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와 임나의 어원
중국역사서 삼국지에는 금관가야가 狗邪國 또는 狗邪韓國으로 되어있다. 여기서 狗邪(구야)=가야이고 韓國은 弁韓을 뜻한다(邪는 ‘사’가 아니라 ‘야’로 읽는다). 즉 狗邪韓國은 ‘변한의 일국인 가야’ 라는 뜻이다. 일본서기에는 金官이 須那羅(수나라) 라고도 표기되어있다. 일본학자 末松保和에 의하면 須那羅는 한국어 ‘쇠나라’를 한자의 音을 빌려 표기한 것이라고 한다. 또 金官은 ‘쇠나라’를 訓에 의하여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고 한다. 즉 ‘쇠’를 金으로, ‘나라’를 官(=國)으로 표기한 것이 金官이다. 삼한에는 3, 4세기까지 문자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지금의 김해지방에 ‘쇠나라’라는 읍락이 있었는데 후세에 한자가 들어옴에 따라 문자화하여 '須那羅' 또는 ‘金官’으로 표기하게 된 것 같다.
금관가야는 무역으로 번성한 나라로, 철이 주요 상품이었다. ‘변진은 철을 생산하며 마한, 예, 왜는 모두 이 철을 구하러 온다. 변진에서는 철이 중국의 화폐처럼 사용되며 또 낙랑. 대방군에도 철을 공급한다.’ 라고 삼국지 변진전은 전하고 있다.
금관가야는 일명 任那라고 한다.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은 멀리 아유타국(인도?)에서 배를 타고 왔는데 그녀가 상륙한 곳은 主浦村이라고 불렸다고 삼국유사의 駕洛國記는 전하고 있다. 일본학자 鮎貝房之進에 의하면 이 王妃 來臨의 地 主浦의 원래 이름은 ‘님내’ 였다고 한다. 후세에 이 ‘님내’를 문자화한 것이 主浦로, 主는 ‘님’을, 浦는 ‘내’(하천)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그리고 이 ‘님내’를 한자의 音을 빌려 표기를 한 것이 任那이다. 즉 님내를 音 표기한 것이 任那이고 訓 표기한 것이 主浦라는 것이다. 任을 ‘임금님’으로 해석하고 那를 ‘나라’로 해석하여 任那를 ‘왕의 나라’ 라고 풀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鮎貝氏의 임나=님내=主浦 설이 옳다고 생각한다. 가락국기가 저술된 것은 이미 가야멸망 후 수백 년이 흐른 시점이었지만 당시에도 사람들은 매년 7월 29일에 수로왕 廟에서 祭儀 ‘戱樂思慕之事’를 거행하고 王妃 來臨의 신성한 땅 主浦에서 왕비를 맞이하는 뱃놀이행사를 하였다고 한다.
금관가야는 지금의 김해이다. 김해는 臨海 라고도 했으나 鮎貝氏에 의하면 이 臨海도 任那와 마찬가지로 ‘님내’의 음 표기라고 한다. 金海라는 지명은 신라 경덕왕 때 지방행정구역의 변경에 따라 金官과 臨海에서 한 글자 씩 따 만들어진 것이라고 鮎貝氏는 보고 있다.
任那라는 용어는 일본서기에는 많이 나오지만 우리나라에는 광개토왕비문, 삼국사기 强首傳, 진경대사탑비의 3곳에 나올 뿐이다. 이렇게 일본에서 금관가야가 임나로 더 잘 알려진 것은 일본으로 이주한 가야인들이 금관가야라는 정식 국명보다는 님내(임나) 라는 지역명을 더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대에는 국명은 주로 공식적인 대외관계에 사용되고 국내에서는 지역명이 국명으로 통용되었다고 한다. 신라의 경우도 대외적으로는 사로, 사라, 신라라고 했지만 일반주민은 자국을 ‘계림’이라고 했다고 한다. 또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일상생활에서 지명은 자주 입에 올려야하는 말이지만 국명은 그렇지 않다. 일본으로 이주한 가야인들도 국명 금관가야보다는 자신들의 고향 이름인 님내(임나)를 더 많이 입에 올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