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2월28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청주] 천국에 대한 희망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예레 17, 5 - 10
† 복음 : 루카 16, 19 - 31
★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 반면 주님께 의지하는
이는 물가에 심긴 나무처럼 무더위가 닥쳐와도 그 잎이 푸르고,
가물 때에도 줄곧 열매를 맺는다(제1독서).
★ 부자와 라자로의 삶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 세상에서
부자는 온갖 좋은 것을 누리는 반면, 라자로는 굶주림과
아픔으로 고통 받았다. 그러나 죽어서는 이 모든 것이
달라졌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부자와 라자로는 이 세상의 삶이 끝난 다음에
정반대의 삶을 맞이합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 곁에서 위로를
받고 있었지만, 부자는 물 한 방울이 아쉬운 곳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오늘 복음의 주제로 ‘회개’를 꼽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부자는 무엇을 회개해야 했던 것일까요?
사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의 불법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소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가 부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다는 구절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자기가 지닌 재력으로 권세를 부렸다는 모습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오늘 복음에서 회개하지 않은
자로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이겠습니까?
오늘 부자가 회개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웃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거지 라자로가 자기 집 대문 앞에서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는
것을 그가 보지 못했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면서도 라자로가 죽기까지 전혀 눈길 한번 주지
않았습니다. 그의 고통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조금이라도 라자로에게 관심을 기울였다면, 라자로가
그렇게 길바닥에서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한 여인이 세상의 온갖 전쟁과 가난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하느님께 항의하였습니다. “왜 당신은 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가요?”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널 보내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가거나 고통 받고 있는 것을
두고 하느님께 그 책임을 묻는 것은 비겁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의 일부, 아주 조금씩만 나누어도 세상의 아픔을
덜 수 있습니다.
-매일 미사 -
◈ [청주] 천국에 대한 희망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2월28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 16,19-31
천국에 대한 희망
천국에 대한 희망은 어떠한 시련의 십자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부와 가난을 견주어 ‘복이 있는 사람’,
복이 없는 사람, 혹은 ‘팔자가 좋은 사람,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은 그 생각을 바꾸도록
안내합니다. 부자는 잠시 동안 호화로운 삶을 즐기다가 영원한
고통을 안게 되었고 반면 라자로는 잠시 동안 고통스런 삶을
살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특별히 어떤 잘못을 범했다거나 선행을 하여서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그렇게 살다 보니까 한
사람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한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하느님께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은 이렇게 다릅니다. 부라는
것이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을 멀리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마르10,25).
잠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분명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혹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에 겨워 이웃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 너무 힘들어 절망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나만 생각하고 살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관심이 죄입니다.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누구의 가르침도 들리지 않습니다. 결국 그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합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6).
지금 힘든 이들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그리고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요한12,24).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10,22). 그러므로 시련을 만나게
될 때 하늘을 바라보며 신뢰를 다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의 여정 안에서 시련도 유혹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유익한
것입니다.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됩니다”(집회2,5). 예기치 않은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깨어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한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고 천국을
장담할 수 없는 만큼 지금 여기서 주님마음에 들게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앵무새를 키우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습니다.
앵무새도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고
따라했습니다.
젊은이는 살기가 너무 힘들어 신부님을 찾아 상담하기로
작정하고 앵무새를 안고 사제관으로 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사제관에도 앵무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젊은이의 앵무새가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사제관의 앵무새가 답례를
하였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지치고 힘들 때 “내 힘들다!”고 낙심하지 말고,
거꾸로 “다들 힘내!”라고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메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확증은 믿음 뒤에 주신다.
22013년 다해 2월28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복음 : 루카 16,19-31
제가 25세 되던 해에 마음 안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낄 때,
저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싫어서 무척이나 고민을 하였습니다.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더 컸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할 때
만약 저를 부르시는 것이라면, 저를 불러주셨다는 ‘표징’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확실한 표징을 주지 않으시면서
저를 괴롭히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성당에 올라갔을 때 성모님이 사람처럼
변하셔서 제 앞에 서 계셨습니다. 술을 마시기는 하였지만,
석고 성모상이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마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참을 무서워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있다가 다시
쳐다보니 성모님은 여전히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또
고개를 숙이고 한참 있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이제는
성모상이 본래대로 석고상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너무
두려워 가슴이 뛰면서도 이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술을 많이 마셔 헛것을 본 거다.’
물론 그 전이나 이후에도 아무리 술을 마시고 성모상을
쳐다보아도 그 때처럼 성모님이 살아있는 분으로 보인 적은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믿기를 원치 않았을 뿐입니다. 믿어서
사제가 되어 결혼을 못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오랜 고민 끝에 한 번 믿어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느님은 행복이라는 것으로 저를 태어날 때부터
부르시고 계셨다는 확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저의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이 계시다는 보증이
되어감을 느꼈습니다.
바르톨로메오는 무화과나무에 앉아있는 것을 예수님이
보았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예수님은 앞으로
하늘이 열리고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도 보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증거가 있어야만 믿음을 가지겠다는
말이 틀렸음을 말해줍니다. 믿어야 증거가 주어집니다.
결국 믿음도 선택이고 결심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싶었기 때문에 어떠한 표징이 나타나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안 믿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이미 안 믿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에, 그 결심을 바꾸기 전까지는 어떠한
표징을 보여주더라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이 세상에서 좋은
것들만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라자로가 천국으로
간 이유는 나쁜 것들만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둘의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이라고 여겨지는 명예, 재물, 쾌락을 선택했지만, 라자로는
가난과 만족을 택했습니다. 라자로는 하느님이 없기를
원했습니다. 이 세상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라자로는 가진
것이 없었기에 하느님이 있기를 원했습니다. 내세에서라도
위로를 받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것이 결심이
되고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부자는 라자로를 다시 살게 해서 자신의 형제들이
지옥에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와 예언자들을
믿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여전히 영혼이 있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증거를 대보라고 합니다. 물론 우리 주위에는 영혼을
보았다는 이야기나 죽었다가 살아나서 증언을 하는
이야기들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저도 직접 군대 가서
귀신과 대화를 하였다는 사람과 통화를 했고, 그 귀신이
입고 있던 군복의 이름을 대니 몇 년 전에 그 부대에서
자살한 병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과달루페 성모님이나 란치아노의 성체성혈 기적과
같은 것들은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 믿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선택이고
결심이기 때문입니다. 안 믿기로 결심했기에 어떠한 증거도
믿음의 확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믿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완전하게 증명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 증명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둘 다 증명되지 않는다면 신중해야 할 텐데 증명되지 않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약 강을 건너야 하는데 그 안에 악어가 살 확률이 50%라면
누가 증명되지 않았다고 해서 악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며 건너가겠습니까? 아마 1%의 확률만 있어도
함부로 건너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이것도 저것도
증명되지 않는 상황에서 무조건 없다고 믿어버리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결정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일단 안 믿기로 결심을 했다면 그것을 꺾을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그 결심이 어리석다는 것만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선택이든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부자처럼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그것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은
우선, 자신들에게 증거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이
세상을 선택하고 있어서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제 말씀드렸던 김희아씨를 생각해봅시다. 세상에서는
김희아씨가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평보다는 끊임없이 감사를 선택했기에 지금의 김희아씨와
그 가족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만약 그 마음까지도
불평불만으로 살았더라면 세상의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김희아씨가 자신에게 온 모든 불행들이 자신에게
어울리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 믿으려 했던 것은
결국 어떤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결심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까 그 믿음이 결국 감사하는 삶이 가져다주는
행복이 있음을 알고 자녀들에게도 감사한 삶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믿으려고 하면 그 때부터 증거를 주십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나의 선택과 결심으로 시작되는 것이지 표징이나 증거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가
믿음인 것이지, 믿음을 위해 증거를 요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벌써 2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요즘 사순시기라서 또 봄을 맞이해서 이곳저곳에서 특강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 특강을 하느라 매우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요. 어제 역시 하루 종일 강의를 했는데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사람들이 내 강의를 듣고서 그 내용을 실천할까?’
강의를 들으시면서 공감의 고갯짓을 많이 해주십니다.
또 지루할 수도 있는 제 강의를 잘 경청하시는 모습도
보여주시지요.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강의를 잘 들으시는데
얼마나 제 강의 내용을 삶 안에서 실천하고 계실까요?
독일의 한 심리학자가 발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배운 것을
실행에 옮지 않는 사람이 무려 95%나 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렇게 실행에 옮기지 않기 때문에 성공할 확률은
5%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배우고 나서 그대로
방치해 두면 기억은 1시간 만에 56%를 잊어버린다고 하지요.
그리고 하루가 지나면 74%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망각에서 벗어나고자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끊임없는 반복과 꾸준한 실천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또한 무엇을 전하기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하셨습니까?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사랑. 이 사랑 때문에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이 사랑을 기억하고 내 삶 안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었을까요? 죽음까지도 불사한 주님의
사랑을 잊어버리는 망각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사는 방법은 주님의 사랑을 삶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하고 꾸준히 실천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냥 때가 되면 저절로 사랑이 실천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적극적인 의지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가 왜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을까요? 사실 그는 그렇게 악한 사람 같지 않습니다.
자신이 고통 속에 있다고 구해달라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 형제들이 이곳에 오지 않을 수 있도록 라자로를
형제들에게 보내달라고 말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그런데도 그가 불붙는 지옥 속에서 고통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많은 것들을 누리면서도 정작 이웃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바로 옆에 가난한 이웃들을 외면한
채 자신의 호화로움만을 즐긴다면 죄가 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벌써 2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2013년이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두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시간이 빠르다고 시간 탓만 하지 말고, 더
이상 후회를 만들지 않기 위해 더욱 더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평탄한 길에서도 넘어지는 수가 있다. 인간의 운명은 그런
것이다. 신 이외의 누구도 진실을 아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체호프)
어제 저녁 강의를 했던 마두동성당입니다.
87세 美 할머니 장례식에 대학생 2천명이 몰린 까닭은?
어제 인터넷에서 감동적인 글을 하나 보았습니다.
“‘로즈’라는 87세 여대생을 소개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된 것입니다. 저 혼자 보기가
아까워서 이곳에, 이 할머니께서 풋볼경기 파티에서
하셨던 연설 일부를 공유합니다.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반성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늙었다고 해서 놀기를 멈추게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놀기를 멈추기 때문에 늙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언제나 젊게 살고, 행복하고, 성공을 하는 비밀은
단 4가지입니다. 언제나 웃고, 매일같이 세상을 재미있게
사세요. 그리고 자신만의 꿈을 가져야 합니다. 꿈을 잃는다면,
그건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은 체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은
그런 사실조차 모르지요!
나이를 먹는다는 것과, 성숙한다는 것에는 정말로 큰 차이가
있답니다. 가령 당신이 지금 19살인데, 아무런 생산적인
활동도 안 하고 가만히 침대에 일 년간 누워있으면 당신은
20살이 되지요. 똑같이 내가 87살이고, 역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일 년간 누워만 있어도 88살이 됩니다. 말하고자
하는 건, 나이를 먹는 건 우리의 선택이 아니란 겁니다. 모든
사람이 나이가 들 수는 있지만, 그건 아무런 노력이나 능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비밀은, 언제나 변화 속에서
기회를 찾음으로서 성숙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후회를 남기지 마세요. 우리와 같은 늙은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가 ‘저지른’ 것들에 대한 후회보다는 ‘안 해본 것’들에
대한 후회가 남는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유일한 사람들은
후회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시간이 흘러 자신이 갈망했던 대학 졸업장을 갖게 되었으며,
졸업 후 일주일 뒤 ‘로즈’ 할머니께서는 평화롭게 자는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장례식 때 자그마치 2,000명이
넘는 대학교 학생들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이 글의 작성자는
이렇게 참석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하기에 너무 늦은 시간이란 없다'는
메시지를 본인의 삶을 통해 직접 보여준 이 멋진 여성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기억하세요. 나이를 먹는 것은 무조건적이지만, 성숙한다는
것은 선택적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돈이 아니라 신앙으로 드는 보험
보험 들을 때는 아깝지만 정작 사고 나면 큰 도움 정말
고맙지요. 자동차 보험은 당연히 들어야 하는 것으로 이미
상식화 되었습니다. 이젠 암보험 생명보험 장례보험 등 온갖
것들이 점점 퍼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러 보험 중 돈 절약하며 몇 개만 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장례보험을 넘어 영원보험은 사실 누구나 다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죽음 이후는 돈이 아니라 신앙으로
드는 보험이라는 것 명심해야지요.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루카 16,25)”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의 묵상 글 -
◈ [의정부] 무관심이 가장 큰 죄
오늘 복음은 세상의 물질을 즐기느라 가난한 사람을 돌보지 않는
이가 맞는 최후를 보여줍니다. 그 기준은 바로 선행의 실천 여부에
있다는 것을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그가 악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라자로를 충분히 도와줄 수 있었는데 모른 척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관심이 그의 죄였습니다. 무관심은
이처럼 우리를 가장 큰 죄악으로, 영적인 살인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인간의 삶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마지막 순간을 망각하고 산다면, 우리 또한
또다시 찾아오는 제2의 라자로를 외면하게 될 것입니다. 나눌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삶은 하느님 대전에서 반드시 갚아야 할 빚을
남긴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은 바로 이웃에게 베풀어야 할 하느님의 선물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눔이란 누군가에게 끝없는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언가를 누구에게 줄 때면 언제나 계산하지 않고
무상으로 주셨습니다. 가진 것을 나누지 않고는 못 견디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평소 누군가를 애정을 갖고 돌보지 못해 자책하고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있는가 봅니다.
저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오늘 저는 주고 또 주면서 저절로
익어가는 벼 이삭을 닮아보기를 주님께 청해 봅니다. 가난으로
신음하는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게 해달라고 청해 봅니다.
- 김경진 신부(의정부교구 대건까리따스 위원장) -
◈ [기타] <거룩한내맡김영성>내맡김은 빼앗김이다?
-이해욱신부
<斷想> 4. 내맡김은 빼앗김이다?
저를 찾아오시는 분들 중에는 가끔,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에
대한 저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의 부담을 크게 갖게 되는 분이
계시는 모양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삶을 살라고 하면, 자신이
가진 재산을 다 기증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혹은,
이 세상에서의 모든 인간적 재미를 다 끊으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마치 수도자처럼 늘 엄숙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빼앗긴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와는 전혀 반대입니다.
내맡김은 "빼앗김"이나 "잃음"이 아니라 "얻음"입니다.
한 번의 맡김으로 영원을 얻게 되는 것, "영원한 얻음"입니다.
하느님께 내맡기게 되면,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달리 나타나지만
오히려 열배, 백배의 재물의 축복을 받을 수도 있으며, 좋은
사람들을 선물로 주시며, 좋은 일들, 좋은 자리, 좋은 건강 등
많은 좋은 것들을 통하여 복을 가득히 받고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적인 재미를 빼앗아가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에 대한 개념"과 "인간에 대한 개념"은 서로 대치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치되는 개념입니다.
인간에 대해 충실할수록 하느님과 가까워지게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인간적일수록 하느님적(的)이 됩니다.
부부는 더욱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부부관계도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으로 그리고 육적으로도 더욱 일치하게 되며,
육적 일치의 환희 속에 하느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일방이 아니라 쌍방의 환희를 위하여
서로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게 됩니다.
성인들께서도 하느님과의 일치 속에 환희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환희의 나라"입니다. 꺼지지 않는
영원한 환희입니다.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들은 잠시 찰나의 환희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사랑 속에 매일 매순간의 환희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옛 성인들께서 잠시의 환희를 맛보셨지만 내맡긴 영혼은 매일의
환희를 맛봅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 사랑의 최고의 위 단계가 바로 하느님과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과의 사랑을 얻으려면 반드시 인간적 사랑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적(的)이 아닌 것 외에 모든 것을 기쁘게 즐기십시오.
이 세상을 기쁘고 즐겁게 죽도록 즐기십시오. 하느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모든 것 속에는 하느님이 자리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 내맡기시게 되면, 하느님이 기뻐하실
일들만 하게 됩니다. 이 세상을 기쁘고 즐겁게 즐기기
위해서라도 하느님께 내맡기시길 바랍니다.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 [기타] 사순 제2주간 목요일
2013년 다해 2월28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용문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많이 있습니다. 자동차를
이용하는 길, 기차를 이용하는 길, 버스를 이용하는
길입니다. 용문은 서울보다는 동쪽에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서쪽을 향해서 가야합니다.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해도 동쪽으로 간다면 서울과는 더욱 멀어지게 됩니다.
묵주기도를 해도, 묵상을 해도,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의 신심행위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이정표를 바라보아야만 비로소 빛을 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자동차를 타고 왔지만 다음 기도 모임에는 기차를 타고 오려고
합니다.
지난번 복음화 학교 공동체와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성지순례에도 여러 방식이 있습니다. 여행객처럼 먹고 놀다
오는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이는 무늬만 성지순례이지 실상은
관광입니다. 안내원에게 성지에 대한 소개를 받기는 하지만
묵상도 없고, 나눔도 없는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이는 반은
성지순례이지만 온전한 성지순례가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성지에서는 성서를 읽고, 온전한
마음으로 묵상을 하고, 십자가의 길 기도와 묵주기도를 바치고,
회개와 통회의 눈물을 흘리는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나눔을
통해서 서로를 위해 격려하고, 공동체의 친교를 나누는
순례입니다. 매일 매일이 기쁨이고, 행복한 순례입니다.
우리 복음화 학교에서 가는 성지순례는 품격이 있고, 묵상이
있고, 기도가 있고, 매일 미사가 있는 성지순례였습니다.
예루살렘의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의 길을 봉헌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골고타 언덕을 오를 때 시장구경을 하고,
잡담을 하고, 웃으며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십자가를 지려고 하였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골고타
언덕을 올랐습니다. 저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서 복음화
학교의 성지순례가 참으로 의미 있고, 주님과 함께하는 순례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공동체의 가족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성당의 출입구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희망합니다. 만일 당신이 여행객으로
이곳에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돌아가십시오. 만일 당신이
순례자로 이곳에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셔서 돌아가십시오.”
참으로 의미 있는 말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성지순례를 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는 글 이었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을 향해서 가면 안 된다고 말을 합니다. 그곳은
화려해 보이고, 멋져 보이지만 결국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마치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아서 생기가 있고, 많은 열매를 맺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오늘의 복음은 부자와
라자로를 통해서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자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열심히 일했고, 돈도 벌었고, 좋은 집도 장만했습니다.
하지만 부자의 방향은 세상에 있었습니다. 만일 부자의 방향이
하느님을 향한 것이었다면 눈앞에 보이는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아픈 사람, 헐벗은 사람을 향해서 손을 내밀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했다면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시작할 수 있었고,
죽어서도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라자로는 열심히 살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성실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며 원망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라자로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표징은
보여주었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가난한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너희 중에 가장 헐벗은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너희 중에 가장 굶주린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너희 중에 가장 병든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거북이가 느리다고 해도,
달팽이가 느리다고 해도 방향이 올바르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달 할 것입니다. 하지만 치타가 빠르다고 해도, 사자가 용맹하다
해도, 독수리가 하늘 높이 날아도 방향이 올바르지 못하면 결코
목적지에는 도착할 수 없습니다.
예전에 들었던 성가를 기억합니다.
“님이 나를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니지만
님이 나를 부르시니 기뻐 따르오리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니 당신이 몸소 하소서
나를 보내시는 뜻이 이루어지소서
님이 나를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니지만
님이 나를 부르시니 기뻐 따르오리다
주여 나를 보내소서 나를 보내 주옵소서
주여 내게 말씀하소서 말씀 전하오리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니 당신이 몸소 하소서
나를 보내시는 뜻이 이루어지소서
주여나를 보내소서 나를 보내 주옵소서
주여 내게 말씀하소서 그말씀 전하오리다
- 조 재형 -
◈ [수도회] 이 고통을 넘어서면
2013년 다해 2월28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 루카16,19-31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이 고통을 넘어서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에 등장하는 거지 라자로의 불행은
정말이지 비참하다 못해 혹독했습니다. 온 몸은 종기
투성이었습니다. 그의 주된 일상은 매일 가려운 피부를 박박
긁어대는 것이었습니다. 긁느라고 기운이 다 빠질 정도였습니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저도 피부가 많이 약한 편입니다. 평생
이런저런 피부병에 시달려봐서 라자로의 고초가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옵니다.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의 고통, 겪어본 사람만 잘
압니다. 수시로 몰려오는 가려움증, 어떤 때는 공개석상에서
체면상 마음 놓고 긁지도 못할 때의 고통은 더 큽니다. 시원하게
한번 긁고 나면 끝이 아닙니다.
긁은 자리에는 즉시 상처가 생기고 염증이 심해지고...한번은
밤에 본인도 모르게 완전 박박 긁어대 문제가 커졌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밤에는 예방차원에서 두 손을 꽁꽁 묶고 자기도 했습니다.
라자로의 피부병은 얼마나 중증이던지 종기가 온몸을 덮었습니다.
긁고 치료하느라 가산 다 탕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라자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것을 봤을 때 제대로 된 복합 중증
장애우였습니다.
당시 유다 상류층 사람들 사이에서는 손으로 음식을 먹고 손에
묻은 자국을 빵으로 닦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라자로는 식탁
밑에 대기하고 있다가 부자가 사용하고 난 휴지 던지듯이 사용하고
난 빵조각을 휙 던지면 기다렸다는 듯이 주워 먹었습니다.
그의 옆에는 몰려온 개들도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떨어진
빵 주워 먹는 것도 개들과 경쟁을 해야 했습니다. 개들조차
라자로를 무시하며 그의 종기를 마음 놓고 핥았습니다. 그는
개와 동급, 아니 개만도 못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불행하고 비참한 인생이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한 인간 존재를
실감나게 설명하시려고 라자로라는 가상인물을 설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상에서 가장 불행했던 라자로였는데, 천상에서는
가장 행복한 얼굴로 변화됩니다. 지상에서 한 60년 잠시
불행했던 라자로는 이제 불행 끝 행복 시작입니다.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얼굴로 아브라함의 품에 편안히 안겨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천년 만년 아니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상에서 한 60년 잠시나마 행복에 겨웠던 부자는
이제 행복 끝 불행 시작입니다. 지옥의 타는 불길 속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
속에서 천년 만년 영원히 고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릇된 인생관, 왜곡된 고통관, 어처구니없는 내세관을
지니고 있었던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는
준엄하기만 합니다.
바리사이들의 사고방식은 예수님의 사고방식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지상에서의 비참을 하느님의 저주로
봤습니다. 지상에서의 가난은 하느님의 경고로 생각했습니다.
누군가가 지상에서 쌩고생하면 하느님의 벌을 받았다고
여겼습니다.
반대로 지상에서의 복락은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화만사성, 만사형통, 승승장구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편의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라자로와 부자의 비유는 하느님의 판단이 우리 인간의 판단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의 장막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세상이 막을 올리면 전혀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이 펼쳐질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여러 차례
강조하셨던 바입니다. 그날이 오면 첫째가 꼴찌가 될 것입니다.
반대로 꼴찌가 첫째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속적인 겸손입니다. 내 손에
들어있다고 다 내 것이 아니기에 남는 바를 나누는 정신도
중요합니다. 극단적 자기중심주의에서도 벗어나야겠지요. 오늘
내 처지에서 하느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 지상생활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머지않아
다가올 또 다른 세상에도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현실의 고통, 분명히 의미와 가치가 있음을 알고 그것을 찾아
나가는 노력도 중요합니다. 끔찍한 고통의 한 가운데를 걸어가면서
반드시 이 고통에는 끝이 있음을, 이 고통을 넘어서면 하느님
아버지의 충만하고 따뜻한 위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굳게
믿는 일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기타] 거룩한 은총의 사순시기에
2013년 다해 2월28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루카 16, 19-31)
거룩한 은총의 사순시기에(루카 16, 19-31)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듣습니다.
부자는 하느님을 믿기는 하지만 마음에 하느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에 라자로의 고통을 마음으로 느끼지도 못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지도 못합니다.
라자로는 죽어서 천사가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고, 부자는
죽어서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지내게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부자는 간절하게 도움을 청하지만 둘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현대 신학은 하느님의 자비, 사랑에 대하여 많이 강조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조는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의
자비로운 마음이 되어야하고 하느님의 사랑의 마음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는 말씀처럼 거룩함에로 초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죄를 범해도 다 용서해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언젠가는 반듯이 책임을 져야하고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합니다.
지옥이 없다거나 연옥이 없다거나, 혹은 사랑의 하느님이
우리를 지옥으로 보내시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비오 성인은 이미 1950-1960년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눈송이 떨어지듯 지옥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한탄을
하셨습니다.
부자는 라자로를 자기 아버지 집으로 보내어 형제들에게
경고해주기를 청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말합니다. 부자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라고 말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실재로 하느님께서는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구세주의 어머니
마리아를 세상에 30년이 넘게 매일같이 파견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늘의 어머니께서 세상에 오셔서
말씀하셔도 사람들은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많다는 말씀처럼 지금까지 인류역사상
이토록 자주, 이토록 오랫동안, 이토록 여러 사람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전해주신 적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서 눈물로 호소합니다.
이 거룩한 은총의 사순시기에 겉옷만 찢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심장을 찢는 회개의 은총을 구합시다. 아멘.
◈ [기타] 혼자 조용히 머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2013년 다해 2월28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롸하는
이는 복디다.>
(예레미야서 17장 5~10절)
아는 신부님께 진돗개 한 마리를 선물 받았습니다. 2개월이
조금 넘은 강아지인데, 밖에 내놓기가 조금 걱정이 되어서
한 일주일 집에서 키웠는데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번거로운 거 같습니다. 처음에 소변을 가리지 못해 여기저기
오줌과 똥을 싸놓고, 털 날리고, 물어뜯고, 기도하거나 책
읽으려고 방에 들어가서 문 닫아놓고 있으면 놀아달라고
방문 긁고, 밤에 잘 때 낯선 장소라 낑낑대고 늑대울음 소리
비슷한 걸 내서 잠도 못 잤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적응하느라 고생을 좀 했는데요. 제 얼굴에 고생의 흔적이
보였는지 한 신자분이 ‘신부님 굉장히 피곤해 보이시네요..’
하시더라고요. 그 날이 새벽 3시에 일어난 세 번째
날이었거든요. 잠을 못 자서 나도 모르게 눈이 반쯤 감겨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어제 드디어 분가를 했습니다. 예약한 돼지 세 마리가
온다고 해서 형제님들과 옛날에 쓰던 공소를 정리했습니다.
왕겨도 한 50포대 깔고, 먹이통도 자동으로 만들었는데요.
제가 보기에 거의 동물 호텔 수준인 거 같습니다. 돼지들을
풀어 놓으니까 막 뛰어 놀더라고요.
그걸 보고 문득 ‘여기에 강아지를 풀어놔도 서로 잘 지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강아지를 가져와 봤습니다. 우리 안에
풀어놨는데요. 낯선 동물에게 기가 죽었는지 살살
피해다니더라고요. ‘그래도 있어봐라..’ 하고 놔 뒀다가 저녁에
다시 가 봤는데요. 그냥 어울려 지내고 있었습니다. 돼지
무리가 자고 있는데 옆에서 자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오늘 오전에 사료를 주러 가봤는데요. 개를 좀
묶어놔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가 돼지에게 장난을
치는 건지 공격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먹이통 근처에 못
가게 하더라고요. 그래서 묶어놓고 사료를 주고 나서 방으로
돌아왔는데요.
강아지에게 변화가 한 가지 느껴집니다. 뭐냐면 보통 집에서
키울 때는 제가 어디를 갈 때 문 앞에서 낑낑 대고, 따라가려고
난리를 칩니다. 제가 문 닫고 책 읽을 때도 마찬가지로 상당히
낑낑 대는데요. 우리에 갔다놓은 뒤로는 그게 없어졌습니다.
돼지들과 어울려 노는게 재미있는지, 아니면 그 안에 강아지가
놀만한 것들이 상당히 있어서인지 저에게 별 관심이 없습니다.
처음 들어갔을 때 한 번 달려왔다가 다시 돼지에게로 가거나
자기 할 일을 합니다. 그 모습이 약간 서운하더라고요.^^; ‘놀게
많아졌다고 주인을 찾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어떤 때보면 우리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놀아야 할 거, 먹어야 할 거, 해야 할 일들, 만나야 할
사람으로 분주해져서 어느 순간부터 주인을 찾지 않고 주인을
향한 기도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독서
서두에 나오는 말씀과 같은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떠나버린 그 마음을 다시 주님께 돌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혼자만의 시간인 거 같습니다. 조용히 혼자 침묵할 수 있는
시간,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야 다시 주님께 얼굴을
돌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읽은 책에 이런 글이
인용되어 있었습니다.
“흔히들 사막을 끝없이 이어지는 수평의 연속으로 생각하지만,
그곳에는 수직으로 상승하는 것들이 있다.”
혼자 조용히 머무는 그 시간이 나를 수직으로, 곧 주님께 들어
올려 준다는 겁니다. 그 일이 조금씩 나를 독서 중간에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주리라 생각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고요한 시간을 마련하여 기도하는 것은 ‘내 힘으로 안
됩니다.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는 것을 깨닫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기도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마련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자세 교정해 주는 신자분이 계신데, 예전에 본당 신부님도 교정을
해 주신 거 같다. 그 과정 중에 엉덩이를 발로 차는 것이 있는데,
치료 후에 다른 신자분에게 이런 농담을 하신 거 같다.
“나 주임 신부님 발로 찬 사람이야~”
- 밤송이 신부님의 묵상 글 -
◈ [기타] 허윤석신부의 강론
제목 :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
2013년 다해 2월28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롸하는
이는 복디다.>
예레 17,5-10
어떤 신자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부님 우리 신자들이 모두 신앙인인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저부터!”
내가 누구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는 것과 신뢰를 전적으로
그곳에 두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차이가 있냐고요?
내가 신뢰하는 것이 그저 힘들 때 의지하고 싶은 대상에서
넘어서서 내가 유혹과 고통을 당할 때 진정 나를 지켜준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신뢰는 신뢰 받는 사람에게는 기회입니다. 신뢰를 주는 사람에게
응답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기회를 늘 갖기를 원하십니다. 신뢰를 하는
우리의 입장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받는 하느님의 입장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분이 믿을만한 분인가?라는 질문보다 그분은
나에게 어떤 분이셨는가를 기억해 보십시오!
회복의 시간 Hora Recreationis
http://cafe.daum.net/credohur1004
- 허윤석 신부님의 묵상 글 -
◈ [기타]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
“이 삶 안에서 우리의 첫 번째 목적은 타인들을 돕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적어도 그들에게 상처는 주지
말아라.” (달라이 라마)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다해 2월28일 목요일 복음묵상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루카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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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가 복음으로 읽혀진다.
화려한 삶, 즉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던 부자가 지옥으로 간
후, 아브라함에게 때늦은 부탁을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는
내용과, 그 부자의 집 문간 앞에서 부스럼투성이로 누워
구걸을 하며 연명하다가 천국에 간 라자로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세 가지의 메시지를 떠올려보자.
첫 번째, 지옥으로 간 부자는 온갖 호사를 누렸기에 지옥을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힘들어하는 이를 모르는 척하며 그냥
지나칠 수 없음이 인지상정이다. 만약 우리가 힘들어하는
이를 보면서 별다른 마음의 움직임이 없다면 그것은 자신이
병든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무관심이란 관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음을
뜻한다. 어떻게 자신의 대문 앞에서 종기투성이로 누워
걸식을 하고 있는 이를 외면하면서 편안하게 밥이 넘어갈
수 있는가? 차라리 불편해서라도 다른 곳으로 내쫓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소개된
부자는 오히려 라자로가 자기 때문에 살 수 있었다고 말한다.
사실 이러한 병든 마음을 가지고 있는 소위 ‘가진 자’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개들마저 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다” (루카16,21)고 라자로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우리 말 표현에 ‘개만도 못하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강아지들과 늘 함께 살아왔다.
그래서 강아지들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자신한다.
개가 핥는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애정을 표현하고나 새끼를
닦아주거나 상처가 난 부위를 소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자로의 종기를 핥아주려 했던
개들도 라자로가 처한 가련한 상황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인간들, 그 인간들은
그 반대의 짓거리들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고 있다. 우리
역시 모르는 가운데 부자가 보여준 무관심과 방관이라는
병에 걸려 있을 지도 모른다. 생각해 볼 일이다.
두 번째, 우리가 그분의 세계로 들어가느냐 마느냐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만 주어지는 기회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기회를 살고 있다.
잘 살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엉터리로 망가뜨릴 수 있는 기회.
이 기회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지, 아니면 ‘영원한 죽음’으로 떨어질 지가 갈리고 만다.
명심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는 이 삶으로 끝난다는
것을.
세 번째는 세상의 욕망에 사로잡힌 이는 옳은 것이 눈앞에
있어도, 그 옳은 것에 귀를 기울이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돈이 많다는 것이 죄가 아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
이라 했다. 욕심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하지만 그 욕심은 대체로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마음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여유를 잃게 하기 때문이다.
욕망 때문에 진실을 못 보는 것이 죄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행복을 위해 애쓰고 있는 것들에 대해 자주
살펴보아야 한다. 정말 자신의 영혼에 도움이 되는 것을
얻으려는 삶인지, 아니면 영혼을 파멸시키고 마는 것을 위해
모든 시간과 힘을 쏟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고 말이다. 이
세상이 전부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지만 우리가 다음
세상을 무시할 수 없다면 이 삶을 옳게 살아내야만 한다.
사람답게 사느냐는 결국 우리 각자에게 달린 몫이다...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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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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