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3월3일 사순 제3주일
[청주] 심보를 바꾸는 것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탈출 3, 1 - 8ㄱㄷ. 13 - 15
† 독서 : 1코린 10, 1 - 6. 10 - 12
† 복음 : 루카 13, 1 - 9
오늘은 사순 제3주일입니다. 농부이신 하느님께서는 포도밭인
우리에게서 신앙의 열매가 맺어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악의 유혹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 스스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비와 자양분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삶의 태도를 새롭게 고쳐 나가기로 다짐합시다.
★ 하느님께서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을
통해 모세를 부르신다. 당신 백성이 이집트에서 겪게 된 억압과
울부짖는 소리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을 해방시키시고자
모세를 쓰시는 것이다(제1독서).
★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 아래에서 홍해를 건너 파라오의 손에서
벗어났으나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광야에서 불평을 터뜨렸다.
그리스도인은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악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지만, 이스라엘 백성처럼 악을 탐내며 불평불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제2독서).
★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주인의 손에 잘려 버려진다. 이처럼
회개하지 않는 이들 또한 하느님의 손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러나 주님께서는 심판을 서두르지 않으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며
끝까지 참고 기다리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삼 년이
지나도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장 자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바로 이때 포도
재배인이 주인에게 한 해 더 기회를 주자고 합니다.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자기가 ‘나무의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다.’
고 합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음의 두 가지
일을 하실 것입니다.
첫 번째로 삶의 둘레를 파실 것입니다. 우리 삶의 주변으로
홈을 파시어 경계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곧 세상의 흐름에서
잠시 벗어나 고독한 자리로 이끄실 것입니다. 세상의 삶과
늘 어울리다 보면 하느님을 만날 시간이 없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직접 영양분을 얻으려면 규칙적으로 그리고
꾸준히 삶의 둘레를 만들어 세상과 구분을 짓는 시간과
공간을 가져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거름을 주실 것입니다.
거름은 냄새나고 다가가기 싫은 것이지만, 나무를 키워
주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우리 삶에 어려움과 고통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거름입니다.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이 사실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입니다.
이 사순 시기에 신앙의 열매를 잘 맺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둘레를 파시고 거름을 주시는 주님의 손길에 여러분
자신을 맡기십시오. 맺지 못했던 삶의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매일 미사 -
◈ [청주] 심보를 바꾸는 것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3월3일 사순 제3주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
+ 루카 13,1-9
심보를 바꾸는 것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예. 행복하시게 지내신 분은 행복에
행복을 더하시고, 혹시라도 행복하지 못하셨다면 지금부터
행복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두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못한 것은 우리 마음이 문제 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회개에로 초대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을 회개라고 알고
있습니다. 회개란 쉬운 말로 심보를 바꾸는 것입니다. 자기의
인생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 지상의 마음가짐에서 하늘을
향한 마음으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신자중에 가장 무서운 신자는 누구라고 했죠? 예, 배신자.
그러면 신부가 제일 싫어하는 신자는 누구라고 했죠? 원불교
신자, ‘원망’하고, ‘불만’이 가득하고 ‘교만’한 신자입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이 ‘사랑’하고 ‘포용’하며 ‘겸손’의 마음으로
바뀐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찌 되었든 대표적인 배신자
베드로는 위기를 모면하고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닭이 두 번째 울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15,72) 주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인간의 연약함을 의탁할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롭게 태어나서 주님의 으뜸제자로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인물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이 말은 확실하여 그대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1티모2,15-16)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 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필리3,14) 바로 이것이 회개의 모습입니다.
만약에 과거에 매여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회개는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철저히 맡기고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과거는 지나간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올지 모르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오늘이
선물로 주어졌고 오늘을 통해서 미래가 열립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관장 자캐오라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19,6) 하고 이르시자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19,9)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캐오는
과거를 청산하고 새 삶의 변화된 모습을 구체적 행동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동의 변화 없는 회개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신부님께서 오랜만에 출신 본당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오래도록 살고 계신 신자분이 반가워 하시며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한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오랜만에
친정에 오셨는데 떡이라도 해 오셨습니까?” 신부님께서 능청스레
대답하셨습니다. “네, 그러잖아도 떡을 해 오려고 했는데 집사람이
없어서 못해왔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핑계를 댑니다. 집사람 핑계는 왜댑니까?
남편을 탓하고, 자식을 탓하며 부모를 원망하고 이웃을 시기하는
마음, 탓을 남에게 돌리는 심보를 고쳐야 합니다. 잘된 것은
자기가 잘해서 그런 것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으로 돌리는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삶의 회개입니다.
십자가의 오른쪽 강도를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하나가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하며 예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른쪽에 매달린 강도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습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23,42-43)
왼쪽 강도의 모습을 통해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남을 비방하고 모욕하는 마음입니다. 사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남의 잘못된 일을 보면 “내 그럴 줄 알았다. 네가
사는 것이 그 모양이더니 결국 그 꼴이구나”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심판하는 태도를 가질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추스르는 근신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믿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그의 안쓰러운 모습에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고 또한 회개의 기회로 삼는 겸손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오른쪽 강도처럼 마지막
순간에라도 마음을 돌려서 간구하면 주님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하고 약속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기회를 미루지 마십시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사람들이 당한
불행이나 고통,실로암 탑에 깔려 죽은 사람이나 그들은
‘죄가 많아서’, ‘믿음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하셨고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루카13,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재앙을 당하기
전에 미리 준비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변에 벌어지는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말해주는 메시지입니다. 지금 여기서 준비하고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결코 우리의 멸망을 두고
보실 분이 아니십니다.
방탕했던 아들의 비유(루카15,21)을 보면 작은 아들이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라도 삼아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방탕하였던 아들은 겸손되이 저 밑바닥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버지의 머리위에 올라가서 아버지를
애먹이던 그가 품팔이꾼, 종의 모습으로 내려갈 수 있는
마음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집의 풍요로움에 대한 기억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기억을
통해 하느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정작 내 좋은 일에는
둘러리로 전락시키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
주님!하면서도 참으로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지 못하고
오히려 종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음을 솔직히 인정해야겠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용서한 아버지, 그 아버지께서 우리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한 주간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감이 곧 회개요, 그리고 그
회심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되새기며 주님의 사랑을 드립니다. 성
아프라테스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고 회개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는 이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메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믿음과 감사
2013년 다해 3월2일 사순 제3주일
<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 >
복음 : 루카 13,1-9
<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믿음과 감사 >
저는 다른 것보다도 키에 대한 열등감이 있습니다. 유학
할 때도 가장 싫었던 것 중의 하나가 백인이나 흑인들과
함께 있다 보니까 제가 난장이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키에 대한 열등감은 제가 대학생 때 가장 컸던 것 같습니다.
한 번은 미팅을 나갔는데 어떤 여대 응원부가 나왔습니다.
저의 친구들은 다 컸지만 저는 거기 나온 4명의 여자애들보다
더 작았었습니다. 가장 작은 애가 170이 넘었던 것 같습니다.
그 아이들은 식사를 마치고 춤추러 가자고 하였습니다. 정말
가기 싫었지만 따라갔습니다. 나보다 더 키가 큰 여자들이
저를 내려다보며 춤을 추었습니다. 다시는 기억하기 싫은
미팅이었고, 그 이후로는 미팅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어떤 자매가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제가 키 큰 여자를 싫어하면서도 동시에 키가 큰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자매도 저보다 키가 컸습니다.
저의 부족한 면을 채워줄 것이라 생각했고 2세를 위해서도 키
큰 여자와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함께 길을 걸을 때는 매우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앉아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함께 걸으면 사람들이 이 불균형한
키를 지닌 커플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물론 남들은 시선도 안 주는데 제가 열등감을 가지니 그렇게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불편해하니 관계가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내 안에 해결하지 못한 것, 키에 대한 콤플렉스 혹은 열등감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내 안에 머물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불만만 가지고 살게 만듭니다. 내가 하고 싶어도 잘 안 되는
이유는 내 안에 열등감에서 나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키가 작으니 내 여자가 더 큰 남자를 만나면 나를 떠날 것이라는
두려움이 결국 관계를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키가 작아서 선택한 키 큰 여자가 채워줄 수 없는 것, 즉 아담하게
내 안에 안길 수 있는 사람을 은연중에 그리워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결혼도 할 필요도 없고 남보다 크게 보일 필요도 없는데
얼마 전에 신발을 살 대 깔창을 살짝 깔아달라고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아직도 버려야 할 것이 많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 안에 채워지지 않는 불평불만이
내 안에서 감사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나의 자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포도밭 주인은 3년씩이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잘라버리려고 합니다. 만약 열매가 잘 맺히다가
1년만 열매를 맺지 못해도 이젠 나무가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생각해 버릴 수 있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3년씩이나 기다려 주었다는 것은 이미 상당한 시간을 기다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1년을 더 청하는 재배인은
기다릴 수 있는 한계보다 더 기다려보자고 청하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우리를 이렇게 기다려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면 바로 잘라버리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은
당신의 무한한 인내심으로 언제까지라도 기다려 주실 수 있다는
자비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변하고자만 한다면 하느님은
언제까지라도 기다려 주실 분이란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포도나무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을까요? 무화과나무의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같은 복음에서 무화과나무가 어디에
나오는지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같은 루카복음에서는
무화과나무에 관련하여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루카 17,5-6)
같은 구절이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실 때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여 결국
그것을 저주하여 말라버리게 만든 내용에서 공통적으로 나옵니다.
물론 여기서도 제자들에게 ‘믿음’에 대해 강조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지라고 하면
그대로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무화과나무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믿음의 열매’에
관해 말씀하시기 위해 공통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복음에서는 그것이 예루살렘의 성전정화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오늘도 제물을 바치다가 죽은 갈릴래아
사람들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즉 오늘복음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믿음이 결여된
전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못된 소작인의
비유에서 보듯이 ‘감사’의 봉헌이 결여된 전례를 말합니다.
전례는 믿음으로 아주 작은 것에서도 감사를 찾아내어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입니다. 이것이 결여된 전례는 예루살렘 성전처럼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저주를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전례 안에서 반드시 갖추어져야 하는 것은 감사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셨다고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감사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맺히게 하기 위해서는 매 순간 감사하지
못하게 만드는 내 안의 것들을 청소해야 합니다. 내 안의 성전이
정화되지 않으면 감사의 열매가 나올 수 없습니다. 키를 볼 것이
아니라 그밖에 나에게 주어진 수많은 감사한 것들을 보아야합니다.
그래서 나오는 감사의 찬미가 바로 무화과나무 열매인 것입니다.
자꾸 돌아가신 분들을 이야기해서 죄송하지만, 열매가 끝내
맺히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더 이상 그 사람에게는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으십니다. 수많은 재산을 주었는데도 그 재산으로
돈놀이를 했다는 몇몇 사람들의 말에 화가 나서 목숨을 끊은
최진실씨, 자기에게 맡겨진 어머니와 조카들, 또한 감사하지
못하게 만드는 수많은 감정들로 누나를 따라간 최진영씨, 그리고
간신히 살아왔지만 헤어지자는 애인의 말에 이 둘을 따라간
조성민씨는 우리에게 감사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더 이상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오늘 복음말씀의 경고를
생생하게 느끼게 해 줍니다.
그러나 감사할 것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의 씨를 발견하고
그 나무를 키워 삶 자체가 감사가 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KBS [강연 100도씨]에서 얼굴장애를 잘 극복하며 살아가고
있는 김희아씨의 사연을 매우 감동적으로 보았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E1QmlQrTBbI]
김희아씨는 태어날 때부터 왼쪽 얼굴이 붉은 모반으로 덮여있어서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아 보육원에서 자랐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사람들이 놀라서 마스크를 쓰거나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니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은 김희아를 칠판 앞에
세워놓고 반 아이들보고 희아를 그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 그린 것을 들어보라고 하였을 때, 어린 희아는 50장에 달하는
자기 얼굴이 그려진 도화지를 한꺼번에 바라보며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보육원에서 자기를 도와주겠다던 분들이 생겼으나 두 달 만에
희아의 얼굴을 보고는 재정적 지원을 바로 끊어버림으로써 또 한
번의 상처를 크게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는 아무 곳에서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생전 처음으로 긍정적인 차별을 받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자신을 키워주었던 보육원 원장님이 취직이 되지 않는 희아씨를
보육원 교사로 일하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자친구도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화장을 짓게
하고 1년 동안 만났지만 결국 1년째 되는 날 민낯으로 마주치게
되어 이별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자친구는 그것을
잘 받아주었습니다.
2년 째 되는 날, 오른쪽 얼굴이 붓고 코피가 쏟아져 병원에 갔더니
얼굴에 암이 퍼져서 뼈까지 다 잘라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년 동안 자신을 사랑해왔던 남자친구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기
싫어서 헤어지자는 전화를 하고 수술을 받았는데, 남자친구는
다른 쪽 얼굴까지 함몰된 자신을 끝까지 사랑해 주었고, 7년 정도
사귄 뒤에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시댁 부모님들도 김희아씨를
잘 받아주었고, 지금은 아주 예쁜 두 딸의 어머니가 되어있습니다.
어느 날 6살 된 큰 딸 예은이와 역할놀이를 하였습니다.
엄마와 딸의 역할을 바꾸어서, 엄마가 “엄마 나 배고파!”
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딸이 “배고파? 그래 엄마가 맘마
줄게. 조금만 기다려?”라고 대답하였을 때, 희아씨는 생전
처음 엄마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또 듣고 싶어서 “엄마,
나 아파”라고 할 때 딸은 “아가, 많이 아파? 엄마가 안
아플 때까지 안고 지켜줄게?”라고 하는 말에 뒤통수를
맞은 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딸이 어머니에게 얼굴이 왜 그리 되었느냐고, 또 왜
보육원에 갔느냐고 물어보다가 이불속에서 어머니를
자기 작은 팔로 꼭 안아주며 이렇게 이야기하더랍니다.
“엄마, 엄마는 엄마가 없어서 참 불쌍하다.”
엄마는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는 아이들로 키우기 위해
자기가 항상 그래왔듯이 ‘감사하는 마음’을 키워주자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넘어져서 피를 흘리고
있을 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예은아, 넘어졌는데 이것밖에 안 다쳤네. 이이고 참
감사하네.”
며칠 뒤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아기가 손에 피를 흘리며
어머니에게 뛰어왔습니다.
“엄마, 넘어졌는데 이것밖에 안 다쳤어요. 참 다행이지요?”
이렇게 김희아씨는 아주 작은 것들에서 감사를 찾아냈습니다.
그 감사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결국 자기를 낳고
버린 어머니께도 미안하고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예은이가 저에게 보여주는 재롱을 제가 부모님께
보여드리지 못해 저는 너무 죄송합니다. 이렇게 아픈
모습을 가지고 태어나서 어머니 모습을 아프게 해 주어서
죄송합니다. 저는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세상에서 이렇게 일찍 놓아주셨기에, 보육원의
단체생활을 통해 빨리 아프고 빨리 슬프고 빨리 눈물을
닦을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아픔이 없었다면 감사도
몰랐을 것입니다. 저에게 슬픔이 없었다면 기쁨도 몰랐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김희아씨를 보며 이런 말도 한다고 합니다.
“밥맛이야, 내가 네 모습이면 벌써 죽었다.”
저의 뒤통수를 세게 때리는 김희아씨의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저니까... 감당할 수 있으니까... 저에게 주어진 것이고,
저에게 어울리니까 저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김희아씨가 엄마의 사랑을 자녀를 통해 느끼게
하고 또 남편과 자녀들 때문에 행복하게 하고, 또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도록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좋은 지향만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힘들지만 기다리면
됩니다. 산을 오를 때는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느 새 그
산은 내 뒤에 놓이게 되어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고, 그 행복을 찾도록 거룩한 인내심으로 기다려주십니다.
당장 내일 죽을 것처럼 조급해하거나 두려워하지 맙시다. 원하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 이루어질 때까지 하느님은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무화과나무, 그 나무에서 감사와
행복의 열매가 맺히기를 바라시고 계십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회개의 삶으로 초대하시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억울한 일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자신은 전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죄인 취급을 받게 되었을 때, 항상 올바르게 행동했으나
오히려 커다란 피해를 입게 되었을 때, 상대방을 굳게
믿었으나 배신의 아픔만을 얻게 되었을 때. 분명히 억울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억울한 일을 왜 내가 경험해야만
할까요? 어떤 이들은 이렇게 쉽게 말합니다.
“네가 지은 죄가 많아서 그래.”
정말로 그럴까요? 그렇다면 더 많은 잘못과 죄를 범하는
사람이 오히려 떵떵거리며 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참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즉, 세상은 내 머리로 미리 계산해 놓아도 영
다른 결과를 맞닥뜨리도록 만드는 곳입니다.
사실 그 억울함을 호소할 때를 잘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잘못이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잘못이
있더라도 자신의 지금 상황은 너무 과하다면서 불평불만을
퍼붓습니다.
어떤 직장상사가 회식 중에 아무 생각 없이 신입 여직원의
손을 잡았다가 성희롱으로 문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상사 입장에서는 손 한 번 잡은 것이 성희롱으로 회부된
것에 대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지금의 세상은 자신의 생각만을 받아들으며 움직이지
않습니다.
나의 억울함만을 생각하면서 그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역시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찾기 위해
노력했을 때, 분명 그 상황이 단순히 억울한 순간이 아닌
오히려 주님의 뜻을 느끼고 행복으로 나아가는 순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사건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갈릴래아 사람들이 빌라도에 의해 학살당한 사건,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실로암 탑이 무너져서 깔려 죽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죽은 것일까요?
당시의 사람들은 불행이 죄의 값으로 받는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간단하게 자신의 입장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지요.
그보다 죄의 생활에서 벗어나 구원의 손길을 잡을 수 있는
회개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매 순간 회개하여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단순히 억울한 상황만을 바라보는 어리석은
내가 아니라, 더 큰 삶인 구원의 삶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지혜로운 내가 될 수 있습니다.
회개의 삶으로 초대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억울하다고 불평불만을 하는 나의 잘못된 모습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주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될 수 있도록 더욱 더
노력하는 사순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추하든 아름답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
이 이상 든든한 출발이 어디 있으랴(칼릴 지브란).
고강동성당입니다. 오늘 하루 종일 이곳에서 미사와
특강을 한답니다.
지금 나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어떤 학생이 유명한 프로듀서(PD)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피디가 되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하나요?”
그러자 그는 “아뇨. 책을 많이 읽다 보면 피디가 될 수도
있어요.”라고 답변을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질문이나
답변이나 똑같은 것 같지요? 그러나 그는 분명히 다르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책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일 년에 백 권씩 억지로 읽으면
얼마나 괴롭겠어요. 그러나 피디 시험에 떨어지면 괜히
고생만 하고 억울하죠. 하지만 책이 좋아서 열심히 읽은
사람이라면 피디가 되지 않아도 독서의 즐거움을 누렸으니
후회할 일은 없죠.”
어떤 관점이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억울한 상황은 내 마음가짐에 따라서 만들어지기도, 또
반대로 더 즐거운 상황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겪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사람이 새로워지는 비법
잘못 이후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태도가 문제입니다.
상대나 환경이나 누구냐에 따라서 변화무쌍하기도 합니다.
고집이나 옹고집, 철면피나 가면 쓴 사기꾼 변덕쟁이들도
있지요.
뉘우침 개과천선 회개 같은 말로 사람이 새로워진다고
하는데요. 제발 모든 사람들이 바로 이것을 삶의 비법으로
터득하면 좋겠습니다. 회개에 대한 설명보다 더 강한 확언을
예수님이 하시지 않았습니까.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루카 13,4~5)”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의 묵상 글 -
◈ [대구]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희가 완고한 마음을 거두고 회개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오늘 복음은 두 가지 비극적인 사건을 소개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한다.(13,1-5) 첫 번째는 갈릴래아 사람들이
빌라도에 의해 죽어간 사건이고, 두 번째는 실로암 연못에서
탑이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깔려 죽은 사건이다. 이 두 사건에
대해 역사적으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추측건대 예수님
당시 갈릴래아 지역은 백성들의 독립운동과 폭동이 빈번한
곳이었고, 이를 다스리기 위한 통치자들의 잔혹한 진압으로
갈릴래아 사람들의 죽음은 흔한 일이었다. 실로암에서 벌어진
사건도 마찬가지다. 예기치 못한 일로 아까운 생명들이 사라져
갔지만, 이러한 사건은 우리네 인생 역사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비극적인 일들의 원인을
자신들의 잘못이나 죄로 이해하고 있었다. 조상의 죄든,
자신의 죄든 죄로 인한 하느님의 징벌이 비극적인 일들로
나타난다고 믿은 시절이었다.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이 ‘해석’의
문제다. 어떤 상황을 보고 그 상황이 무엇 때문에, 어떤
이유에서 생겨났는지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호기심이 비극적
참사를 인간 죄의 결과로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조금 다르게 해석하신다. 예수님은 소개된
두 사건보다 더 비극적인 사건은 회개하지 않는 마음의
완고함이라 여기신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5절)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참사는 ‘국한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회개하지 않는 이들에게
멸망은 ‘모두’의 것이 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만큼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죄가 더 크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이러한 회개에 대해
더욱 강조하신다. 다른 공관복음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지만
(마태 21,18-22 ; 마르 11,12-14), 루카복음에서는 조금 더
기다려 달라는 포도 재배인의 모습이 등장한다.(루카 13,8)
조금 더 회개의 시간을 달라는 간청의 모습이 보이는 대목이다.
사실 회개의 시간은 충분히 주어졌었다. 포도밭의 주인이 삼
년째 기다렸던 터였다.(7절) 그런데도 조금 더 시간을 달라는
포도 재배인의 간청은 무화과나무가 잘려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어주기를 바라는 간절함의 호소인 것이다.
멸망이 아니라 회개의 길을 걷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과도 맞닿아 있다.
복음의 시작 부분에 나타난 비극적 사건은 멸망과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 참사를 죄의 결과로 인식하는 사람들의
논리에 따르자면, 죄의 끝은 멸망과 죽음일 뿐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다르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죄의 끝은 회개에 있다는 것이다. 죄를 지었으니 너는 죽어라가
아니라, 죄를 지었으니 너는 기필코 회개의 길을 걸으라는 강한
부탁이 오늘 복음의 중요한 주제가 된다.
묵상(Meditatio)
얼마 전 한 신자를 만났다. 그분과 사형제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 당황스럽고 힘든 대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신자분의 말씀이 이러했기 때문이다. “나쁜 짓을 저질렀으면
죽어야 해요.” 할 말이 없었다. 너무나 단호한 그분의 말씀에
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보태어 본들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했다.
죄를 지었으면 죽어야 한다는 논리는 참으로 그럴듯하다. 죄에
대한 대가를 분명히 치러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가를 치러야 할 그 죄인을 완전히 없애버린다면 누가
대가를 받아 안아야 하겠는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이고, 그만큼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명이 하느님께 달려 있을진대, 마치 내가 하느님인
것처럼 죽여라, 살려라 하는 식의 태도는 참으로 완고한 마음의
단면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죄에 대한 판단은 하느님께 두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죄를 지은 이가 하루빨리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 안에 되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인이라도 그 또한 하느님의 작품이지 않은가. 우리가 죽음을
쉽게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그만큼 죽음의 문화에 익숙해져서
그렇지 않나 되돌아보게 된다. 강도, 산도, 바다도, 나아가
인간의 생명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우리의 이기심이 죽음의
문화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반성해 볼 일이다. 분명한 것은
복음은 죽음이 아닌 생명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명을
다시 살리는 길이 교회의 길, 우리 신앙인의 길임을 꼭 기억하자.
기도(Oratio)
하늘의 하느님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시편 136,26)
- 박병규 신부(대구대교구 선남천주교회 주임) -
◈ [수도회] 진정한 의미의 회개란?
2013년 다해 3월3일 사순 제3주일
- 루카 13장 1-9절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회개란?>
한 노부부가 반세기 가까이 결혼생활을 해왔지만 서로의
삶은 늘 고달팠습니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건만 두 분의
삶은 ‘화기애애’, ‘알콩달콩’이 아니라 언제나 ‘티격태격’,
‘용호상박’이었습니다.
원인을 분석해본 결과 코드 차이, 사고방식의 차이였습니다.
결국 살아온 배경, 가정환경의 차이였습니다.
아침식사 때 마다 남편은 아내의 한 가지 행동 때문에 늘
툴툴거렸습니다. 식탁에 앉자마자 부인은 갓 배달되어온
우유를 남편에게 따라주었습니다.
남편 입장에서는 옛날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컵의 80%
정도만 따라주면 마시기도 좋고 쏟을 염려도 없을 텐데,
부인은 매일 같이 큰 머그컵에 넘치기 일보 직전까지 찰랑찰랑
따라주는데, 요즘 같아서는 손 떨림 증세도 있고, 그걸 쏟지
않고 마시기 위해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그러려니 했었지만, 결혼생활 40년이 지난 어느 날
도저히 참지 못한 남편은 한 바탕 퍼부었습니다.
“왜, 아무 것도 아닌 걸로 평생 동안 날 괴롭히냐구! 우유 따라줄
때 먹기 좋게 80% 정도만 따라주지 왜 넘치기 일보 직전까지
따라줘서 날 힘들게 하냐구?”
남편의 말에 부인은 큰 충격을 받고 앓아누우셨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았던 어린 시절, 부인의 가족들은 뭐든
아끼고 아꼈다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신선한 우유 가득 부어
원 없이 한번 마셔보는 게 소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을 향한 사랑의 표현으로 큰 머그컵에 가득 가득 우유를
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40년 동안 아침마다 사랑을 따라준
결과가 “왜 평생 날 괴롭히냐?”였으니 할머니가 앓아 누을
수밖에요.
또 다른 노부부는 성격차이로 더 이상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힘들어 이혼하기로 하였답니다. 두 분을 담당한 변호사가
안타까운 나머지 사연이라도 들어보려고 노부부를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그날 식사의 주 메뉴는 통닭이었습니다.
매너가 온 몸에 잘 배어있는 할아버지는 그날도 습관처럼
통닭을 쭉 찢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앞가슴 살을 할머니에게
권했습니다. 그 순간 할머니는 앞가슴 살을 손으로 확
뿌리쳤답니다. 그리고 불같이 화를 내면서 40년 동안 한 번도
내뱉지 않았던 마음 속 이야기를 꺼내셨답니다.
“40년 결혼생활 동안 당신은 늘 이렇게 자기중심적이었어.
난 통닭 앞 가슴살 팍팍해서 정말 싫단 말야. 난 뒷다리가
제일 좋단 말야. 당신은 같이 살아오면서 내가 어느 부위를
좋아하는지 단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
그 순간 할아버지는 충격에 빠지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앞가슴 살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위야. 내가 먹고 싶은
부위를 꾹 참고 40년 동안 당신에게 준 건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사순 제3주일인 오늘 복음은 우리를 회개의 삶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회개의 삶을 산다는 것, 과연 어떤 삶을 사는 것일까요?
제가 생각할 때, 회개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서 나와 가까이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점검해보는 일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나의 영적 성장을 위해, 보다 충만한 인생 여정을
위해 선물로 보내주신 사랑하는 사람들을 좀 더 알아가는 것,
그것이 회개가 아닐까요?
멀리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 가족, 내 직장동료, 이웃들이
지니고 있는 남모르는 고통과 상처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작으나마 위로의 손길을 펼치는 것이 회개가 아닐까요?
서로 잘 안다고 해도, 정말 모르는 게 인간입니다. 서로를 알기
위해 계속 대화하면서 꼬이고 꼬인 관계의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회개가 아닐까요?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여라.
2013년 3월3일 사순 제3주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
(루카 13, 1-9)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여라.(루카 13, 1-9)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우리 모두를 회개에로
초대하십니다.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과 실로암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잘못을 하여서 그러냐?” 라고
질문을 하면서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회개해야하는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늘그막에 낳은 요셉을 특별히 사랑하기 때문에
형제들은 요셉을 미워하여 죽이려합니다. 그러나 죽이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으로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전 이십 세겔에
팔아버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동생을 팔아먹은 것이고, 동생을 죽이지
않았지만 그들 마음에 미움과 증오가 가득합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죽이지는 않았지만 가장 가까운 배우자나
자녀나 부모, 또 이웃이나 친구를 미워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형제에게 성내는 것까지도
재판을 받아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우리는 이념이나 가치관 때문에 사람들을 미워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과 반대의 사람의 대하여
허물과 단점을 파헤치며 끊임없이 욕을 하고 미워한다면 이
것 역시 하느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미움을 담고 살아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미움과 증오와 원망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사소한 틈사이로 악이 파고
들어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거룩한 성사를 더럽힌 것에 대하여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뻔히 아는 죄를 고백하지 않아 모고해의 죄를
범했다든지, 혹은 대죄 중에 있으면서도 남들이 의식되어
성체를 모셔서 모령성체를 한 죄가 있다면 이런 부분에
대하여도 회개해야합니다.
태풍이 불어오거나 심한 장마가 예상되면 일기예보에서
미리 알려주어 재난에 대비하도록 전하여 줍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도 성모님을 통하여 인류에 닥쳐올 재난에 대하여
준비하도록 성모님을 보내주시어 회개하도록 초대하셨습니다.
일본에서 쓰나미로 수만 명이 순식간에 죽었고, 또 아이티
공화국에서 수십만 명이 지진으로 순식간에 죽었습니다.
우리 앞에도 어떤 일들이 순식간에 닥쳐올지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도 언제나 회개하고 깨어 기도하며 지내야 하겠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지난 25일에 인류에게 “기도가 너희에게 기쁨이
될 때까지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여라.” 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 은총의 사순시기에 내 마음에 기쁨이 없다면
우리가 무엇을 회개해야하는지 깨우쳐주시기를 청하며 열심히
기도합시다.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 [기타] 소나무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3월3일 사순 제 3주일 복음묵상
찬미예수님,
오늘 복음 내용은 금,토요일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시면 될
듯 합니다. 오늘은 제가 일본에 와서 처음 맞이했던 2004년도
첫 사순절, 일본 신자들을 위해 만든 십자가의 길을 우리 말로
옮긴 것을 소개합니다.
얼마 남 지 않은 사순시기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
십자가의 길
시작기도
당신께서 저희의 구원을 위해서 걸어가셨던 그 길이 저희의
눈에는 그저 어리석은 길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이신 당신께서 왜 그런 길을 걸어가셔야만 했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알 수가 없습니다.
너무도 저희에 대해서 잘 아셨기 때문인가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세상은
당신의 왕국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까?
어렵습니다. 당신의 그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너무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너무도 슬픕니다.
저희의 희망이신 당신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저희를 위해서
이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시는 것을 보면 가슴이 터질
정도로 아픕니다.이 길의 끝은 어디입니까?주님!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의 그 어리석은 그 길을
저희도 따라가고자 합니다.
제 1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예수님, 당신께서는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빌라도라는
총독 앞에서 한 말씀도 하시지 않고
침묵을 지키시며 서계십니다. 그 어느 누구도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당신께서는 더없이 비참하기 그지 없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십니까? 저희가
그토록 간절히 희망하며 기다렸던 바로 그분이십니까?
왜, 한 말씀도 하시지 않으시는 겁니까? 어떻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느님을 심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주님! 당신께서는 결국 이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제 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당신께서 지고 계시는 것이 분명히 십자가 입니까?
무겁습니까? 어느 정도 무겁습니까? 저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무게를. 저희의 모든 죄의 무게, 저희의
모든 슬픔과 고통과 분노와 악이 담긴 그 무게를.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그 무게가 당신의 등에 지어져
있습니다. 송구합니다.
주님,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오늘도 저희는 당신께
더욱 버거운 십자가를 지게 하고 있습니다.
용서하소서.
제 3처: 예수님께서 기력이 떨어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결국, 쓰러지셨군요? 쓰러지시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저희의 마음을 헤아리려 해보신 적이 있으시나요? 그저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는 이 비겁한 마음을 알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주님, 저희는 이토록 약하디 약한 존재이옵니다.
사랑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도 용기를 내지 못하는 바보천치
들입니다. 용서해주소서.주님, 당신께서는 일어서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희의 힘만으로는 걸을 수 없는 이 길, 당신께서 함께 걸어가
주시지 안됩니다. 주님, 조금이나마 저희가 당신의 발이 될 수
있도록 힘을 주옵소서.
제 4처: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심을 묵상합시다.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어머니이십니다. 당신의 어머니이십니다. 그 어머니께서
당신의 그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어머니께서 울고 계십니다. 당신을 낳고 키우신, 그리고
모든 것을 함께 하신 그 아름다운 마음이 울고 있습니다.
그 마음을 알고 계십니까? 아마도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당신의 그 아픔을 이해하고 있는 분은 당신의 어머니이시라는
것을 저희는 믿고 있습니다.
제 5처: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 짐을 묵상합시다.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시메온, 당신은 정말로 운이 나빴던 사람입니다. 왜, 하필이면
그 길에 있었습니까? 왜, 어째서 그렇게 많은 군중들 속에서
하필이면 병사의 눈에 당신이 들어와 그리도 무거운 십자가를
대신 지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나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라는 범죄자를 알고 있었나요? 이전에 만난 적이라도
있었나요?
억울하지 않나요?시메온, 당신은 정말 운이 좋았던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도, 감히 할 수 없었던 일을 당신이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성소’라고 말합니다. 즉 ‘거룩한 부르심’이지요. 우리는 매
순간, 직접 그분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있지만 응답하기가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도망가기에 바쁜 모습을 늘 보이고 있습니다.
당신은 정말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제 6처: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림을 묵상합시다.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베로니카, 아름다운 여인이여! 모든 여성들이 본받지 않으면
안될 여인이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피투성이가 되신 예수님께서
그토록 불쌍해 보였나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아팠습니까?
당신의 손에 있는 그 수건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받아들임에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의 행위에 조금이나마 쉬실 수 있었을 것이고 행복을
느끼셨을 겁니다. 지금의 우리들도 다시 한 번 청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당신이 보여준 그 용기와 연민의 마음입니다.
제 7처: 기력이 다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또 다시, 넘어지셨네요. 당신께서 밟고 가시는 한 발 한 발을
보고 있는 저희의 가슴은 어떠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저희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하느님, 당신께서는 정말로 어리석으십니다. 당신께서는
늘 사랑을 외치셨지만 그 결과 돌아온 것은 사랑이 아닌
고통이었습니다. 사랑이 고통입니까? 주님! 두렵습니다.
사랑이 그런 것이라면, 약해빠진 저희가 어떻게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주님, 만일 당신의 그 길이 옳은
것이라면, 저희에게도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깨달음을 허락해
주소서.
제 8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을 묵상합시다.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정말로 당신께서는 어쩔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 상황에서
당신께서는 부인들을 위로하고 계십니다. 그 연민의 끝은
어디입니까?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당신께서는
정말 어쩔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마도 저희
모두는 당신께 그러한 아픔을 드리면서도 뻔뻔하게 당신의
위로를 필요로 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그 사랑을
저희의 것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제 9처: 예수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주님, 힘이 다하셨나 봅니다. 당신께 그 무엇도 해드릴
것이 없는 저희의 마음은 그저 어린 아이들처럼 소리 높여
울고 싶을 뿐입니다. 주님, 조금이나마, 쉬십시오. 아직
가셔야만 할 길이 멀기만 합니다. 결국 또 다시 일어서실
당신을 통해서, 저희도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는 방법을
배웁니다.
제 10처: 예수님께서 옷 벗김 당하심을 묵상합시다.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마침내, 골고타 언덕에 도착하셨습니다. 남은 것은 지금까지의
어느 순간보다 두렵고 고통스러운 길입니다. 형리들이 옷을
벗깁니다. 하느님 아들의 옷이 하느님께서 지으신 존재들의
앞에서 벗겨지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부끄러워할 것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필요 없는
것에 부끄러워하는 저희의 모습이 그곳에 있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지혜를 주소서.
제 11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묵상합시다.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대못이 몸을 뚫고 나가 십자나무에 박히는 소리에 저희는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이 죄를 어떻게 하면 되겠나이까?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 중에 가장 큰 죄라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을 죽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생각하는 것조차 두려운 범죄를 저희는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희도 저희의 죄로 말미암아, 또
다시 당신께 못질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 용서해주소서! 주님, 하지만 당신께서는 이 엄청난
범죄를 통해서 구원의 문이 열렸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께서는 이 십자가의 길을 반드시 걷지 않으시면 안
되었다고 말입니다. 주님, 당신의 그 성심을 헤아릴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제 1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숨을 거두셨습니다. 철저히 낮은 모습으로 오셔서, 철저히
낮은 모습으로 살아가셨고, 철저히 비참한 모습으로
떠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조차도,
저희의 죄에 대해 성부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저희가 모르고 저지른 죄이기에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왜 그러하셨습니까? 저희도 당신처럼 살라는 말씀이십니까? 왜,
이토록 어려운 요구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제 13처: 제자들이 예수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을 묵상합시다.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당신의 몸은 이미 차갑게 식어있습니다. 살이 터져나간
몸은 피투성이로 더럽혀져 있습니다. 당신께서 보여주시려
했던 것이 이런 무능한 모습이었습니까? 왜, 한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까? 당신을 품고 울고 계시는 어머니 마리아를
조금이라도 생각해주셨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계속해서 조용히 울고 계십니다.
그녀는 당신의 길을 이해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그러기에는 너무도 역부족입니다. 당신을 따르려는
저희에게 힘을 주소서.
제 14처: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합시다.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당신께서는 이제는 아무 것도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절망하는 마음으로 당신을 묻고 있습니다.
정말로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 오실 때는 빌린
마구간이더니, 돌아가실 때도 남의 무덤을 빌려서
떠나시는군요. 당신의 것이라고는 거룩한 마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까? 주님, 당신을 이런 모습으로
보내드리는 것이 괴롭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주님, 저희는 믿습니다. 당신께서 그토록 가르치시고자
했던 그 가르침을 믿습니다. 죽음이 단지 죽음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영원히 살기 위한 시작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님, 편안히 쉬십시오. 정말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을 가슴에 담아 살아가겠습니다.
주님의 기도/ 성모송 / 영광송
맺는 기도
주님, 저희에게 이런 은혜로운 시간을 허락해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부끄럽지만 고백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곧
부활의 영광을 당신께서는 보여주실 것입니다. 사순절
당신의 고통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의 이유인 당신의
사랑을 이해하는 시기임을 배우게 하소서. 그리고 당신의
성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 참된 부활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당신께서는 아름다우십니다. 저희도
아름답기를 원합니다. 당신 안에 머무를 때 저희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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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십자가는 제가 주임 신부로 있는 일본 사이타마 교구
오따 성당의 제단 십자가 입니다. 이 십자가의 특징은 왼쪽에
예수님의 옆모습이, 그리고 오른 쪽은 예수님의 뒷모습이
그림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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