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2년 12월28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청주] 순교자의 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1요한 1, 5 - 2, 2
† 복음 : 마태 2, 13 - 18
헤로데는 권력을 유지하려고 자신의 정적들을 살해하는 잔인한
임금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탄생 무렵 왕권에 위협을 느껴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 2,16). 이때 억울하게 죽은 아기들의 희생을
교회는 오래전부터 순교로 이해하고 기억해 오다가 중세 이후에는
더욱 성대한 축일로 지내 오고 있다. 아기 예수님을 대신하여 죄
없는 가운데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 하느님께서는 빛이시기에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 따라서
하느님 안에 머물면 그분의 빛을 받게 된다. 그 빛은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 줄 것이다(제1독서).
★ 동방 박사들이 돌아간 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알려 준 대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한다. 아기를 찾아내어
죽이려는 헤로데의 폭정을 피하고자 한 것이다. 이로써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복음).
◈ 오늘의 묵상
한 달에 한 번 양로원에 가서 미사를 봉헌하고 식사도 하며 할머니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옵니다. 이 양로원의 할머니들은 자식이 없거나,
있다 해도 모실 형편이 못 되는 자식을 둔 분들입니다. 할머니들은
많은 시간을 기도하며 지냅니다. 그들이 기도드리는 대상은 자식들이나
건강한 젊은 사람들입니다. 할머니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삶이란
참으로 역설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늙고 병들어 힘든 분들이 젊고
건강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할머니들은 자신을 버린 자식들을
위하여 누가 볼세라 새벽부터 일어나서 조용히 기도합니다. 하느님만이
그들을 위로하실 수 있고,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계셔야 합니다.
역설적인 것은 양로원의 풍경뿐만이 아닙니다. 각종 사회 복지 시설을
돕는 후원회원도 줄어들고 연령도 점차 고령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맞벌이하는 젊은 사람들도 많아졌지만 여가 시간을 좀처럼 남을 위하여
헌신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더 많아졌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고 그나마 봉사하는 층도 연세가 드신 분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구세사의 역설을 들었습니다. 죄 없는 아기가
권력에 집착하는 헤로데를 떨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죄 없는 아기들을
죄 많은 어른이 죽였습니다. 여리고 약한 아기들이 주님의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말 못하는 아기들이 생명을 바쳐 주님을 이 세상에
알렸습니다. 말 못하는 어린 아기들이 목숨 바쳐 고백했다면 젊고
건강한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증언하고 있는지요?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매일 미사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선과 악의 균형의 법칙
2012년 다해 12월 28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복음 : 마태오 2,13-18
< 선과 악의 균형의 법칙 >
얼마 전에, ‘안녕하세요, 전국고민자랑’이란 프로그램에서
엄마에게만 2년 동안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종구란 청년을
둔 한 어머니의 고민이 방송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눈물을
흘리게 한 사연이었습니다.
이전엔 어머니와 매우 좋은 사이였는데, 종구가 고 3 때부터
조금씩 아버지와 누나들에게는 이야기를 하는데 엄마에게는
말을 하지 않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2년 동안은 단 한마디도
어머니에게 말을 하지 않아서 군대에 간다는 것조차도 어머니가
종구의 누나들을 통해서 전해 들어야만 했습니다. 종구는 이유도
말해주지 않은 채 어머니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방송 녹화 중에 마침내 종구가 입을 열었습니다. 사실은 종구가
고 3 때 친구를 잘못 사귀에서 한 친구에게 많은 괴롭힘을
당했었습니다. 본래 내성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그 1년을 악착같이 참아내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고 그 친구를 만날 필요도 없어졌지만 어머니의
말과 행동에서 그 친구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구는 자신을 괴롭혔던 그 친구대신 어머니에게 자신의 고통을
전가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종구는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어머니도 눈물을 흘리며
힘들 때 관심을 가져주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며 포옹을 하였고, 스튜디오는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누군가 종구에게 미움을 심어주었습니다. 그 믿음이 상쇄되기
위해서 2년이란 세월동안 그 이유 없는 침묵을 참아야 했던
어머니의 희생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희생
덕분으로 종구의 미움은 사라졌습니다.
밥을 먹어야 힘이 나고, 기름을 넣어야 자동차가 움직이고,
초가 타야 빛을 내고, 향도 타야 좋은 향기가 생기는 것처럼,
희생 없이 얻어지는 좋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만큼
희생되는 것이 있으면 그만큼 좋은 것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없으면 우리 죄의 용서도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것이 아마 에너지 보존법칙에 해당될 것입니다. 악취가
있으면 그것을 중화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향이 불에 타서
희생되어야만 합니다.
오늘은 아무 죄도 없는 아기들이 그리스도의 탄생 때문에
희생을 당해야 했던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왜 선하신
분이 세상에 오셨는데 수많은 죄 없는 아기들의 희생이
필요했을까요? 아마도 그만큼 큰 미움을 상쇄시키기 위해
그런 희생이 요구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죄 없는 희생이 있어야만 하는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그냥 제가 지어서 이름붙인 ‘선과 악의
균형법칙’에 대해 생각해 볼까합니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만약 우주에서 끌어당기는
힘이 더 세다면 지구는 우주 미아가 되어 어떤 행성에 부딪혀
생을 마감하게 되거나, 태양이 끄는 힘이 더 세다면 태양의
뜨거움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힘의 균형 안에
있어야 생명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남녀 사이에는 밀고 당기는 긴장감이 있어야 연애가 오래간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기찻길을 보십시오. 서로 밀고 당기는 가운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합니다. 힘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여 너무
벌어지거나 너무 좁혀지면 결국 그 기찻길은 아무 쓸모가
없어집니다. 기찻길을 만든 이유는 그 위에 기차가 다니게 하기
위한 것인데, 쓸모가 없어졌다는 말은 더 이상 존재시킬 이유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기찻길도 그렇고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저는 이 힘의 균형의 법칙이 온 세상을 파멸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고, 이것은 선과 악의 균형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즉 선이 증가하면 그것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악도 증가합니다.
그래서 모세나 예수님과 같은 인물이 태어나면 파라오나 헤로데의
증오와 분노가 더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없는 이들의 희생이
세상에 증가된 미움을 상쇄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왜
돌아가셨습니까? 그만큼 인류에 대한 사랑이 폭발적으로 세상에
퍼지고 증가하자, 그것에 대한 시기와 질투, 미움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종말에 다다를수록 세상은 미움이 더 커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하느님은 세상을
존속시킬 이유를 찾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는
점점 커지는 악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선도 그만큼 많이
요구될 텐데 의인들이 스스로 그런 희생을 바치지 않는다면
균형의 법칙은 억지로라도 희생을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 자연재해나 가뭄, 홍수, 지진, 해일, 기아 등으로
많은 이들이 죽어가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사라지기 때문에
그만큼 세상은 이유 없게 보이는 죽음들이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의 작은 제단입니다. 제단은 거룩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위에 죄의 악취가 심하다면 당연히 그것을
정화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제대 주위를 돌면서 향을 치는 것입니다.
만약 온 세상에 죄가 없다면 그 악취를 중화시키기 위해 자신을 태우는
희생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나라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죄가 여전히 만연하기에 끊임없이 그 죄의 악취를 중화하기
위한 죄 없는 이들의 희생이 요구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은 더
이상 이 세상을 존재하게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시고 그것이 마지막
때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2천 년 전 죄 없이 희생된 아기들과,
지금도 아무 죄 없이 희생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유지시키는
순교자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을 유지시키기
위해 희생한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고마움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 때문에 이유 없이 죽어간 아기들에게 얼마나 미안하고 그래서
하늘나라에서 얼마나 사랑해 주시겠습니까?
우리 주위에도 이유 없는 고통과 죽음을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유 없는 희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이
세상을 유지시키는 거룩한 희생의 제물들인 것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순교자의 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2년 다해 12월 28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복음 : 마태오 2,13-1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순교자의 피
성 예로니모는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 이라고 했습니다.
순교자들의 희생과 증거의 삶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그들의
모범을 따라 주 하느님께로 나갑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하며 주님의 품을 찾은
스테파노, 오늘 기억하는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는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열정을 일깨워 주며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큰 화를
불러오는지 가르쳐 줍니다.
헤로데는 두 살 이내의 아기를 모조리 죽여서(마태2,16) 자기의
권력을 넘보는 싹을 잘라 버리고자 했습니다. 이런 일은 이미
이스라엘이 한창 피어날 때 이집트에서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과 생명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아들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탈출1,22).
이런 일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낙태건수는
정부추정치만 40여만 건에 이릅니다. 출생아는 년 43만 건이라고
하니 소리 소문없이 낙태로 희생되는 생명들이 얼마나 많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보호받아야 할 태아들이
어머니 뱃속에서 죽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부모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무죄한 생명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유린하고 있으니 그들의 통곡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요셉은 한밤중에 천사가 전해준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마태 2,13). 요셉은 그 말씀을 듣고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습니다’(마태2,14). 온갖 어려움을 마다 않고 지체 없이 발길을
옮기는 요셉의 태도는 곧 순교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은
일상 안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몸에 배어있는 행동입니다. 우리도 언제 어느 때 부름을 받던지
기꺼이 따라 나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순교는
일상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말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자기 의지를 희생으로 바쳤다면
그 사람을 감히 순교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하느님의 손길과 안배는 언제나 함께 합니다.
악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련과 고통,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분의 손길과 요청에 단호히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순교자들이 이 지상에서 소멸 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천국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고해성사를 주다보면 기분이 좋을 때가 있고, 또 반대로 기분이 나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깊은 자기반성을 하고서 고해성사를 보시는 분의
경우는 내 마음도 정화가 되는 기분입니다. 그러나 그냥 남들이 성사를
봐야 한다는 말에 아무런 반성 없이 마지못해 들어오신 분의 경우는
‘이럴 거면 왜 들어오셨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깊은 성찰을 하고 고해소에 들어오시는 분은 눈물을 흘리시면서 죄를
고백합니다. 그 죄를 잘 들어보면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죄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해쳤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아무런 성찰
없이 들어오신 분은 대부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죄 없어요.”
어떤 책에서 성자일수록 본인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고백한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속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그렇지요.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우리는 결코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크고 작은 죄를 반복해서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깊이 성찰하고 뉘우치는 사람은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남들도 그러는데 뭐.’, ‘이
정도는 괜찮아.’ 식으로 타협하고 전혀 성찰과 회개의 시간을 갖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곧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지요.
똑같은 죄를 지으면서도 누구는 스스로 큰 죄인이라며 고개를 숙이는
반면, 누구는 죄가 없다면서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습니다. 과연
누구를 하느님께서 반겨주실까요?
오늘은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입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들은 헤로데가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 날을 기억하는 날인 것이지요.
헤로데는 자신이 한 행동이 과연 큰 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면서 그리고 힘 있는
자가 누릴 수 있는 권리라면서 죄인임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러한
잔인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타협하며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헤로데의 잔인함으로 희생당한 아기들은 과연 죄가
있을까요? 어떤 죄가 있어서 그러한 죽음을 당해야 했던 것일까요?
아직 세상에 피어나지 못한 이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이 아기들의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약하고 어린 아기들의
희생으로 예수님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킨
예수님으로 인해 이 세상은 구원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 사실을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은 과연 어떤 편에 서고 있는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스스로 죄가 없다고 하면서 큰 죄인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스스로를 낮추면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힘을
쓰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내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들어 높이는 사람, 그래서 주님께서
진심으로 반겨주는 의로운 사람이 바로 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오늘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나는 ‘하지만’을 답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랭스턴 휴즈).
어제는 인천교구장님 주교 수품일이었습니다. 건강하세요, 주교님.
나의 보물 1호는?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회원 가입을 하는데, 이러한 질문이 있습니다.
“나의 보물 1호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잠시 생각해봅니다. 내 보물 1호가 무엇일까? 자동차,
자전거, 노트북... 제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서 비싼 것들만
떠올려 집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이것은 보물이 아니더군요.
보물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지요. 세상의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물 1호라는
말에 곧바로 돈과 연관된 것을 떠올리다니... 제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세속적이었는지를 깨닫습니다.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닌, 진정한 보물. 내 자신에게만
진정으로 의미 있고 특별한 것들을 찾아보십시오. 이 보물들이
많아질수록 내 마음은 더욱 더 풍요롭게 될 것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자신의 눈이 멀면
2012년 다해 12월28일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마태 2, 13-18)
자신의 눈이 멀면(마태 2, 13-18)
모든 생명을 창조하시고, 그 생명에게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해
주시고, 그 생명체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요셉성인께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요셉성인께서는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 갑니다. 그리고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이 동방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는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립니다.
구세주께서 탄생하신 사건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먼 길에서 오랜
기간 여행을 하며 축하해 드리는데, 어떤 사람은 자신의 권력이
무너질까봐 두려워서 구세주를 죽이려하고, 죄 없는 아기들까지
죽여 버립니다.
어디엔가 자신의 눈이 멀면 구세주도 생명의 소중함도 깨닫지 못합니다.
아무리 생명의 소중함을 교회에서 가르쳐도 그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한 젊은 부부가 생명을 잉태하였습니다. 그러나 태아의
건강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많이 힘들어하며 함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부부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였지만 8주를 넘기지 못하고
아기가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 부부는 말했습니다. “태아도 한 인격체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많이 그 부부는 울었습니다. 태아를 하느님께 보내면서.
그리고 그 아이를 자신들의 가족으로 받아들인다고 하였습니다.
“그 아이는 하늘나라 성인이 되어서 우리가족을 수호천사처럼 지켜줄
거예요. 저희도 그 아이를 위해서 연미사도 드려주고 계속 기도할
거예요. 미카엘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어요. 제가 힘들 때면 미카엘
대천사에게 도움을 청했었거든요. 그렇게 미카엘 천사가 나에게
왔다가 가네요.”
태아도 인격체로, 가족으로 받아들이면 그 가정에 많은 은총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명의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에 매일 매일 수많은 생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권력욕에 빠진 헤로데에 의해서가 아니라, 물욕과
쾌락욕과 편리주의에 빠진 그 생명의 부모들에 의해서 그런 일들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70-80년대에는 정부가 가족계획이라는 미명하에 모자보건법을 만들어
태아 생명에 대한 국민들의 눈을 멀게 하여 생명의 소중함을 잃어버리게
하였습니다.
비신자든 신자이든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나아 잘 기르자는 말에
속아서 교회에서 그토록 반대를 하여도 눈을 찔끔 감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지금도 역시 교회는 절제해야하고 혼전 순결을 지켜야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생명은 수정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배아줄기세포를 시험하는 것도 인공수정도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후 피임약이나 루프의 착용도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인간은 수정되는 그 순간부터
하느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 오늘 태중의 모든 아기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혹시라도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고 떠나는 생명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 [서울] 신앙인이기 때문에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8일 축제 기간인데, 한 마을의 또래
아기들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한 일을 기억하는 축일이 있다는 게
이상하다고 했던 주일학교 아이가 생각납니다. 축제로 지낸다기보다,
‘순교를 기념’한다는 의미가 맞겠지요.
순교자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은 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신앙고백을 하지 않은 아기들이
순교했다고 하면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순교’라는 말을 ‘예수님 때문에’라는 죽음의 원인 측면으로
바라본다면, 이 아기들은 순교자가 됩니다.
우선 이 아기들은 아기 예수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본향 베들레헴이나 또는 그 부근에서 태어났고, 끝으로
예수님처럼 사내아기였습니다. 죽임을 당하는 이유치고는 뭔가
어이없는 ‘연관성’이라고나 할까요? 어쨌든 이러한 유사성의
근원은 ‘예수님 때문에’ 죽게 되는 것으로 모아집니다.
아기 예수를 찾는 이들의 무리는 둘로 갈라집니다. 그분을 경배하고자
찾아 나선 이들과, 그분을 없애버리고자 찾는 이들(2,13)입니다.
모두가 주님을 진실로 기다려 왔고 맞이하려 했었다면, 아마
베들레헴과 그 일대의 두 살 이하 아기들에게 기쁨에 넘친 잔치와
선물이 듬뿍 베풀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신앙의 선조들에게서 여러 형태의 모범을 보고 듣습니다.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는 능동적인 순교가 있던 시대는 지나갔지만,
우리는 신앙의 가르침을 살아가기에 쉽지 않은 세상이라는 감추어진
박해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살아가려면 그로 인해 겪어야
하는 ‘순교’가 없지 않습니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곧
신앙인이기 때문에 힘든 것을 견뎌내야 하거나, 내게 소중한 것을
내어 주어야 할 때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 이정훈 신부(서울대교구 청년 성서모임 지도신부) -
◈ [서울] 사랑의 삶
내가 어머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갑자기 돌아가신 다음 날 염습할
때였다. 우리 앞에 누워 계신 어머니는 평소와 다름없이 주무시는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가 입고 계신 알록달록한 몸뻬바지를 보자 갑자기 목이 메었다.
평생 쉼 없이 일을 하시고 장사를 하셨던 어머니는 외출할 때를 제외하곤
늘 몸뻬바지를 입으셨다. 나는 어릴 때 그런 어머니의 옷차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구들 어머니는 멋지게 차려입는데 어머니는 늘 같은 옷에
같은 머리 스타일로 다니셨기 때문이다. 내가 “엄마, 좀 다른 옷 입으면
안 돼?” 하면 어머니는 늘 “난 이게 편하다.”며 말머리를 나는 그때
정말 어머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러나 어머니도 여자인데 왜 멋지고 좋은 옷을 입고 싶지 않으셨을까?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평생 입고 싶은 것, 드시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사셨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다 똑같을
것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놓으실 분,
그분의 이름은 ‘어머니’다. 티끌만큼의 이기적인 욕심도 없는 어머니의
모습, 하느님 사랑의 판박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할 때마다 어머니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갑자기 밤에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 가야 했던 어머니 마리아의 고통
때문일까? 우리들의 어머니는 똑같지는 않아도 자식 때문에 평생 크고
작은 고통을 겪으신다. 어린 시절 어머니께 들었던 한국 전쟁 때의 피난
이야기는 너무 끔직해서 생각하기조차 싫다. 그때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
때문에 고통을 견딜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 당신은 며칠을
굶으면서도 자식들 먹을 것을 먼저 챙겼다고 한다. 자식들이 배가 고파
울면 애간장이 녹는 것 같았다는 어머니의 말씀에서 사랑의 실체를
느끼게 된다.
헤로데는 새로운 왕이 나신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자신의 권력에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욕심은 인간의 눈을 멀게 한다. 헤로데는 이기적인
욕심에 빠져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내 것만이 제일 소중하다는 이기심, 자기 것만을 지키려는
아집은 얼마나 큰 재앙을 가져오는가. 자신의 욕심만을 채운다면 우리의
삶은 황폐하게 될 것이다. 이제 내 것만이 소중하다는 마음부터 버려야
한다. 다른 이를 위해서 무언가 버리고 희생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그만큼 사랑으로 변화될 것이다.
- 서울대교구 허영엽 신부 -
◈ [광주]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묵상
지난 10월 7일 유엔(UN)에서 ‘인간개발보고서’를 냈습니다. 특히
이 보고서는 극히 불평등한 미국의 보건의료 상황을 지적하면서
과도한 군사전략개발에 비해 인간개발전략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비판합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유아 사망률이
2000년 이후 점차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생후 1년 이내 흑인
영아 사망률이 백인의 2배에 달합니다.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가정의 1세 이하 영아 사망률이 가입 가정보다 50퍼센트 더 높습니다.
(참고로 건강보험 미가입 비율은 백인 13퍼센트, 흑인 21퍼센트,
중남미계 34퍼센트) 하위 5퍼센트 어린이들이 상위 5퍼센트 부잣집
어린이들보다 평균 수명이 25퍼센트나 짧습니다. 또한 이 보고서는
미국이 불평등 문제 해소를 고려하지 않은 경제성장 위주의
‘밀레니엄 개발계획’을 실행할 경우 향후 10년간 4,100만의
어린이들이 억울하게 죽을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부끄러운 그늘입니다.
물론 어린이에 관한 문제는 단지 미국 사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세계 각국의 많은 어린이들이 아동노동·전쟁·아동학대 ·
아동성폭력 · 굶주림 등 갖가지 형태와 이유로 고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어른들의 전쟁과 갈등 때문에 이미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증오와 분노를 키우는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어른들의
폭력 때문에 어린 시절을 악몽 속에서 지내는 어린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고된 노동과 값싼 노동을 하며 이미 어린 시절부터
세상의 추위를 느끼는 어린이들도 세상엔 많습니다. 이 어린이들을
증오와 분노에서, 악몽에서, 고된 노동에서, 세상의 추위에서
불러낼 수는 없을까요?
- 광주대교구 김정용 신부 -
◈ [서울] 하느님과 어린양에게 바쳐진 첫 열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2,18)
헤로데에 의해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이 모조리 학살을 당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문제의 발단은 동방박사들의 방문에서 기인됩니다. 별의 인도를 받아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를 찾아서 먼 길을 찾아왔던 동방박사들은
예루살렘 위에 머문 별을 보고 헤로데 임금을 찾아갑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2,2)
헤로데로서는 깜짝 놀랄 일이었지요. 동방박사 일행의 방문에 대한
충격이 컸음을 성경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마태2,3)
헤로데는 즉시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다 모아놓고 메시아가
나실 곳이 어디인지를 구체적으로 지명하게 합니다. 그들은 미카서
5장 1절의 말씀을 들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마태2,5-6)
박사들은 다시 별의 인도를 받아 베들레헴 성 마구간에 계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서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예물로 드린 후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꿈에 받고 다른 길로 돌아갑니다.
헤로데는 돌아오지 않는 동방박사들을 기다리다가 분명히 베들레헴
일대를 수색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박사들이 떠난 그 날 밤으로
이집트로 피난간 성가정을 찾지 못하자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예언한대로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라는 말씀이
그대로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일로 희생된 이와 비슷한 끔찍한
일이 구약의 탈출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과
생명력을 두려워한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강물에 던져 죽였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탈출1,22)
모세가 파라오의 학살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던 것처럼 아기 예수님
역시 베들레헴 학살에서 벗어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구약과 신약에서
볼 수 있었던 학살의 현장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낙태로 죽어 가는 어린 생명들이 일 년에 2백만 명이 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이렇게 끔찍한 일을 신자가 비신자나 할 것 없이
동조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놓고 우리는 심각하게 자신을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확인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한 쪽은 헤로데 임금과
수석 사제들 그리고 율법학자들로 대표되는 기득권층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살면서 메시아에 대한 지식이 깊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산 넘고 물 건너서 먼 길을 어렵게 찾아왔던 동방박사들과
쓸 줄도 읽을 줄도 몰랐던 목동들이 있었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아기
예수님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헤로데 임금과 수석
사제, 율법학자들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는데 동참하지만 동방박사들과
목동들은 감격에 겨워 축하와 찬미를 드리지요.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이루십니다.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반발한 헤로데 임금은 그래도 이해되지만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왜 수 천년 동안 기다려온 메시아를
죽이는데 찬동하고 적극 협력하였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욕심
때문이었지요. 끝없는 욕심과 굽힐 줄 몰랐던 주장이 메시아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배척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33년 후에 다시 일어나지요. 33년 후에 본시오
빌라도와 수석 사제들, 율법학자들은 또 다시 예수님을 죽이는데
적극 협력합니다. 결국에는 권력자가 이기는 것 같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삼일만에 그들의 노력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지가 드러납니다.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본시오 빌라도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사형 선고를 내린 어리석은 죄인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70년경에 모두 패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죄의 결과로 그들의 후손들은
이천 년 동안 나라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랑 생활을 하게 되지요.
이러한 어리석음은 과거 예수님 시대에만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곳곳에서 그런 일이 계속되고 있지요. 우리 성당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한 사람일수록, 또 단체의 장으로
봉사활동을 열심히 한 사람일수록 사목자의 복음적인 결정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예수님 시대의 수석 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과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것이지요.
순수해야 합니다. 오히려 먼 곳에 있었던 동방박사들은 메시아를 만났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였던 순수한 목동들은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님을
지켜보며 찬미 드리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를
받은 지 얼마나 오래 된 신자이고 성당에서 어떤 직위로 무슨 봉사를
했는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지만 오히려 성을 쌓아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계기가
된다면 그 사람은 구원에서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복음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18,3)는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복음적인 것은 받아들이고 비
복음적인 것은 스스로 정화시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할 때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생명의 눈이 열릴 것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이기양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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