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3년 1월6일 주님 공현 대축일
[수원] 사랑은 의지로 이루어져 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독서 : 이사 60, 1 - 6
† 독서 : 에페 3, 2. 3ㄴ. 5 - 6
† 복음 : 마태 2, 1 - 12
‘주님 공현 대축일’은 또 하나의 ‘성탄 대축일’이라고도 한다.
동방의 세 박사가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간 사건을 기념하는
날로, 이 사건을 통하여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탄생이
공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님 공현 대축일을
해마다 1월 2일에서 8일 사이의 주일에 지내고 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별의 인도로 세 명의 동방 박사가
세상의 구세주가 탄생되었음을 알고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 경배한
사실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탄생을 온
누리에 비추는 별빛이 되기를 다짐합시다.
★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예루살렘을 축복하신다.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을 알아보는 영광의 도시가
된다. 예루살렘 바로 옆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이
있다(제1독서).
★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을 알아보고 하느님의 공동 상속자가
된다. 이것이 곧 구약에서부터 예언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복음이다(제2독서).
★ 구세주의 탄생이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임은 구약에서 이미 예고되었다. 동방 박사
세 사람의 방문은 이를 상징적으로 잘 드러낸다(복음).
◈ 오늘의 묵상
하늘의 별빛이 구세주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그 별이
온 누리를 비추었음에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모든 이에게
구원의 표징으로 다가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구원의 별빛에 대한 네 종류의 반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루살렘 시민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구세주의 별이
뜬 것조차 모릅니다. 아예 하늘을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먹고사는 문제에만 골몰할 뿐 생사의 문제인 신앙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의 반응은 헤로데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하늘의
별빛은 구원의 표징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별을 보면서 오히려
두려워합니다.
세 번째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의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별빛의 의미를, 또한 그 별이 어디에 멈추게 될지도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삼아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경배하러 찾아갈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그 별빛이 무의미하거나
위협적이거나 머리로만 되새기는 것일 뿐 기쁨의 초대장이 되지
못합니다.
반면 마지막으로 살펴볼 동방 박사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구세주의 별빛을 찾았고 따라갑니다.
제2독서에서 선포된 것처럼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탄생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요?
-매일 미사 -
◈ [청주] 귀한 선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1월6일 주님 공현 대축일
<우리는 동방에서 임금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 마태오 2,1-12
귀한 선물은 우리 자신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아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세상에 구원자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동방의 박사들이 경배하기 전까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바로 동방의 박사들을 통하여 주님의 탄생이 공적으로
드러났음을 기념합니다. 이시간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
드리고 예물을 바쳤듯이 우리에게도 주님께 진정한 예물을
바쳐드릴 수 있는 마음을 불러 일으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해주실 구세주가 오셨다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분의 탄생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누리고 있는 자기의 기득권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움켜쥔 것을 놓으면 자유를 얻을 것인데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잃어버립니다. 먼저 주면 잃을 것이 없는데 주지
않으려 하니까 결국은 누가 빼앗지 않아도 빼앗긴 기분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듣고 헤로데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 놀랐을까요? 헤로데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임금인데 감히 어디에 다른 임금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놀라움입니다. 백성들의 놀란 것은 저 소리를 들은 헤로데가
어찌 나올까? 불똥이 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자기 말고
다른 왕이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2살
이내의 남자 아기를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큰 죄악을 가져온 것입니다.
사실 헤로데는 로마를 위한 전쟁에 큰 공을 세워서 기원전
47년에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대성전도
짓고 세금정책도 잘 세워서 백성을 위했습니다. 자기 개인
사치품을 팔아서 백성의 식량도 사들이고 하였는데 왕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면서부터 의심증이 생기고 의처증이 생겼습니다.
결국 말년에 가서 폭군으로 둔갑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인 미리암도
죽이고, 장모 알렉산드라도, 장남 안티파테르도 다 죽였습니다.
장남의 두 아들도 그리고 10명의 부인에게서 난 아들들 중에도
왕권을 탐낸다 싶으면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속적인 욕심이 얼마나 큰 재앙을 가져오는가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옵니다.”(야고1,15) “욕심을 내다가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남을 시기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싸우고
분쟁을 일으킵니다.”(야고4,2)라고 말합니다. 결국 욕심을
부리면 끝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욕심을
부리지 마십시오. 욕심은 그나마 지금처지의 행복마저도 거두어
갑니다.
술에 만취한 베드로가 한참 비틀비틀 걷다가 전봇대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그러더니 전봇대를 잡고 서너 바퀴 빙빙 맴을
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는 전봇대에 기대어 땅바닥에 풀썩
주저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중얼거렸습니다. “큰일 났군, 사방이
완전히 막혀 버렸어!”
살다 보면 사방이 완전히 막혀 버린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내 욕심이 그 길을 가려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헤로데는
천년만년 권력을 잡을 줄 알고 욕심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없습니다. 그는 죽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 것을 움켜잡지 말고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행복의 길입니다.
동방의 이방인은 메시아의 탄생을 알아보고 멀리 귀한 예물을
가지고 경배하러 왔습니다. 그들을 인도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
별입니다. 그러나 깊이 보면 별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입니다.
구세주를 기다리는 간절한 믿음이 별을 찾아냈습니다. 오늘
복음보면 박사들이 “그분의 별을 보고” 라고 표현합니다. 별이
믿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분의 별을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대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도 메시아의 탄생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유다인들은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정말 등잔 밑이 어두웠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머리에 머물렀지 믿음으로 승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동방의 박사들(6세기경부터 카스팔, 발타살, 멜키올이라고
불렀습니다)은 믿음이 있었기에 먼 길을 마다 않고 주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혹 예물과 뇌물의 차이점을 아십니까? 내가 바치면
예물이고, 남이 바치면 뇌물이랍니다. 감사해서 그저 고마워서
바치면 예물이고, 조건이 붙으면 뇌물입니다. 주님, 이것을 해
주시면 제가 이것을 꼭 하겠습니다. 이것은 뇌물이지요. 우리가
봉헌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물을 봉헌해야지 뇌물을
바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동방 박사들은 예물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들이 준비한
첫번째 예물은 황금입니다. 황금은 왕권을 말합니다. 당신을 왕으로
모셔 순종하고 살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두번째의 예물은 유향입니다. 제사장의 권한 다시 말하면 그분의
신분이 신적 사제인 왕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몰약은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를 말합니다. 왕이 죽음을
감당하는 인성을 지니신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썩지 않게 하는 것이기에 불사불멸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세주로 오신 주님께 어떤 예물을 드려야
할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선물은
믿음의 사람이 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황금을 예물로 드려야겠습니다.
그리고 거룩함을 유지하는 자기성화의 모습으로 유향을, 또한
불사불멸에 대한, 다시 말하면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삶을 몰약의 예물로 바쳐드려야 하겠습니다.
그 구체적인 실천 방안 중에 하나를 제시합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면 예비자 인도를 통해 그 믿음을 증거하기
바랍니다. 영생에로 인도된 기쁨은 혼자 누리지 말고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기쁨이 커집니다. 그러므로 예비자를
인도하시고 인도된 사람이 꼭 영세 받을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
열매 맺는 기쁨을 차지 하기를 희망합니다.
한 사람이 한명을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잠시 예비자로 인도할 한 사람을 기억하실까요?
내가 기억하는 사람이 세례를 받게 위해서는 우리가 이
지역사회에서 더 거룩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은 앞서는데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고 빛나게 하는 가운데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각자가 봉헌하는 예비자를 기꺼이 받아주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님을 경배한 후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한 왕의 부탁보다도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
는 하느님의 지시를 더 중요하게 받아드려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다른 길로 돌아갔다’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내 길이 아니라 하느님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인간적인 요구보다도
천상 것을 우선시하고 하느님의 뜻을 더 중요시하는 삶의
방향전환이 꼭 필요합니다. 일상 안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가오는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의 손길을 꼭 잡으시길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러분 위에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여러분 위에 나타나기 바랍니다.(이사60,2)
사랑합니다 .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랑은 의지로 이루어져 있다.
2012년 다해 1월5일 주님 공현 대축일
< 우리는 동방에서 임금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
복음 : 마태오 2,1-12
< 사랑은 의지로 이루어져 있다. >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패요 동시에 성공으로 손꼽히는
어니스트 섀클턴이 지휘했던 남극탐험대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때는 1914년 8월 섀클턴은 27명의 대원들과 함께 남극 횡단에
나섭니다. 이 시대는 모험의 시대로 수많은 이들이 바다와
북극과 남극, 혹은 높은 산을 정복하려던 영웅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인듀어런스 호는 웨들해의 해류에 밀려 바다 위를 떠도는
얼음 섬에 부딪혀 표류하게 됩니다. 겨울은 점점 다가왔고 이는
곧 죽음이 다가옴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도 대원들은 서로를 위해주고 각자의
일을 착실히 수행했습니다. 인듀어런스 호의 이 같은 평화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섀클턴이 대원을 뽑았던 방식을 보면 그런
사실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면접 장소에서 갑자기 노래를 불러보게
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소리를 질러보라고 합니다. 섀클턴이 원했던
것은 화려한 경력의 이력서가 아니라 함께 팀워크를 이룰 수 있는
‘마음 자세’였던 것입니다.
1916년 4월 20일 섀클턴이 대원들을 모아 놓고 중대 발표를 합니다.
그의 지휘 아래 몇몇 대원들이 제임스 커드 호(작은 구명보트)를
타고 사우스조지아 섬에 있는 포경기지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막 엘리펀트 섬(해역에 서식하는 바다코끼리에서 따온 지명)에
도착한 처지에 그것은 실로 엄청난 계획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사우스조지아 섬까지는 무려 1280km. 그토록 멀고 까마득한 곳을,
겨우 6m 길이의 갑판도 없는 배를 타고, 지구에서 가장 험난한 바다
위로, 그것도 겨울에 지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바다에는 시속
100km의 바람이 불고 20m 높이의 거대한 파도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계획은 만만찮은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원들 중 선원이라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듯이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섀클턴은
한 달 후에도 자신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이 섬을 탈출하라고
명령합니다.
비틀거리는 배에 부딪힌 파도는 곧바로 얼어버렸고, 9일째가 되면서
커드 호의 움직임이 점점 위험스러워졌습니다. 나무와 돛, 줄이
꽁꽁 얼어붙은 채 간신히 물에 떠 있는 상태였습니다. 섀클턴은
고통스러웠던 그날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대원들 모두가 뼛속까지 젖고 얼었다. 7개월 동안 벗지 않은
젖은 옷 때문에 몸을 추스르기가 더욱 힘들었다. 젖은 발과 다리는
하얗게 변한 채 심하게 부풀었고, 손은 때와 고래 기름, 동상,
스토브의 연기 때문에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손끝을 약간
움직이기만 해도 전신에 고통이 느껴질 정도였다.”
1916년 5월 (천신만고 끝에 조지아 섬에 도착한 직후) 섀클턴은
새로운 계획을 발표합니다. 그와 다른 두 사람이 섬을 가로질러
반대편의 스트롬니스 포경기지까지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산, 해발 3천m, 험한 바위와 위험한 크레바스가
곳곳에 있고 대부분이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몹시 위험했습니다.
아무도 넘어본 적이 없는 미지의 산이었고 당연히 지도도
없었습니다.
“섬의 지형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사우스조지아의
해안에서 안쪽으로 단 1km라도 들어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섀클턴)
장장 36시간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산을 넘습니다. 당시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구조선을 얻는 데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한 편 와일드는 섀클턴 일행이 떠난 후 22명의 대원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언젠가 섀클턴이 꼭 돌아온다는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섀클턴이 떠난 지 4개월이 지난
1916년 8월 30일, 누군가 소리쳤습니다.
“배가 왔어요!”
갑판에는 섀클턴이 망원경으로 얼음 섬에 있는 생존자의 숫자를
세고 있었습니다. 대원들은 숨을 멈추고 섀클턴이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이윽고 서로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거리가
되자 그들은 일제히 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모두 무사합니다!”
조난당한 뒤 무려 634일만에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전 대원이
구조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실패 속에서 섀클턴이란 선장의 ‘마음자세’를
봅니다. 무언가 이루어내는 사람과 이루어내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그 ‘마음자세’에 있습니다. 의지가 강한 사람은 무엇이든
이루어내고, 약한 사람은 중도에 포기합니다. 의지가 강한 사람은
어차피 목표가 정해지면 직행을 타는 사람이고, 약한 사람은
언제든 중도에 내릴 수 있는 완행을 타는 사람입니다. 완행을 탄
사람은 기차가 설 때마다 내려서 돌아가야 하느냐, 아니면 계속
가야하느냐 갈등을 하지만 직행을 탄 사람에겐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갈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대인과 소인의 차이인
것입니다.
어떤 자매가 저를 스승으로 삼고 싶다고 찾아왔습니다. 스승은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면 제가 하는 것들을 하실 수 있나요?”
그분은 당연히 따라 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란 책을 20년이 넘도록
매일 읽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20분만 읽으면 3년이면 10권을
다 읽게 될 테니 다 읽는다면 제자로 삼겠다고 말했습니다. 몇 달
읽다가 포기했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마음으로 바란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진정으로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다. 만약 세례 받을 때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마음으로 원했다면 일주일에 한 번 성당
나와서 미사 하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을 텐데 사실은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입니다.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별이 하늘에 떠올랐습니다. 별은 아기
예수님이 있는 곳으로 원하는 모든 이들을 이끕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별을 쫓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출발을 했더라도
많은 이들이 포기합니다. 오늘 예수님을 만난 동방 박사들도 별이
갑자기 사라져서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그래도 죽음을 각오하고
헤로데에게 새로 난 왕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헤로데는
그 곳의 왕인데, 새로 왕이 났다고 말하는 것만큼 목숨을 내놓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메시아를 만나고 경배합니다.
부르심을 받는 이들은 많지만 그 초대에 끝까지 응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세 명의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 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께
경배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감사하는 것이 모든 전례의 핵심이고
구원의 길입니다. 그래서 감사 일기를 써보라고 모든 신자들에게
선물로 노트를 다 나누어 주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반 이상이 포기를 하였습니다. 감사에 도달하면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인데 그 말을 믿지도 않고 또 거기까지 도달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가끔 성당에서 관면혼배를 하게 되는데, 정식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처럼 혼인신고만 하고 살아오다가 간단하게나마 혼인예식을
하면 매우 감격해하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시간에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끝까지 사랑하고 존경하겠다는
서로의 결심을 확인한 순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냥 사랑하며 살면 되지, 이런 결단의 순간이나 예식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사랑은
‘의지’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계약을 맺었다면 그 계약의 조건을
끝까지 이행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관계도
의지가 가장 중요한데 의지는 결단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 결단의
순간을 하찮게 여긴 사람들은 관계를 끝까지 유지해나가기 쉽지
않습니다.
처음에 남녀가 사랑이라고 느낄 때는 4종류의 호르몬이 분비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3년 뒤에 완전히 분비를 멈추게 됩니다. 그러면 그
이후에 결혼을 유지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맺어주셨다는 믿음, 또 그 믿음 때문에 끝까지 사랑하겠다는
마음가짐, 즉 ‘의지’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의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는 처음의 기름은 가졌었지만,
그 이후에 이어갈 기름, 즉 결단과 의지는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섀클턴이란 사람이 자신의
선원들을 구출하기 위해 발휘했던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이
있다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결단과 의지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구원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 좋은 일을 하려고 하면 반드시 저항이 따릅니다. 밥을
지으려고 해도 귀찮은 몸을 일으켜야 합니다. 만약에 가족에게 밥을
해 주려고 한다면 더 많은 저항을 이겨내야 합니다. 돈을 벌려고
하면 하루 종일 피곤하게 일을 해야 합니다. 그만큼 큰 저항을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과 혼인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큰
저항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 저항이 얼마나 큰지를 잘 알기 때문에
혼인 서약까지 하면서 결심과 의지를 다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하느님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얼마나 강한 의지가 필요할까요?
세례를 받았으니 미사에 나오다가 무슨 일이 있어서 쉽사리 냉담
하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기에 합당할 만큼 의지가 있는
것일까요?
저는 성당에서 성경강의를 하더라도 반드시 강의비를 걷습니다.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몇
만원이라도 낼 의지가 없다면 처음부터 듣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어차피 중도에 그만둘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람이 되신 말씀께서 당신 자신을 세상에 보여주신다는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그러나 모두에게 당신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만나기를 원하는 강한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보여주신다는 뜻이 더 큽니다.
우리가 아무리 강한 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늘을 버리고
세상까지 내려오신 하느님의 사랑에 비할 것은 못 됩니다.
다만 하루에 10분씩이라도 감사 일기를 쓰는 것, 혹은 성경을
읽는 것, 혹은 주일미사에 나올 수 있는 의지만으로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의지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과연
우리들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분을 사랑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인천] 아직도 적당히 하시겠습니까?
고기는 어떻게 익혀드릴까요? ‘적당히’여. 설탕은 얼마나
넣을까요? ‘적당히’여. 물 차가워요? 적당해요. 맛은 어때요?
조금 맵지 않아요? 적당해요.
우리들이 많이 쓰는 말, ‘적당하다’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 적당하다는 말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적당함이란
넘치지 않고 모자라지도 않다는 뜻이겠지요. 즉,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균형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쯤을 적당함으로 볼 수 있을까요? 그야말로
천차만별, 백인백색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이 적당함을 자신의 기준에 맞추곤
합니다. 자신이 편하면 적당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기준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상태에서도 “적당히 해.”라고 말하면서
쉽게 포기를 하는 것이지요.
‘적당히’란 앞서도 말했듯이 넘치지 않고 또 모자라지도
않는 상태입니다. 결코 자신이 편한 상태, 내 기준에만 맞는
상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나아가려 할 때에도
이러한 적당함은 계속됩니다. 자신의 기준에만 맞추려는
적당함을 가지고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요.
시간 날 때에만 기도하겠다는 우리. 힘들면 한 주 쯤은
쉬어도 된다는 우리. 내가 어렵고 힘들 때에만 기도하는
우리. 남들 앞에서 신앙생활 한다는 것을 숨기려는 우리.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으면 온갖 불평불만을 던지는
우리.
바로 자기 기준을 앞세우는 적당함이 만들어낸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적당함으로 과연 주님을 느끼고
주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요? 내가 만든
적당함은 가장 적당하지 못한 모습으로,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하게 만들 뿐입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공적으로
이 세상에 드러난 것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그런데 공적으로
드러나는 이 사건의 중심에는 동방 박사들의 경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동방의 세 박사가 귀한 선물을 들고서 험한 광야를 가로질러
베들레헴까지 경배하러 옵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한 세상도
아니었지요. 또한 치안이 좋지도 않았습니다. 온갖 역경과
난관이 자리하는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구세주를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났던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들이 쉽게 말하고 있는 ‘적당함’이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을 만나는 일에 있어서는 적당함이 아닌 최선을
다해야 함을 동방의 세 박사는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무 편한 것만을 쫓지 마십시오. 또한 너무 쉬운 길만을
선택하지도 마십시오.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함께 하는
그 길은 편하지도 또 쉽지도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참
기쁨과 행복이 주어지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성인성녀들이 어렵고 힘든 그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길을 향해 걸어가겠습니까? 아직도 적당히
하시겠습니까?
사랑은 주춧돌이 되어야지, 완성된 구조물이 되어서는 안 돼요.
사랑은 너무나 잘 휘어지고 구부러지기 쉽거든요(베티 데이비스).
1월 8일에 서품 받을 부제님과 신학생들의 대품피정 후의
기념사진.
웃음은 건강을 부른다.
신나게 춤을 추다가 옆 사람과 부딪친 30대 여성이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통증은 없는데 발을 디딜 수가 없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단순히 삐끗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병원의 의사 선생님 역시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왜냐하면 통증이 없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정밀검사 결과 아킬레스건이 통째로 끊어진 것으로 나온
것입니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졌다면 엄청난 통증이 왔을
텐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지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웃으면 뇌 안에 모르핀 같은 자연 진통제 호르몬이 분비된다고
합니다. 진통제 주사를 맞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1996년 로마린다 의과대학의 리 버크
교수는 “크게 웃었을 때 암세포를 직접 공격하는 NK세포가
활성화할 뿐만 아니라 천연진통제 분비가 활성화된다.”라고
발표했습니다.
한 번 웃으면 몸의 660개의 근육 가운데 231개가 움직이는
효과가 있고, 한 번 웃는 것만으로 스트레스로 인해 좁혀진
혈관을 확 뚫어주기도 한다고 하네요. 이렇게 좋은 웃음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행하고 있을까요?
아이들은 하루에 300번 웃는 데 비해 어른들은 고작 6번
웃는다고 합니다. 그 6번 중에서도 4번이 비웃음이고 2번은
기가 막혀 웃을 뿐이라고 하네요.
최고 고령자로 기네스북에 올랐던 프랑스의 잔 칼망 할머니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나쁜 추억은 빨리 잊고 좋은 추억만
생각하면서 웃어~~~”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대구]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별의 인도를 받고 메시아를 찾아 나선
동방박사들처럼 제 삶을 이끄는 말씀의 빛을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세밀한 독서
동방박사들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인다. 별을 보고 움직인다.
움직여 나아가 다다른 곳, 그곳에 한 아기가 있다. 그 아기는
장차 온 민족을 다스릴 분이시다. 동방박사들이 현자든, 점성가든
그들이 움직이는 이유는 오직 하나, 유다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아기에게 경배하기 위함이다.
한편 헤로데는 움직이지 않는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길을
떠난 반면, 헤로데는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오게끔 한다. 수석
사제와 율법학자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움직이던 지도자였다.
유다의 정치적이고 공식적인 왕 헤로데가 유다의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불러들인다. 그들이 서로 어울려 문제 삼는 것은 동방박사들이
찾고 있는 그 아기가 아니다. 장차 유다를 다스릴 메시아가 태어날
장소를 찾는 것이다. 다스리고 있는 이가 다스릴 분을 찾는 것이
헤로데의 말대로 경배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하다.
헤로데가 새로 태어난 유다인의 왕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를
궁금해하는 이유는 다스림의 자리가 오직 자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헤로데는 움직이지 않았다. 헤로데는 그냥 그렇게 자신의 왕국을
자신의 자리에서 지켜내고 싶었다.
동방박사는 별의 인도로 다다른 한 집에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내어놓는다. 유다의 진정한 왕이 여기에 있음을 이 예물들이
말하고 있다. 옛날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이사 49,23; 60,3) 세상의
왕들이 이 아기의 탄생을 경배하듯 동방박사들은 예물을 내어놓는다.
저 멀리 동쪽에서 이곳 작은 집 안으로 세상의 모든 왕권이 모여든다.
이렇게 유다인의 왕은 세상을 다스리는 이들과 다르지만, 동시에
세상을 모두 품어 안는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묵상
예수님은 세상에 와 계시지만 동시에 세상에서 숨어 계신다. 찾아
나서는 나의 여정이 그분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이 나한테
오시는 것에 길들여져 내가 나의 자리를 박차고 걸어가는 데
불편함을 느끼며, 책에 적혀 있고 누군가 알려주는 예수만을
수없이 되뇐다. 꼼짝하지 않는 나의 장소는 그저 내 말에 익숙하고
내 행동에 익숙하고 내 원의에 익숙한 예수의 허상만을 간직할
위험이 있다.
동방박사들이 움직여 나아간 곳에는 보잘것없는 집과 그 집에
놓여 있는 힘없는 아기가 있다. 여염집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장면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새로울 것도, 놀라울 것도 없는
그곳에 세상의 모든 왕권이 놓일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동방박사들을 안내해 준 별 덕택이다. 이 별은 세상의 화려함을
세상의 단순함과 평범함 앞으로 데려간다. 세상의 왕들을, 세상이
그다지 알아주지 않는 한 아기한테로 인도하고 있다. 깜깜함의
위엄으로 뒤덮인 저 밤하늘에 작디작은 존재를 수줍게 드러내는
별이 세상의 권력과 명예 한가운데 작디작은 모습으로 태어난
아기 예수님과 많이 닮아 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발견하는 자리는 그리 대단한 자리가 아닐진대,
가끔씩 우리네 교회의 자리와, 우리네 신앙의 자리는 세상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자리가 되고픈 욕망의 자리가 되기 일쑤다.
예수님의 탄생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세상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삶의 자리 안에 세상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도록
내려놓고 비워내는 작업이 시작됨을 알리기 위해서리라.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은 세상을 다스리는 이의 모습이지(마태 2,3 참조)
아기 예수님 옆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우리의 자세는 아니지
않을까?
기도
주님, 유다의 작디작은 고을, 베들레헴을 생각합니다. 작디작은
고을인 베들레헴에서 작디작은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기가
제겐 크나큰 메시아요, 크나큰 기쁨이옵니다. 주님, 고맙습니다.
- 박병규 신부(대구대교구 선남천주교회 주임) -
◈ [기타] 죽을 위험을 감수하고
2013년 다해 1월6일 주님 공현 대축일
<우리는 동방에서 임금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마태 2, 1-12)
죽을 위험을 감수하고(마태 2, 1-12)
인류구원을 위해서 세상에 가장 나약하고 겸손한 아기 예수님으로
오신 구세주께서는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구세주께서는 오늘 동방에서 온 박사들로부터 경배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참사람이며 온 세상의 임금님께 합당한 황금과 또
신에게 경배를 드릴 때 사용하는 유향을 드림으로서 참
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신 분께 합당한 경배와 예물을 드립니다.
또 앞으로 겪게 될 죽음을 예고하는 몰약도 예물로 드립니다.
동방박사들은 멀리 이국에서 별을 보고 새로운 임금의 탄생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새로운 임금의 탄생을 알
뿐만 아니라 아는 것을 행동으로 실천합니다.
그 당시 광야나 사막에서 야영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광야의 변화무쌍한 날씨와 들짐승들, 또 강도 등의 출몰로 죽을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위험을 무릎쓰고 그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와 함당한
예물을 선물로 드립니다.
우리는 미사성제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믿습니다. 미사 때 마다
사제의 축복으로 빵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됨을 믿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탄생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아주
가까이 주변의 있는 성전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몇
천 년에 한번이 아니라 매일 매일 미사성제 때마다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을 실천으로 옮기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조금만 바쁜 일이 있거나 힘들다고 주일미사를 참례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게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 주일미사에 신자들이
30%도 참여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말로만 믿는 것이고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미사에서 주님의 현존을 믿는다면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일을 목숨을 걸고 실천해야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평일에도
시간을 할애해서 한주에 한두 번은 평일미사에 참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겨야합니다.
우리 자신들이 이 세상을 떠나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보고
후회할 일이 많은데, 그 중에 자신이 그토록 미사성제에 많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이를 실행하지 않은 것일 겁니다.
비오성인께서는 미사가 없는 것 보다 태양이 없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토록 미사성제는 우리 개인의 영혼과
인류의 평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애로우신 주님, 동방박사들이 믿고 깨달은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였듯이 저희도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축복하여주소서.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 [수도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사합니다.
2013년 다해 1월 6일 *주님공현대축일 - 마태오 2장 1-12절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 성탄의 의미를 되새기는 주님공현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오늘 또 한 번의 성탄 축제를 거행합니다. 참으로 경탄할만한
신비인 구세주 하느님의 육화 강생의 신비,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신비를 묵상하고 그분 탄생의 의의를 되새겨야
하는 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을 지니고 인간 세상에 내려오신 정말이지
기상천외한 대사건, 인류역사상 가장 대단한 사건인 육화강생의
이유는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신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당신 나라로 올라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신성을 부여하기 위해, 유한한 인간성에 무한하신
하느님성, 영원성을 투입하기 위해, 보잘 것 없는 존재, 무(無)인
존재인 인간을 하느님화하기 위해, 그래서 결국 인간의 품위를
들어 높이기 위해, 인간에게 참된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이토록 말로 표현 못할 은혜로운 대사건,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철철 흘러넘치는 성탄의 신비 앞에 당연히
우리 인간 측의 응답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 첫 번째 응답은 바로 감사가 아닐까요?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고 만사가 형통할 때는 누구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 자녀가 명문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고, 내 딸이
그럴듯한 직장에 취직하고, 가족 모두가 건강하고, 삶은 늘 내게
호의적이고, 인생은 순풍에 돛단 듯이 순조로울 때 감사하지 않을
사람 단 한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는 그게 다여서는 안 됩니다. 일이 마음먹은
대로 잘 안 풀릴 때, 만사가 꼬이고 꼬일 때, 나락으로 떨어질
때, 병고에 시달릴 때, 결국 우리 모두가 언젠가 맞이하게 될
죽음 앞에서도 감사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감사입니다.
감사의 생활이 잘 안 되는 우리가 바라봐야 할 여인이 한분
있습니다. 삶 전체가 감사였던 한 여인, 에티 힐레숨입입니다.
그녀는 2차 세계대전 중에 죽음의 수용소로 실려 가는 와중에도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른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저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계속 찬미하나이다.”
그녀가 베스테르보르크 임시 수용소를 떠나 죽음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는 마지막 열차에서 쓴 우편엽서가 나중에 한
네덜란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그 엽서는 마치도 오늘
우리에게 남긴 유언처럼 여겨집니다.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되어가는 사람들로 빼곡한 열차 안입니다.
나는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 위에 걸터앉아 이게 마지막이겠지
하며 성경을 펼쳐보았습니다. 펼쳐보자마자 이런 구절이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산성 나의 바위.’ 아버지와
어머니, 미샤는 저와 몇 량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결국 사전
통보도 없이 이송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노래를
부르며 베스테르보르크 수용소를 떠났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세상 안에서 만나는 아름다움에 대해 감사를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름다운 꽃들, 릴케의 아름다운 시,
암스테르담 운하 위에 찰랑이며 부서지는 햇살, 어린 아이들의
웃음소리, 갓 구운 빵 냄새...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감사가 그런 소극적이고 제한적인 감사에
머무르지 않고 감사의 외연을 확장시켜나가기 위해 끝도 없는
감사의 훈련을 쌓아갑니다.
“나는 풍요로움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나는 너무도 감사합니다.”
에티의 내면을 가득 채운 풍요로움은 그녀와 사람들의 관계를
깊은 차원으로 성장시켜나갔습니다. 그녀는 세상 안의 다른
피조물 못지않게 동료 인간들에게도 아름다움이 배어있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이웃들의 약함을 점점 관대하게
수용하기 시작했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가한 잘못도 쉽게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녀 앞에 펼쳐진 삶은 처참하고 혹독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가는 시한부 인생으로 전락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자신 앞에 다가온 뜻밖의 현실을 용납할 수 없었겠지요.
그러나 오랜 영적 투쟁과 그녀의 내면 안에서 깊은 삶이 이동이
이미 한번 이루어진 그녀였기에 오래 가지 않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모든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세상이
하느님 현존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나를 평화로운
책상에서 끌어내어 이 시대의 근심과 고통 한 간운데 있게
해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녀에게 있어 감사는 좋은 것 나쁜 것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포용할 만큼 그 범위를 넘어 뻗어나갔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속에 퍼져 영혼에 잿더미처럼 내려앉은 비극에도 감사했고,
영롱한 빛을 내며 깊은 의미를 계시해주는 은총의 순간에도
감사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마지막에 이렇게 적습니다.
“나는 베스테르보르크(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기 전 머무르는
대기 수용소)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케리 월터스,
아름답게 사는 기술, 생활성서 참조)
우리 시대 대영성가 헨리 나웬 신부 역시 우리에게 감사의
훈련을 촉구합니다. “감사함의 훈련이란 나의 모든 존재와
소유가 사랑의 선물로, 그래서 기쁨으로 경축해야 할 선물로
주어졌음을 받아들이려고 확고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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