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3월4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청주]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1열왕 5, 1 - 15ㄷ
† 복음 : 루카 4, 24ㄴ - 30
★ 아람의 장수 나아만은 나병 환자였다. 그는 엘리사 예언자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 이스라엘로 갔다. 요르단 강에서
몸을 씻으라는 엘리사의 말에 어처구니없었지만, 그가 일러 준
대로 하자 병이 나았다. 이에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온
누리의 주님으로 고백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신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주어진 점을
상기시키시며 은총이 지연이나 혈연에 따라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정도에 따라 주어진다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아닌 아람의 장수
나아만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고향인 나자렛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내적인 조건에 따라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신자로서
의무를 다했다는 외적인 조건만으로 하느님의 은혜를 바라는
것은 아닌지요?
이솝 우화 중에 ‘요술쟁이와 생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생쥐
한 마리가 요술쟁이의 집에 살았는데 고양이를 늘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그래서 요술쟁이는 생쥐가 불쌍하여 고양이로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개를 무서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요술쟁이는 생쥐를 다시 개로 변화시켜
주었는데 이번에는 호랑이를 무서워하였습니다. 요술쟁이는
다시 호랑이로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호랑이가 된 생쥐가 고양이를 만나자 오줌을
싸면서 숨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요술쟁이는 “네가 모양
(껍데기)만 바뀌었지 마음은 변화되지 않았구나. 다시 생쥐로
돌아가려무나.” 하면서 생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 비신앙인에서 신앙인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단순히 겉모습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태도의 변화까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외적인 조건만으로 하느님께
은혜를 얻고자 하였지,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해 갖추어야 할
내적인 변화는 소홀히 여겼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보고도
그분을 환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매일 미사 -
◈ [청주]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 루카 4,24ㄴ-30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가득 차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복음을 귀담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듣고 싶은 만큼 듣고, 보고 싶은 만큼만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은 나자렛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기보다는 나의 잣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내 입맛에 맞게 선택하고 맞지 않으면 흘려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고 능력이 넘치지만 그 능력을
간과하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대한 알량한
지식과 편견이 그분과의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다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겸손을 청해야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청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돌같이 강한 마음을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기원합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실
때 오히려 화를 내고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자존심을
지키려 취한 방법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기득권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면 더 큰 존경과 권위가
살아날 것인데 눈앞의 이익을 위해 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니 첫발이 중요합니다. 선을 택할 수 있는 첫 발이 그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4,30)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요한1,5-9)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그리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나만 바보처럼
손해를 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적당히 눈 감으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의심과 배척,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넘어지시고 또 일어서시는 십자가 길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웁니다. 진정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고, 진실 될수록 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박병해 신부)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메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열등감이 나를 조작한다.
2013년 다해 3월4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
복음 : 루카 4,24ㄴ-30
< 열등감이 나를 조작한다. >
“넌 아버지가 없이 자라서 결혼하기 힘들겠다.”
“너는 머리가 안 좋아서 누가 데려가겠니?”
“넌 어떻게 허리랑 히프랑 구분이 안 되니?”
우리는 살면서 이런저런 상처들을 받고 살아갑니다. 부모나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이렇게 들은 말들은 우리 안에 상처를
남깁니다. 이 상처들이 우리 안에 남기는 것은 열등감이고
또 그것이 드러날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만약 부모 없이 자란 사람이 그것이 자기에게 커다란 상처고
열등감일 때, 애인을 사귀다가도 그 사람이 자신의 치부를
알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뜬금없이 헤어지자고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문제는 자신이 그런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준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에게 그렇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도 자신 안에 상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혜민 스님은 TV 스타특강 쇼에 나와서 이와 관련된 당신의
경험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스님이 김승우가 진행하는 한 프로그램에 출연하기에
앞서 인터넷으로 김승우씨의 프로필을 검색하였다고
합니다. 그 프로필에는 김승우씨의 키가 180이라고 나와
있어서, 약간 키가 작은 스님은 함께 섰을 때 매우 작아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님이 막상
김승우씨를 보는 순간, ‘... 180은 아닌데?’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왜 스님은 김승우씨가 옷을 잘 입고 얼굴도 잘 생겼음에도
키부터 보였을까요? 스님은 그 이유가 스님이 키가 조금
작다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것들은 실제로는
그 사람이 그런 문제가 있기 때문에 나를 볼 때 자신이
있는 문제부터 보려고 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상처가 있고 열등감이 있기 때문에 그
열등감을 극복하는 방식이 상대에게 똑같은 상처를 입혀서
자신의 상처의 고통을 경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자기보호 방식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 스스로 그렇지 않다고 믿도록 가짜 자신을
만드는 것입니다. 즉 높은 하이힐을 신는다든지 깔창을
까는 방식입니다. 나의 트라우마를 숨기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자신들의 성기를 가렸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몸도 나무 뒤에 숨깁니다. 부끄럽기
때문에 드러내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남이 나에게 맞는 이야기를 해도 화가
나는 것이고 자신의 상처가 드러날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넌 키가 작아. 넌 머리가 안 좋아. 넌 못생겼어. ...”
자신이 그렇기 때문에 굳이 그 소리를 들어도 기분 나쁠
필요가 없는데 기분이 나쁜 이유는 자신이 숨기는 모습이
밝혀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경우에
다른 사람이 나를 뻔히 쳐다보기만 해도 나의 부끄러운
면을 보고 비웃는 것 같아서 화가 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치유하는 방법은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만족하고 할 수 있다면 감사하는 길입니다. 김희아씨의
예에서도 보듯이 지금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이 나에게
가장 어울리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준 것이라는 믿음이
상처를 치유합니다. 그러면 열등감에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결국 자신이 더 잘나 보이려는 자아를 죽이고 겸손하게 받은
다른 많은 것들부터 감사드리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진실을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하시며 엘리야와 나아만의
예를 들어주십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사실이지만 고향
사람들은 잔뜩 화가 납니다. 자신들은 다르게 취급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듣는데도 화가 난다면 내 안에
트라우마가 있는 것이고, 그런 상처가 있다는 뜻은 그만큼
자아가 강하다는 뜻이고, 자아가 강하다는 말은 그만큼
교만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자아가 큰 만큼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빛으로써 우리 상처를
환히 비추고 부끄럽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인정하고 감사합시다. 남이 나에게 하는 말에 화가 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진실하게 내 모든 단점들을 밝힙시다. 주님이
주신 것이니 좋은 것이라고 여깁시다. 그리고 모든 것에
감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보편적인 사랑보다는 편협한 사랑을
휴대전화가 보편화되어 있지 않았던, 그러니까 제가
신학생 때의 일입니다. 길거리에서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제가 다가와 돈을 좀 빌려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급하게 광주의 집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자신의 명함을
내밀며 절대로 사기꾼이 아님을 힘주어 강조하셨습니다.
저는 이분의 상황이 안타까워 지갑을 꺼내 광주까지
내려가는 차비라는 3만원을 주었습니다. 이분께서는
너무나 고맙다면서 제 은행 계좌번호를 적어가셨고,
분명히 곧바로 입금하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다음날 제 통장에 입금이 되었는지 확인해 보았지요. 입금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확인했지만
역시 입금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5일 뒤, 이분이 주신 명함에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습니다. 엉뚱한 번호더군요.
그리고 명함에 적혀 있는 회사는 실제로 있지 않은
유령회사였습니다. 맞습니다. 사기를 당한 것이었지요. 저는
그분을 믿었지만, 그분은 저를 이용했을 뿐이었습니다.
그 뒤에도 종종 제게 길거리에서 도움을 청하는 몇몇 사람을
만났지요. 그때마다 저는 매몰차게 거절했습니다. 한 번의
경험으로 다른 사람들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뒤, 어디를 갔다가 지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당황했습니다.
집까지 돌아가려면 차비라도 있어야 할 텐데 지갑이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우선 땅바닥만 쳐다보게 되더군요. 혹시라도
떨어진 돈이 있을까 싶어서요. 없었습니다. 다음에는 혹시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 사람들의 얼굴만 쳐다보았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다음의 방법은 모르는 사람에게
차비를 빌려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밖에 없었지요.
다행히 기적처럼 아는 사람을 만나서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때의 일을 겪은 뒤에는 모르는 누군가가 요청할
때 그냥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물론 나 역시도 여기에
예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종 사기를 치면서 남을 이용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고 또 나와 아는 사람들만 해결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을 갖는다면 어떨까요? 주님께서
제시하시는 사랑의 삶과 정반대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보편적인
사랑보다는 편협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즉,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 자신들만이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철저하게 반대하십니다. 구원의
길은 모든 이스라엘과 이방인 할 것 없이 모든 이에게 환하게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사람처럼 다른 이들을 믿지 못하고 편협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우리 역시 모든 이들에게
열린 사랑의 마음을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웃음 없는 하루는, 그날 하루를 낭비하는 것이다.(찰리 채플린)
어제 미사 강론이 그렇게 길었는데도 예쁘게 잘 들어준
복사아이들. 고마워요.
실패에 대해...
실패는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이 널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실패가 꼭 필요 없는 것일까요? 물론 실패가
많으면 많을수록 위축이 될 수밖에 없고, 결국 깊은
좌절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실패를 통해서
더 앞으로 성장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미국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를 아십니까? 그는 총 714회의
홈런을 기록했지요. 그러나 그가 무려 1,330회의 삼진
아웃을 당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실패의 횟수가
성공의 횟수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성공만을 기억하고 이야기할 뿐, 실패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1,330회의 실패는 714회의 성공을 가능하게 한
밑거름이 되었을 것입니다.
베이브 루스뿐만이 아니라 실패를 극복해서 진정한 성공의
자리에 올라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결국 실패 없이는
미래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극복하지 못할 대상으로
또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언젠가 우상숭배라는
말씀드렸지요. 맞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 역시
우상숭배이며 큰 죄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이 세상 안에서 행복하기를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특히 당신과 함께 하려는 우리를 절대로 내치시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하는 마음으로 힘차게
앞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실패에 굴하지 않고 나아갈 때,
주님께서도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자랑하면 뭐합니까. 병이지요.
2013년 다해 3월3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 자랑하면 뭐합니까. 병이지요.
알면 병,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있는데 그게 맞을 때가 참
많습니다. 고향을 가면 앞뒤옆집 어른들 모두 다 인사 나누고
문안 여쭤야합니다. 친척들이 모여도 가계상의 호칭 자리일
뿐이지 직업은 별 상관없습니다.
예수님도 나자렛이라는 고향에 가시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모든 예언자들도 고향에서 우리네와 같았다는 말씀을
하신 걸 보면요. 성인들의 후손 성직 수도자의 가족 하며 자랑하면
뭐합니까. 병이지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루카 4,24)”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의 묵상 글 -
◈ [서울] 구원에 이르는 단순한 길
무릇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느님께 구원의 은총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간혹 나는
신자들에게 “여러분! 제가 천국에 바로 가는 티켓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한 가지 알고 있는데 들어보시겠어요?”라고
질문하곤 한다. 이때 열이면 열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큰 관심을 가지고 “네!”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방법을 듣고 난 다음에는 절망하는 눈빛이 역력하다.
왜냐하면 오늘부터 죽는 날까지 잠들기 전에 단 하루도 빠지지
말고 성경을 한 장씩만이라도 읽으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성경을 한 장 읽는 일은 쉬운 일이겠지만, 죽는 날까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실천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차라리 아주 어려워 보이는 희생과 봉사를 몇 가지
실천하라면 이를 악물고라도 시도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시리아 장수 나아만은 엘리사 예언자의
나병 치유 처방을 듣고 몹시 화를 내며 발길을 돌렸다. 다행히
나아만의 부하들이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2열왕 5,13) 하며
설득했다. 아마 복음에서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의 일화를 언급하신 데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우리 스스로가 구원의 길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지 자문해 보자. 어쩌면 구원의 길은 우리 가까이에 이미
마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겸손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구원의 길을 찾아보도록 하자.
- 전영준 신부(서울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교수) -
◈ [수도회] 고단수 예수님
2013년 다해 3월4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 루카 4장 24-30절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고단수 예수님>
좋은 지도자, 제대로 된 리더로 존재하려면 ‘고단수’가
되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우리 예비 신부님,
수사님들을 교육시키는데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끊임없는 격려, 칭찬, 용서, 관대한 수용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뿐이라면 큰 발전이 없습니다. 나태해지기 쉽고
흐트러질 가능성도 많습니다. 한 마디로 ‘군기’가 빠지지요.
그래서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자극입니다. 때로 정확하게
부족함을 지적해줘야 합니다. 때로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따끔하게 야단도 쳐야 합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강경일변도로 나가게 되면 교육의
효과가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적당한 순간을 포착해서
풀어주어야 합니다. 윤활유를 쳐줘야 합니다.
밀고 당기고, 쥐었다 풀었다를 계속 반복해가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런 모습을 잘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지혜가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은 ‘할 말은
한다’는 주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참으로 꼴불견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속에 든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갖은
허세를 부리면서 거드름을 피우던 율법학자들, 교만과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던 바리사이들의 한심한 모습을
예수님은 절대로 간과하지 않으셨습니다.
솔직하게, 느끼는 그대로, 나오는 그대로의 말씀을
직설적으로 던지셨습니다. 폼 좀 그만 잡으라고, 깊이
반성하라고, 빨리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하고 싶은 말씀을
가감 없이 던지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선민의식, 우월감에 잔뜩
사로잡혀 있던 유다 사람들을 향해 직격탄 한방을 날리십니다.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예언자 엘리야는 유다인들에게가
아니라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수많은 나병환자들 가운데 치유받은 사람은 유다인들이
아니라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었다.”
정곡을 찌르는 예수님의 말씀에 분기탱천한 사람들은
합세해서 예수님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갑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입니다.
그런 순간 한 마디만 더 하면 건너오지 못할 강을 건너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위기 상황을 파악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즉시 입을 닫으십니다. 이제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이제
남아있는 것은 그들의 선택이니, 이제 됐다, 하시면서 침묵
중에,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그들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강약조절, 치고 빠지기에 전문가이신 예수님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상처받고 고통당하는
우리들에게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처신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관계 안에서 중요한 것이 적정선입니다. 때로 넘어서지
말아야 될 선은 넘지 말아야 합니다. 넘어서게 될 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참담한 현실이요, 때로 죽음과도 같은
현실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거룩한내맡김영성>마귀도 누구도 다 아는데
- 이해욱신부
<斷想> 8. 마귀도 누구도 다 아는데 나만 모르는 것?
모든 사람이 다 알고, 마귀까지도 아는데 나만 모르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교만함"입니다.
마귀가 사람에게 들어오는 가장 쉬운 통로가 바로 "교만"
입니다. 우리 원조 아담과 하와가 그 모습을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0.001%라도 교만함이 내 안에 남아 있게 되면,
마귀는 그 틈을 타고 나를 찾아 들어옵니다.
공기와 같은 존재가 바로 마귀입니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교만해지면 곧 마귀의 조종을 받게 되어 영이 어두워지고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게 됩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교만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더욱 영이 열리고 지혜가 밝아져
점점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나중에는 하느님의 지혜를
받아 모든 것을 알게 해 주십니다.
빛과 어두움, 하느님과 마귀는 같은 대비입니다.
영이 어두운 사람은 어두움을 못 봅니다.
자신이 어둠 속에 있는데 어떻게 어두움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 넘이 다 그 넘입니다.
영이 밝은 사람은 어두움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영이 밝으면 밝을수록 어둠이 잘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영이 어두운 사람은 지혜가 어두워져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가장 올바르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거짓과 속임수의
귀재인 마귀에 조종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아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1요한 2,11)
그래서 주위에서 아무리 충고하고 알려줘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과거에 하느님의 엄청난 은사를 받았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과거에 하느님의 지혜를
받았었기 때문에 정말 말은 일사천리로 잘합니다. 그러나
생활은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영이 어두운 사람은 그런 사람의 말에 그냥 홀딱 반해 버리게
됩니다. 유유상종, 끼리끼리 만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합하여 "선"을 이루듯이
(로마 8,28) 어둠의 자식들이 서로 합하여 "악"을 이룹니다.
거룩하게 살려는 사람은 그들끼리, 그 반대의 사람은 그
사람들끼리 말입니다. 서로 "취미"가 달라 반대의 것들은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취미가 같으면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이 카페에도 하느님에 대한 취미가 없으신 분은 잘 들어오지
못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하루에도 수차례
방문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이 카페를 통하여 사람을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친구 신부들과 "고스톱"을 칠 때를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옛날 일산에 둑이 터졌을 때 친구 신부들과 밤을 새워 고스톱을
치고 있었는데 그 시간 본당 신자 분들은 물난리로 성당으로
대피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도 길이 끊겨 성당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하느님 얘기로 날 새는 줄
모릅니다. 자신의 입에서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이
튀어나오느냐에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정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사람도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느님에 대한 얘기가 입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세상의 일이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 나옵니다.
골프를 좋아할 때는 입만 열면 제 입에서 골프 얘기만
나왔었습니다. 골프 얘기로 밤을 새도 지겹지가 않았습니다.
자기가 가장 좋아 하는 것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제는 입만 벙긋하면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만
나옵니다. 하느님께 내맡긴 후의 큰 변화입니다.
이제 저는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생각만 하면 제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물만 흐릅니다.
그것을 정말 자랑하고 싶습니다.
그전의 저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곳에 하느님께 내맡긴 사람들의 공간인
기도원(수도원)을 주님께서 세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방해받지 않고 하느님에 대해 날 새는 줄
모르고밤새 하느님 얘기로 꽃피는 집, "예수님처럼"을 세워
주시겠다고 말입니다. 정말입니다, 지켜보세요.
지금의 성모님의 집,"마리아처럼"을 세워 주시 것처럼,
예수님의 집, "예수님처럼"을 세워 주실 분을 언젠가 저에게
보내 주실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옆에 "예수님처럼"이
언젠가 들어설 것을 저는 아주 확신합니다. 예수님께서 애기
시절의 "엄마 앞에서 짝짜꿍!"이 많이많이 생각나시는가
봅니다.
같은 죄를 짓는 사람도 날 새는 줄 모릅니다.
취미가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당연합니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 해도, "한 번 천사는 영원한
천사"가 아닙니다. 대마귀 루치펠이 한 번 대천사였다고
영원한 대천사입니까? 대천사 루치펠이 대마귀 루치펠이
된 것의 교훈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한 번 자신의 모든 것을 완전히 100% 다
내맡기면 그것으로 그만 끝입니다.
100% 내맡긴 이들은 절대로 절대로 "교만"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내맡김의 신비"입니다.
저를 비롯해 지금 내맡긴 삶을 살고 있는
100% 내맡긴 이들을 잘 지켜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말이 교만이라고요?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하느님이 제 안에 계시기에 도저히 그럴 수 없습니다.
누구는 제 안에 하느님이 없냐고요? 자신을 분별하기
어려우시면 저에게 말씀해 주시면 제가 분별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받은 은사 중에 "분별의 은사"가 있는 모양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그리고 완전히 내맡겨
드리면,하느님께서 자신의 부족함과 죄마저도 다 책임져
주십니다.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드렸는데 부족함과 죄라고
책임져 주지 않으실 분이 절대 아닙니다. 내맡기게 되면 그
단계까지도 가능하고 사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그 이상의 "하느님의 능력"을 발휘하게 해 주실 것을 저는
또 확신합니다.
하느님께 내맡기면 성모 마리아처럼, 예수님처럼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맨 마지막에는 "하느님처럼" 아니, 하느님의
새끼(자녀)가 됩니다. 하느님의 새끼는 하느님, 곧 신(神)
입니다.
내맡기게 되면, 신(神)나는 생활이 시작됩니다. 죽어서가
아니라 지금 이 세상에서부터 정말로 신(神)나는 생활을
하실 수 있습니다.
"거룩한 내맡김"으로 저와 함께 정말로 신(神)나고 또
신(神)나는 생활로 들어가지 않으렵니까?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 |