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2월21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청주] 가장 강력한 힘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에스텔 4,17(12).17(14)-17(16).17(23)-17(25)
† 복음 : 마태 7, 7 - 12
★ 에스테르는 이스라엘의 여인이면서도 페르시아의
왕비였다. 그녀는 동족을 말살하려는 하만 재상의 음모를
듣고서 이를 저지하고자 임금에게 간언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는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라 하느님께 매달려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다(제1독서).
★ 기도의 핵심은 간절함과 항구함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로서 자녀들의 간절하고도 항구한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신다. 아니, 그분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더 좋은 것도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들으면서 우리는 쉽게 이러한 생각을 떠올릴
것입니다. ‘정말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얼마나 정성스럽게 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일까?’ 그러나 오늘 복음은 ‘기도를
들어주시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보다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생각하라는 데에
주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어떤 꼬마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용돈을 받을 마음으로
심부름할 때마다 그것을 공책에 꼬박꼬박 적어 두었습니다.
“구두닦이 천 원, 설거지 천 원, 청소 2천 원 …….”
그렇게 하고서 나중에 엄마에게 이른바 청구서를 내놓았습니다.
엄마는 그것을 보고서 빙긋이 미소 띠며 방에 들어갔습니다.
잠시 뒤 엄마는 메모지 하나를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너를
내 배 속에서 열 달 간 배고 있었을 때 받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 백만 원, 너를 낳을 때 들어갔던 출산비 오십만 원,
지금까지 너를 먹이고 키우는 데 들어간 돈 3천만 원 …….”
이런 식으로 열거되면서 맨 끝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 합계는 0원.”
오늘 복음 말씀을 듣고 ‘기도를 늘 들어주신다.’ 또는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만 이해한다면, 앞의 아이의
계산법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부모가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며 자식을 키우듯, 하느님께서는 그보다 더 깊고 높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고, 지금도 주고 계십니다.
-매일 미사 -
◈ [청주] 가장 강력한 힘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2월21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
+ 마태오 7,7-12
가장 강력한 힘
“기도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도 양보하시는 힘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특권입니다.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그 자녀의
필요와 염려에 관심을 나타내실 수 있는 길이고, 주
하느님나라의 창고는 기도로 열리며 믿음은 그 열쇠를
돌리는 것입니다.”(작자미상)
그런데 기도의 응답은 때때로 즉각 이루어 주십니다.
가르멜 산위에서 기도한 엘리야의 기도를 듣고 곧 불을
내려 주셨습니다. 천천히 적당한 때에 이루어주시기도
합니다. 다윗왕은 성전을 건축하려 하였지만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케 하였습니다. 어느 때는
이루어주지 않음으로 응답이 되게 하십니다. 기도의
응답은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게 하십니다.
위함입니다. 들어주어서 손해가 될 것은 들어주지 않음으로
해서 유익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큰 사랑으로
우리의 필요를 반드시 채워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7,8)
라고 하셨습니다. 각자의 바람이 많이 있겠지만 세속적인
만족과 위로를 찾고 구하기보다 먼저 하느님을 찾고
갈망하여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청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욕정을 채우려는데
쓰려고 청하기 때문(야고4,3)이라고 하였으니 헛된 수고의
기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열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울지 않는 아이는 젖도 못 얻어먹는다.”
고 했습니다. 먼저 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들어주실 것을 청하십시오.
사실 문이라는 것은 열릴 때 열리고, 닫을 때는 닫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열고, 악에는 닫아야 합니다.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께는 물론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부모에게, 형제에게, 이웃에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부와 명예, 명성의 유혹에는
문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마음은 열고 욕심의
입은 닫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주실 수 있는 분이고 따라서 우리는
받을 수 있으니 행복합니다.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만 구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고마운 응답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청하고, 찾고 두드리되
내 뜻이 아니라 주시는 분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길 바라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7,1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좋은 의향을 가지고
마음껏 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반복해서
청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그분 손에,
그분의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음성을
조용히 듣는 것입니다.”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입니다.”
(마더 데레사) 우리의 바람과 기도가 헛되지 않기를 빕니다.
사랑합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주는 것인가, 받는 것인가? 내가 무엇인가를 받을 때,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가?
주님과 더불어 베풀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남을 비난하는데 더 이상 열광하지 맙시다.
얼마 전에 암으로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난 한 가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 가수는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팀으로 나와 정말로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지요. 그 과정 안에서 암 말기라는 사연을 듣고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수를 정말로
힘들게 했던 것은 암이라는 병보다도 다른 것에 있었답니다.
바로 많은 사람들의 악의가 담긴 인터넷 댓글이었지요.
음악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보기 보다는 우승을 하기
위해 일부러 쑈 한 것 아니냐는 말, 더군다나 결혼까지
해서 아이까지 않았다니 이제까지의 모습은 다 거짓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몇몇 사람들의 “아직도
죽지 않았냐?”는 저급한 표현의 글에 큰 아픔을 간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혹시 다른 이로부터 나쁜 말 듣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까? 제발 나를 꾸짖는 나쁜 말만 해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떻게든 좋은 평가를 받고,
긍정적인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면서도, 남에 대해서는 얼마나 인색한지
모릅니다. 또한 자신의 이러한 비판의 말, 부정적인 말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합리화시켜 외치고 있습니다.
자신을 내던져가며 누군가를 비난하는 일에 몰두하는
모습. 그러나 역으로 내가 비난받는다면 어떨까요?
저 역시 지난해에 어마어마한 인터넷 악성 댓글에
시달렸던 적이 있었지요. 솔직히 ‘내가 떳떳하니까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 뭐.’라고 간단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더군요. 전후 관계에 대한 어떠한 고민도 없이
쓴 글, 또한 그 글에 대해서 동의하는 또 다른 사람들의
글은 저를 화나게 만들었고, 왜 이러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 너무나도 억울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저급의
사람들에게 원색적인 욕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치욕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 연예인들이 악성
댓글에 큰 상처를 받는다는 사실에 깊이 공감할 수가
있었지요.
별다른 의미 없이 행하는 오늘의 내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꾸게 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자신 역시 다른 이들로부터 똑같은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황금률이
크게 와 닿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내가 원하는 대로 먼저 내가 남에게 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모두가 살아갈 때, 더 이상 상처를
주는 세상이 아닌 힘과 용기를 더해 주는 세상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남을 비난하는데 더 이상 열광하지 맙시다. 이제 비난하기
보다는 칭찬하고 사랑하는데 더 열광하는 우리들이 되면
어떨까요?
최고의 장애는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이다. 희망은 바로
뒤에 있지만 돌아보지 않기 때문에 찾지 못할 뿐이다
(닉 부이치치).
미사가 길다는 말에 좌절하는 귀여운 복사들.
주님이 우리 관심의 큰 축이 되어야 합니다.
어제 어느 본당에서 사순특강을 했습니다. 원래 저녁
시간을 이용한 특강을 부탁했지만, 제가 시간이 없어
오전 낮 미사 중 강론을 이용해서 사순특강을 하기로
했지요. 시간 맞춰서 제의방에 들어갔습니다. 복사들이
4명 있더군요. 다음은 저와 복사들의 대화입니다.
“오늘 강론시간 무척이나 긴데 괜찮니?”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곧바로 터져 나오는 말.
“왜 길어요?” “사순특강으로 강론을 하는 것이거든.”
“짧게 하면 안 돼요?” “안 되지. 특별히 사순절을
맞이해서 특강을 하는 것이니까.”
“그러면 한 20분 정도 하실 거죠?” “아니지. 특강이니까
1시간 정도는 해하지.”
“미사 포함해서요?” “아니. 미사 빼고 특강만…….”
복사들이 다 절망에 빠졌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앞이
캄캄한가 봅니다. 사실 특강 한 시간이면 정말로 짧은
것입니다. 보통 제게 3시간 정도를 부탁하거든요. 따라서
이번 특강은 무척 짧은 것인데, 이 복사들은 길어서
어떻게 하냐고 걱정에 빠진 것입니다.
미사와 특강을 마치고 어른들은 너무 짧았다고
이야기하시는데, 복사들은 너무 길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럴까요? 처음부터 듣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처음부터 관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길고 지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주님이 어떠합니까? 혹시 주님을 지루한 분, 내 관심
밖의 분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럴 경우, 성당
나가는 자체가 시간 낭비인 것처럼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시간이 되면 가겠다고 말하고, 조금이라도
이유가 되면 성당을 소홀히 하는 것이지요.
주님이 내 관심의 큰 축을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과
함께 하는 그 모든 일에 큰 기쁨과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열려도 그만, 안 열려도 그만
2013년 다해 2월21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마태오 7장 7-12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열려도 그만, 안 열려도 그만>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고 강조하시는 예수님께
하실 말씀 많은 분들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주실 것이다, 얻을 것이다, 열릴 것이다,
하시지만, 어디 현실이 그렇습니까? 아무리 청하고 찾고,
죽으라고 두드려도 안 되는데, 이것 어떻게 하실 겁니까?”
시대가 너무 냉혹해서 그런가요, 아니면 팍팍해서 그런가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방법이 없는 이웃들, 사방이 완전히
높은 벽으로 가로 막혀 그저 주저앉아 울고 있는 이웃들이
너무 많은 요즘입니다.
지금 이 시대, 너무나 안타까운 일 중에 하나가 착한 사람,
너그러운 사람, 남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살기 힘든 시대라는
것입니다.
하면 된다는 개발독재 체제 하에서, 어떻게 해서든 나부터
살고보자는 무한 경쟁체제 안에서, 극단적 줄 세우기 문화로
인해 얼마나 많은 선한, 평범한, 진국인 이웃들이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다양한 인간적 한계 앞에 서 계신 분들, 그 끔찍한 도전을
또 한 번 시작해야 하나 갈등하시는 분들, 삶의 막다른 골목
앞에서 고민하고 계시는 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말
하시는 예수님 아니시기에, 한 번 더 노력해보시기 바랍니다.
최대한 노력했다 여겨지더라도 한 걸음 뒤로 크게 물러서서
좀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이 어떤 것인지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두드릴 대로 두드렸다고 생각하는 분들,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더 두드려보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남아있는 알량한 자존심, 불필요한 수치심 모두 등
뒤로 멀리 내던지고 한 번 더 용감히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조금만 더 가면 그토록 우리가 학수고대했던 ‘열린
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 우리의 딱한 처지, 우리의 절박한
상태를 결코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실 분입니다.
주면 좋고 안 줘도 그만이고, 열리면 좋고 안 열려도 어쩔 수
없고가 아니라, 죽기 살기로, 혼신의 힘을 다해, 삶의 모든
것을 걸고 한번 청해보고, 찾고, 두드려보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청소년들이 달라지길 바라는 대로 어른들이
먼저
2013년 다해 2월21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청소년들이 달라지길 바라는 대로 어른들이 먼저
눈 감으면 코 베먹는다는 옛이야기 지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사기꾼 절도 강도 폭행 살인 뉴스를 볼
때마다 단골로 나오는 메뉴지요. 이젠 남을 보면 일단
의심부터 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입니다.
남은 물론 친척 심지어는 자식도 돈 앞에서는 믿을 수
없다는 거지요. 이런 사회를 만들어낸 것은 어린이나
청소년들이라는 생각 절대 안 듭니다. 깊이 살피고 마음
아파하고 뉘우쳐야 할 자들은 어른들임이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마태오 7,12)”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묵상 글 -
◈ [의정부] 아직도 달콤한 사탕만을 원하십니까?
본당에 있을 때 아이들한테 사탕과 초콜릿을 건네며 이런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사탕을 손에
꼭 쥐고 있을 때는 아무리 그것을 달라고 해도 쉽게 주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아이의 손에서
사탕을 순순히 받아낼 수 있을까? 그것은 아주 쉽습니다.
그 아이한테 더 좋은 것을 주며 사탕을 달라고 하면 그
사탕을 놓아버리고 더 좋은 것을 움켜쥡니다. 제가 실험을
해보니 맞더군요. 물론 영특하거나 욕심이 많은 아이들은
둘 다 갖습니다.(웃음)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주님께 달라고 청해도 주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정작 내 손에 아직 덜 중요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기준과
인간인 내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치도 치아가 썩은
자식에게 좋아하는 사탕을 주지 않는 부모의 마음과 같지
않을까요?
순간적으로 나한테 달콤함을 주는 사탕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이미
내가 청하는 것을 주님께서 주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 법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께 청할 것만 청할 수 있는 하루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두드리러 가야겠습니다. 그럼
언젠간 주님께서 부족한 우리한테도 믿음 · 희망 ·
사랑의 열매를 주시겠지요.
- 김경진 신부(의정부교구 대건까리따스 위원장) -
◈ [기타] 믿고 기도하는 이들에게(마태 7, 7-12)
2013년 다해 2월21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믿고 기도하는 이들에게(마태 7, 7-12)
크리스티나 성녀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를
통해서 다 죽어가는 어린이를 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소문이 퍼져서 나중에는 그 나라 왕비마저도
죽음의 질병에서 살아나게 됩니다.(주님의 거룩한
이름에 의한 놀라운 은총-가톨릭 출판사-)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는 굉장히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어느 시골 공소회장님은 만삭의 부인이
바다에 빠져 죽어가고 있었지만 헤엄을 칠 수 없기에
바위에 앉아 “예수 마리아여!” 만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합니다. 다행히 지나가던 배가 그 소리를 듣고 갈쿠리
장대를 휘저어 겨우 머리카락 몇 가닥에 걸린 부인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숨을 쉬지 않아 병원에 데려가면 늦을 것 같아
엎어 놓으시고 물을 뺀 다음 안방에 불을 지펴 따뜻하게
하여 몇 시간 동안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부인이 또 기적적으로 살아났는데 이제 배속의 아기가
움직이질 않아 또다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일주일 만에 다시 배속의 아기가 살아났고,
무사히 출산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공소회장님이 굿하는데 가면 굿이 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기도로서 치유되게 하여 하느님께 큰 영광을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이 회장님의
행적을 글로 남기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느 자매님의 딸이 임신을 했는데 양수가 터져 멈추지 않아
어떻게 하느냐고 말하였습니다. 병원에 가서 병자성사를
드리고 며칠은 괜찮았는데 다시 양수가 터져 또 오셨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도 힘들다고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간절히 기도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전에서 하루
종일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께 기도하라 말씀드렸습니다.
저도 미사 중에 함께 기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다행히 조산을 하여 생명이 태어났지만, 듣지를 못하여
또 슬퍼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희망을 갖고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는데 아기는 점점 건강해졌고 마침내 잘 듣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스테르 왕후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주님께 피신처를 구합니다. 간절한 에스테르의 기도는
하늘에 닿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입게 됩니다.
또 복음에서 예수님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삶에서 위기를 맞거나 혹은 꼭 기도해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조금 하다 말거나 혹은 대충 하는 것이
아니라 죽기 살기로 주님께 매달려야합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서든지 반드시 기도의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 믿고 기도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은총을
베풀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도 언제나 믿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주소서.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 [기타] 허윤석 신부의 오늘의 강론
제목: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2013년 다해 2월21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주님,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습니다.>
에스테르기 4,17(12).17(14)-17(16).17(23)-17(25)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분과 대화를 나눈다면 너무나
행복하고 그 자체로 기적의 시간입니다. 바로 그분은
하느님이며 그 시간은 바로 기도시간입니다.
오늘 에스텔은 기도합니다.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이 기도를 기도의 시작과 끝에 후렴처럼 반복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저와 당신 밖에 없는 외로운저는 너무나 다릅니다.
외로운 저는 당신밖에 없다는 신앙고백을 통해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백을 하기까지 오히려 외로움을 나를
당신께로 이끈 예언자입니다.
돌이켜 보면 인생은 외로움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당신밖에
없는 외로움은 다릅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당신이 나의
외로움을 모르실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 밖에 없는 외로운 저라는 고백은 정말 아름다운 고백이며
피조물의 겸손된 신앙고백입니다.
저는 사제로 고백합니다.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회복의 시간 Hora Recreationis
http://cafe.daum.net/credohur1004
- 허 윤석 신부님의 묵상 글 -
◈ [기타] 소나무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다해 2월21일 목요일 복음묵상
[하나]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마태오7,8)
... 지나간 시간을 뒤돌아볼 때, 부정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했을 때,
결과적으로 안 들어주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설마 그럴 리가?” 라며 반문하는 이도 있으리라. 물론, 나
역시 결과를 보고,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그분의 마음에
속이 상한 적이 많았다. 하지만 비록 내 예상과는 빗나간
결과였다 하더라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분께서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시려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그분께 청한다. 그리고 반응 없으신 그분께 실망하고
곧 포기를 하고 만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를 통해 무엇인가를 청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한다는 것이다. 내가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계획이 있으신데, 내가 청하는 내용이 나를 망치는
것인데 그것을 그대로 들어주실 리 없다. 따라서 우리의
청이 이루어지지 않는 듯 한 느낌이 들 때, 우선 나의 지향이,
나의 바람이 정말로 옳은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만
한다.
때로는 우리의 눈이 어두워져 옳지 않은 것이 옳게 보일
때도 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욕심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서 하느님께 따지듯이, 강요하듯이
기도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청해야 할 것,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좋은 길로 내가 걸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아시며, 내가 그 길로
가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바라신다는 것이다.
[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마태오7,12)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른다. 쉽게 말하면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상대방을 이해하라는 말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해본다.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
아니 인간이라면 모두가 타인에게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 표현이 가능하겠지만, 결국 나 아닌 타인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존중해주 것이 아닐까?
그래. 간단한 이야기다. 우리 인격이 파괴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고 우리의 인격이 더욱 가치 있게 커질
수 있는 방법은 서로 존중 받고 존중하는 관계 안에 사는
것이다.
유명한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씀이 있다.
그 깊은 뜻이야 말씀을 하신 그 스님만 알겠지만, 사람은
사람으로서, 물질은 물질로서, 자연은 자연으로서 존중 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왜 아프냐?”는 어리석은 질문이
아니라,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을 존중하고, 그 아픔을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이다.
모든 관계의 기본은 존중임을 다시 한 번 마음에 간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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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필요로 하는 그 여정을 당신보다
먼저 알고 계십니다.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기타] <거룩한내맡김영성> 내맡김의 영성과 新靈性
-이해욱신부
<후속> 21.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과 新靈性(뉴에이지)는
완죤히 X !
1) 제가 경험한 "ㅇㅇ도"
몸에 병이 들어 산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외국에서 교포사목을 하던 타교구의 친구
신부가 일시 귀국 후 위암을 진단받게 되어 그 교구의
다른 친구 신부와 오랜만에 함께 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나게 된 그 친구 신부는 저에게 "ㅇㅇ도가
건강에 좋으니 ㅇㅇ도를 배워보라."고 권유했다.
그 "ㅇㅇ도"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 하던 중, 약 2년 전,
제가 사는 마을에서 ㅇㅇ도 관계자들이 주최한
"ㅇㅇㅇ 자연건강학교"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참가 인원이 12명이었는데, 2~3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천주교 신자였다. 그것은 이 건강학교를 이곳에 유치하게
한 신자 분(재속회)이 20여 년 전부터 이 건강학교의 최고
책임자와 아주 잘 아는 사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2박 3일 동안 경험해본 결과, "아, 이것이 바로 요즘 우리
교회에서 조심시키는 '뉴에이지(신영성)'이구나!"라고
경험할 수 있었다.
그 ㅇㅇㅇ 자연건강학교의 총책임자 ㅇㅇㅇ선생은
"오랜 동안 계룡산에서 도를 닦아왔는데, 이제 때가 되어
자신의 가르침을 펼 때가 와서, 'ㅇㅇㅇ 자연건강학교'를
처음으로 이곳에 열게 되었다."고 했다.
"자, 다함께 명상을 하겠습니다. 모두 눈을 감으시고
파아란 하늘을 마음으로 그려보시길 바랍니다.
저 넓고 조용하고 편안한 하늘은 하느님의 품입니다.
하나님의 품입니다. 부처님의 품입니다... "
ㅇㅇㅇ선생과 또 다른 한 ㅇㅇㅇ선생은 천주교 신자란다.
그러면서, 강의 중 "명상"을 많이 강조하면서, "하느님,
하나님, 부처님"의 호칭을 매 번 동시에 사용하였고,
마지막 날에는 어느 목사님까지 대동했는데 그 목사님께
"목사님은 주일예배도 못 하시고 이곳에 오셨네요."하고
인사를 건네니, 목사님은 저에게 "저희는 모든 종교
(유,불,선)를 아우릅니다."며 그날이 주일임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신자라는 ㅇㅇㅇ선생과 미사나 예배 없이 다른
건강 프로그램 진행을 위해 그곳을 떠났다.
그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신자 분들과 그것을 유치했던
재속회원까지도 그것이 "뉴에이지"인 줄을 전혀 모른다.
"우리 프로그램에 자주 참여하시는 분들 중에 수녀님들이
많습니다."고 강조하던 선생 중의 한 사람은 나와의 대화
중 화가 나서 "교황은 xxx!"라고까지 폭언을 하기도
했는데 그 재속회원은 그 선생을 아들처럼 무척 아끼는가
하면, 그 선생 또한 천주교 신자처럼 다른 수녀님들과도
매우 친밀히 지낸다.
2) 신영성(뉴에이지)
우주에는 하나의 힘, 하나의 법칙이 있단다. 지구에
중력의 법칙이 있어 모든 물체가 땅으로 떨어지듯이,
우주에 "유인력"이 있고 그것의 지배를 받는단다.
유인력은 마치 자석과 같아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끌어올 수 있단다. "행복, 명예, 돈, 집, 여성, 남성...
등 모든 것을!"
모든 것에는 동일한 진동수(주파수)가 있어서, 원하는
것의 주파수에 자신의 주파수를 계속 맞추는 연습과
노력을 하면,마침내 그 주파수와 동일한 상태가 된단다.
그 주파수를 맞추는 도구가 바로 "생각"이며, 그 생각을
확실히 이미지화(시각화) 시키면 그것이 곧 현실화
된단다.
"생각"은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단다. "명상"을 통해
원하는 것을 자꾸 상상으로 그리면 생각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삶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단다.
생각을 집중시켜 창조를 이루기 위해서는 "항상 좋은
감정"을 가져야 한단다. 그래서 자신의 처지에 늘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 중요하며,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즐기며 기쁘게 임해야 한단다.
하여튼 인간은 무한한 힘을 지닌 신과 같은 존재이며,
스스로의 능력을 믿고 원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는
"창조자"이란다?
3)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
"신영성(뉴에이지)"은 하느님이 필요 없다. 이 세상의
원하는 모든 것을 얻으면 그것이 곧 "행복"이다.
스스로 기쁘고 즐겁게 사는 것이 삶의 목표이다.
"생각"이 곧 하느님이다. 자기가 생각을 집중하여 모든
것을 스스로 하기만 하면 된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뜻대로 사는 삶"이다. 인간이 중심이 되는
삶이다.
"인간의 능력"을 중심으로, 아니 믿음으로 사는 삶!
그것은 "교만의 극치"이다. 교만의 끝은 멸망뿐이다.
구약성경의 "바벨탑 사건"이 그것을 잘 증명해 준다.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하느님 중심적인 삶(영성)
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느님을 기쁘고 즐겁게 해
드리는 삶일까?"가 삶의 목표이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기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겨 드리면, 나의 뜻이 하느님의
것이 되어 주님께서 나의 모든 삶을 이끌어 주신다.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 2,20)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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