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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이 말씀 앞에 자신을 점검합시다. 나의 생활 속에 이런 행함이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삼았다면 참으로 내 삶 속에 이러한 행위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가? 누가 나에게 어떠한 신앙 사상을 가져와서 나를 미혹하거든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그들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가?
그 날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마태 7:21-27/ 18:19-20 교회같이 안 보니는 교회 (참고: 이말씀은 1997년경 한 목사님의 설교말씀입니다)
저는 지지난 주에 일본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이 야기일지 모르지만, 저에게서는 이번 일본방문이 처음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일본을 거쳐가고 또 하루 밤 여관에서 묶고 온 일은 있었지만, 그것은 일본을 가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번에 제가 일본 방문이 제 생애에서, 제 목회생활에서 중요성을 갖는 것은 제가 일본을 가서 일본의 땅을 밟아보고 이곳 저곳을 가 보았으며 일본의 문화를 보고 그 문화를 창 조한 일본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을 만나서 사귈수 있는 기회를 가졌 기 때문입니다. 제가 솔직히 고백하는 것은 여러분들 중 더러 그런 분들이 있으리라 봅미다만, 국민학교 2학년까지 일본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 저 는 일본에 대하여 심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일본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 았습니다. 제가 법과대학에서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면 안된다던지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하라는 예수님의 교훈을 배워 알고 있습미다만, 저는 일본 사람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어떤 편견을 가지고 불신 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번 일본 방문에서 일본 사람들을 만나서 사귀었 고 그들을 정말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로 받아 드리지 못했던 사실을 깨 닫게 되었고 깊이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일본 교회를 방문하게 된 경 위나 그곳에서 한 활동 등등에 자세한 보고는 다른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오늘은 제가 일본 방문중 거기 있던 두 교회를 보고 생각하고 느낀 점을 주로 말씀드리면서 피차에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상고하 고자 합니다.
저는 일본에 가서 두 교회를 보았습니다. 하나는 저를 초청한 일본교회 로 경도에 있는 北白川(기다시라가와)교회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경도에 있는 재일 조선인교회였습니다. 기다시라와 교회는 지난 봄에 창립 60주년 을 축하한 교회로 우리교회 홍창의 장로님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교회입니 다. 홍 장로님이 일본 유학시절에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 그 교 회에 나갔고 그기서 견신례를 받기도 했던 교회이고 지금까지 밀접한 관계 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창립 60주년에는 그 교회의 자랑스러운 출 신이고 친구로서 기념강연의 강사로 초청 받고 다녀오신 일도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교인들은 60여명이었습니다. 한국 기준으로 하면 작은 교회이 지만, 일본 기준으로 하면 큰 교회라고 했습니다. 저를 놀라게 한 것은 그 교회의 크기 같은 것 보다는 언뜻 볼때 그 교회는 교회 같이 보이지 않았 다는 것, 그러나 그 교회가 진짜 교회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 등의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많이 돌아 다니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여러 곳을 가 보았습니다. 미국의 여러 곳은 물론, 캐나다, 남미, 제네바, 이스 라엘, 희랍, 등지였고 아시아로는 대만, 홍콩, 필리핀, 등지를 가 보았고 그 지역들의 교회를 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제가 일본에 가서 본 그런 교회는 본 일이 없습니다.
우선 그 교회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건물 밖에는 물론 건물안, 특히 예 배실에도 없습니다. 건물은 자기 건물이지만, 교회라고 알아볼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주위에 있는 가정집들과 꼭 같은 집이었기에 교회로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사실은 그 교회는 일반 가정집이었던 건물 을 교회로 개축한 곳이었습니다. 건물 밖 출입문 옆에 '日本基督敎團 北白 川敎會'라고 한문으로 내려 쓴 나무 간판이 하나 걸려 있었습니다. 그것도 붉은 색깔의 나무에 검은 붓글씨로 쓰고 그 위에 니스칠을 같은 것을 해서 그런지 컴컴하여 그 앞에 바싹 가 보기 전에는 잘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주차장 같은 것도, 마당도 없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 갔을 때 저는 놀랐습니다. 천장이 있고 그리 넓지 않은 방인 예배실 한 가운데 나무 기둥들이 세개나 있었습니다. 어디를 보나 가정집을 개조한 것이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교회 에배실 안에 십자가가 안 보였습니다. 높은 강단도 강대상도 안 보였습니다. 강단과 강대상이 있어야 할 위치에 작은 탁상과 의자가 하나씩 있었을 뿐입니다. 옆쪽에 작은 오르간이 하나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작은 칠판이 하나 세워져 있었습니다. 올간은 파이프 오르간이나 전자 오르간도 아니었습니다. 칠판에 예배순서를 백묵으로 써 놓았는데 그것이 주보를 대신했습니다. 예배순서 도 아주 간단했습니다.
칠판 오른쪽에는 "禮拜次第", 그 다음 줄에 "司會 小笠原/奏樂徐"라고 써 놓았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써 놓은 에배순서는 이러했습니다.
주악/ 찬미가: 263/ 주의기도/ 성서" 에베소서 2:14-16/ 기도: 오가사와 라 선생/ 찬미가:260 B/ 설교: 분단의 장벽 화해 공동체: 근수/ 찬미가: 284/ 헌금/ 보고/ 감사: 이누마 선생/ 송영: 539/ 축도 예배 시작 정각인 10시 30분이 되니까 목사님이 자리에서 일어서시더니 매우 근엄한 표정으로 '지금부터 11월 26일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묵도.' 라고 말했습니다. 묵도하는 동안 오르간이 연주되었습니다. 묵도로 시작하고 찬송, 기도, 성경봉독, 설교, 헌금, 감사기도, 보고(광고), 찬 송, 축도의 순서였습니다. 주보도 없고 성가대도 없었습니다. 성가대 찬양 순서도 없었습니다.
목사가 서 있는 뒤쪽벽, 그러니까 십자가를 걸어 두는 위치에는 사진을 넣은 작은 액자가 하나 걸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광야에서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이름 있는 대 화가의 작품이 아니고 스코트랜드의 한 무명의 화가의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그 교회의 전임 목사 님이 스코트랜드 국립 박물관에 갔다가 거기 걸려 있는 그 그림을 보고 사 본을 한장 사 와서 그것을 액자에 넣어 거기에다 걸어 놓았다는 것이었습 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사진이 든 액자가 몇개 있었는데 그것은 그 교회 의 전임 목사들의 사진과 종교 개혁자 존 칼뱅의 사진이었습니다. 그리고 영어 글씨를 쓴 것을 액자에 넣은 것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다 음과 같은 영어 글자가 씌여져 이었습니다.
"I for Japan; Japan for the world; the wold for Christ; And all for God."
이 글은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로서, 흔히 무교회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우찌무라(內村)간죠 선생의 친필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의 신학과 신앙이 그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예배시간이 되었을 때 어느새 그 예배실은 사람들로 꽉 찼습니다. 60여명 이 되어 보였습니다. 이미 들은 이야기지만, 그 교회 목사님은 교인이 얼마나 출석하였는지를 헤어 보는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교회에는 담임 목사 한 사람이 있을뿐 다른 교역자나 사무직원조차도 없었습니다. 목사가 하는일 이외의 교회의 일들은 교인 모두가 나누어서 맡아 한다고 하였습니 다. 누가 청소하는가 물었더니 교회 청소는 교인들이 함께 한다고 했습니 다. 예배실 의자는 접는 철재의자였는데 예배가 끝나니까 교인들이 모두 자기가 앉았던 의자를 접어서 뒤에 놓았습니다. 교회는 예배와 회의 등이 끝나면 방의 불을 끄고 바깥문을 닫고 열쇄를 채우고 나가면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사찰집사도 없었는데 누가 교회를 지키는가 물었더니 그 동네의 아이들과 이웃 사람들이 교회를 지켜 준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운동장도 없지만, 그 골목의 아이들이 교회 앞에 와서 논다고 했습니다.
저는 일본에서 또 다른 한 교회를 가 보았습니다. 조선인 교회인 '경도 남부 교회'(재일대한기독교 소속)였습니다. 그 교회는 지상 5층의 높은 건물인데다 뽀죡탑 위로 십자가가 높이 세워져 있어서 멀리서도 교회로 보였 을뿐 아니라 교회 건축양식으로 보아 금방 교회란 것을 알아 볼수 있었습니다. 최근에 신축한 초현대식의 호화로운 지하 1층, 지상 5층의 훌륭한 교회 건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조선인들이 밀집해 있는 달동네 지역에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교회는 그 교회의 주위의 환경과 매우 어울리지 않을뿐 아니라 내가 본 일본인 교회와 매우 대조적 이었습니다.
강(江)둑(提防)에 집들이 밀집해 있었는데 정말 서울의 달동네 같았습니 다. 그 곳에서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가연성 목재로 하꼬방 같은 집을 지어 한번 화재가 나면 20여채씩 불탄다고 했습니다. 얼마 전에도 그런 화재가 있었다고 했었습니다.
저는 부자나라의 일본이 교회와 피차별민들, 특히 한인 교포들이 살고있 는 곳을 보고 그곳에 있는 한국인 교회를 보고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그 일본인 교회는 비록 외모는 초라하고 교회 같이 보이지 않았지만, 참 교회 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일본이 만주를 침략할때 그들 만주 사람들에게서 침략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복음을 주어야 한다고 하여 만주 선교사로 두 사람이나 배출되었습니다. 유명한 사와자끼 선생과 와다 선생 이 그들입니다. 그들 가운데 사와자끼 선생은 만주에서 순교를 당했습니 다. 또 그 교회는 일본의 2차대전을 비판하고 일본에서는 금기인 천황제도 를 비판하는 설교를 하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의 수는 적지만, 정말 정직 하게, 성실하게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진지한 크리스쳔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교회는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 교회의 자유를 철저히 믿고 일본 제복주의 권력에 맹종하거나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 교회는 현재도 한국교포가 서너명이 교인으로 있었습니다. 재일 동포들이 일본인 교회에 교인으로 되는 예는 그리 많지 않고 그리 쉽지도 않습니다. 그들이 그곳에서 인종은 비록 다르지만,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고 한 권속으로 따뜻 하게 환영을 받고 있으니 교인으로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 그 교회 교인들은 피차별민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재일조선교포 들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2차대전의 와중에 서 일본에서 와서 살면서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일본말을 잘 모르는 나이 많은 한국 여성들을 위하여 '어머니학교'라는 것을 세워 그들에 게 일본말을 공부시키는 야학교가 있었습니다. 그 학교의 선생으로 자원 봉사하는 교인들이 몇분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 학교는 학생 한 사람에 선 생 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현재 20여명의 어머니들이 공부하고 있다고 했습 니다. 그 어머니 학교 선생들중 한 분은 한국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고 한 국어로 기도할수 있기 위해 한국에 나와서 1년반 동안 연세대학교 어학당 에서 한글공부를 했습니다. 그가 바로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시는 사에끼 상입니다.주1) 서울에 있는 동안 우리 향린교회에 나았습니다. 그 기간에 가족방문을 위해 일본을 두 주 방문한 때 이외에는 개근을 할 정도로 교회 출석을 빠지지 않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가족들을 일본에 두고 서 울에 와서 한국어만 공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가시간에 그는 일산에 있는 뇌성마비 환자들을 돕는 자원봉사일을 해 왔었는데, 제가 그 후에 알 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교회 목사님인 오가사와라 목사님은 일본의 피차별민 해 방운동의 챔피언으로 있습니다. 그는 15년전에 기다시라가와 교회로 부임 할때 그 교회가 있는 1조(一條)주2)로 이사를 오라고 했을때도 거절하고 여전히 피차별민들이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지역인 7조에 살고 있습 니다. 그의 두 아들중 한 사람은 몇년전에 서울 상계동에 와서 약 10개월 동안 빈민들과 함께 지내면서 한국말을 배웠습니다. 이번에 제가 그 교회 에서 강연을 했을때 일부 통역을 맡기도 했습니다.
지난 8월에 우리 교회를 방문하여 강연을 해준 바 있는 이이누마 지로 교수님 역시 그 교회의 교인입니다. 그는 재일 한국인의 인권획득 운동과 평화운동의 선구자입니다. 그의 월남전 반대시위는 유명합니다. 그 외에도 그 교회에는 의식있는 엘리트들과 교수들이 교인으로 있으면서 일본의 양 심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옛날 청소년 시절 일본에 유학 중자디던 한 한국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가 본래 기독교 가정출신으로 그곳 경도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닐때 그 교회의 충실한 교인이었고 견신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후 그 한국 유 학생은 귀국하여 서울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서울 향린교회를 세웠습니다. 그가 홍창의 장로님입니다. 우리 향린교회는 다시 지난 1993년에 창립 40주년 기념교회로 남서울에 '강남향린교회'를 다시 창립했습니다. 향린교회는 민족의 통일과 교회갱신을 위해 앞서 가는 교회 로 국내외적으로 널리 소문난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일본 경도에 있는 한 일본인 교회는 교회 건물 안에도, 밖에도 십자가가 없고 교회 같이 보이지 않는 교회이며 그 때도 오늘도 작은 교회 로 있습미다만, 그 교회가 일본과 한국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컸었던 것 을 알수 있습니다. 비록 외모는 보잘것 없고 작은교회였으며 교회 같이 안 보이지만, 그 일본인 교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다운 교회라는 것을 확 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는 데에는 십 자형으로 생긴 물건을 나무로 하던 쇠로 하던 그것이 그리스도의 교회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카돌릭 교회는 성 모 마리아 상과 베드로상 등이 없으면 교회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 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이 상들을 우상이라고 하여 모두 철거해 버 리지 않았습니까? 그 따아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성모 마리아나 베드로 나 다른 성자들의 동상이 없는 교회를 상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그런 것들이 없는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개신 교회입니다. 그런데 성모 마리아 상이나 십자가 상이 무엇이 차이가 있을 까요? 물건인 점에서 같고 상징인 점에서는 모두가 같지 않습니까? 사실 그런 것들은 종교적 예술이고 상징이지 그것이 곧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장로교회는 정식으로 교회가 되려면 목사가 1명, 장로가 1명, 적어도 교 인 30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기준만 갖추면 교회 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보실까요? 이것은 제도적 교회가 정한 기준일 뿐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나 또한 거 기에 있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은 바로 그러한 기준으로 교회의 유무를 판단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까? 아무리 작은 무리들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면 바로 거기에 교회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여기 에서 에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이 그 이름을 반복하여 부른다 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 아니란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수 없듯이, 교회라는 것이 다 교회라고 할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고 모두가 그리스 도인이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로 부릅니다만, 그 런 교회들이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서 세운 교회가 아니란 말이 아닙니까?
나무 십자가, 쇠나 동이나 심지어는 금으로 된 십자가가 그 건물밖에, 건물안에 있던지 말던지, 교우 상호간에 예수의 사랑이 실천되고 있는곳, 신뢰와 사랑, 이해와 용서, 서로 위하는 사랑과 섬김이 실천되고 있는곳, 그것이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 교회 바깥 세상에 증언되고 실천하는 곳, 그 곳에 참된 교회가 있습니다. 번듯한 건물이 있던지 말던지, 수고하고 무거 운 인생의 짐을 지고 허덕이며 신음하는 영혼들이 와서 그 무거운 짐을 내 려놓고 안식과 위로를 받으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번민하는 사람들이 와서 엎드리고 회개하고 용서의 확신을 얻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사건이 일 어나는 곳,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과 구원의 사건이고 동시에 화해와 평화 와 통일의 사건인 십자가 사건이 선포되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가 있는 곳 아닙니까?
화려한 건물이 교회로 보이던지 말던지, 이 불편등한 사회질서에 대하서 책임이 있는 불의한 권력을 향하여 예언자적인 정의와 평등의 설교를 외치 는 곳, 불의와 죄악과 반생병적인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과 비판이 선포되 는 것, 그 곳에 교회가 있습니다.
아름답고 비산 가구들로 가득차 있는 화려한 곳, 모든 사람이 교회라고 알아 볼 수 있는 건물 안에서 수천명, 수만명이 모여서 거룩하고 장엄한 종교적 의식이 반복하여 거행된다 하더라도, 만일 그 모인 사람들이 남이 야, 나라야, 세상이야 어떻게 되던 자신과 자신의 가정만의 복, 성공과 출 세 등만을 위하여 밤낮으로 기도하는 곳이라면, 그곳이 자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몇 사람되지 않는 사람들이 초라한 곳에 모여서 엉성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예수의 사랑이 실천되고 증언되며 눈멀 고 병든 사람의 치유와 구원의 목회가 실천되는 곳, 가난한 민중을 위한 기도와 특히 이 추운 겨울에 고생하는 양심수들의 해방을 위한 기도가 올 려지는 곳, 민주와 자유와 평등이 선포되는 곳, 그 곳은 아무리 보잘것없 이 초라하더라도, 아무리 작은 수의 교인이 모여 에배를 드리더라도, 바로 그 곳에 하느님께서 계시고 그곳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교회로 보이는곳이 교회가 아니고, 교회로 안 보이는 곳이 교회일 수 있다는 것이 오늘 성서의 교훈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