느님 아버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하느님을 직접 보셨을까요? 하느님께서 직접 성모님께
나타나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을 알기 위해 노력하셨고, 그 끈을
절대로 놓지 않으셨기에 이렇게 모든 신앙인들의 모범이 될 수 있는
기도를 바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도 오랜만에 만나면 어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역시 오랜만에
만났을 때, 하느님으로부터 더 큰 감동을 받게 될까요? 하느님은 오랜만에
만나도 되는 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만나야
할 분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놓아서는 안 됩니다. 이 관계의 끈을 계속해서
붙들고 있는 분만이 성모님께서 부르셨던 ‘마리아의 노래’를 역시
부르는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미숙한 사랑은 “당신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하지만 성숙한
사랑은 “당신을 사랑하므로 당신이 필요하다.”라고 한다(에리히 프롬).
마니또로부터 선물받은 인형. 예쁘죠?
웃음
못생긴 얼굴은 성형수술로 얼마든지 고칠 수 있지만,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웃지 않는 얼굴을 웃는 얼굴로 바꿀 수는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웃는 얼굴은 스스로의 힘을 통해서만 만들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잘 웃는 사람들은 누구나 명랑하고 다정한 인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편안함과 기쁨을 전해줄 수가 있지요. 그런데
요즘 많은 사람들이 웃지 않는 것 같습니다. 웃을 일이 없어서일까요?
그보다는 웃을 수 있는 나의 모습을 스스로 차단하는 것은 아닐까요?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칼라일은 “진심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웃는 사람은 절대로 구제불능의 악한이 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하루 신나게 웃을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사람
엘리사벳의 칭송 어린 환대를 받은 마리아는 큰 기쁨에 넘쳐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마리아가 표현하는 기쁨의 첫 이유는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자신을 ‘굽어보셨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셨다.’고 하면서 마리아가 칭송하는 하느님의
업적은 아기 예수 잉태인데, 우리가 보기에는 마리아한테 참 막막한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처녀가 아기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 시대에
큰일은 큰일이지요.
아무리 하느님의 일이라고 하지만, 마리아의 상황은 우리가 볼 때
찬가 부르며 기뻐하기에는 좀 어렵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마리아의 다른 점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시고…’로 이어지는 마리아의 노래 나머지
부분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마리아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태도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하느님이 대대로
행하신 업적을 기억하며 칭송합니다. 곧 마리아의 삶은 자기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자신이 속한 백성과 더불어 있고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바라보고 있기에, 그 백성의 오랜 기다림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 그 일에 자신이 불림 받는 것을 크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가장 큰 기쁨은 바로 그분께
‘불림’을 받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높이 들어올려 주시는 이는 바로 이처럼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모든 이를 위한 축복이 되려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사람의 눈길을 끄는 존재가 아니라, 마리아가 석 달을 엘리사벳
곁에 머무르고 나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듯이,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고요하고 충실하게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변에 마리아와 같은 이는 누구입니까?
- 이정훈 신부(서울대교구 청년 성서모임 지도신부) -
◈ [기타] 조금씩 행복을 느끼며
예비신자 교리와 견진 교리를 받으면서 그리고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하면서 우리는 성모님이 원죄 없이 태어난 분이며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주신 분이라는 것을 배웠다. 또한 이를 믿을
교리로 굳게 믿고 성모님께 우리의 소망을 전구해 주시도록 청한다.
성모님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씀이 항상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과 선생님과 주위 분들에게 사랑과 칭찬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런데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잔정이 부족했다.
내 일이 항상 우선이었기 때문에 내가 해야 할 것을 모두 마친 후에야
주위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종종 그들에게
해주어야 할 시기가 지나가 버리거나 그 일들이 다른 방향으로
해결되어 버리곤 했다. 나는 홀로 남게 되고 점점 내 생활 속으로
맴돌게 되었다.
하느님을 알게 되면서 점점 나를 버리는 연습을하게 되었다. 내
시간을 남을 위해 쓰고 내 생각을 접고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며
비판하기에 앞서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지려 노력했다.
그러자 조금씩 행복을 느끼며 내가 누구인지를 과거보다 더 잘 알게
되었다. 겸손한 마음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는 하느님의 종입니다.’
나는 내가 남보다 못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나는 스스로
노력하면 대부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자만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나를 만드신 주님을 깨닫게 되자 내가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대부분이고 주님의 은총과 자비 없이는 한순간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 김영수(한양대학교 병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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