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3년 1월9일 주님 공현 후 수요일
[청주] 아름다운 마무리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1요한 4, 11 - 18
† 복음 : 마르 6, 45 - 52
★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르신 분이시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 가운데 온전히 머무르신다. 절정의 사랑을
보여 주신 예수님께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고백하는 믿음 역시 하느님과 일치하는 길이다(제1독서).
★ 물은 성경 안에서 죽음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 어둠 속에서
물 위를 걸으시는 모습은 그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미리 드러내는[공현] 사건이다. 이로써 마르코
복음사가는 빵의 기적이 생명을 주시는 그분의 사명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 준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어릴 때의 일입니다. 밤에 잠을 자다가 갑자기 볼일이 마려우면
화장실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무척 고민했습니다. 화장실이
마당 한쪽 구석에 있어서 겁이 났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어머니를 깨웠습니다. 어머니는
함께 일어나 화장실까지 데려다 주기도 했고, 때로는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어머니를 깨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화장실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저를 보호해
주는 어머니가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어머니와 같은
분이십니다. 살다 보면 험난할 때도 있고, 칠흑 같은 어둠의
시기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당장 절박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 연줄 등 아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분,
어두운 밤에 화장실을 다녀오도록 용기를 주는 어머니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의 인생길을 보살펴 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이 밤에 호수를 건너다가 풍랑으로 말미암아 위기를
맞이합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노를 젓는 기술이나 호수의 특성에 대한 지식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의식이
없었으므로 예수님을 보고서도 유령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길에서 거센 풍랑을 만났을 때 어느새 우리 곁에
나타나시는 그분을, 그분의 동행을 의식합시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매일 미사 -
◈ [청주] 아름다운 마무리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1월9일 주님 공현 후 수요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
+ 마르코 6,45-52
아름다운 마무리
몇 년 전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8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습니다. 브라질 국민들은 퇴임하는 그에게 87%의
지지율을 보냈습니다. 세계 각국은 그의 퇴임을 “아름다운
퇴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재임 기간 중 브라질을
세계8위의 경제대국으로 끌어 올렸고 좌우를 모두 끌어안는
포용의 정치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래서 2010년에 다시
출마하면 당선이 확실시됨에도 불구하고 “신은 한 사람에게
두 번 선물을 주지 않는다. 다시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미친 짓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물러났습니다.
그래서 그의 퇴임을 “아름답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퇴임은 어떻습니까? 바닥을 치고
불행하게 떠납니다. 아름다운 마무리, 아름다운 뒷모습이
그립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국정운영의 청사진과
새 정부의 골격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민생정부'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합니다. 국민 신뢰를 통해 '정치 불신'
을 없애고 선진국 진입에 한 발짝 더 다가가겠다는
목표랍니다. 당선인은 '말만 늘어놓기'보다는 확실한
실천과 행동으로 국민들에게 믿음을 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잘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일찍이 세례자 요한은 당신의 뒤에 오실 분을 소개하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요한1,27)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한다.”
(요한3,29)하시며 예언자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재촉하여 떠나게
했을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입니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갑자기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제자들의 위치는 봉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존경받는
자리가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환영받을 때 초심을 잃지 않고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떠나게 하셨는데 ‘배’
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구성원입니다.
성직자이든, 수도자이든, 총회장이나 구역장, 반장,
단체장은 봉사의 도구이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 욕심을 내려놓을
때 아름다워집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떠날 채비를 갖춰야
합니다.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당당히 가야합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작별하신 후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습니다.
할 일을 마치고 기도하러가셨습니다. 그 기도는 주님을 지켜주시는
힘입니다. 당신을 파견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도 기도는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을 밝히
드러내 줍니다. 하느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깨어있게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에 방해 받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는 산으로 가야합니다.
기도의 장소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녁이 되었을 때 제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마침
배는 호수 한 가운데에 있고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맞바람은 장애물입니다. 성경에서 ‘바람’
은 성령을 상징하니까 맞바람은 ‘악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의심과 두려움을 가져오게 하는 방해꾼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며 맞바람을
잠재우셨습니다. 맞바람을 잠재울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우리는 곤경의 바다에서 헤매지 말고 그 한복판에 서계신 주님을
잘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며 우리를 곤경에서 구하러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눈이
멀면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 집니다. 모쪼록
거센 맞바람 안에서도 함께 계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가 세상살이에 바빠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을 지날 때에도 당신이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용기를 내어라.
어제 사제서품식이 잘 끝났습니다. 인천교구 사제 10명
그리고 부제 8명이 새롭게 탄생 했지요. 저도 얼마나 가슴이
뭉클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서품 모습을 보면서 동시에
저의 지금까지의 사제생활을 반성하고 다시금 마음을 잡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서품식 준비하는데 있어서 많은 분들이 수고하셨습니다.
성소후원회, 신학생, 사제, 인천대신학교, 전례꽃꽂이,
인천교구 합창단, 그 밖의 많은 관계자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어제와 같은 큰 행사를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서품식이 끝나고 나서 많은 분들이 제게 와서 정말로 수고했다고,
서품식이 너무 잘 진행되었다는 칭찬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총진행자이기는 하지만, 저 혼자서 이 큰 행사를 어떻게
치룰 수 있었겠습니까? 다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솔직히 제가 처음 성소국장으로 와서 서품식을
진행하는데 두려움도 많았습니다. 거의 6,000명의 신자들이
참석하는 이 서품식을 과연 잘 진행시킬 수 있을까 라는
두려움이 생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러나
성소국장으로 네 번째 서품식과 크고 작은 많은 행사들을
진행하다 보니 이제 두려움이 전혀 생기지 않습니다. 이 모든
행사들을 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해주시는 많은
분들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이 안에 함께 해주시면서 가장 거룩한 전례, 가장 아름다운
전례를 만들어 주신다는 굳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만 사라진다면 할 수 있는 것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도 내 마음 안에 있는 두려움으로
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또한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면 떨려서 제대로 할 수
없지요. 그런데 믿음이란 이 두려움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을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문제는 이 믿음을 사람 안에서, 이 세상 안에서만 찾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세상 안에서 굳은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요. 그러나 가장 완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주님께 믿음을 둔다면 무엇이든 가능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놀라운 기적, 즉 빵의 기적을
목격한 상태였기에, 이 정도의 기적쯤이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으로만 바라보니 두려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 안에서 인간적인 판단, 세속적인 판단 없이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굳은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때
두려움 없이 온전히 주님과 함께 모든 어려움과 시련들을 잘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잊지 말고, 오늘을 힘차게 생활하시길 바랍니다.
운은 우리 바깥이 아닌 우리의 의지 속에 존재한다
(줄리우스 그로스).
2013년 1월 8일에 탄생한 새 신부님들과 주교님 그리고 몬시뇰님.
하느님을 좋아하십니까?
예전에 강아지를 키운 적이 있습니다. 한 6년 정도 키웠던 것
같습니다. 강아지를 키우는데 돈이 꽤 들더군요. 사람이 아파서
병원에 가도 그렇게 비싸지 않습니다(의료보험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강아지는 아파서 병원에 데리고 가면 상당히 비싼 값을
치러야 합니다. 또 왜 이렇게 예방접종 시킬 것들도 많은지요.
여기에 사료를 사다가 먹이는 것은 물론, 이 강아지를 위해서
간식도 종종 구입하게 됩니다.
사람에게도 쓰지 않는 많은 돈을 이 강아지에게 쏟아 붓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강아지를 좋아하기 때문이지요. 때로는
말썽도 많이 치고 있지만, 제가 들어올 때 반갑게 꼬리를 흔들며
맞이해 주고 그리고 제 옆을 떠나지 않는 모습, 즉 이 강아지가
저를 좋아한다는 그 한 가지 때문에 그렇게 많은 애정을 쏟아
붓게 되는 것입니다.
저를 좋아한다는 그 한 가지 때문에 사랑을 주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느님도 그렇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겠다!’라는 거창한 마음보다 더
먼저가 되어야 할 것은 ‘하느님을 좋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좋아하는 마음 하나만 보고서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좋아하십니까?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정제천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빵의 기적을 행하신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을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동요하는 군중을 돌려 보내신다. 이런 일을
하시는 예수님은 어떤 성품을 지니신 분일까?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며 당신의 계획과 구상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하는 분이시다.
그리고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가신다. 이때에 예수님은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 대한 자체 평가를
하셨을까? 군중이 그 기적의 영적인 의미를 깨닫게 되도록
기도하셨을까? 영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한 군중이 육적인
차원에 머물러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게
될 것을 직감하셨을까? 어쨌든 예수님은 일을 하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멈추어서 성찰하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가면서 살아가셨다. ‘활동과 관상’은 예수님의 삶을 이끄는
두 수레바퀴였다. 활동과 관상을 하나로 살게 해주는 기도를
성 이냐시오는 양심성찰 또는 의식성찰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일러주었다. 이 기도를 통해 영적인 눈을 기르고
마침내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기를 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 물 위를 걸어오신다. 바닥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마당에 힘을 내라고 격려하시기 위해서 제자들을
찾아오신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도 삶의 파도에 시달릴지라도 주님이 함께 계심을 잊지
않기를 빈다. 진정한 힘과 용기는 두 주먹을 불끈 쥐는
데에서 나오지 않는다. 내 곁에 함께 계시며 “나다.”
하시는 그분에게서 나온다.
- 정제천 신부(예수회) -
◈ [수도회] 배가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2013년 다해 1월9일 주님 공현 후 수요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
마르 6, 45 - 52
배가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이스라엘은 좁은 국토면적을 가진 소국이지만 아주 다양한
지형과 기후를 가진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은 서쪽의 지중해라는
큰 바다와 동쪽의 거대한 사막 사이에 끼어있는데 그래서
'사이의 땅'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아열대성 기후와 지중해성 기후가 교차하는 독특한 기후 조건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리적으로도 고산지대가 있는가 하면 바다 수면보다 수백 미터나
낮은 지역들이 있어 지역적으로 다양한 기후를 갖고 있지요.
고산지대인 예루살렘은 엄청 춥지만 저지대인 사해 부근은 혹독한
더위를 견뎌내야 합니다. 메마른 유다 광야에는 풀 한포기 찾기
힘들지만 해안가나 갈릴래아 호숫가는 항상 푸르고 온난합니다.
갈릴래아 호수 역시 이런 독특한 지리와 기후의 영향을 받아 자주
특별한 모습을 보입니다. 평소 잔잔하다가도 갑자기 깜짝 놀랄
정도의 풍랑이 일기 시작합니다. 멀리 헤르몬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찬바람과 아라비아 사막으로부터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이 갈릴래아
호수 상공에서 부딪치기라도 하면 심한 기류의 이동이 발생해 마치
바다처럼 높은 파도가 일렁거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갈릴래아
호수라고 하지 않고 바다라고까지 칭할 정도였습니다.
군중을 해산 시킨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벳사이다로 먼저 보내십니다.
그리고 자신은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육로로 가기는 너무나
먼 길이었기에 제자들은 갈릴래아 호수를 가로지르는 배에 승선합니다.
하필 제자들이 배에 오르자마자 악천후가 시작되고 맙니다. 마르코
복음사가의 기록에 따르면 제자들의 고초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배에 태워 보낸 시간은
오후 4-5시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새벽녘에 호수 한 가운데서
헤매고 있었으니 적어도 10시간 가까이 탈진할 정도로 노를 저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육체적 정신적으로 탈진했으면 새벽녘에 물위를
걸어 자신들 가까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유령이다!"라며
소리까지 질러댔습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의 단절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아직까지 스승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정체 파악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분이 바로 메시아라는 확신에 도달하지 못함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아직까지 스승을 향한 제자들의 믿음이
확고하지 못함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우리 각자 역시 갖은 역풍과 맞서면서 인생이란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때로 그 역풍이 너무나 커서 삶 전체가
흔들리기도 합니다. 때로 지레 겁을 먹기도 합니다. 파선될 것
같은 기분에 다 포기하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인생의 조각배 위로 올라오시면 아무리 큰
풍랑이라도 순식간에 잔잔해질 것이기에 무조건 참고 견디는
일이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는 신앙의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요즘 어느 교회든
가면 발견할 수 있는 신앙의 해 로고가 기억나실 것입니다.
로고는 아래쪽과 위쪽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아래쪽은
교회를 상징하는 배의 모양입니다. 그리고 배위의 둥근 원은
성체를 상징하며 성체 안에는 IHS라는 글자가 세겨져 있는데,
이는 인류의 구세주 예수 ((Jesus Hominum Salvator)라는 뜻입니다.
올 한해 교회란 배가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인류의 구원자 예수님을 우리 배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내 인생의
배 위로 큰 파도가 넘어올 때 마다 주님께서 빨리 내 배위로
건너오시도록 간절히 청해야 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부산] 기적과 일상의 조화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도
12광주리를 가득 채우는 기적이 있었다. 한 끼의 식사를 이렇게
성대하게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들이 가득 찼을까?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고 군중은 또 어떠했을까? 마르코복음에는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에 대한 어떤 반응이나 효과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다르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을 보고 예수를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로 믿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산으로 피해 가셨다고 한다.(요한 6,14-15) 그런 다음에 요한복음도
마르코복음에서와 같이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기적을 보도하고
있다.(요한 6,17-21)
마르코복음은 요한복음과 달리 예수께서 빵의 기적을 베푸신 직후
다른 어떤 효과가 개입되기 전에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호수 건너편 베싸이다로 먼저 가게 하셨고, 모여 있던 군중을 흩어
돌려보내셨다. 우리가 복음서 전체에서 늘 볼 수 있는 장면은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신 후에 기적을 입은 사람들을 그 현장에
두지 않고 바로 돌려보내시는 것이다. 게다가 자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마태 9,22; 15,28; 마르 5,34; 10,52; 루가 7,50; 8,48; 17,19; 18,42 등)
고 하시면서 기적의 원인을 예수님 자신보다 사람 편에 두셨다. 이런
점들은 기적의 성취가 예수님 편에서 행하시는 일방적인 행위라기보다
생산자와 소비자, 또는 발신자와 수신자 간의 쌍방적인 행위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즉, 기적만이 능사가 아니라 기적(奇蹟)
과 일상(日常)의 조화를 의도하고 계신 것이다.
기적과 일상의 조화는 참으로 중요하다. 기적을 놓고 이를 체험한
측이나 이를 베푼 측에 똑같이 있을 수 있는 감정은 만족감과
달콤함이다. 누구든지 이러한 쾌감이 지속되기를 바라지만 일상(日常)
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적의 주도권을 잡은 예수에게도,
기적을 체험하는 인간에게도 같은 비중으로 적용된다. 그래서
기적(奇蹟)은 상식을 벗어난 일상이탈로 소개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군중을 흩어 집으로 돌려보내시고 제자들을 재촉하여 다음 선교지로
서둘러 보내시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기적과 일상의
조화를 꽤하시는 것이다. 기적과 일상을 특히 잘 조화시키는 요소가
있다. 그 요소는 오늘 복음에서 두 가지로 발견된다.
첫째는 기도(祈禱)이다. 예수께서 사람들과 제자들을 보내고 산으로
가서 기도하신 것은 기적을 베푼 스스로의 성취감과 달콤함에서
벗어나 기적을 가능하게 하신 하느님과 대면하기 위해서이다. 즉,
기도의 일상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둘째는 말씀이다. 곧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50절)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역풍을 만나 일상의 어려움을 겪는 모든 이들을 향한 말씀이다.
“나다”(에고 에이미)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정식으로 소개하는
자기계시적 말씀이며(출애 3,14), 하느님 현존의 방식이다. 누구든지
기도하면서 “나다”라는 하느님 현존의 말씀을 신뢰하는 사람은
일상 속에서 기적을 체험하게 되며, 기적 속에서 일상의 평정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기도하지 않고 “나다”는
말씀의 하느님 현존에 대한 체험 없이는 아무도 기적과 일상의
조화를 바랄 수 없으며, 이를 체험할 수도 없다. 아무도 기적
속에서만 살 수도 없고 무미(無味)한 일상 속에서만 살 수도
없다. 그러나 기도와 말씀을 함께하는 일상은 그 속에 기적을
태동시킨다.
-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
◈ [수원]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실 때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남자만 5천 명 되는 사람들을 먹이신
빵의 기적 후에 제자들을 재촉하여 호수 건너편으로 보내시고
군중들을 헤쳐 보내셨다고 한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시는 예수님의 의도가 있었다. 그 이유를 마르코 복음사가는
설명하지 않지만 요한 복음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들은 예수의 권능을 보고 감탄하여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뽑아 세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기 때문이고, 제자들이
그것을 말리게 되면 혼란이 생길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소요를 막기 위해 제자들을 격리시키고 군중들을 헤쳐보내신
것이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람이 일어 제자들이 파도에 시달리는 것을
보신다. 그러한 곤경을 아신 예수님은 이제 당신이 하시던 기도를
중지하시고 제자들의 어려움을 해결하시고자 물 위를 걸어가신다.
예수께서 제자들 곁에 가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졌고
제자들은 또 한번 놀란다. 이 때 예수님은 무엇이라 하셨는가?
“겁 내지 말고 안심하여라”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세상 어려움 속에 있을 예수께서 함께 계심을
인정하고 받아 들일 때 우리는 어떠한 역경이라도 이길 수 있으나,
하느님을 믿지 못하고 그 어려움을 자기 힘으로 헤쳐 나가고자 할
때 더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온갖 풍랑으로
뒤흔들리고 어지러울 때, 거기에 십자가를 모실 수 있어야 한다.
그 때에 우리 마음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생활 속에서 여러 번 체험했으리라 믿는다. 또한 성인 성녀들
또는 순교자들의 순교의 모습에서 그들이 평안하고 기뻐하는
가운데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모습이라고 하겠다.
빵의 기적을 체험하고 놀라움과 감탄으로 가득 찼던 제자들이
지금은 또 풍랑을 만나서 고생을 하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은총의 순간을 체험하기도 하지만, 또 역경을 만나면 그 은총의
순간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보다,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느님을 떠나고 싶은 생각도 하고 자포자기하기도
하는 풍랑을 맞이할 때가 많다. 이 때에 우리의 마음 안에
주님의 십자가를 모시도록 하자 그러면 그 풍랑은 가라앉을
것이다. 자연을 섭리하시는 권능을 가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시지 않겠는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분을
잊지 말고 그분의 은총의 때를 기억하며 다시 우리 자신을
가다듬으며 살아 갈 수 있는 은총을 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 [기타]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2013년 다해 1월9일 주님 공현 후 수요일(요한 1서 4장 11~18절)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지난 주일에 공소 미사를 봉헌하고 나서 한 형제님이 구세군이
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한 교파이다...’
라고 짧게 대답을 한 뒤에 ‘무슨 이야기를 하시나..’ 하고
기다렸는데, 대답을 듣고 나서 조용히 다시 식사를 하십니다.
뭔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게 있으신 거 같은데.. 하는 생각에
‘그건 왜 물어보세요?’ 하고 다시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형제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지난 번에 티비에서 얼굴이 망가지고 큰 점이 있는 아줌마가
나왔다. 그분이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서 버려져서 구세군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컸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결혼을
했다. 그 일이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남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어떻게 보육원에서 자랐고, 얼굴이
흉했던 그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정말 사랑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인 거 같다... 그걸 보고 느낀 바가 많다.
그래서 나도 서운해 하고 미워하는 마음.. 다 내려놓고 모임에
참석하려고 한다. 며칠이 갈지는 모르지만 새해에 그런 결심을
했다.’
그 이야기가 저에게는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형제님은 도시에
있을 때 자매님 따라서 조금 성당에 다니다가.. 오랜 냉담을
하시다가.. 섬에 와서 다시 성당에 나오고 계신데요. 한동안
어떤 서운함 때문에 성당에 나오지 않으셨었습니다. 그래서
중간 중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었는데요.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드렸지만 ‘말로는 그 서운함이나 갈등을
풀어줄 수 없겠다..’ 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계속 성당에 안 나오실 거 같았는데 다른 몇 분의 권유로 어느
날 부턴가 나오시긴 하더라고요. ‘다행이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몇 달이 지난 뒤에 ‘다 내려놓겠다... 미워하지
않겠다...’ 하시니 그 말이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먹게 해 준 그분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들면서, 혼자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 설득이 아니라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데에 더 큰 힘이 있구나...’ 요한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도 그러한 맥락인 거 같습니다. 오늘 독서
첫 구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마치 ‘하느님의 사랑을 맛보아라. 그 사랑을 체험해 보아라..
그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거다...’ 하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를 위해 하늘의 달과 별들과 걸어
놓으시고, 길에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꽃들을 지어내신 하느님의
사랑을.. 또 나의 앞길을 인도하시고 이끌어 주시며 곁에서
돌봐주시고 나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신 하느님의 사랑을
말입니다. 그런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깨달을 수 있다면,
아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이웃을 위해 나누고 섬기고
봉사하고 사랑하는 신앙인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을 천천히
들여다 보고 느껴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온천에 갔다가 나오는데 그 앞에 작은 인공연못이 있었다.
그 안에 조그만 물고기들이 많았는데, 한 5살 된 아이가 점점
그곳에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자, 그 아이 할아버지인 듯한
분이 이렇게 겁을 줬다.
“너 거기 빠지면 고기가 문다~”
- 밤송이 신부님의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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